114화. < 당신이 선물해준 거니까 (5) >
허다인이 만들어낸 영역 한가운데를 백묵이 걸었다.
“왔구나.”
돌아보지도 않고 허다인이 말했다. 백묵은 정색한 채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돌아본 허다인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언제나 머리 한쪽에 걸치고 있던 뿔 달린 하회탈이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백묵이 눈을 감았다.
타이밍을 딱 맞춰 노린 듯한 급습. 누각의 공격은 홧김에 저지른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종류의 것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백묵이 지키고 있던 봉인의 기둥이 부서진 순간, 두 사람은 이미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어느 쪽이 먼저 결별을 선언하느냐의 차이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식 측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은 것은, 허다인과의 약속을 배신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같은 동료로서 백묵이 보낸 사죄였다. 너에게는 화낼 권리가 있다. 그렇기에 선공권을 양보해주었다.
허다인과 적대하게 되어버린 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후회는 요만큼도 하고 있지 않았다. 시간을 백 번 돌린다 한들 백 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이다. 이제 와서 허다인이 길을 막아선다고 마음이 약해질 정도로 백묵의 각오는 무디지 않았다. 신념은 관철한다. 그렇기에 불식이었다.
“…방해는 없는 모양이군. 이것도 네 생각대로인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뜬 백묵이 그녀에게 말했다.
“영역을 거둬라. 지금이라면 멈출 수 있다.”
그 말대로였다. 이 시점까지라면 아슬아슬하게, 허다인의 행동을 어떻게든 못 본 척해주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허다인은 철저하게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될 적이 되어버린다. 그 말에 허다인 또한 차갑게 대답했다.
“너야말로, 지금이라면 멈출 수 있어.”
"......."
“더 이상 여왕의 봉인을 부수려고 드는건 그만둬. 그런 일을 하면 모두가 불행해져. 백묵 년 대전쟁을 한 번 더 일으키기라도 할 생각이야?”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그때와는 달라.”
“다르지 않아. 여왕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이상.”
“쓰러뜨리면 되잖나.”
간단히 내뱉어진 백묵의 대답에, 허다인이 휙 고개를 들어 백묵을 노려보았다. 하회탈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꽉 쥔 주먹이 부들 부들 떨렸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으면 이러고 있지도 않았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간단한 이치였다. 그 마왕이 굳이 봉인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이유는, 그가 전력을 다해 싸워도 여왕을 쓰러뜨리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것은 쓰러뜨릴 수 있는 종류의 마물이 아니었다.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그런 허다인 앞에서, 백묵은 손가락을 들어 하나하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오성하. 김혜성. 정유현. 인형사에 흡혈귀.”
허다인이 멍하니 백묵을 바라보았다.
“이계의 침식이 멈춰있었는데도, 대전쟁의 강자들에 맞먹는 놈들이 몇 명이나 나타났다. 새로운 용왕도 이쪽 편이 됐고, 마녀들까지 협력하고 있지. 지금 상황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야. 단언하지. 이만한 절호조가 앞으로 찾아올 일은 없다.”
백묵의 말은 사실이었다. 황금시대라고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변수들이 거짓말처럼 맞물려, 지금 백묵의 옆엔 전례가 없을 정도의 전력이 모여있었다. 여왕이 봉인된 탓에 이계의 침식이 거의 멈춘 지금, 이만한 힘들이 모인 것은 이변이었다.
“지금 치고 나가지 않으면 대체 언제를 기다리겠다는 거지? 영원히 품에 시한폭탄을 껴안은 채 살아갈 셈이냐?”
백묵이 입꼬리를 이죽댔다. 그것은 근본적인 성향, 사고방식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백묵은 여왕의 봉인에 덜덜 떨면서 언제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사는 것 따위 사양이었다. 그런 상황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허다인의 경우엔 그것과 정반대였다.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면 어때서. 터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 돼. 그게 육영웅으로서 내가 가진 책임이야.”
허다인의 말에 백묵은 도발하는 듯 크게 코웃음을 쳤다.
“육영웅으로서 가진 책임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정말로 악질적인 것은, 허다인은 지금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허다인과는 오래된 친구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쯤이야 훤히 보였다.
정령과 동화한 허다인은 백묵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까마득한 시간 내내 속세와 단절된 채, 봉인의 바깥에서 기둥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겠다는 것이다. 봉인의 안에서 핵이 되어있는 김유성처럼. 그것이 동료를 희생시킨 것에 대한 속죄라 생각하면서.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얼간이 같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미련했다.
“…농담은 그쯤 해둬라. 듣기만 해도 불쾌하군.”
백묵이 일축하며 손사래를 쳤다. 입을 다문 허다인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보인 백묵의 반응도, 그가 어째서 여왕의 봉인을 부수려고 하는지도. 그 이유에 대해선 아플 정도로 이해가 간다. 지금도 용사는 봉인 속에 잠들어 있으니까.
백묵은 동료를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잘못됐다고 탓할 수 있을까. 허다인 또한 지금 당장에라도 봉인을 전부 깨부숴버리고 유성을 꺼내주고 싶다고, 대체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주먹을 꽉 쥔 허다인이 고개를 들었다.
“…봉인을 깨뜨리면 유성이 고마워할 것 같아?”
“그 놈한테 고맙단 말 듣자고 하는 일 아니다.”
“유성뿐만이 아니야. 아무도 그런 건 원하지 않을걸!”
소리치는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백묵은 작게 콧숨을 쉬었다.
동료가 다치는 것조차 싫어하는 허다인이, 자신의 손으로 동료를 희생에 밀어 넣었다. 어쩔 수 없다는 한 마디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결정이었는지. 그녀가 어느 정도로 고뇌하고, 마음을 잘라냈는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동료의 목숨값으로 얻어낸 평화이기에 더더욱, 그 평화를 깨뜨리려는 인간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겠지. 스스로 영원히 봉인의 수호자로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김유성에게 바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의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야.”
“아직도 모르겠어? 백묵 네가 하려는 건 육영웅에 대한 배신이야!”
“배신? 배신이라고.”
그 한 단어에 백묵의 기세가 크게 거칠어졌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배신이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향하는 건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이. 말 그대로 역린을 건드린 듯한 형세였다. 백묵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분노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네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줄까. 봉인의 핵에 말뚝으로 박히러 갈 때, 김유성은 자긴 상관없다고 껄렁대면서 웃었다고 했지. 평소랑 똑같은 얼굴이랑 태도로. 너희들 모두 리더의 뜻을 존중하자며, 김유성과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나눴고….”
한 번 숨을 들이쉰 백묵이 최대한의 경멸을 내뱉었다.
“너희들은 전부 병신이냐?”
살기가 휘몰아치는 기세에 허다인마저 움찔했다.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묵은 애초에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따위의 거창하고 멋들어진 이유로 싸우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싸우지 않으면 이쪽이 죽으니까. 자신뿐만이 아니라 친구들까지 전부 죽을 테니까. 그래서 싸웠을 뿐이다.
“자긴 상관없다고. 그따위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나?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너희들 전부를 쓰러뜨리는 한이 있었어도 헛소리하지 말라고 그놈을 쥐어팼을 거다! 내가 없었다면 네가 그렇게 했어야지. 친구가 평화를 위해 자살하겠다는 꼴을, 참 훌륭한 일이라고 눈뜨고 보고만 있었나?”
허다인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랬다.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다. 그 결과 대전쟁은 끝나고 용사 김유성은 영웅이 되었다. 백묵이 허다인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만약,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사라져버린 놈을 끄집어내서 헛짓거리 말라 흠씬 두들겨 패주는 걸 배신이라고 말한다면.
“그까짓 배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주지.”
천근살. 겨냥은 정확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거대한 강철의 칼날이 튀어나갔다. 웬만한 마법사의 방어막 따위는 그대로 찢어발겨 뭉개버릴 압도적인 중량. 하지만 백묵이 상대하는 것은 무당 허다인. 단순한 무게론 짓누를 수 없는, 깃털보다 가벼운 환상이었다.
쇄도한 철검에 부딪힌 순간, 허다인의 몸이 수많은 나비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방향에서 치맛자락을 나풀대며 나타나 땅에 내려섰다. 백묵은 놀란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단순한 물리적인 공격으로 허다인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강(剛)과 유(柔)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저쪽 또한 백묵의 방어를 뚫어낼 수는 없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허다인이 쓸 수 있는 수는 대강 다 파악하고 있고, 백묵은 이미 그 전부에 대비책을 갖추어둔 상태였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치명적인 기습을 가할 수는 없다…. 백묵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허다인이 손을 휘저었다.
“신기루.”
누각의 길드 아지트, 하늘을 떠다니는 한옥. 공중누각(空卞樓閣). 그것은 지금 환상으로 흩어져 이 공간 자체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 진정한 정체는, S급 던전 중 하나이자 그 보상 자체인 ‘신기루의 성채’. 그 성은 소유자가 환상을 다루는 것이 능숙하면 능숙할수록, 자유자재로 그 형태를 바꾸었다.
“질곡.”
무엇이든 빚어낼 수 있는 극상의 점토나 마찬가지다. 이윽고 그 환상은 하나의 완충재가 되어, 원래대로라면 허다인이 재현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게 해주었다. 백묵이 자신의 팔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그넷줄처럼 생긴 밧줄이 팽팽하게 뻗어 백묵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이건….”
꽉 힘을 줘봐도 구속은 풀리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백묵을 묶고 있는 밧줄은 신기루, 공중에 뜬 누각을 통째로 엮어서 만들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채 하나를 무너뜨릴 만한 물리적인 힘이 없으면 끊어내지 못했다.
“하찮군.”
하지만 백묵은 애초에 허다인의 공격을 피할 생각조차 없었다. 움직이지 못한다 한들 큰 문제는 없다. 전부 버텨내고서 압도할 뿐이다. 백묵은 강철을 제련해 원거리에서 공격하려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변을 깨달았다.
능력을 발동할 수가 없다.
능력 자체가 사라졌다기보다는, 능력의 흐름 자체가 흐르지 못하게 정지당한 것 같은 감각. 백묵은 이 느낌을 전에도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언제 느꼈었지? 자신의 기억을 되짚던 백묵은 한순간에 납득했다. 그리고 허다인을 쳐다보았다.
“마왕인가.”
허다인의 손에는 새까만 장정의 책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마왕에게서 받은 무언가일 것이다. 지금 백묵의 능력을 멈추고 있는 이 감각은, 마왕과 마주했을 때 당했던 정체불명의 제압 기술과 똑같았다. 허다인 혼자서는 마왕의 힘을 재현해낼 수 없지만, 어떤 형태로든 바뀔 수 있는 신기루의 성의 힘을 빌린다면 흉내를 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밧줄에 묶인 백묵이 이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힘을 끌어올려도 능력은 발동하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 마왕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은 피차일반인 이야기였다. 허다인 또한 자신이 마녀들과도 결탁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상대방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마녀들이 도착하지 못했다는 건, 허다인이 배치해둔 모종의 방해에 발이 걸려있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간단한 이야기였다. 서로에게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결국 부딪친 총력전에서 자신이 패배했을 뿐이다. 백묵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회탈을 벗은 허다인이 묶여있는 백묵을 쳐다보았다.
“백묵. 지금이라도 좋아. 봉인을 부수는 걸 단념한다면-”
허다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묵이 코웃음을 쳤다.
“하루 이틀 본 사이냐.”
“백묵, 나는.”
“단념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말도 없이 쳐들어온 거 아니냐.”
백묵이 어서 하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오히려 체념은 깔끔했다. 이미 한 번 허다인의 뒤통수를 친 자신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여왕의 봉인을 부수려 들지 않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허다인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허다인이 조용히 손을 들어 묶여있는 백묵에게 향했다.
“알겠어. 그렇게 유성이랑 함께하고 싶다면, 백묵 너도… 봉인 속에서 잠들어 있도록 해. 여왕의 봉인은, 나 혼자 지키겠어.”
오직 그것만이 안타까웠다.
이것으로 육영웅은 오로지 허다인 혼자만이 남게 된다. 정말로, 허다인에게 그런 고독을 맛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허다인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다인 쪽을 바라보는 백묵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내 백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백묵의 말에 꾹 입술을 깨문 허다인이 대답했다.
“한 가지가 아니라 몇 개라도 좋아. 전부 대답해줄게.”
“아니, 하나만 대답해주면 된다. 너, 용왕은 어떻게 했지?”
“지수는…마왕이 자기한테 맡겨두라고 했어. 이 자리에 오진 못할 거야. 잘 됐어. 그 애한텐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으니까.”
그 대답에, 정말로 유쾌한 일이라는 듯 백묵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그런 수상한 놈을 믿은 게 너의 패인이다.”
허다인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허다인의 손목을 잡았다. 허다인이 눈을 휘동그레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곧바로 나비로 흩어져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파사의 마력이 모든 술식을 차단하고 있었다.
“무당 주제에 줄을 잘못 탔군.”
동료 복은 이쪽이 있던 모양이야. 묶여있는 백묵의 조롱이 들렸다. 그리고 허다인의 뒷편, 당연하다는 듯이 난입해온 청년을 향해 웃어보였다.
“늦었다, 용왕.”
그곳에는 지수가, 조용히 스승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