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당신이 선물해준 거니까 (4) >
엉망진창이다. 오성화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불시에 이루어진 적의 습격, 그 적의 정체라는 것이 누각 길드라는 점, 지금 당장에라도 백묵을 도우러 가야 하는데, 가면을 쓴 채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 그 모든 것들이 초조했지만, 가장 생각이 복잡한 것은 무엇보다도 백묵 쪽을 향해 달려가던 그 여자의 모습이었다. 오성화가 이를 갈았다.
“숨겨두고 있었단 말이지…!”
절대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새까만 갑주의 기사를 대동하고 있는 여자. 그것은 인형사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눈을 감아도 훤했다. 길드장인 백묵의 독단이었다. 대단한 전력이니 죽이기는 아깝다, 뭐 그따위 이유로 회수해둔 것이겠지. 오성화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서. 이 망할 양반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있으신 모양입니다.”
“...큭!”
앞쪽에서 격렬한 불기둥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몸에 폭발을 일으킨 오성화가 반쯤 억지로 추진력을 만들어 피해냈다. 붉은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하고는 초면이 아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분명 협회장의 연구동에서 누각의 전투원으로서 싸우던 그 남자였다. 오성하가 숨을 몰아쉬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망량입니다.”
“본명 말이야, 본명!”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그걸 본명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불기둥이 덮쳐왔다. 대화로 시간을 끌려는 수작쯤이야 옛 저녁에 눈치챈 것 같았다. 남자가 뿜어내는 불꽃의 화력은 대단했다. 용왕의 비늘로 이루어진 갑옷이 아니었다면 한참 전에 화상투성이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망량이 자신의 몸을 휘감은 불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억시니. 날뛰지 마라.”
망량의 말에 화염의 숨결이 조금 가라앉았다. 망량은 온몸에서 불길이 흘러나오는데 뜨겁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오성화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사와도 무투가와도, 일반적인 정령사와도 다른 전투방식. 남자는 정령과 말 그대로 일체화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정령사를 만나봤지만 저런 건 구경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해.’
이상한 것은 바로 망량의 전투력이었다. 아무리 누각의 길드원이라 해도 이건 너무 강했다. 지금의 오성화의 수준은 1년 전에 비하면 일취월장해 있었다. 웬만한 일류 각성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와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웬만한 상성의 불리함 정도야 노련함으로 커버한다. 일대일이라면 더더욱 압도할 자신이 있다. 그런 오성화가 전투의 주도권을 쉬이 잡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아마도, 필드 때문인가….’
선글라스를 쓴 오성화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 근방뿐만 아니라 영역 전체가 어떠한 힘의 역장 안에 감싸여 있었다. 정확히 어떤 원리의 능력인 줄은 몰라도, 이쪽의 힘은 약화시키고 저쪽의 힘은 강화하는. 그런 종류의 주술일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들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지금 오성화는 불식 헌터 1팀의 팀장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히 서있어야 할, 길드를 받치고 있는 대들보다. 지금 오성화에게 요구되는 판단은 이 전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였다.
‘집행부는 길드끼리의 분쟁에 개입하지 못한다. 적어도 이번 건으로 뻥튀기 장수가 도와주러 오지는 못해.’
하지만 그 마녀들이 지금은 불식의 동맹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배까지 하며 적대하고 있었는데, 세상만사 참 모를 일이었다.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동맹이라는 건 이해관계로 묶여있다는 것. 불식이 쓰러지면 마녀들 또한 곤란하니, 시간을 끌면 그들이 분명 지원하러 와줄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으면 게임 끝이야.’
아마도 무당 허다인을 제외하면 이 망량이라는 녀석이 누각의 제일가는 전투원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오성화가 놈을 이곳에 묶어두고 있기만 해도 결과적으로 이쪽의 승리가 된다. 오성화는 합리적으로 전황을 분석해 판단을 끝마쳤다.
...하지만, 예상이라는 건 변수 하나로도 틀어져버리는 것이었다.
***
여자의 얼굴은 새까만 가면에 가리어져 보이지 않았다.
“거 참, 누구신지는 모르겠는데.”
"..."
김혜성이 고깔모자를 푹 눌러썼다. 방금, 까딱하면 여자에게 기습당해 목이 따일 뻔한 참이었다. 기척을 지우는 것이 거의 몬스터 수준이었다. 김혜성이 걱정에 의심 많은 성격인 탓에,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면 확실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쪽에서 먼저 공격해왔으니, 연습용 과녁으로 삼아도 불만은 없겠지?”
마력을 끌어올리는 데엔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김혜성이 여자를 향해 쇄도하는 탄막을 펼쳐냈다. 연속적으로 발동한 매직 미사일이었다. 기초 중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대신에 어떠한 준비동작이나 마법진도 필요 없었다. 동작의 가벼움을 중요시하는 김혜성에겐 딱 알맞은 마법이었다.
그 자체는 어떻게든 피해낼 수 있는 속도였지만, 김혜성이 손가락을 작게 튕긴 순간. 날아가고 있던 매직 미사일들이 한순간 깜빡여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 수많은 투사체들은 여자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 와서 피할 수는 없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김혜성은 생각해내 연습하던 기술을 실전에서 곧바로 성공시킨 것에 고양감을 느꼈다.
“짜잔. 블링크 트릭.”
주문 자체에 지연과 블링크를 걸어 상대방을 혼란시키는 수법이었다. 기술이라기보다는 속임수다. 단순한 화력전에서는 쓸모가 없지만, 적이 피하기 힘들게 만드는 데에는 큰 효과가 있었다. 김혜성의 기술들은 거의 전부가 이런 잔머리들을 하나하나 쌓아낸 결과였다.
‘저 여자. 어딜 어떻게 봐도 공격을 맞아가면서 버티는 타입은 아니야.’
그렇다면 한 대라도 적중시키면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김혜성이 피어오른 연기 속을 바라보았다. 전부는 무리라도 몇 발 정도는 맞췄을 것이다. 상대를 잘 관찰하고 임기응변과 변칙적인 전술, 잔머리로 대응하는 것. 그것이 김혜성의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김혜성이 등 뒤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윽!"
김혜성이 허리를 숙이자, 쎄액! 하고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여자는 어느새 김혜성의 뒤를 잡고 있었다. 민첩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김혜성이 반사적으로 뒤를 향해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당황했지만 제대로 카운터가 들어갔다.
여러 전투로 갈고닦인 경험과 감각. 이 반격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어둑시니.”
어둠이 분출했다. 그림자에 감싸인 여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매직 미사일은 여자의 몸을 맞추지 못했다. 눈치채면 검은 가면의 여자는 이미 김혜성의 앞쪽에 나타나있었다. 여자가 단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호수에 비친 달을 잡을 수 없고, 거울에 비친 꽃을 딸 수는 없다.”
“갑자기 무슨 시를 읊고 있어.”
“잔상을 공격해봤자 헛수고입니다.”
“거 참 충고 고맙수.”
김혜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와중에도 김혜성은 상대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마력의 파형으로 볼 때 정령사가 분명한데, 가면의 여자는 오히려 신체를 강화하고 싸우는 암살자에 가까웠다.
암살자라고 하면 마법사의 천적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일대일 상황이라니, 마법사에게는 그냥 죽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혜성은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보니까 댁도 정상적인 정령사는 못 되는 모양이지?”
“무슨 뜻이죠?”
대답에는 정말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는 기색 따위 요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다. 여자는 지금 한순간의 가속을 위해 자세와 힘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이라도 김혜성의 의식이 대화에 쏠리는 순간, 그 빈틈을 찌르려 일부러 대화에 맞장구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바람 소리와 함께, 여자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그것과 동시. 여자는 김혜성의 옆쪽에 나타나 역수로 쥔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반응하려고 집중하고 있었는데도 이 꼴이다. 단순히 고속이동이라 말하는 것은 그녀의 역량에 있어 실례였다. 이것은 말 그대로 초고속이동이었다. 김혜성이 웃었다.
쉬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쌔액! 여자의 단검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이내 김혜성은 여자와 멀리 떨어진 저편에 나타나, 날아가려는 고깔모자를 한 손으로 푹 눌렀다.
“잔상을 공격해봤자 헛수고라고.”
김혜성이 웃었다. 저쪽이 초고속이동이라면 이쪽은 순간이동이었다. 기동력 따위 포기한 유리대포. 그것이 일반적인 마법사들에 대한 인식이었지만, 김혜성은 블링크와 텔레포트만을 극한으로 연마한 마법사였다. 기동력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썩 정상적인 마법사는 아니라서.”
검은 가면의 여자, 이매가 김혜성을 돌아보았다. 속공 승부에서 다른 무엇도 아니고 기동력으로 따돌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누각주 님의 힘으로 적잖이 능력이 강화된 상태인데도. 그것은 이매의 자존심을 상당히 자극했다. 더욱 더 깊게. 어둑시니의 기운을 두른 이매가 김혜성을 노려보았다.
“…방금 그게 제일 빠른 공격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쪽이야말로, 이게 전력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고속이동과 순간이동. 이것은 말 그대로 일장일단, 다른 방향성의 기동력을 추구한 자들의 싸움이었다. 자존심을 걸고, 저 상대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 쉬식!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건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
그리고 그 너머의 길.
발푸르기스의 밤, 흑마녀를 제외한 세 명의 마녀들은 누각이 만들어낸 영역 안으로 돌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마녀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거의 확신했다.
그럴 것이 같은 육영웅인 백묵과 허다인은 역량 면에서 거의 길항을 이루고 있었다. 어둑시니의 이매는 김혜성과, 두억시니의 망량은 오성화와 각각 대치하고 있다는 것 또한 확인했다. 이 상태에서 마녀들이 백묵과 함께 협공하면, 허다인을 꺾는 것쯤이야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세 명의 마녀가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 명, 넉넉하게 생각해서 두 명만 지원군으로 와도 불식은 충분히 누각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적, 청, 황 세 명의 마녀 전부가 협력하러 온 것은, 일종의 신뢰 관계 형성을 위해서였다.
심지어 적마녀는 이렇게 툴툴대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가 가봤자 이미 다 끝나있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S급 던전 갈 때 보니까, 오성화인가 하는 그 사람도 꽤 세 보이던데. 별것도 아닌 일에 세 명이나 헐레벌떡 오다니 걱정도 팔자라고 놀림당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거 싫은데.”
“트집잡힐 바에야 놀림당하는 게 나아.”
그런 대화를 한 게 바로 몇 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 명의 마녀들은 전부 바닥에 쓰러져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있었다.
거의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적마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뻐끔댔다. 마녀들은 하나하나가 압도적인 수준의 각성자였지만, 화력만 믿고 싸우는 유리대포. 판에 박힌 정통파 마법사였다. 지켜주는 전열이 없으면 급습에 취약하고 기동력이 부족하다.
세 명의 마녀를 쓰러뜨린 건 단 한 번의 공격이었다.
“생각보다 시시하네.”
나타난 적이 콧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데에 특출난 흑마녀가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흑마녀는 따라오지 않았고, 마녀들을 쓰러뜨린 적의 힘과 속도는 그녀들끼리 맞대응하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마녀들의 시야 끝에 분홍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너, 너…!"
“미안. 약속이라서. 일단은 막내기도 하고. 그 사람들 덕에 미역 씨를 구했으니, 이쪽도 정성을 보여줘야 하거든.”
붉은 눈동자의 서민하가 마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딱히 기습하지 않아도 세 명의 마녀들을 쓰러뜨리는 건 가능했을 것이다. 상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드래고닉 뱀파이어에 뱀파이어 엠프레스. 심지어 아그리올라를 토벌하는 것으로 그 위계는 한 층 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서민하 본인의 각성자로서 가지고 있는 ‘결’을 보는 능력. 그 능력 또한 용왕의 마력을 몇 번이고 찢어발기는 과정에서 크게 성장했다. 그 모든 것이 서민하를 괴물로 만들었다. 적어도 정면승부로 마녀들을 쓰러뜨리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서민하는 단적으로 말해 육영웅보다 위였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거기서 가만히 누워있어.”
통로의 벽에 기댄 서민하가 말했다. 지금 마녀들은 곧바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식으로 결을 찢어냈으니까. 마력을 끌어내서 억지로 몸을 움직이게 한다면 또 모르지만, 그런 시도를 하려 드는 걸 서민하가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아무튼 이걸로 누각에 진 빚은 갚았다. 서민하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 그냥 이대로 끝난다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날카로워진 흡혈귀의 감각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편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
“조금 쉬게 해주지. 벌써 다음 상대야?”
서민하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있었다.
"...."
서민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은 표정은 저쪽도 똑같았다. 옆에 새까만 갑주의 기사를 대동하고 있는 소녀. 그녀가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서민하가 빌려주었던 모자였다. 정말로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던 얼굴이었다. 서민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유라?”
“민하. 민하가 왜 여기에 있죠?”
인형사의 눈이 상황을 살폈다. 세 명의 마녀들이 상처 입은 채 쓰러져있었다. 수많은 전투경험으로 단련된 인형사의 논리는 곧바로 결론을 도출했다. 서민하는 누각 측의 인물이고, 불식의 지원군으로 온 마녀들을 제압했다. 백묵을 도와야 하는 자신과는 적이라는 뜻이었다. 인형사는 천천히 백묵과 나누었던 약속을 생각했다.
‘우진의 딸, 우진의 이름에 걸고 맹세해라.’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맺은 계약. 그것은 유사시에 불식 길드의 편에서 싸우는 조커 카드로 존재할 것이었다. 그 계약에 걸려있는 담보는 오직 한 가지, 유라의 아버지인 우진의 이름이었다. 그것 말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깰 마음만 있다면 가볍게 깨버릴 수 있는 약속. 하지만 그것은 인형사를 묶어내는 데에 지독하게 효과적이었다.
인형사가 휙 손을 쳐들었다. 그 손가락 끝에서 마력의 실들이 뻗어 나갔다.
“유라 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하지만….”
손가락에서 뻗어 나간 인형사의 실이 쓰러져있던 마녀들의 몸에 연결되기 시작했다. 일어설 수 없던 마녀들의 몸을 강제로 일으킨다. 마녀들 또한 그 조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몸의 제어를 맡기는 것은 탐탁지 않았지만,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꼭두각시가 된 세 명의 마녀 앞에 흑기사가 우뚝 섰다.
“말했었던가요? 다음에 만나면 민하한테 인형극을 보여주겠다고.”
“잠깐 기다려….”
“이야기한다고 해서, 비켜주진 않을 거죠?”
인형사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마녀와 흑기사가 춤추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공격을 버텨줄 전열이 있는 지금, 세 명의 마녀는 서민하에게 마음껏 그 흉악한 화력을 쏟아부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 서있는 건 바로 그 흑기사 우진이다. 이미 인형사가 가지고 있는 전력은 육영웅 한 명 정도는 가볍게 쓰러뜨릴 수 있는 수준 이었다. 서민하 또한 진심으로 싸울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좋아.”
서민하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곳에서 만난 것은 유감이지만, 재회했다는 기쁨이 먼저였다. 유라가 인형극을 보여주고 싶어한다면, 같이 놀아준 다음 잘 지냈냐 안부를 물으면 그만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자신은 무언가를 가지고 놀 때마다 곧잘 망가뜨리곤 한다는 점이었다. 서민하가 새빨간 눈동자를 부릅 치켜떴다.
“인형에 흠집 좀 냈다고 불평하기는 없기야…!”
붉은 기운에 휩싸인 서민하가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