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당신이 선물해준 거니까 (3) >
‘누각의 길드 아지트는 움직이는 S급 던전이다.’
루드비히의 그 말에 지수가 떠올린 생각은 그럴 리가 없다 하는 부정이 아니라, 그랬었던 건가 하는 수긍이었다. 이야기가 진짜라는 근거를 요구할 것도 없이 지수는 이미 납득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지만 생각해 보면 수많은 위화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협회장과의 결전에 들어가기 전, 허다인이 지수에게 걸어주었던 환술. 그것은 한순간에 지수의 의식을 허다인이 꾸며낸 정신세계 속에 끌어들여, 극히 한정된 시간 속에서도 제대로 단련을 끝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정신과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거나 마찬가지인 기술이었다.
악용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공격에 사용한다면 말 그대로 무적에 가까운 맹위를 떨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다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올바를 것이다. 그 환술은 아마도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발동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기에.
‘누각 안에서만 쓸 수 있는 거겠지. S급 던전의 힘을 빌려서.’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딱딱 들어맞았다. 정확히는,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됐다. 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허다인의 환술이 이치에 맞지 않는 수준의 능력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왜 그 근본을 의심하지 않았지?
‘애초에 허다인 그 사람은 어딘가 신비했으니까.’
그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지수가 허다인에게서 받은 인상은 ‘마법사’라기보단 ‘요술사’에 가까웠다. 단순히 힘이 세고 화력이 강한 게 아니라, 간파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들로 상황에 대응하는 타입. 그래서 하늘을 나는 누각을 봤을 때도 허다인의 힘으로 뭐 어떻게 하고 있는 거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도 별 생각 없이 넘겨버렸다. 무대 위 마술사의 트릭을 일일이 까발리려 드는 것을 꼴사납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수가 허다인에게 요만큼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온화한 사람이라 안심하고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경계를 풀어버렸다. 첫 만남부터가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난입한 것이었고, 스승과 제자라고는 하지만 딱히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다. 말을 나누었던 적은 손으로 꼽아 셀 수 있다. 하지만 허다인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게 뭐 하나 없는데도, 그녀는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거나 흉계를 꾸밀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즉 별 근거도 없는 단순한 직감이었다. 이건 정말로 지수답지 않았다.
‘얼이 빠져있었던 건가?’
위화감은 느꼈다. 단서도 주어져있었다. 허다인과 백묵의 의견이 근본적인 부분에서 대립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정보까지 지수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런데도 견제는커녕 대응마저 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지수의 실책이었다. 지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여기 묶어두겠다고.”
“그래. 이건 스나크 네가 나설 무대가 아니야. 뭘, 감금 따위를 하겠다는 게 아니다. 일단은 손님으로서 맞이한 거니,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느긋이 차라도 마시고 있으면 돼.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아무래도 마왕의 목적은 지수를 이제부터 시작될 분쟁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 자체일 뿐, 딱히 지수에게 위협을 가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점이 더욱 마왕이라는 존재를 기묘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의중을 읽을 수가 없다.
“날 위협하지 않겠다고?”
“물론. 스나크 네가 날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야. 나는 상식인이다. 누군가를 별 이유도 없이 먼저 공격하지는 않지.”
대답을 듣자마자 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에서 황금빛의 안광이 흐르고, 머리엔 용왕의 뿔이 돋아났다. 바짝 곤두선 용왕의 감각은 아주 작은 위화감도 놓치지 않고, 마왕이 지금 이 공간에 무슨 수작을 부려놓았는지 감지하려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단한 결계를 준비한 모양이군.”
“무슨 뜻이지?”
“결계 자체의 존재감은커녕, 술식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당신. 낼 패를 잘못 골랐다고. 다른 뭣도 아니고 결계로 나를 묶어두려는 건 헛수고야. 나는 보는 순간 모든 결계를 간파할 수 있으니까.”
허세 같은 게 아니었다. 지수가 이 방에서 나가려는 걸 막기 위해 마왕이 준비했을 터인 결계가 가동되는 순간, 지수는 해석 스킬로 구조를 한 순간에 간파해 내측으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었다. 결계는 결코 지수의 탈출 시도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가면을 쓴 루드비히는 그저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지금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순수한 의구심으로 가득차있는 눈동자.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해보던 루드비히가 지수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지금 결계가 대체 왜 나오지?”
“나를 못 나가게 묶어둔다 했잖아. 그럼 당연히 결계로….”
당황한 지수가 말하자,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루드비히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스나크 너는 정말 이상하군. 당연히 나보다야 네가 훨씬 현대의 상식에 익숙할 텐데, 상식인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야.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힘보다는 대화로 해결하는 게 좋다는 내 말은 쓰레기통에라도 쑤셔넣은 건가?”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에게서 상식적으로 좀 생각하라는 말을 들어버렸다. 하지만 눈썹을 찌푸린 건 그것이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지금 루드비히가 한 말은 마치, 그저 지수를 말로 설득하기 위해. 네가 나설 곳이 아니니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충고해주려는 목적만을 위해서 지수를 자신의 집까지 끌어냈다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정확하다.”
그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너 참 현명하다며 루드비히가 짝짝짝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냉소를 지은 루드비히가 지수에게 말했다.
“아무리 나라도 계승식을 마친 용왕을 한 순간에 구속할 만한 결계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나?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해도 미치지 않은 이상 내 집에 깔아둘 리가 없지. 네가 난동을 부렸다간 하나하나 손수 인테리어한 내 방이 난장판이 될 텐데.”
“그렇다면 정말로….”
“내가 널 유인한 건 스나크 널 휘말리지 않게 무대 밖으로 빼내, 저쪽엔 참견하지 말라고 말해주기 위해서다. 그게 다야.”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사실이라면 정말로 바보 같은 이야기였다. 이 양반은 지수가 진짜로 그런 말을 순순히 들어서 여기서 차나 마시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지금 당장에라도 한국에 돌아가 누각의 급습을 저지해야 했다.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수준이었다.
지수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린 루드비히가 읊조렸다.
"쇼 스타퍼.”
이전 마왕과 대면했을 때에 당했던 그 기묘한 기술이었다. 잿빛의 기운이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했다. 기술에 걸린 지수의 몸은 정지 명령을 당한 듯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용왕의 힘을 짜내 뿌드득 고개를 돌린 지수가 거의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위협, 안 한다고 했잖아…!”
“이건 위협이 아니야. 열이 오른 널 진정시키는 것 뿐이다. 나는 아직 요만큼도 스나크 네게 해를 입히지 않았어.”
완전한 궤변이었다. 아주 그냥 개 패듯이 팬 다음에 때린 게 아니라 살짝 밀친 거야, 이렇게 변명하지 그러나. 지수가 짜증나 죽겠다는 얼굴로 루드비히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정숙한 시선으로 지수를 마주할 뿐이었다.
“이야기를 해보자, 스나크.”
자리에서 일어난 마왕이 뚜벅뚜벅 걸어가 자신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었다.
그것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손수 제본한 듯한 새하얀 책이었다. 제목은 루드비히의 손에 가려져 있었지만 작가명은 읽을 수 있었다. 베리야에프 저. 루드비히가 쓴 다른 책인가? 하지만 저런 판형의 소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건 순수한 질문이다. 너는 어째서 나가려 하지?”
책을 든 루드비히가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꼰 채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루드비히의 시선은 지수가 아니라 책의 지면에 향해있었다.
“누각과 불식의 충돌. 조금 더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백묵과 허다인의 충돌이지. 그건 결국 그 둘의 동료였던 김유성의 희생을 기리는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고, 남들끼리 싸우는 남들의 사정이다. 네가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할 만한 사안이 아니지.”
루드비히가 멈춰있는 지수 쪽에 시선을 주었다.
“물론 너의 사정에 얽혀있다면야 일부러 한쪽 편을 들어주려는 것도 이해가 간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로 남의 싸움을 이용해먹는 것. 어떻게 보면 비겁한 일이지만,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그런 처신에 맞닥뜨리게 되는 법이지.”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까부터 용왕의 힘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이 구속을 깨뜨리려고 하고 있었지만, 해봐야 조금씩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건 루드비히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왕은 자신의 거의 모든 마력을 지수가 ‘잠자코 이야기를 듣게 만드는’ 데에 사용하는 중이었다.
‘예전처럼, 끝도 안 보일 만큼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야…!’
한가롭게 자리에 앉아 책장이나 넘기고 있으니 겉으로는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마왕 또한 지수를 멈추는 것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 지금 누군가가 마왕을 공격하면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현상해석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루드비히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스나크 너는 아그리올라의 격을 먹어치워 진짜 용왕이 되었다. 반드시 봉인의 기둥을 부숴야 할 당위성은 사라졌지. 이런 상황에서 네 임의로 한쪽 편을 들어주며 개입하는 건 아무래도 너답지가 않아. 너는 애초에 그런 인간이 아니었잖나?”
책을 읽는 루드비히가 틀리냐는 듯 시선을 쏘아보냈다.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하고 버럭 소리 지르지는 못했다. 그만큼 루드비히의 말은 지수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러했다.
지수는 딱히 남의 일에 얽히고 싶어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과 상대방의 의견이 다르다한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아는 사이인 두 사람이 싸운다 해도 한 발짝 밖으로 거리를 둔 채, 어떻게 되든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해왔다. 지금처럼 책임감 따위의 이유로 남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건, 오히려 지수가 싫어하던 부류들에 가까웠다.
“스나크 너의 동기는 비틀려있다.”
얼이 빠져있다. 지수는 방금 전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정말로 그런 것인가? 지금 누각을 막으러 가야 한다는 이 생각 또한 얼이 빠져있는 판단일 뿐이고, 자신답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무언가가. 가슴에 이물질이 섞여있다. 지수가 천천히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제일 먼저 집힌 것은 지갑이었다. 꽃혀있는 명함은 오성화의 것이었다. 분명, 그가 다가와줌으로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또 하나는 접혀있는 종이쪽지였다. 예전에 서민하가 절대 읽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주었던 편지였다. 그 안에 무슨 말이 써있는지 지금은 알고 있었다.
또, 백묵이 소개장삼아 건네주었던 집행부의 카드. 이것에서부터 여러 가지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잠깐동안 할 아르바이트 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집행부원인 박사로서의 신분증. 늑대 씨가 잘 보관해두라고 건네줬던 물건이었다.
수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이 모든 일들이 있기 전에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인정해야만 했다. 각성하기 전의 지수와 비교해서, 지금의 지수는 상당히 달라져있었다. 지위나 능력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부분의 어딘가가 바뀌어버렸다. 사람들을 만나 성장했다? 아니, 오히려 퇴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예전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얽매이게 됐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좋건 나쁘건, 그것이 지금의 지수였다.
"......."
마지막으로 지수의 주머니 안에서 나온 것은, 봉인의 기둥 속에서 과거의 허다인이 건네주었던 오행부였다. 미래의 제자에게 스승으로서 선물하는 물건이라고 했었다. 가진 사람이 큰 상처를 입었을 때 대신해서 재가 되어 사라져주는 호신부.
말 그대로 목숨 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분명 대단히 소중하게 아끼던 물건이었겠지. 허다인이 어떤 마음으로 이 물건을 선물해줬는지에 대해선, 꽉 막힌 지수라도 알 수 있었다. 단지 지수가 다치지 않았으면 한 것이다.
아무 근거도 없이, 미래의 제자라는 말 한 마디만을 믿고 이런 것을 넘겨주었다. 그것을 얼빠진 일이라고 비웃을 수 있을까? 아니었다. 그것은 얼빠진 게 아니라, 신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지수가 허다인을 의심하지 못한 것도, 자신을 해칠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간단한 이치였다. 지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수는 봉인의 기둥 속에서 대전쟁 시절의 백묵과 허다인을 보았다. 허구한 날 틱틱대면서도 사실 지수를 평가해주고 있던 젊은 백묵과, 수상한 인물인 게 분명함에도 지수를 믿고 끝까지 변호해주던 허다인. 두 사람 모두 싫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 한쪽은 지수의 동맹이었고 한쪽은 지수의 스승이었다. 지금 그 둘이 싸우려고 한다. 단순히 투닥이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의 신념을 건 전쟁. 죽고 죽이는 싸움일 것이다. 어느 한쪽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겠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는 데에 하나하나 이유를 대고 있을 필요 따위 없었다. 지수가 입술을 비틀며 목소리를 짜냈다.
“...밴더스내치!”
지수의 등 뒤에 밴더스내치의 영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루드비히가 눈동자를 빛냈다. 아그리올라? 루드비히가 읊조렸다. 밴더스내치의 간섭으로, 지수가 가진 용왕의 힘이 반쯤 억지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그대로 멈춰버리는 마왕의 힘이 한 순간 깨뜨려졌다. 지수가 휙 고개를 돌려 마왕을 노려보았다.
“마왕. 이상한 건 바로 당신이야.”
“뭐라고?”
“동기가 비틀려있기는 개뿔이! 아는 사람이 다치는 걸 보기 싫은 건 상식인으로서 당연한 거거든!”
내뱉으니 시원하다는 듯 지수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한 순간 마왕이 지수를 잡아채지 못한 건, 정말로 지수의 말에 과연 그런가, 하고 납득했기 때문이었다. 책을 덮은 루드비히가 콧숨을 쉬었다. 이제 와서 용왕을 쫓아가봤자 도망칠 것이다. 한 방 먹었군. 지수가 뛰쳐나간 방문에서 접시를 든 은발의 여자가 들어왔다.
“뭐야 저 사람! 비장의 과자를 대접해주려 했는데.”
“급한 용무가 생겼다고 하더군.”
그리고 루드비히는 접시의 비스킷을 하나 집어들어,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그렇다면 이번 차례는 넘겨주도록 하겠다. 다음에 어떻게 움직일지는, 변화할 국면을 보고 정할 일이다. 앉아있는 루드비히가 접시를 가지고 온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맛있군. 백마녀의 힘 없이도 과자는 잘 만드는데.”
“하. 그놈의 백마녀 타령은 언제까지 할 거야?”
“영원히. 이거 책장에 꽃아두도록.”
“뭐야, 노동력 착취? 루드가 꺼낸 걸 왜 내가 꽃아야하는데?”
“네가 쓴 책이니까.”
루드비히가 여자에게 소설책을 떠밀어 맡겼다. 자, 그러면 스나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이제 누각과 불식의 싸움은 어떻게 진행될까. 흥미로운 사색거리였다. 세계를 관조하는 마왕의 눈동자에 안광이 흘렀다. 가면을 벗은 루드비히는 콧바람을 부르며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