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당신이 선물해준 거니까 (1) >
첫 번째 S급 던전의 문을 열자 마왕이 있었다.
지수는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이런 건 염두에 두고 있지조차 않았다. 지수의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돌아갔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받아들이고, 곧바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모두가 멈칫거리는 사이 마왕의 발소리만이 뚜벅뚜벅 울렸다.
“정말로 기특해.”
마왕은 지수 일행에게 격려를 보내었다. 이 골칫거리들을 처리하러 오다니 기특하다. 그것은 마치 자기 방을 스스로 청소한 아이를 칭찬해주는 듯한, 딱 그 정도의 가감 없고 소소한 목소리였다. 눈썹을 찌푸린 서민하가 마왕 쪽으로 나섰다.
“기다려, 이것들 다 당신이 한 거지. 이 난리를 쳐놓고….”
서민하가 마왕을 붙잡으려 걸음을 내디딘 순간, 지수가 서민하의 손목을 잡았다. 그것도 있는 힘껏 꽉 힘을 주어서. 지금 서민하는 자그마치 마왕에게 걸어가 멱살을 잡으려고 했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저쪽을 자극하면 안 된다.
‘마왕과 싸우게 됐다간 다 끝장이다.’
지수가 눈을 까닥이며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곳은 S급 던전. 적게 어림잡아도 수천은 될 언데드 병사들. 그 전부가 일방적으로 학살당해있다. 각각의 시체들은 어떤 방법으로 죽였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기괴하게 비틀려있었다.
상처 입은 아그리올라와 싸우면서 지수는 한 가지 확신을 굳히고 있었다. 심장이 뽑힌 상태가 이 정도 수준이다. 마왕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만전 상태의 아그리올라보다 강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분명히 무언가 마왕만이 아는 꼼수를 써서 아그리올라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풍경 자체가 그 확신에 대한 반박이었다. 마왕은 언데드 군단을 상대로 단순히 이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언데드 병사가 비틀린 건 거의 동시다.’
시체의 상태로 파악해보건대, 눈에 보이는 한에서는 그러했다. 지수는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마왕의 강함은 만전의 아그리올라를 정면승부로 쓰러뜨릴 수 있는 수준일지도 몰랐다. 단지 효율과 편리함을 위해 속임수를 곁들였을 뿐.
걷고 있는 마왕의 모습에선 소모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수가 진정한 용왕이 된 지금. 마왕이 상대라고 해도 그때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는다.
정면에서 맞서 싸우는 건 무리라도, 제 몸을 지키며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 싸우게 됐다간 지수조차 도망치는 데에 급급하다는 뜻이었다. 다른 이들을 감싸줄 수 있는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마왕을 쳐다보았다. 가면 안쪽에서 정관한 마왕의 눈동자가 지수의 눈과 마주쳤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나? 싸울 생각 없다고 몇 번을 말해줘야 이해할 거냐.”
마왕이 비키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당장 집에 가서 테레비 녹화해야할 게 있으니 잡지 말아라. 그런 느낌의, 긴장감이라곤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손짓이었다. 마왕이 지수를 스쳐 지나가려 할 때, 지수가 마왕의 망토 끝을 손으로 잡았다. 마왕이 할 말이 아직도 남았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망토를 잡은 지수의 손끝이 떨렸다. 파직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긴장감에 입술을 깨문 지수가 마왕에게 말했다.
“...만약, 여왕의 봉인을 풀겠다고 해도?”
“그건 별개지. 저번에 경고했을 텐데? 뭐, 나쁜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다는 이유로 제재를 가할 만큼 야만적이진 않아. 주시는 하겠지만. 실행하려 들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니까. 저번에는 현장이 딱 걸려서 현행범으로 처벌했을 뿐, 심증만으로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소리였다. 참 당황스러울 정도로 교양인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마왕은 지수 측에 서 있는 인물들보다도 훨씬 더 상식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수는 요만큼도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마왕은 상대방이 자신을 경계한다고 해서 공격을 해오는 부류가 아니었고, 둘째로 그런 이유 가지고 경계를 거두기엔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 강대했다.
“아주 의심이란 단어가 두 다리 뻗고 걸어 다니고 있군.”
마왕이 참 피곤한 놈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남이랑 싸우는 것 자체를 싫어해. 적어도 이 건에 관해서는, 너희가 힘이 부치면 협력해줄 용의까지 있다. 아무튼 세상이 개판이 되면 손해 보는 건 나니까.”
그리고 뚜벅이는 소리와 함께, 검은 망토를 펄럭이는 마왕이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적막이 이어지기를 몇 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호흡을 하는 것조차 잊고 있던 지수가 하아 크게 숨을 내뱉었다.
마왕이 떠나간 자리에서 적마녀가 멍하니 말했다.
“도와주겠다고? 진짜 아무 속셈도 없는 거야…?”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마왕은 정말로 다른 생각 없이, 순수하게 몬스터를 청소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인가. 그 질문에 지수가 내린 결론은 ‘아니오.’였다. 마왕의 행동에는 걸리는 점이 수도 없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어째서 굳이 나타나 지수로부터 반 년의 시간을 빼앗아갔는지
해석 스킬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는 말과 대응이 맞물리지 않는다. 그 이유에 아직 짐작 가는 바는 없지만, 모종의 사정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엇인가를 꾸미고 있다. 지수는 앞머리를 살짝 쥐어뜯었다.
입술을 깨문 지수는 재버워키의 힘으로 사고를 가속시켰다.
‘내 수를 읽고 있는 상대의 수를 읽어내야 해.’
자신보다 강대한 적이라는 점은 똑같았지만, 아그리올라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아그리올라는 분명 교활하고 강대했지만, 그 합리성은 지수의 예측하에 있었다. 지수는 아그리올라의 행동들을 미리 읽어낼 수 있었고, 그것에 대비책을 세우든 선택지를 틀어막든 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마왕은,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달랐다.
정보의 절대적인 부족. 패턴을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언제나 사고의 빈틈을 찔러오고, 예측할 수 없는 수를 둬온 것은 지수가 아니라 마왕 쪽이었다. 무슨 행동을 해도 마왕에게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몰아붙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선수(先手)를 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숨기고 있는 진짜 목적을 알 수 없다는 의뭉스러움. 이쪽의 숨통을 끊기 위한 최선수를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 마왕의 수를 읽는 것을 한층 더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였다. 마왕을 단순히 백 퍼센트 정체불명의 존재로 내버려 두기엔, 지수의 개인적 관심과 호기심이 너무 컸다. 슬슬 이쪽이 선수를 잡을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그걸 위한 도박은 방금 성공했다.’
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던전 안의 일행들은 지수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던전을 공략하려고 한들 이미 상황은 끝나있었다. 안에 있던 물건들은 다 챙겨간 걸까? 마왕이 딱히 그런 것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우선은 이대로 던전 안쪽을 수색하고 물건들 수습해주세요. 기록도. S급 던전의 정보는 하나하나가 귀중하니까.”
“마왕을 쫓아가지는 않는 건가?”
“지금 쫓아가서 뭐해요. 그냥 가준 게 다행이지.”
백묵의 말에 지수가 대답했다. 헌터인 오성화와 백묵이 동행하는 것은 상당한 의지가 되었다. 단순히 머리가 잘 돌아간다거나 힘이 강한 것으로는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나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
던전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A급 던전의 거대 미궁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곳은 하나의 전장이었다. 군대와 군대가 격돌하는 시야 가득 펼쳐진 평야. 그리고 그 땅을 메우듯 가득히 언데드 병사들의 썩은 시체가 깔려있었다.
“어이가 없는데. 이게 대체 몇 마리야? 정직하게 싸웠었다간 끝이 없었겠는걸. 칼 한 번 휘둘러서 몇 마리씩 죽인다 쳐도, 다 죽이기 전에 팔이 아파서 쓰러질 수준이라고.”
시체 썩은 내에 코를 부여잡은 오성화가 말했다. 반쯤 농담조였지만 그 말은 과장도 뭣도 아니었다. 여기 있는 언데드 병사들의 규모는 정말로 한 나라의 군대에 필적했다.
이 던전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몰라도, 분명 전면전을 하라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리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버티거나, 그게 아니면 단서를 통해 길을 찾아 숨어있는 적장의 목을 베거나. 아마 그런 것이 올바른 공략법이겠지.
하지만 소름이 돋는 것은, 지수의 눈 안에 들어있는 모든 몬스터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있다는 점이었다. 마왕은 이만한 숫자의 언데드 군단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부 몰살시켰다.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서민하가 말했다.
“아까 그 이상한 가면. 역시 뭔가 걸려. 수상해.”
“그 차림새를 하고 있는데 안수상한게 말이 안 되지.”
“그런 뜻으로 말하는 거 아니거든. 진짜 그냥 보내도 괜찮은 거 맞아?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인데.”
지수가 턱을 매만졌다. 서민하는 흡혈귀 특유의 직감인지 무엇인지로 마왕의 불길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건 분명히 올바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전부 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이 던전의 탐색과 수습이었다.
“아무래도 여기 같은데.”
오성화가 말했다. 던전의 끝, 이른바 보스 몬스터의 방이라고 불리는 공간이었다. 끝없는 언데드의 시체들을 밟고 평야를 헤쳐나가, 결계로 둘러싸인 성벽을 파훼했다. 마침내 도달한 새까만 성채에서 맨 꼭대기의 방으로 향하자, 왕좌가 있는 자리에는 던전의 보상인 듯한 두 아이템이 놓여있었다.
하나는 보석으로 장식되어있는 새까만 왕관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의 가죽 위에다 새빨간 글자를 피로 새긴 안 좋은 기운이 풀풀 뿜어져 나오는 두루마리였다.
지수가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두루마리를 읽어보았다. 그것은 극도로 복잡한 하나의 주문 술식이었다. 웬만한 마법사라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것조차 버겁겠지만 지수에게는 해석 스킬과 용왕으로서 가진 지혜가 있었다.
지수가 두루마리를 다 읽고 백묵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던 게 무슨 몬스터인지 대충 짐작이 가네요.”
두루마리에 적혀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기력과 영혼을 물건에 불어넣는 ‘라이프 베슬’ 술식이었다. 술식을 시전하면 몸은 순식간에 모든 생기를 잃고 썩은 시체가 되어버리지만, 그 대신 몸이 바스러져도 다른 몸을 찾아 부활할 수 있는 반영구적인 불사 상태가 된다. 이곳의 주인은 바로 리치였다.
물론 S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쯤 되는 존재니, 단순한 리치 따위는 아닐 것이다. 리치 킹이나 리치 엠페러 뭐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가공할 만한 괴물일 그 몬스터는 마왕이 이미 처리해버린 듯했다. 오성화가 왕좌의 저편을 가리켰다.
“저쪽에 출구 있네. 이미 클리어된 게 맞아.”
공략이 허무하게 끝났다. 던전 안에는 오성화와 백묵이 남아, 다음 S급 던전에 대응할 때 필요할 여러 정보들을 조사하겠다고 했다. 헌터들에게는 익숙한 일인 듯했다. 사실 지수를 포함한 나머지는 그런 쪽에 대해서 별로 소양이 없었다. 같이 남아봤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던전을 나온 지수는, 나머지 하나의 아이템인 새까만 왕관을 적마녀에게 건넸다. 마도구 제작에 대해서는 지수보다도 흑마녀가 특화되어있었다. 지수가 척 봐서 정확한 능력을 모르겠다면 그녀에게 감정을 맡기는 게 맞았다.
“흑마녀한테 전해줘. 무슨 아이템인지 알아내 달라고.”
“...알겠어. 요.”
적마녀가 눈을 돌리며 억지로 존댓말을 붙였다. 흑마녀를 제외한 마녀들은 상당히 지수를 대하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지수를 공격하려다 역으로 압도당했을 때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내 적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사라지자, 지수는 마지막으로 남은 서민하를 돌아보았다.
“다 가버렸네. 나한테는 뭘 시키려고?”
“…너는 그냥 마음대로 하고 있어. 애초에 이쪽 일 가지고 민폐를 끼친 거고. 비상시에만 움직여주면 충분해.”
지수의 말에 서민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을 의지해주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싶었다. 하지만 지수의 인식에 있어서 서민하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었다. 필요하다면 도움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까지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수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찾았다.’
이것이 지수가 놓은 도박수였다. 던전을 걸어 나가려던 마왕의 망토를 지수가 잠깐 잡아 멈춰 세웠을 때. 주문의 마력이 새어나가지 않게 파사의 마력으로 봉입한 탐지의 룬을 슬쩍 붙여놓았었다. 지수의 몸에서 떨어진 파사의 마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흩어져가, 탐지의 룬을 바깥에 드러낸다.
지수가 완전한 용왕이 된 지금, 룬 마술의 정밀도는 이전과 비교할수 없었다. 마력을 차단하는 봉입이 풀린 순간 곧바로 마왕에게 눈치채여 룬이 해제된다고 해도, 적어도 그 시점에서의 위치는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성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탐지의 룬은 아직도 망토에 붙어 해제되지 않았다.
‘마왕의 위치는 파악됐다.’
더 이상 선수를 양보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것은 하나의 정보전이었다. 작가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자택 주소를 알아내고 싶다는 의도는 전혀, 요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수는 혼자서 자기합리화를 중얼거리며 룬의 좌표를 특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