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이런 건 처음 보는데 (5) >
백묵의 모든 말을 들은 지수는 작게 콧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는 이야기네요.”
백묵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의 던전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위험한 게이트의 존재.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혼란이 일어나지 않게 은폐까지 하면서.
안일하다기보다는 독선적이었다. 화를 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만한 각오를 하고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이가 없다고 한 지수의 말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
“심연이란 멋들어지는 이름이 떡하니 있었는데. 왜 굳이 S급 던전 같은 촌스러운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겁니까?”
지수가 진지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백묵이 눈동자를 끔뻑였다. 그답지 않게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그쪽을 따지고 드는 거냐?”
“아니. 그렇잖아요, 사실이.”
“젊은 녀석이 겉멋만 들어선. 그런 부분은 무당이랑 똑같군. 이름은 직관적으로 의미를 알 수 있는 편이 좋다.”
“그래도 미학이란 게….”
“그만. 그런 걸로 너랑 논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널 부른 건 내가 파악하고 있는 S급 던전에 네 동행을 부탁하고 싶어서다. 너는 던전의 비밀을 단숨에 간파할 수 있으니.”
백묵은 지수의 해석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가 보기 전에도 게이트를 읽을 수 있는 눈. 알고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통해 함께 비즈니스까지 하고 있던 관계였다. 일이 복잡해진 지금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비활성화되어있던, S급 던전이라….’
지수가 여왕의 봉인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쭉 활성화되지 않았을 던전들이었다. 지수는 나름대로 책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느긋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만일 제때 토벌하지 못해 게이트가 해방되면 큰일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백묵 씨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그래. 전력은 한 명이라도 많은 게 좋겠지. 아니면, 현역에서 물러나 있었던 나는 제대로 싸우지 못할까 걱정인가?”
“그럴 리가요.”
지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백묵의 무지막지한 힘과 능력은 직접 싸워본 지수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마녀들조차 혼자서라면 백묵에게 맞설 수 없을 것이다. 상당히 든든했다. 설마하니 그 아그리올라 같은 게 보스 몬스터로 나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몇 번이나 공략되고, 대충 수준이 파악된 이제까지의 던전과는 달랐다. 일단 대강이라도 수준을 가늠해봐야 이쪽에서도 투입할 전력을 결정할 수가 있었다. 지수가 생각했다.
‘가능한 한 최악을 상정하고서 행동해야 해.’
백묵이 말해준 정보들을 음미한다. 입장할 수 있는 것은 S급에 상당하는 각성자뿐. 그것은 다시 말해 전력에 넣으려면 최소한 김혜성이나 오성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고, 단 한 명이라도 중상을 입는다면 메꿀 수 없는 손실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던전 안의 정보를 읽어내는 능력을 가짐과 동시에, 현시점 가장 강한 각성자라고 할 수 있을 지수의 동행은 필수였다. 자신처럼 맥빠진 놈이 세계 최강의 각성자나 마찬가지라니 이 세상 참 글러 먹었다고 지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앉아있던 지수에게 백묵이 말했다.
“그리고 오성화 놈이 가져온 그것.”
무얼 말하는 것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서민하, 오성화와 함께 세 사람이 토벌한 용왕 아그리올라의 유해. 그것은 오성화가 수습하여 아공간 포켓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것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수는 자신이 필요한 부분 조금 이외에는 두 사람에게 양보해도 좋았다. 지수가 원한 것은 아그리올라의 비늘이니 피 따위가 아니라 그녀의 격 그 자체였다. 그 격은 지금 지수의 것이 되어 용왕의 계승식을 완료시켰다.
게다가 지수는 두 사람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왕의 사체는 분명히 값을 따질 수 없는 재료겠지만 그 정도는 감사의 의미로 선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오성화가 절대 그런 것을 받아들일 성격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서민하의 경우엔 아예 널브러진 도마뱀 사체 따위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기분 나쁘다 싫어할 정도였다. 사실 전투능력의 관점에서도 그녀는 스스로의 몸이 최강의 갑옷이자 검이나 마찬가지니, 장비에 별다른 구애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오성화에게 사체 중 반을 처분해 서민하에게 전달해달라 부탁하는 게 나을 것이다. 처분했을 때 대체 얼마만큼의 액수가 나올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그냥 가지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어! 이 토벌의 최대 공로자는!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저를 앉혀놓고 그러면 안 된다 훈계하려 들겠죠. 눈만 감아도 그림이 그려지네.”
“오성화 놈의 성격을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군.”
백묵이 자신도 동일한 의견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지수가 생각해놓은 바가 있었다. 지금 백묵에게 S급 던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더욱 확신이 섰다. 오성화를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방법. 지수가 말했다.
“S급 던전 청소는 지금 코앞까지 닥친 사안이고, 저희는 당장 써먹을 전력이 필요하죠. 전투능력이 부족하다면 장비를 입혀서라도 던전에 들어갈 전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어요.”
오성화는 던전행의 지루함에 권태감을 느낄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의 S급 던전 토벌에는 그런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각성자로서 오성화의 역량은 지수는 물론이요 육영웅인 백묵에 비해서도 다소 떨어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S급 던전이 나타난 지금, 긴급상황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대여의 형태로 양도한다고 해두자고요. 갑옷에 검 하나 딱 만들어서. 그러면 그 사람도 별말 못 할 테니까.”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기도 했다. 아그리올라의 유해를 생산직 장인들에게 맡긴다면 수준이 맞지 않는 페널티를 감안해도 대단한 장비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오성화와 불식 길드의 전력 업을 꾀하고 싶었다.
그래야 지수가 할 일이 적어질 테니까. S급 던전을 무난히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이쪽이 신경 쓸 일도 적어진다.
“그러면 결행은?”
“최대한 빠를수록 좋겠죠.”
백묵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침을 정한 지수가 백묵의 사무실에서 일어났다.
***
결행의 날이 찾아왔다. 백묵이 안내해준 S급 던전의 게이트는 외부인들에게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원래 던전의 게이트라는 게 일반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출입이 통제되곤 하지만, 이 경우는 아예 존재 자체의 은폐였다. 게이트가 세워져 있는 것은 불식 길드의 소유로 되어있는 부지의 깊숙한 지하였다.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여기다.”
백묵이 안내했다. S급 던전의 게이트는 실제로 다른 던전들처럼 은은한 빛이 흐르며 활성화되어있었다. 내버려 둔다면 해방되어서 세상에 몬스터를 쏟아낼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 만났을 즈음, 백묵은 지수에게 나중에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마도 이 S급 던전이 바로 그것이었던 듯했다.
동행하고 있는 것은 적마녀, 서민하. 그리고 새로운 장비로 무장한 오성화였다. 다른 이들은 전부 각자 하고 있는 역할이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동원할 수 있는 S급 수준의 각성자 전원이 모였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육영웅에 하나는 용왕. 첫 시도라는 것을 염두에 둔 신중한 구성이었다.
지수가 손에 든 만년필을 능숙하게 휘리릭 돌렸다.
새롭게 태어난 파사의 만년필은 흑마녀에게 수주를 맡긴 물건이었다. 몸체 자체가 아그리올라의 비늘로 대체되었고, 안쪽에서는 용혈을 촉매 삼아 마력을 증폭시키고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용린만년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팔짱을 끼고 선 백묵이 눈길을 돌려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느낀 점은?”
“감회가 남다르긴 하네요.”
지수가 생각했다. 처음 각성했을 즈음에는 세상일 같은 것에 신경을 안 썼다. 어쩌다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 뒤에는 물밑에서 암약하며 세상을 조종하는 흑막 흉내를 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자원봉사자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들로부터 세상을 지킨다. 그러려고 이렇게 모여있으니까 무슨 정의의 사도 같네요.”
물론 지수는 순수하게 세상이 걱정돼서, 자신이 벌인 일의 뒤처리를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여러 가지 메리트가 있을 것이다. S급 던전이라 이름 붙여진 새로운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희귀한 재료나 장비, 지식.
그런 것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라면 참여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 행동의 본질이 세상을 구하고, 참극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꽤 보람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백묵이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네?”
“내가 느낀 점을 물어본 건, 그런 감상이 아니라 네가 게이트를 보고서 알아낸 정보를 알려달라는 뜻이다.”
백묵의 말에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쪽은 정보를 넘겨달라는 말일 뿐이었는데 혼자서 오해해버린 듯했다. 지수의 머리에서 용왕의 뿔이 돋아나고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이내 S급 던전의 게이트를 읽어낸 지수가 정보를 읊었다.
“S급 던전. 망령왕의 무덤.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 스스로 죽어, 왕에게 영혼이 귀속된 언데드, 좀비 군대들….”
게이트의 정보를 읽은 지수는 소름이 끼쳤다. 아무래도 적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 같다, 범위 공격에 특화된 적마녀를 데려와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보다 먼저 든 것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라는 감상이었다. 대응이 늦어 이런 게 현실에 해방되어버렸다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진짜로 나라가 멸망했을지도 모르겠는데….”
하나하나가 S급 던전에 걸맞은 수준의 전투능력을 가진 좀비 병사 군단이다. 다른 헌터들이 방위선을 만들고 자시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협회장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지수의 귀환이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준비된 이들이 게이트를 열고 S급 던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쪽의 광경에 경악한 지수가 멍하니 읊조렸다.
“뭐야, 이게….”
지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게이트를 열자 나타난 것은 흉흉한 바람 소리가 울리는 평야 한가운데였다. 썩어가는 살점의 악취와 비릿한 피 냄새. 그곳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전장이었다. 수백이 아니라 수천이 넘는 언데드 병사들이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그리고 그 모두가 이미 형체를 잃어 죽어있었다.
“움직이지 않아.”
“이미 상황이 끝나있다고…?”
언데드니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수의 눈에 보이는 수천 명의 병사들은 전원이 기괴한 형상으로 비틀린 채 이리저리 찢겨 있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곳에 살아남아 있는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다른 이들도 똑같은 듯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광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이미 누군가가 한 번 쓸어버리고 간 듯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지수와 백묵 일행이 들어오기도 전에 먼저 S급 던전에 들어와, 이런 상태를 일방적인 학살을 자행해낼 수 있는 존재라고 하면, 짚이는 것은 한 명밖에 없었다.
저편 멀리에서 또각또각 발걸음이 울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용왕의 눈을 가진 지수에게는 그가 보였다. 먼저 멋들어진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연극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새까만 망토와 복장. 손에 들려있는 건 아마도 보스 몬스터인 망령왕의 머리였다. 피와 살점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지만 그에게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생각해보면 그가 이곳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당연했다. 오로지 개인의 사정으로, 세상에 혼란이 일어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 마왕의 행동방침이었으니까. 지수의 말에 백묵과 마녀가 곧장 긴장하면서 몸을 굳혔다.
“뭐야. 여길 청소하려고 온 건가.”
그리고 그는 조용한 발걸음 그대로, 지수와 다른 이들이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그리고선 지수의 어깨를 툭 쳤다.
“기특하군. 내 수고가 줄겠어.”
적을 대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숙제를 분담할 사람이 하나 생긴 것처럼, 정말로 대견하다는 듯이. 그리고 망령왕의 머리를 바닥에 툭 던져놓은 마왕은, 게이트를 빠져나가 사라졌다. S급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저 사람 뭐야? 친한 척하면서. 미역 씨 아는 사람?”
서민하만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