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이런 건 처음 보는데 (4) >
“이사장이라고?”
지수의 말을 들은 전승민의 표정은 당황하거나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표정에 담겨있는 건 분노였다. 이 학원을 세운 이사장의 정체는 마법사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척척박사. 전승민이 가장 존경하고 있는 각성자이자,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존재.
심지어 전승민은 김혜성을 따라다니며, 척척박사의 이름으로 다른 강사들을 포섭하러 다닌 장본인이었다. 전승민이 셔츠에 접혀 껴있던 동그란 물테 안경을 빼 들어 썼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
헛소리로 흘려넘길 수 없다는 찌릿찌릿한 시선이 전해져왔다. 전승민은 고깔 카페의 척척박사 학파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척척박사를 존경하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라이벌이라고 해도 척척박사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네가 척척박사라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네."
전승민이 소리치자, 지수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냈다. 표시되어있는 건 고깔 카페의 접속 화면이었다. 핸드폰은 척척박사 아이디로 로그인된 채, 지금껏 지수가 작성한 글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전승민이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았다.
“척척박사입니다.”
지수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예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척척박사란 정체를 죽어라 숨기고 다닌 건 첫째는 신변의 안전 때문이었고, 둘째는 이름값에 실력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척척박사라는 이름이 지수의 역량에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판이었다. 관계자에게까지 이 악물고 숨길 필요는 없었다.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는 건 귀찮아질 테니 싫지만.’
뭐라고 반박하려 했던 전승민의 입가가 멈추었다. 전승민은 신세대의 헌터들 중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현실을 거부하려고 해도, 한쪽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근거들이 퍼즐조각처럼 짜맞추어져 가고 있었다.
지수가 처음 라이센스 시험을 쳤을 때와, 고깔 카페에 척척 박사가 등장한 시기. 룬 마술을 기반으로 하는 스타일. 자신의 마법을 한 눈으로 슥 보고 간파하던 이해도.
그런 것뿐만 아니라 사소한 근거들. 척척박사가 올렸던 라이브 영상의 가수. 그 가수와 지수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모습. 여러 정황들이 전승민을 스쳐 지나갔다. 입술을 달싹이던 전승민이 지수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정말로….”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옆에 서있는 서중철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따라가지 못해 눈을 끔뻑였다. 전승민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럴 만도 했다. 쫓아가고 있던 라이벌과 존경하고 있던 멘토가 동일인임을 알게 되어버린 것이다. 웬만한 정신줄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라이센스 시험 때도. 그 이후에도, 자신은 안중에도 없던 것인가? 그런 상대에게 자신은 등급이 올랐다고, 마법 실력이 늘었다고 혼자서 라이벌시하며 승리감에 젖어있던 것인가. 꼴사나운 일이었다. 부들거린 전승민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잘 된 일이야. 이기고 싶던 상대와 뛰어넘고 싶던 목표가 하나로 줄었다면 오히려 편하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이를 빠득 간 전승민이 휙 손가락을 돌려 전광판을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지수에게 말했다.
“네가 이 학원의 진짜 정점이겠지? 챌린지 매치를 지키고 있는 저 둘마저 쓰러뜨리고, 너에게 도전해보이지.”
챌린지 매치?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가리킨 전광판을 쳐다보자, 학원의 리그 옆에 매달 챔피언만이 도전할 수 있는 챌린지 매치가 표시되어있었다. 그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건 바로 발푸르기스의 밤의 청마녀와 적마녀였다.
‘쟤네 둘이 왜 여기 껴있어?’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준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마녀들은 단신으로 길드 하나쯤은 간단하게 괴멸시킬 수 있는 각성자들이었다. 전원이 김혜성 이상의 마법사다. 이런 곳에서 놀 레벨이 아니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는 건가?’
지수가 생각했다. 사실 마녀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학원에 종사하고 있었다. 황마녀는 보안과 경비를 위해 열심히 포탑을 가동시키고 있었고, 흑마녀는 걸맞은 재능이 있는 이들에게 마도구 제작의 기본을 전수해주고 있었다. 이 세상에 이계의 지식이 확산되는 건 그녀들 또한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마녀와 청마녀. 그 둘이 학원의 최상의 학생들에게 원소 마법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리그에서 날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챔피언만이 도전할 수 있는 거대한 벽인가. 서중철이 호승심에 찬 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는 새빨간 아가씨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저 아가씨를 쓰러뜨리면 선생님과 겨뤄볼 수 있는 거군요. 선생님을 이기는 건 무리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하하!”
“약한 소리 하지 마, 중철이 형. 우린 이긴다.”
지레짐작한 이야기가 멋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적마녀와 청마녀를 이길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지수가 나서 싸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게 가능한 정도면 지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린 전승민이 지수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니, 당신이 척척박사라고 해서 내가 포기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그조차도 보란 듯이 뛰어넘어주지.”
“어… 힘내세요.”
그만한 충격을 받고도 전승민은 기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지수는 진심으로 전승민을 격려해주었지만, 전승민의 경우에는 그것을 어떠한 도발로 받아들인 듯 싶었다. 등으로 이글이글 호승심에 불타는 눈빛을 받으며, 지수는 학원의 다음 구역을 안내받으러 걸어갔다.
***
학원을 돌아보고 난 뒤. 지수는 불식의 건물 안에서 사무실의 백묵과 독대하고 있었다. 백묵 쪽에서 지수를 불러 둘이 보자고 한것이었다. 백묵이 콧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용왕 결사라고 이름 붙이면 좋을까.”
“네?”
“이 웃기는 모임 말이다. 이름도 없이 임시로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만. 용왕인 너를 중심으로 해서 네 개의 세력이 모인 이 구성은, 이계의 침식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 대한 가장 커다란 대책본부라고 해도 될 거다.”
지수를 필두로 한 이 연합은 그렇게 자칭하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영향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각성자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사실 연합이라고 할 만큼 결속력이 있지는 않은 엉성한 모임이지만.
“그리고 거기엔 각 세력이 맡은 역할이라는 게 있지.”
백묵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예를 들어 협회와 정유현은, 각성자의 숫자나 질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지금, 들끓는 상황을 안정시키는 걸 목표로 하지. 사회 혼란의 억제력이야. 어쭙잖게 각성한 힘을 이용하려는 놈들이나 조직을 발견하면 곧바로 박살낸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의 침식이 다시금 진행되어가며, 각성하는 이들의 숫자도 그 능력도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다. 난리가 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각성자 범죄율은 이전보다 훨씬 떨어졌다. 새로 태어난 집행부, 그리고 정유현이 여론을 등에 업고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정체불명의 집회와 마녀들은, 각성자 사회가 변해감에 따라 필요한 인프라의 확충. 인식의 변화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네가 세운 학원이 좋은 예시고. 협회와 집행부가 하는 게 안정화라면 그 녀석들이 하는 건 확장이다.”
이계의 침식이 더욱 진행된 뒤의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들. 물론 그러한 안배를 해두는 것은 사람들을 위해서 따위의 사회봉사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단지 인프라를 선점해 흔들리지 않는 권력과 영향력을 손에 넣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우리에겐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청소라고 부르는 게 좋겠지. 너를 부른 건 그것 때문이야.”
지수가 백묵을 쳐다보자, 백묵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수수께끼를 냈었지.”
백묵을 처음 만났을 때? 그건 분명 헌터 라이센스 시험을 막 끝내고 나서였을 것이다. 오성화가 자기 쪽 길드장이 보자고 한다길래 스크롤을 찢었더니, 갑자기 마법을 쏴제껴서 놀란 기억이 있었다. 분명히 그때 백묵은 지수에게 그렇게 질문했었다.
“S급 헌터의 기준이란 무엇인가…였던가요?”
“기억력이 좋군. 분명 B급 이상이 되어서 찾아오면 말해주겠다고 했었나? 생각해 보면 너는 아직도 D급이군. 웃기는 일이야. 솔직히 이제 와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조건이니, 그냥 정답을 말해주지. S급의 기준은 상태창의 소실이다.”
백묵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상태창의 소실?”
“나름대로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만, 흑마녀와 대화해보고서 결론이 나왔지. 너는 상태창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지?”
지수가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시스템이라고 하면 분명히 각성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일 터다.
시스템. 상태창. 인터페이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가리키는 것은 한 가지였다. 그것은 모든 각성자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기능이었다. 능력 자체라기보다는 능력을 쓰기 쉽게 해주는 보조수단이라 표현하는 게 맞을까.
각성한 능력의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따라해보라는 듯 스킬을 자동으로 발동시켜주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각성자들이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반이었다. 사실 지수는 처음부터 거의 의존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지수가 예외인 경우일 것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지수가 백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도우미 비슷한 거 아닌가요?”
“근접했다. 상태창이란 건 한마디로 말해 안내책자야. 현대의 상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이계의 상식에 적응하게 만들어 주는. 어떻게 말하면 문화침략이랑 비슷하겠군. 찌라시를 뿌려봤자 모르는 말로 쓰여있으면 효과가 없을 테니.”
각성자는 한마디로 말해 이계의 침식에 노출당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계의 침식에 노출되어봤자, 당사자가 그게 무엇인지 모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우선은 현대의 상식을 버리고 이계의 상식을 따르게 유도하는 안내책자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그런 끝에.
“이계의 힘에 완전히 적응한다….”
“그래. 완전히 물들어버리는 거지. 이 세상의 법칙보다 먼저 이계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은, 더 이상 안내책자가 필요 없게 되는 거다. 어엿한 한 사람의 이계인(異界人)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경지에 이른 자들이 바로 S급 헌터. 마녀들이 각성하자마자 S급이 되는 이유도 납득이 갔다. 마녀들은 이계의 기억과 지식을 전부 계승하고 있으니, 인식이나 가치관 또한 현대보다는 이계의 것에 가깝겠지. 안내책자 따위 애초에 필요가 없었다.
“사실 상태창이 사라지는 건 절대적인 강함의 척도 같은 게 아니야. 능력이 아주 미약할 때부터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천성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 이계와의 상성이 잘 맞아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바로 허다인이 그런 케이스지.”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용왕의 지혜와 통찰을 가지게 된 지금, 백묵이 제시한 그 가설에는 모순점이 거의 없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지수에게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불러냈다기엔 석연치가 않았다. 그냥 전화나 문자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백묵의 눈빛이 달라졌다.
“본론은 여기서부터다.”
아니나 다를까 입을 연 백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S급이 아니면. 이계의 침식에 충분히 적응한 어엿한 이계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조차 없는 던전이 극소수 확인되어 존재한다.”
백묵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전에 발견되었지만, 원정대를 꾸리거나 토벌하러 나서기는커녕 세간에 공개조차 하지 않은 몇 개의 게이트. 그것은 통상의 던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그런 위험한 것들을 지금까지 방치해 두고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전에는 상관이 없었다. 대전쟁이 끝나고 여왕이 봉인된 뒤엔, 문이 완전히 닫혀서 아무리 내버려 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여기까지 말했으면 대충 눈치챘겠지?”
“열린 겁니까. 이계의 침식이 진행돼서.”
“그래. 던전들의 규모는 전부 A급의 거대 미궁 이상이다. 토벌하지 않고 방치했다간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겠지?”
게이트가 해방되면 던전이 그대로 현실을 침식해 몬스터들이 뛰쳐나온다. A급 던전과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라면, 나타나는 몬스터들 또한 웬만한 각성자들이 출동한다고 해서 대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까딱 잘못했다간 국가 규모의 참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지수는 백묵이 하려던 말을 드디어 이해했다.
협회와 집행부가 각성자들을 제어하고, 매드 티 파티와 마녀들이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헌터 길드인 불식과 용왕인 지수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몬스터들을 싸그리 청소하는 것. 백묵은 오랜만에 최전선에 나갈 생각에 기지개를 켰다.
“대전쟁이 한창일 때는 심연이라고 불렀지.”
백묵이 이쪽에 서류화된 자료들을 건네주었다. 게이트의 위치가 확인되어 정리되어있는 자료는 세 묶음이었다. 재빨리 자료들을 훑어보는 지수에게 백묵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편의상 S급 던전이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