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이런 건 처음 보는데(2) >
테이블에 엎드려서 자고 있던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어.”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걸 보니 아침이었다. 이야기하다가 졸아버린 듯했다. 정유현은 바로 옆의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손님만 남겨두고 집주인 혼자서 자버리다니 상당한 실례였다. 벌떡 일어난 지수가 기억을 떠올렸다.
한밤중에 한 이야기는 상당히 길었다. 지수는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았고, 정유현은 반년간의 정세에 대해 말해주었다. 무엇보다 서로가 쟁점으로 삼은 것은, 아그리올라의 둥지. 협회장을 쓰러뜨릴 때 있었던 일이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늑대 씨야말로 위험한 짓 좀 하지 마세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지수의 입장에서, 동료와 제대로 된 협의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 자멸하는 필살기를 사용해버린 정유현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인간은 대화라는 걸 할 수 있는 동물인데, 왜 말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자기 혼자 다 결정하려 드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정유현도 똑같았다. 자신이 자기 멋대로 폭주해서 죽어가는 것을, 왜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구해낸단 말인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전략적으로도 합리적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야기해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남 때문에 무리하는 건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된다. 잘못한 건 그쪽이고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똑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해주지 않았다.
둘 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태연히 거짓말을 내뱉을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은 빈말로도 하지 못했다. 결국, 또 그런 상황에 처하면 똑같은 짓을 하겠다는 말이었으니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솔직히 제가 늑대 씨보다 세거든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강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약한 동료가 우선적으로 희생양이 되는 게 합리적이지. 틀린가?’
그런 소모적인 논쟁을 펼치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생각하니까 또 화나네.’
화장실에서 세수한 지수는 성큼성큼 걸어가 주방 앞에 섰다. 이내 포트에 물을 끓이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계란과 스팸으로 볶음밥을 만들 뿐이었다. 대충 완성이 되자 지수가 옆방의 문을 쿵쿵 두드렸다.
“나와서 밥 먹어.”
“졸려….”
대충 씻고 나온 서민하가 졸린 얼굴로 지수의 방에 들어왔다. 정유현을 본 서민하는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 것인지 늑대 아저씨 안녕, 하고 손을 흔든 뒤 테이블 앞에 앉았을 뿐이었다. 정유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수가 장갑을 끼고 프라이팬에 만든 볶음밥을 밥공기에 나누어주었다. 분량은 딱 세 사람이 넉넉하게 먹을 정도였다.
“맛있네.”
서민하는 배가 좀 고팠던 듯 빠른 속도로 볶음밥을 냠냠 퍼먹었다. 서민하는 배고파도 참는 타입이었다. 솔직히 지수는 서민하에게 밥 해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뭐 안 챙겨 먹고 다니다 굶어 죽는 게 아닐까. 반쯤 진지하게 걱정이 들었다.
“맛있군.”
정유현의 경우엔 천천히 신중하게 맛을 음미했다. 스팸이랑 계란에 밥 참기름 간장을 넣고 볶은 것뿐인데도 그랬다. 만든 사람의 정성 따위를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서 정성은 개뿔 볶으면서 스마트폰이나 보고 있었다.
서민하와 정유현 둘 다 밥 한 풀 남김없이 싹싹 긁어 비웠다. 그렇게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맛있게 먹어주니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포트에 끓였던 물을 부어 녹차를 탔다. 찻잔을 홀짝이며 녹차를 마신 정유현이 말했다.
“차를 아주 잘 끓이는군.”
“맛있어.”
“잎이 좋아서 그래요.”
지수는 겸손해하면서도 내심 기뻐했다. 전문적으로 다도를 배운 것은 아니지만 지수가 탄 녹차는 맛보는 사람마다 호평이었다. 실제로 잎의 품질이 우월한 점이 컸다. 재료에 마법을 부여하는 소양도 용왕의 수준에 이르렀으니 말 다 했다.
용왕의 룬 마술을 사용해서 하는 짓이 찻잎 품질 높이기라는 것도 상당히 웃기는 일이었다. 이런 걸 품위가 떨어진다 하는 걸까. 지수는 의견을 물어보기 위해 머릿속으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밴더스내치?’
<나도 마셔보고 싶은데….>
‘너는 몸이 없잖아. 마셔봤자 그대로 통과해버릴걸’
지수의 촌철살인에 밴더스내치가 축 처진 얼굴을 했다. 유령도 유령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 것이었다. 저렇게 낙담하니 어떻게 해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게 급한 일은 아니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이 끝나고, 지수가 설거지를 하려고 그릇과 잔들을 걷었다. 서민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씻었다. 지수는 앉아있는 정유현에게 손님용 칫솔을 건넸다.
“여기 칫솔이요.”
“고맙군.”
화장실에 들어간 정유현이 씻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지수가 차분히 설거지를 했다. 정유현과 서민하. 단지 손님 한 명, 옆집 이웃 한 명이 있을 뿐인데 방 안이 상당히 시끌벅적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수가 평소에 너무 혼자 있는 데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평소? 혼자?’
거기까지 생각한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릿속에 뇌리가 스쳤다. 이때까지 너무 바빠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접시를 놓쳤다. 그러고 보면 이제는 어디서든 평소에 진정으로 혼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혼에 밴더스내치가 붙어있으니까!
‘급한 일이었어.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야….’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는 생활 따위 쓰레기통에나 처넣어야 할 것이었다. 지수가 식은땀을 흘리며 설거지를 계속했다. 그리고 지수 주머니의 스마트폰에서 착신음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낸 지수는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수야? 혹시 오늘 시간 비나 해서.>
전화를 걸어온 건 오성화였다. 그 말에 지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일정 같은 건 없지만 일정이 없다고 해서 다른 일정이 추가되는 건 사양이었다.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느긋이 지내려고 했다. 오성화가 말을 이었다.
<저녁에 술이라도 마시자고. 못다 한 이야기도 할 겸.>
“나도 같이 갈래.”
옆에서 살짝 불만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수가 깜짝 놀라서 돌아보자, 어느새 돌아온 서민하가 지수가 설거지하는 옆에 서 있었다. 전화 내용이 거기서도 들리다니 귀가 참 좋았다. 하긴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각성자, 초인의 영역에 걸쳐있으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긴 했다.
이쪽은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따라간다는 게 결정이 나 있었다. 지수가 오늘은 그냥 집에 있을 거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화장실의 문을 열고서 나온 정유현이 말했다.
“축하할 만한 날이야. 마시는 것도 좋겠지.”
정유현은 조금쯤 기대된다는 듯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그냥 빈둥거리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할 만 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설거지를 끝낸 지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오성화에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라드로 괜찮을까요?”
***
약속시간이 되기 어느 정도 전. 오성화는 픽업하러 오겠답시고 지수의 빌라까지 차를 타고 나왔다. 차는 언제나 타던 새빨간 코브라가 아니라 미니쿠퍼였다. 코브라는 2인승이라 다 같이 타고 갈 수가 없기에 바꿔 타고 온 듯했다.
지수와 서민하, 정유현 세 사람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오성화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시선은 정유현을 향해있었다. 오성화가 툴툴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쥐포장수. 댁도 같이 오는 거였어?”
“그래. 뻥튀기장수.”
“이거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데. 오늘은 용과 싸운 용감한 삼총사의 자리라고. 우리 무용담을 그렇게 듣고 싶나?”
“또 단체로 실종되진 않을까 걱정이 안 돼야 말이지.”
아니 당신이 무슨 엄마야? 얼굴을 내민 오성화가 도발했고 정유현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봐도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게 서로 틱틱 댔지만, 옛 직장동료 특유의 기묘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성화의 미니쿠퍼를 본 정유현이 말했다.
“너는 정말이지 빨간색을 좋아하는군.”
“검빨 멋있잖아. 이 미학을 모르겠다고?”
정유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내 네 사람이 자동차에 탑승했다. 조수석에 앉은 것은 지수였다. 핸들을 잡은 오성화가 운전을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이 없어도 이 주변 지리는 파악한 상태였다. 오성화가 콧숨을 흘리면서 말했다.
“상당히 변했더라, 반년간.”
무엇이 변했다는 것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각성자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왕의 봉인 중 하나가 깨져버린 뒤에 반년이 지난 것이니까.
매드 티 파티가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도 그렇고, 요즈음은 가히 각성자 사회의 대격변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딱 중요한 때에 자리를 비웠다는 느낌이야.”
“죄송하네요. 따지고 보면 저 때문에 휘말린 건데.”
“아니, 지수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다 내가 지시받고 멋대로 들어간 건데.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럴 때일수록 셋이 뭉쳐서 잘 헤쳐나가야 한다는 거지.”
라드에 도착하자 1층의 술집은 이미 시끌벅적했다. 확장공사는 성공적으로 끝난 듯 싶었다. 지수를 비롯한 네 사람이 가게에 들어오자 어딘가에서 수근대는 기색이 느껴졌다. 서민하 때문이었다. 눈에 띄는 분홍빛 머리카락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저거 서민하 맞지 하고 속삭이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테이블을 잡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온 여주인은 서민하를 보고선 기쁘다는 듯 꺄꺄 소리를 질렀다.
“설마 했는데 진짜네! 어디 갔다 온 거야? 걱정했잖니!”
여주인이 지수에게도 눈웃음을 치며 인사했다. 여기 오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지수는 여주인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그마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여주인이 서민하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며 휙휙 흔들었다.
“갑자기 잠적해선 그때처럼 편지 하나 안 남기고! 네 라이브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행이라도 갔었어?”
“미역 씨가 가출해서 데리고 왔을 뿐이야.”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모든 행적들을 가출이라는 단어로 일축해버리면 내가 너무 억울한데. 서민하의 담담한 대답에, 여주인이 놀란 듯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물었다.
“어머, 가출? 너희들 싸웠니?”
“그냥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끝내고 왔어요.”
“그래….”
볼을 쓰다듬던 여주인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떠나갔다. 여기서 느긋하게 떠들고 있을 수 없을 만큼 가게 일이 바빠 보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인 오성화가 테이블에 놓인 뻥튀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상당히 진지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지수 널 잊어버리고 있었는지 나도 이해가 안 가거든. 솔직히 말해서 잊어버릴 리가 없다고. 빚진게 얼마나 많은데. 짐작 가는 부분 있어?”
지수는 대강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주었다. 사정상 어떤 의식을 받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이름이 지워져 버리는 게 그에 따르는 저주였다고. 하나하나 사실관계를 밝혀주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오성화가 말했다.
“그러니까 저주 같은 거에 걸린 건가? 사람들한테 잊히는 저주? 그거 무서운 녀석인데. 나는 솔직히 나만 까먹었던 건 줄 알고 말이야. 내가 지수 목에 칼을 겨눴다는 생각을 하면 아직도 소름이 끼치네. 너희들은 뭐 사과할 거 없어?”
오성화가 빨리 얘기해보라는 듯 서민하와 정유현을 재촉했다. 비장한 표정으로 지수한테 칼을 겨누고 위협한 건 이제 와서는 완전히 흑역사지만, 자신만이 그런 삽질을 저지르지 않은 거라는 생각에 어느 정도 안도를 얻은 듯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민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는 애초에 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정유현 또한 조용히 뻥튀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기억이 없었어도 얼굴을 마주치니까 추론이 됐지.”
그 말대로 서민하와 정유현 둘 다 지수가 함께 싸운 동료였다는 사실은 옛적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정유현은 그러고 나서도 사상이 대립하는 탓에 지수와 싸웠지만, 결국에는 지수를 지지해주는 것으로 그때 커다란 의지가 되어주었다.
“제 무덤을 제가 파는군.”
“바보 같아. 그걸 어떻게 까먹어?”
“목에 칼을 겨누고 위협했다지. 생명의 은인이다. 동네방네 확성기로 떠들고 다닌 주제에. 박사한텐 충격이었겠어.”
“완전히 죽이려고 했다니까. 깜짝 놀랐어.”
두 사람의 연이은 독설에, 오성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결국 오성화는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괜찮다니까요, 지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해도 오성화는 그 상태로 몇 분이고 움직이지 못했다. 아주 자그마한 미안… 소리만이 안에서 연신 새어 나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