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05화 (105/176)

105화.  < 이런 건 처음 보는데 (1) >

현실로 돌아왔을 때 바깥은 반년이 지나있었다.

몰래카메라 같은 게 아니었다. 진짜로 반년이 지났다. 지수는 망연해하면서도 생각을 계속했다. 다른 두 사람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예 짐작도 안 간다는 반응이었지만, 지수는 이 현상을 일으킨 범인이 누구인지 대강 사고가 미쳤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분명 그 양반이다. 봉인의 기둥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한순간. 갑자기 나타난 마왕은 틈새의 흐름을 멈춘 채 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깐 동안 시간을 끌 필요가 있다는 듯이. 그 잠깐의 영향으로 바깥에서는 반년의 시간이 흘러버린 듯했다.

말도 안 되지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한 것인가? 지수가 섬뜩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일이 가능할지 상상도 안 갔다. 신출귀몰에 정체불명. 마왕은 지수가 완전한 용왕으로 거듭난 지금에 와서도 끝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오성화가 멍하니 명패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야. 불식 1팀 팀장 김혜성?”

“임시거든요? 대장이 갑자기 사라져서 그런 거잖아요!”

김혜성은 질겁을 하며 즉시 설명했다. 김혜성에게 있어 불식 헌터 1팀의 팀장은 오성화외에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성화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이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썩 괜찮기도 했다.

“아니, 꽤 어울리는데? 그냥 네가 할래?”

“학원 일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팀장은 개뿔이!”

김혜성이 진심으로 짜증 나 죽겠다는 듯 빽 소리쳤다. 이내 지수는 방금 김혜성이 한 말에 신경이 쓰였다.

‘학원이라면 역시 그 ’학원‘인가?’

체계적으로 각성자를 교육, 양성시키기 위한 기관. 돈을 퍼붓듯이 쓰면서 급하게 진행하려던 일이었다.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났다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있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김혜성은 핸드폰을 꺼내 이리저리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그야 반쯤 실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세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그마치 반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냥 혼자서 다녀오셨습니까 한마디 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예요?”

“저 구슬 안에 들어갔다 왔지.”

오성화가 책상 위의 구슬을 삿대질하며 가리켰다. 여왕을 봉인하고 있는 기둥 중의 하나. 오성화가 자신의 사무실에 잘 보관해달라고 말했던 그 구슬이었다. 구슬은 빛을 잃고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구슬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오성화의 대답을 들은 김혜성은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그냥 말하기 싫다고 하십쇼.”

“아니 진짜라니까? 내가 안에서 누구 만났는지 알아? 젊었을 때 우리 보스랑 만나고 왔다고. 되게 잘생겼더라.”

“이 양반이 진짜.”

김혜성이 얄미운 말 한마디만 더 하면 확 어떻게 해버린다는 듯 노려보았다. 그 반응에 오성화는 나라를 잃은 듯 억울한 표정으로 양손을 펴 보였다. 지수와 서민하 양쪽을 돌아보는 것이 어떻게 진짜라고 해명을 좀 해달라 것 같았다.

"......."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서민하는 애초에 오성화와 김혜성의 대화에 관심 자체가 없었고, 지수는 귀찮은 해명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솔직히 김혜성이 납득할 수 있을 수준으로 설명하려면 시간을 너무 잡아먹을 게 뻔했다.

배신당한 오성화가 울상을 지으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또다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만두었다. 아마도 지수가 대답하지 않은 건 지금 자신에게 화나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것 같았다. 그리고 김혜성은 그럼 그렇지 하며 혀를 찼다.

실없는 사람이야 정말. 콧숨을 쉰 김혜성은 신호음이 들린 핸드폰을 확인했다. 표시된 문자는 백묵에게서 온 것이었다. 고개를 돌린 김혜성이 멀뚱히 서 있는 지수를 보고서 말했다.

“길드장님이 우리 동맹 얼굴 좀 잠깐 보자신다.”

“아…"

“지금 바로 괜찮겠어? 하기야 바로 위층이기는 한데.”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컨디션이 좋지 않아 푹 쉬고 싶었지만, 얼굴 잠깐 비추는 정도는 전혀 상관없었다. 백묵의 입장에서 보면, 마왕이 난입해온 그때 사라진 지수가 반년이 지난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곧바로 지수의 용태를 확인하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지수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게 여섯 달이나 자리를 비운 것이다. 정리하거나 안부를 전해야 할 상대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오성화는 김혜성과 이야기를 좀 하다 오피스텔에 돌아가야겠다고 했다. 집이라 해봐야 길드 건물 바로 옆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난 기다릴래.”

서민하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지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묵의 사무실까지 찾아가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전 부터 몇 번이고 오간 적이 있으니. 이미 불식 길드의 복도에 걸린 그림 모양까지도 기억할 수준이었다.

사무실의 문을 닫고 백묵과 대면했다. 깍지를 낀 손에 턱을 괴고 있던 백묵이 지수를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시선이 마주치길 몇 초, 지수가 이렇게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끼쳐드렸네요.”

백묵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흥 코웃음을 쳤다. 그가 제일 먼저 입에 올린 것은 간결하고도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어. 봉인의 기둥 안에 갇혀서….”

하지만 지수는 대답할 말이 궁했다. 설명할 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지수가 천천히 말을 고르고 있자, 살펴보던 백묵이 말했다.

“마왕은 너를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죽이지만 않았지,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곳에 가둬두거나 죽은 것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놨다 생각하고 있었지. 널 찾으러 간 오성화와 여자애도 마왕에게 제거당했다 판단했고.”

백묵이 검지로 톡톡톡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백묵 또한 지금은 이름 지우기가 풀려 지수에 대한 기억이 전부 돌아온 상태였다. 그럼에도 당황하거나 난처한 기색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반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정리는 이미 충분히 됐을 것이다. 그리고 책상을 두드리고 있던 백묵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무튼, 살아있어서 다행이군.”

나온 목소리는 담담한 어조였지만, 지수는 봉인 안에서의 경험으로 백묵이라는 인간에 대해 대강은 이해한 상태였다. 백묵은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지수가 피식 웃었다.

“오성화 씨 없었으면 죽을 뻔했어요. 대전쟁 때의 아그리올라를 혼자서 죽이려 들었거든요. 결국 실패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죠. 진짜로 동맹 좋다는 게 이런 거네요.”

“아그리올라라고…?”

“네. 과거의 백묵 씨한테 병렬사고도 배웠어요.”

백묵이 눈썹을 찌푸렸다. 병렬사고라면 확실히 자신의 주특기였고, 지수가 알고 있을 리 없는 것이었다. 방금의 대화로 대충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갈피는 잡을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쉬이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봉인의 기둥에 관해서 누구보다 철저히 연구한 것이 백묵이었다.

“대전쟁을 경험하고 왔나.”

“셋이서 아그리올라를 토벌한 게 끝이에요.”

백묵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그리올라가 어느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인지는 백묵도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반죽음에 가까운 상태에서도 처절하게 발악하며 육영웅을 몰아넣었던 괴물이다. 그걸 셋이서 토벌했다는 건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널 처음 만났을 즈음부터 경이로운 수준의 성장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야 들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제 와서는 아예 믿을 수가 없을 정도군. 그때 그 막 헌터 라이센스를 딴 마법사가 지금은 용왕인가. 말 그대로 왕의 귀환이야.”

심지어 지금은 백묵과 싸웠을 때처럼 편법으로 만들어진 반쪽짜리 용왕이 아니라, 스나크라는 이름까지 부여받은 제대로 된 용왕이었다. 사실 지금의 지수는 백묵이 알고 있는 모든 각성자를 통틀어서 가장 강한 존재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뭐. 아무튼 오늘은 쉬어라. 관련된 놈들과 일정을 조율해보고서 연락을 줄 테니. 그때까지는 다른 인간들이 귀찮게 굴지 않도록 함구하고 있도록 하지. 아마 며칠쯤 걸릴 거다.”

백묵이 말했다. 자세한 사정을 청취하고 향후 방침을 결정하는 건 따로 자리를 마련하려는 듯했다. 하기야 여기서 백묵이랑 지수 둘이 모든 이야기를 끝내는 것도 웃기는 일일 것이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나오자, 서민하가 복도에서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졸려 보이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래. 돌아가면 바로 자야겠어.”

서민하가 눈꺼풀을 비비면서 말했다. 이제 그 기분 나쁜 머릿속의 울림, 빨리 지수를 봉인에서 꺼내라는 용언의 떽떽거림을 듣지 않아도 됐다. 오랜만에 이불을 덮고 푹 자고 싶었다. 그다음은 라이브 하우스에 얼굴을 내비치고….

“다음 무대, 날짜 정해지면 올 거지?”

“그래.”

지수가 대답했다. 지수는 서민하에게 한 말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상당한 죄책감을 안고 있는 채였다. 웬만해서는 들으러 가자는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 서민하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있었다. 그 말에 만족스러운 듯 서민하가 끄덕였다.

집에 가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 빨리 가려면 하늘을 날아가는 것도 좋았지만, 그런 식으로 눈에 띄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앉아있는 서민하는 창문에 기대서 졸고 있었다. 지수가 쭉 기지개를 켜면서 생각했다. 바로 전까지 용왕과 싸우고 있었다는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러고 보니 공방은 쓸모없게 됐군.’

공방으로 사용할 것이라면, 어차피 지수가 가지고 있는 용왕의 둥지가 있었다. 넓이도 편리함도 설비도 지수가 큰돈 들여 마련한 공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손해 본 것은 전혀 없었지만 왜인지 손해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린 서민하는 거의 반쯤 잠들어있었다. 피로 때문인지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지수가 부축하지 않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 할 정도였다. 이내 빌라에 도착하자 절뚝거리는 서민하는 눈을 감은 채로 문고리를 더듬어 어떻게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수는 그리운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의자에 앉으니 감촉이 편안했다. 그림자에서 폴짝 튀어나온 고양이가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랬다. 이곳이 자신의 방이었다. 이제야 무언가 원상태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지수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들을 너무 무리하게 해왔다. 이제는 다시 페이스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학원. 매드 티 파티. 마녀들과의 협업. 백묵의 목적. 그리고 마왕에 대한 생각. 그런 것들은 잠깐이라도 머리 한 구석에 치워놓고, 지금은 이 한가로움을 즐기고 싶었다. 용왕이 된 직후부터는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제까지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지수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지수의 집 현관문 도어락이 삑삑삑 울리며 거칠게 열렸다.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다. 지수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신발장 쪽에서 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타난 남자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대단히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가 손에 든 단말기에 설치되어있는 건 어떠한 종류의 보안 어플리케이션이었다. 누군가가 이 집 안에 무단으로 들어오면 곧바로 남자의 단말기에 신호가 가도록. 남자는 그 신호를 받고서 여기까지 최단거리로 뛰어온 것이었다. 조용히 이글거리는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감히. 누가 이 집에 마음대로….”

그리고 남자와 지수의 눈이 마주쳤다.

지수가 조용히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남자는 그대로 굳어 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미간을 몇 번 꼬집더니, 다시 의자에 앉아있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제압하고 시작하겠다는 듯 남자의 손을 휩싸고 있던 연보라색 소용돌이가 서서히 작아지다 사라졌다.

“...늑대 씨.”

새까만 집행부의 제복은 여전히 남자에게 어울렸다. 나타난 남자, 정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유현이 잠깐 눈을 돌려 할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작게 침을 삼키기만 할 뿐 자연스러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박사, 너는. 정말로….”

머뭇거리길 몇 초. 그리고 겨우 입을 연 정유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정말 그답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미소였다.

“…너는, 정말로 귀가가 늦군. 반성하도록.”

반년 동안 실종되어있던 인간을 보고서도 마치 통금을 몇 시간 어긴 걸 혼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농담처럼까지 들리는 그 말에, 지수 또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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