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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104화 (104/176)

104화.  <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9) >

오성화는 아까부터 혼이 빠진 얼굴로 아그리올라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이런 잡일은 나 같은 쓰레기에게 맡기라는 전언이었다. 아무래도 지수를 괴물 취급하면서 검을 겨누었다는 것 때문에 상당한 정신적 충격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오성화가 어쩔 줄 모르며 또다시 지수 쪽을 바라보았다.

“지수야. 나 한 대 때릴래?”

“아니요.”

“그래. 역시 한 대로는 성이 안 차겠지? 두 대? 세 대?”

“진짜 괜찮다니까요.”

지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아주 약간은 섭섭하기도 했지만, 기억이 지워져있던 것인데 뭐 어쩔 것인가. 오히려 이름 지우기의 영향에서 벗어나있던 서민하의 경우가 이상한 것이었다. 하기야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름 지우기는 해제했어.’

해주의 비술과 같은 요령으로, 자신의 영혼에 걸려있는 보호장치를 조금만 주물럭거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애당초 이름 지우기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강화였다. 지우는 데에 큰 수고가 들 리가 없었다.

지수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굳이 밴더스내치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이, 용왕의 힘과 능력을 완전히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으로 명실상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버렸다. 그런 지수의 상태를 보며 밴더스내치는 상당히 들떠있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왕님이라면 분명히 이런 광경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지. 사상 최약의 반쪽짜리 용왕이 최강의 순혈 용왕을 쓰러뜨린 거라고!>

“따지고 보면 널 죽인 건데 왜 그렇게 방방 뛰어.”

<저런 꽉 막힌 얼간이랑 나랑 같은 취급하지 마.>

아무래도 밴더스내치는 아그리올라를 자신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싶었다. 혼의 정수인 밴더스내치는 이를 테면 갓난아기나 마찬가지인 순수한 상태니, 용왕인 아그리올라가 되고 싶지 않은 자신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걸로 계승식이 정말로 완료되었어.>

지수의 심상 속, 밴더스내치의 등 뒤에 커다란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법진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철컥철컥 맞물려 돌아갔다. 지수는 더 이상 밴더스내치가 꼼수로 만들어낸 반쪽짜리 용왕이 아니었다. 아그리올라를 토벌하는 것으로 그에 걸맞은 자격을 얻어, 정통한 계승자가 되었다.

<계승식의 의지가 왕님에게 부여한 이름은, 용왕 스나크. 이제부터는 그 이름으로 왕님의 왕도를 펼쳐가는 거야!>

밴더스내치는 흥분하고 있었지만, 지수는 심드렁하게 앞머리를 만질 뿐이었다. 솔직히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다.

“그냥 이지수란 이름 계속 쓰면 안 되나? 솔직히 나는 용언도 못 쓰니 원래 이름 들켜도 별 상관 없는데.”

<무슨 소리야? 용왕의 이름이란 건 단순한 호칭이 아니야. 그 긍지와 위엄, 그리고 정체성을 결정하는…>

지수가 귀를 닫았다. 주도권이 완전히 이쪽으로 옮겨져있다는 건 참 훌륭한 일이었다. 아무튼 용왕의 힘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시한부 인생이었던 점도 해결되었고, 이름 지우기도 제대로 해제했다. 지수는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당분간은 느긋한 휴가라도 즐기고 싶었다.

“...결국 약속 안 지켰네.”

옆에 앉은 서민하가 말했다. 전투가 끝나 새빨간 눈동자와 박쥐 날개는 사라져있었다. 지수 또한 황금색으로 빛나던 눈동자와 용의 뿔을 숨겨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였다. 약속? 지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서민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보러 오겠다고 했잖아. 내 무대.”

확실히 그랬다. 협회장과의 결전 끝에 지수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질 때, 서민하의 무대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기억하고 있던 서민하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노래할 때마다 청중들을 살펴보았지만, 지수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엔 이렇게 서민하 쪽에서 찾으러 달려와야 했다.

“어…미안, 바빴어.”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단순히 행동에 나서는 것 뿐만이 아니라 계획을 입안하고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는 것, 동시에 진행시키기 위해 일정을 짜는 것.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잠을 잘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수의 말을 까먹었다면 몰라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면. 서민하는 무대에 설 때마다 실망감에 잠겼을 것이다. 지수는 서민하에게 진지하게 사과했다.

“진짜 미안.”

“이제 집으로 돌아올 거야?”

“그래야지.”

“그러면 됐어.”

서민하가 콧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리고 용왕의 결계가 해제되자, 바깥에 있던 육영웅들이 대공동으로 달려들어왔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앉아서 쉬고 있는 지수와 서민하, 계속해서 뭐라 중얼거리면서 용의 사체를 수습하는 오성하. 눈썹을 찌푸린 우진이 멍하니 입을 벌리며 말했다.

“…설마 정말로 쓰러뜨린 겁니까? 용왕을?”

“사실 죽을 뻔 하긴 했어요.”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실제로 서민하와 오성화가 제때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둥지가 해제될 때까지 시간을 끌면서 발버둥치지 않았다면 지수는 지금쯤 시체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육영웅의 절반인 셋이서 용왕 아그리올라를 토벌했다. 그것은 누구도 믿지 못할 수준의 위업이었다.

“아, 이거 잘 썼습니다.”

오성화가 우진에게 갑주를, 허다인에게 부적을 돌려주었다. 부적은 몰라도 흑기사의 갑주는 아그리올라 공략에 톡톡히 써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성화에게 부적을 건네받은 허다인은 그것을 품에 넣지 않고 지수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야기는 들었어. 지수 너, 미래의 네 제자라며? 이런 대단한 제자를 키워내다니 미래의 나도 꽤 만만치 않네.”

웃으며 말한 허다인의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누가 말했는지는 몰라도, 굳이 할 필요 없는 이야기를 떠들다니. 서로 별 미련을 남기지 않아도 되게 굳이 정체를 밝히지 않고 떠나는 것이 지수의 스타일이었다. 허다인이 말했다.

“용왕을 쓰러뜨렸으니까, 이제는 돌아갈 거야?”

“그래야죠. 여기 있고 싶어도 못 있을 거예요.”

이 봉인의 기둥은 용왕 토벌전의 기록을 말뚝 삼아 고정되어있는 상태였다. 즉, 육영웅이 용왕을 토벌하는 과정.

그리고 지수는 육영웅의 개입을 일절 받지 않은 채, 서민하와 오성화만을 데리고 용왕을 쓰러뜨렸다. 이야기의 전제를 완전히 부정해 버린 것이다. 아마 조금 있으면 말뚝을 잃은 봉인의 기둥은 단순한 기록으로 돌아가버릴 것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허다인이 지수에게 부적을 내밀었다. 한 번 치명상을 대신 흡수하고 재가 되어 사라지는 오행부였다.

“이건 너한테 줄게. 중요할 때 지수 널 지켜줄 거야.”

아직은 네 스승이 아니지만, 네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니까. 오행부를 받은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단순한 기록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지수에게 보내준 말도 행동도 감정도 전부 진짜였다.

“감사합니다.”

지수가 솔직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를 전했다. 오성화는 연신 혼자 팔짱을 끼고 있는 백묵을 힐긋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듯 했다.

그리고 지수와 서민하, 오성화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오성화와 서민하는 갑자기 나타난 현상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자신의 몸이 유령처럼 변해가고 있으니 당연했다. 지수는 담담하게 지금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봉인의 기둥이 무너졌어요. 이곳의 모든 게 기록으로 돌아가면서, 우리가 현실로 끌어내려지고 있는 거예요.”

예전이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당황했겠지만, 용왕의 통찰을 가지게 된 지금은 현상을 곧바로 간파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잠깐동안 현실과 아공간 사이의 통로를 경유해, 눈을 감았다 뜨면 현실로 되돌아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했을 텐데.

“상당히 성장했군. 공간의 틈새에서 나를 인식하다니.”

들린 목소리는 익숙했다. 아공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갈 때 아주 잠깐 경유하는 통로. 원래대로라면 이곳을 통과하는 건 한 순간에 불과하며 인식조차 하지 못해야 하겠지만, 지금 누군가가 이 통로의 흐름을 억지로 잡아놓고 있었다.

물론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는 건 지수가 알고 있는 한 한 명 밖에 없었다. 지수가 조용히 눈을 떴다.

‘이렇게 될 것 같기는 했지.’

새까만 망토와 화려한 장식의 가면. 마치 연극 무대에서 뛰쳐나온 듯한 과장된 차림새. 그곳에 서있는 것은 지수를 봉인의 기둥 안에 집어넣은 장본인, 마왕이었다. 지수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러자 마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라. 잠시 붙들어매고 있는 것 뿐이니까.”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뭘 그리 노려보는 거냐. 덕분에 용왕의 격을 얻게 됐으니 오히려 나한테 감사해야겠지. 목숨을 구해준 거 아닌가?”

“뭐라고?”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이 남자는 지수를 성장시켜주기 위해서, 아그리올라를 쓰러뜨릴 기회를 주기 위해서 지수를 봉인의 기둥 안에 집어넣은 것이었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 지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마왕이 대답했다.

“딱히 그렇지는 않아.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네가 봉인의 기둥 속에 계속 갇혀있든, 그 안에서 죽어버리든, 결국 아그리올라를 쓰러뜨려서 용왕의 격을 손에 넣든. 어떻게 된다고 해도 나한테 손해가 될 건 없으니까.”

“손해가 될 게 없다고….”

곰곰이 생각하듯 턱을 매만지던 마왕이 말을 덧붙였다.

“다만. 정공법이 아니라 육영웅을 전부 죽여버리는 방법으로 빠져나왔다면, 내가 직접 너를 죽일 생각이었지.”

“왜지?”

지수가 마왕에게 물었다. 지수가 육영웅을 죽인다는 선택을 하지 않은 건 오로지 개인적인 성격 문제였다. 그것 때문에 마왕이 자신을 죽이려 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육영웅이랑 뭔가 친분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마왕이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왜냐니? 그런 미친놈은 내버려두면 위험하니까.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타입이지. 나는 편안하고 느긋하게 살고 싶다. 그런 놈이 제 좋자고 날뛰는 건 사양이야.”

지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이 있던 오성화와 서민하의 기척은 어렴풋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현실과 아공간 사이의 틈. 이곳에서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적어도 지금의 지수나 마왕 클래스가 아니면 불가능한 듯 싶었다.

하여튼 좋다. 지금의 마왕은 물어보는 질문에 협조적으로 답변해주고 있었다. 지수가 궁금한 것을 전부 물어보았다.

“왜 내가 아그리올라를 쓰러뜨린 게 네 손해가 아니라는 거지. 나는 따지고 보면 당신이랑 적대하고 있는데.”

그 말에 뭘 물어보냐는 듯이 마왕이 양손을 펴보였다.

“이지수. 아니면 이제 용왕 스나크라고 불러야 하나. 넌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여왕의 봉인을 풀려고 했던 거였지. 하지만 지금 너의 목적은 전부 달성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봉인의 기둥을 깨부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 않나?”

지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더 이상 지수는 시한부 생명이 아니었다. 여왕의 봉인을 깨부숴서 강대한 마물을 불러낼 필요 따위는 없었다. 똑같은 이해관계가 없어진 지금, 나머지 여왕의 봉인을 깨부수는 데에 협력할지 말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지수는 그런 마왕의 방식에 상당한 충격을 느꼈다. 직접 나서서 모든 적들을 전부 박살내버리면 간단할 텐데. 굳이 적과 충돌할 필요가 없다면 충돌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마왕은 정말로 싸움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킨 지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만. 멈춰놓는 것도 한계군.”

마왕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의 틈새. 멈춰있던 흐름의 격류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수의 존재가 원래 가려던 곳을 향해 휩쓸려갔다. 현기증과 함께 눈을 뜨자, 지수의 몸이 봉인의 기둥인 구슬 앞에 나타나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딘가의 건물의 사무실이었다.

옆에서는 함께 돌아온 오성화와 서민하가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바깥으로 돌아왔다. 그런 세 사람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린 것은 서류들을 살펴보고 있던 김혜성이었다. 사무실의 가운데. 책상 위 명패에 써진 글자가 보였다.

[불식 헌터 1팀 팀장 김혜성].

“팀장?”

오성화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타난 세 사람을 바라본 김혜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꺼풀을 떨고 있었다.

“대장… 돌아온 거예요? 대체 어디 갔다 왔어요!”

“어디냐니, 그냥 명령 받아서 잠깐….”

“잠깐은 무슨, 반 년이 지났는데!”

김혜성이 열불이 난다는 듯 빽 소리쳤다.

“뭐?”

그것은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지수와 서민하, 오성화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대전쟁의 시대에서 돌아오자, 바깥의 세상은 반 년이 지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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