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7) >
오성화는 폐허가 된 지하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원….’
설명받은 사정은 이러했다. 데리고 돌아와야 할 중요인물이 있으니, 수색하는 데에 최대한 협조해줄 것.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던전행에 지루함을 느끼던 참이었다. 지금의 오성화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자극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일은 상당히 기대가 되었다. 그 독불장군인 정유현이 먼저 굽혀서 부탁하고, 방임주의를 고집하는 백묵이 손수 명령 한 일이다. 수색이라곤 해도 예삿일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기분 좋은 긴장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런데 정작 찾아간다는 장소는 불식 길드 건물의 지하였다. 주변이 온통 난장판이 되어있는 걸 보니 백묵이 기술이라도 시험한 듯 했다. 동행인 서민하는 아까부터 같은 곳을 이리저리 돌며 걸어다니기만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제 슬슬 삼십 분이 다 되어갔다. 오성화가 서민하에게 질문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보물 찾기?”
“집중하고 있으니까 말 걸지 마.”
서민하가 돌아보지도 않고 담담히 쏘아붙였다. 손에 턱을 괸 채 앉아있는 오성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뭔가 생각하는 게 있겠지,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느긋하게 앉아있었지만 오성화에게도 한계가 찾아왔다.
더 이상 여기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봤자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뭘 어쩌려고 저러고 있는 것인지 짐작도 안 갔다. 오성화는 지금 소꿉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장난할 거면 먼저 일어나고 싶은데.”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턴 오성화가 말했다. 앞뒤 다 제쳐놓고 자신을 투입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길드 건물 지하에서 혼자 두리번거리고 있는 여자애를 호위해주는 것이라면, 제발 웃기지 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바로 그 때.
오성화가 눈을 번뜩이며 뒤쪽으로 도약했다. 거의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당장 거리를 벌리라고 온몸의 세포가 바짝 곤두서서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터져나온 살기의 근원은 저쪽에 서있는 서민하였다. 서민하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 장난이라고?”
이게 장난처럼 보이냐는 듯, 신경질적인 붉은 눈동자가 오성화를 노려보았다. 오성화는 전율했다. 그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는 마력을 육안으로 관측할수 있게 해주는 특제품이었다. 그리고 그 렌즈에 비치고 있는 서민하의 마력은, 웬만한 미궁의 보스 몬스터들이 조무래기로 보일 수준이었다.
호위라니,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이쪽이 호위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 이내 살기를 거둬들인 서민하가 오성화에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오성화의 안경이 마력을 감지하는 아티팩트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저씨. 그것 좀 잠깐 줘봐.”
“아저씨라고? 나는 아직….“
"됐으니까. 선글라스.”
한숨을 쉰 오성화가 순순히 선글라스를 넘겨주었다. 이래서 젊은 것들은. 선글라스를 쓴 서민하는 새까만 시야가 익숙하지 않는 것인 지 고개를 휙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적응하고서 또 다시 몇 분 동안 폐허가 된 지하를 둘러보았다.
“찾았다.”
이리저리 걸어다니던 서민하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예리하게 마력을 갈무리한 뒤 크게 손톱을 휘둘렀다.
찌익,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확하게 결을 따라 양단된 것은, 봉인의 기둥을 숨기고 있던 결계였다. 지수와의 연결에서 느껴지는 기척과 서민하의 기술이 맞물려 이루어낸 묘기였다. 서민하가 데구르르 굴러온 구슬을 집어들었다.
“여기 있어….”
직접 손으로 만져보자 확실히 알았다. 이 안에 미역 씨가 갇혀있다. 그런 실감이 느껴졌다. 구슬을 부수는 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냥 깨부숴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까딱하면 안에 있는 지수가 다칠 위험이 있었다. 서민하가 오성화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저씨, 이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
“아저씨가 아니라… 하. 됐다.”
오성화는 솔직히 말해서 사고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뭘 찾으려고 길드 건물 지하를 구석구석 뒤지나 싶더니, 허공에다 대고 손톱을 휘두르고. 웬 구슬 하나가 데구르르 떨어지나 싶더니, 이제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단다.
하지만 그것을 헛소리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상황이 진지하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이해했다. 오성화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최대한 성의껏 서민하의 질문에 답변해주었다.
“같은 경우일지는 모르겠지만… 인스턴스 던전은 매개체에 손을 대고 들어가겠다고 강하게 생각하면 입장할 수 있지.”
오성화의 대답을 듣는 것과 동시에, 쉬식 소리와 함께 서민하의 신형이 사라졌다. 손에 들고 있었던 구슬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던전행에 이골이 난 오성화는 그 경솔함에 경악했다. 주변 안전도 확보해놓지 않고 생각 없이 들어가서 어쩌자는 것인가. 밖에 누가 올지도 모르는 건데.
핸드폰을 꺼낸 오성화는 길드에 전화를 걸었다.
“네. 헌터 1팀 오성화입니다. 지금 필요한 일이 있어서….”
결국 이런 잡무는 어른의 일이었다. 해야 할 조치를 끝내놓은 뒤, 이윽고 오성화 또한 뒤따라 구슬 안으로 진입했다.
***
구슬 안에 들어온 다음, 오성화는 반쯤 얼이 빠져있었다.
“…이해가 안 돼. 여긴 대체 뭐지?”
오성화가 알고 있는 인스턴스 던전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넓어봐야 방 몇 개 정도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공간. 하지만 이곳은 넓다고 해야 할까, 아예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몬스터들의 질이었다.
나타나는 괴물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A급 던전의 몬스터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숲을 걷고 있었지만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괴물 소굴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과장 좀 보태서 열 걸음 걸을 때마다 괴물과 조우한다고 해도 좋았다.
“여기가 어디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서민하가 숲을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녀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무작정 걷고 있었다. 오성화와 서민하가 걸어간 길에는 마물의 시체들이 수북이 쌓였다. 이 안에서 서민하가 보여준 전투능력은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바깥에 나간다면 당장에라도 불식 1팀에 스카우트하고 싶을 정도로.
물론 저쪽은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 손으로 금색 코인을 만지작대던 오성화가 고개를 돌렸다.
“나오지?”
목소리는 냉철했다. 서민하와 오성화를 멀리서 지켜보며 따라오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건 오성화가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이 특출나다기보단, 싸우면서도 주변을 끊임없이 신경쓰는 던전행의 습관 덕분이었다. 선제공격을 하지 않은 건 이쪽을 해치려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무 뒤쪽에서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미안, 미안. 실력이 좋아서 무심코 계속 엿보고 있었네.”
나타난 자의 모습에 서민하도 오성화도 크게 놀랐다. 특히 누가 쫓아오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였던 서민하는 아예 눈동자가 흔들릴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오성화의 경우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팍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서 나돌고 있다는 건, 너희들도 용왕을 사냥하려고 온 거 맞지? 근데 지금 입구가 결계로 단단히 막혀있어서.”
나타난 자는 한 마디로 표현해, 이족보행하는 커다란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다. 잘 보면 진짜 고양이가 아니라 인형탈을 쓰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발톱 쪽에 몬스터의 피가 묻어있는 걸 보니 저게 정말로 전투복인 모양인데.
“확인해보고 싶으면 데려다줄까? 위치를 알거든.”
살갑게 말해온 건 30대쯤 되는 중년의 목소리였다. 오성화는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꽉 쥐었다. 몬스터가 우글대는 숲속에서 나타난 피투성이 고양이 인형탈의 남자. 이건 뭐 거의 수상하다는 단어 자체가 옷을 입고 걸어다니는 수준이었다.
“좋아.”
하지만 서민하는 그 말에 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성화가 휙 고개를 돌려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대체 저 인간, 아니 인간인지 뭔지도 모를 고양이맨의 뭘 믿고 안내해주는 곳을 따라간다는 말인가. 그 시선에 서민하가 대답했다.
“고양이잖아.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어. 지금은 수단 방법 가릴 때가 아니기도 하고.”
“이봐...."
“속여서 뒤통수를 치려는 거라면 그 때 가서 박살내버리면 그만이야. 내가 저 고양이 아저씨한테 질 것 같지도 않고.”
“그럼 그럼. 아가씨가 참 호걸의 기상이 있구만!”
고양이 아저씨가 껄껄껄 웃었다. 오성화는 선글라스를 고쳐썼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상식인은 자신 뿐인 듯 싶었다. 이런 때야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한숨을 쉰 오성화가 고양이 아저씨에게 턱짓했다. 한 번 가보자는 뜻이었다.
“내 이름은 민오다. 편하게 민오 형이라고 부르라고.”
“… 오성화입니다.”
“서민하.”
그리고 민오가 안내한 것은 웬만해서는 찾을 수 없게 숲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져있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서민하는 점점 민오에 대한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분명 옳게 찾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걸어가던 오성화는 아무래도 신경쓰이는 점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민오 씨. 그 인형탈은 대체 왜 입고 있는 겁니까? 취미예요? 그런 거 입고 싸우면 엄청 답답하지 않아요?”
“이걸 입어야 세져.”
“...그런가요.”
그렇게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동굴까지 가는 지형은 아주 복잡했다. 은신처로서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민오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많은 시간을 낭비할 뻔했다. 여길 어떻게 찾아냈냐는 말에 민오가 대답했다.
“찾느라 상당히 고생하긴 했지. 그래도 어렵진 않았어. 우리 동료 중에 한 명은 점을 치고 한 명은 계시를 받거든.”
같이 싸울 생각이 있으면 이따가 소개해줄게. 동료는 한 명이라도 많은 게 좋지.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민오를 필두로 세 사람이 동굴 안쪽까지 진입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먼저 와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민오가 고개를 갸웃해하며 물었다.
“엥? 은신처는 내버려두고 왜 다들 여기 모여있어.”
동굴 안에 있는 건 육영웅들이었다. 하지만 민오를 반기는 기색도 없이, 안에서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진과 성녀는 입술을 깨문 채 눈을 감고 있었으며, 백묵은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고선 주먹으로 쾅 동굴의 벽을 때렸다.
“또 왜 초상집 분위긴데. 어디 보자. 다인이, 우진이, 묵이, 가희…다 멀쩡하게 있잖아? 누구 다치기라도 했어?”
민오가 말하자 구석에 웅크려있던 허다인이 어깨를 떨었다.
“혼자 들어가버렸어. 눈치챘어야 했는데….”
허다인의 목소리는 죄책감에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성화는 완전히 경악했다. 자신의 상사인 백묵이 젊은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 아니, 백묵 뿐만이 아니다. 깨닫고 보면 다른 사람들 또한 대전쟁에서 활약한 육영웅의 면면들이었다.
여긴 과거인가? 사진이라도 찍어둬야 하는 거 아닌가? 젊었을 때의 우리 길드장은 저렇게 생겼었구나. 오성화는 반쯤 굳어있었지만 서민하는 하나도 놀라지 않고 냉정했다. 철벽 같은 결계에 손을 대본 서민하가 허다인에게 말했다.
“그 혼자 들어갔다는 사람, 이름은?”
“이지수라고….”
그 말에 서민하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도달했다. 그리고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날개를 펼친 서민하가 말했다.
“이거, 온 힘을 다한다면 찢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용왕의 결계는 굳건했다. 분명히 깨부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온 힘을 다해 손톱으로 찢어낸다면 한 순간 정도는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뱀파이어의 능력과는 별개로 서민하가 각성자로서 가지고 있는 결을 보는 능력 덕분이었다.
물론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내는 정도고 곧바로 수복되겠지만, 앞으로 튀어나가며 찢어버린다면 그대로 안까지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서민하가 오성화에게 말했다.
“아저씨. 이리 와서 내 몸 꽉 잡아. 한 명 정도는 같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중간에 놓치지 말고.”
서민하가 허리를 숙이고, 날개가 뒤쪽으로 접혔다. 총알처럼 뛰쳐나가기 위한 준비자세였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팔과 다리에 추진력을 싣기 위해 갈무리되기 시작했다. 민오를 제외한 육영웅들은, 앞에 나타난 여자아이의 기량이 자신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걸 깨닫고 크게 놀랐다.
“잠깐 기다려. 너희들은 누구야?”
허다인이 뛰쳐나가려는 서민하를 제지했다. 서민하가 보여준 방금의 반응은 마치 지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나는 당신 제자야. 미역 씨…이지수도 당신 제자고.”
“뭐? 나는 제자 같은 거 둔 적 없어!”
“그건, 그거야…. 쉽게 말하면 우린 미래에서 왔으니까.”
서민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복잡한 사정은 설명하기도 싫었고 애초에 서민하 스스로가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 앞에 미역 씨가 있으니 찾아서 데려간다. 서민하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그것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허다인이 무언가 납득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자신의 기술을 전부 꿰뚫고 있듯이 알고 있던 것도, 오행과 영역에 능통했던 것도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는 마법사가 이름 하나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허다인이 저고리의 품에서 한 장의 부적을 꺼냈다.
“내 보물인 오행부야. 이걸 품에 지니고 있으면, 치명적인 공격을 대신 흡수해준 다음 재가 되어 사그라들 거야.”
허다인의 둘도 없는 보물이었으나 건네주는 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결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서민하와 나머지 한 사람 뿐이라면 도울 수 있는 건 뭐든지 도와주고 싶었다. 그것이 미래의 인연이라고 해도 스승된 자로서의 도리였다.
“나는 필요 없어.”
부적을 받은 서민하가 그대로 오성화에게 넘겨주었다.
다음에 앞으로 나선 것은 우진이었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마찬가지인 흑기사의 갑주를 벗어 서민하에게 내밀었다. 딱히 감상주의에 휩쓸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용왕을 사냥할 수 있는 유일한 호기다. 이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거추장스러워.”
갑주를 받은 서민하는 그대로 오성화에게 넘겨주었다.
다음에는 기도하고 있던 성녀가 걸어왔다. 성녀의 세례. 한 달에 한 명에게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신체능력과 해로운 효과에 대한 저항력을 엄청나게 올려주는 기술이었다.
“그거 나한테는 절대 쓰지 마.”
서민하가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흡혈귀인 서민하에게 성녀의 세례 따위를 썼다간 역으로 데미지를 입을 게 뻔했다. 결국 성녀의 세례 또한 오성화가 받았다. 그리고 오성화를 바라보고 있던 젊은 백묵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너도 나랑 아는 사이냐?”
“...알고 있고 자시고, 당신이 명령해서 온 거라고요.”
"흥."
백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오성화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오성화의 안쪽에 무언가가 흘러넘치는 것이 느껴졌다. 불가살이의 강철핵 일부를 공유한 것이었다. 효과는 일시적이겠지만 웬만한 주문과 공격들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민오는 줄 게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만 안 주니 미안하네. 내 인형탈은 남한테 못 줘서.”
“솔직히 말해서 줘도 안 입습니다.”
“길안내 해준 걸로 충분해.”
말한 서민하가 다시 자세를 잡고 마력을 갈무리했다.
“그러면 가겠어.”
육영웅들의 온갖 보물들을 칭칭 두른 오성화가 서민하의 허리를 꽉 잡았다. 서민하가 총알처럼 튀어나가기 직전, 허다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수를 꼭 구해줘! 당연하지. 읊조린 서민하는 손톱으로 결계를 갈라내 그대로 안쪽까지 들어갔다. 살짝 찢어진 용왕의 결계는 곧바로 다시 수복되었다.
결계 안의 거대한 공동은 텅 비어있었다.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은 마력의 잔향은 느껴졌지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뭐야? 아무도 없어? 오성화는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두리번거렸지만, 지수와 연결된 서민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곧 나타날 거야.”
그와 동시.
쉬쉬식,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공동에 두 존재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게 맞았다. 공동에 나타난 것은 한 마리의 용과 한 명의 인간이었다. 아그리올라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벌레들을 청소하기 위해 용언을 발동했다.
<죽어라.>
아그리올라의 용언이 울려퍼졌고, 서민하와 오성화 모두 그것을 힘으로 쳐내버렸다.
흑룡이 경악했다. 원래대로라면 누구도 저항하지 못할 용왕의 용언이었지만, 서민하의 경우 용혈의 주박에 쭈욱 저항해왔던 탓에 용언에는 이골이 나있었고, 오성화는 육영웅들의 보물들을 몰아받은 것으로 인해 있을 수 없는 수준의 저항력을 갖추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거대한 흑룡은 말도 안 되는 마력을 풀풀 내뿜으며 포효했다. 흑룡의 곁에서 수십 개의 새까만 칼날들이 발현되었다. 모든 칼날들이 향하는 건 쓰러져있는 녹색 머리칼의 남자였다.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상황.
“드디어 찾았다.”
달려나가는 서민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