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6) >
아그리올라는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주변의 풍경이 변해 놀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그리올라는 갑자기 나타난 이 공간의 정체를 단숨에 통찰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상당히 형태가 바뀌어있지만, 이곳은 같잖은 흉내나 가짜 같은 것이 아닌 진짜 용왕의 둥지였다.
약 1초. 아그리올라가 떠오른 수많은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소거법으로 유도된 결론은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렇군. 내 심장. 마왕의 앞잡이인가?”
아그리올라의 막대한 마력이 증오로 들끓었다. 그건 이미 마력이 일렁이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있었다. 마치 아그리올라의 몸 전체가 새까만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입을 쩍 벌린 흑룡이 미친 듯이 웃어제끼며 소리쳤다.
“이 아그리올라를 끝장내기 위해 찾아온 거냐? 내게 도전해서 이기면, 네가 용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이간질이라도 당했나! 하지만 그 멍청한 놈, 수를 잘못 뒀군! 알고 있는 거냐? 너를 죽인다면 나는 심장을 되찾을 수 있다.”
진보라색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녀는 지금 눈앞의 지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지수에게 용왕과의 결전은 하나의 도착점이었지만, 아그리올라에게 지수는 통과점일 뿐이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건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자의 등이었다.
“마왕….”
아그리올라는 그 이름을 입에 답는 것만으로도 저주스럽다는 듯 발음했다. 목소리에는 가장 짙은 모멸이 묻어있었다.
“그놈은 완전히 정체불명이었다. 나의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술로 이 몸을 농락했지. 하지만 두 번째는 달라. 이쪽도 당해주기만 하지는 않는다. 심장을 되찾고 나면 이쪽에서 기습해주지.”
날개를 확 펼친 용왕이, 고개를 내려 지수를 노려보았다.
“그걸 위해서라면, 좋다. 네 도전을 전력으로 짓밟아주지.”
아그리올라의 말에 지수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착각하고 있군, 아그리올라.”
동등한 관계라도 되는 듯 가볍게 이름을 불렀다. 흑룡이 눈을 부릅떴다. 지수는 흡사 수천 개의 칼날에 둘러싸인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아그리올라와 혼자 싸우겠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이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지수가 말했다.
“이건 도전이 아니야. 왕과 왕 사이의 정당한 쟁탈이지.”
지수가 검지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린 뒤, 아그리올라를 삿대질했다. 나는 심장, 너는 격. 서로 저울에 걸린 것의 무게는 똑같아. 조용히 읊조린 것은 그런 내용이었다.
아그리올라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내 안쪽에서 솟아오른 건, 같잖다는 비웃음이 아니라 순수한 분노였다. 처음 소개를 받았던 때부터 의아했지만, 설마 이 인간은 진심으로 용왕의 이름을 칭하고 있는 것인가?
“농담은 농담으로 넘기는 게 왕의 그릇이겠다만….”
아그리올라가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치고는 너무 모욕적이구나.”
처음 지수에게 여기 용왕이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그리올라는 지수가 용왕이라 자칭하는 것을 일종의 허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너를 죽이고 그 이름을 빼앗겠다는 당돌한 위협이거나. 그것은 오히려 귀여울 정도였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용왕이라 믿고 있는 거라면, 심장 도둑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자신에게 누가 진정한 왕인지 겨뤄보자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라면. 세포 하나에까지 공포가 각인되도록 철저하게 짓밟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 결계를 해제할 수 있었다면 그럭저럭 실력 있는 마법사겠지? 그렇다면 인간으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용왕의 언령을 맛 보여주지. 영광과 절망을 느끼며 죽어라.”
아그리올라의 주변에서 마력이 몰아쳤다. 밴더스내치의 예상처럼 몸을 가눈 용왕은 이미 용언을 회복해두고 있었다.
지수는 용언을 사용할 수 없었다. 온갖 룬들을 끌어모으고 밴더스내치와 재버워키의 도움을 빌려야, 용언을 억지로 주문화해서 사용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정한 용종의 적통인 아그리올라는 말 그대로 숨쉬듯이 용언을 사용할 수 있었다.
“눈 똑똑히 뜨고 보아라!”
하지만 아그리올라의 말과 반대로, 지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하는 것은, 싸우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였다.
‘...이름.’
<응? 뭐라고?>
‘아그리올라의 원래 이름을 알 수는 없는 건가?’
지수는 턱을 쓰다듬으며 밴더스내치에게 물었다.
언령은 힘이 깃든 말이고, 자신을 뜻하는 말인 진명은 그 근본이었다. 상대방의 진명을 알고 있다면 언령의 근본이 장악당해 그 힘을 크게 잃는다. 그래서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계승식에 이름 지우기라는 술법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그리올라 또한 이름이 지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 이름을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름 지우기를 당한 지수의 경우에도, 지수 자신만은 스스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그리올라의 기억을 먹어 치운 밴더스내치 또한 아그리올라의 ‘원래 이름’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밴더스내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 이름 지우기의 약점은 자기 기억을 적에게 읽히면 진명이 드러나버린다는 점이지. 그런 점에 있어서 아그리올라는 철저했어. 용왕이 된 아그리올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 이름을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버린 거야.>
그건 또 상당히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진명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해서 숨겨야 할 만큼 절박한 약점이었나? 아니면 아그리올라의 개인적인 성격 때문인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왜 그랬냐’가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밴더스내치가 콧숨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가 기억하고 있었어도, 그걸 들은 왕님은 그게 아그리올라의 진명이라 인식할 수 없었을걸. 안개가 낀 것처럼 생각나지 않다가 곧바로 잊어버렸겠지. 이름 지우기는 그런 술식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없어.>
문제가 없기는 왜 없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문제 투성이였다. 용언에 대한 대비책을 철저히 세워놓지 않으면 아그리올라를 쓰러뜨릴 수 있는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었다.
용의 언령, 줄여서 용언. 그것은 가장 순수한 마법이자, 용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용언으로 불타라 하면 불타야 하고 죽어라 하면 죽어야 하는 불합리한 능력이다. 물론 지수는 용언을 해석할 수 있기에 저항 또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저항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 뿐이었다. 용언 하나를 파훼하기만 해도 끔찍한 두통이 밀려왔다. 이건 아그리올라의 사념체를 상대할 때 증명된 사실이었다. 하물며 지금 상대할 아그리올라는 사념체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게 없어도 통하지 않을 거야, 지금의 왕님한테는. 왕님은 내 영혼을 보고 구조를 이해했으니까.>
그 말대로 지수는 영혼시로 자신과 밴더스내치의 영혼을 관찰해본 상태였다. 잘만 하면 해석 스킬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낙관은 들어맞아, 용왕의 힘을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지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과 용이 가진 영혼의 차이. 둘 모두가 결합되어있는 자신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왕님은 더 이상 반쪽짜리 용왕이 아니야.>
회상을 끝내고 눈을 떴다.
아주 잠시간의 일이었다. 마력을 끌어올린 아그리올라는 지수를 참살하기 위해 용언을 내뱉었다. 그리고 지수는 그것에 그 어떤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팔다리를 비틀어 끊어버리려는 아그리올라의 외침에, 지수는 조용히 중지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그리올라가 내뱉은 용언은 헛된 말이 되어 증발해 사라졌다. 지수는 놀란 채 망연히 서있는 아그리올라에게 친절하게 해설해주었다.
“용언은 같은 위계의 용에게는 통하지 않아.”
원래대로라면 있을 리 없는 일이었다. 용왕은 용종의 위계의 정점이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이곳에는 두 명의 용왕이 있었다. 같은 위계. 같은 용왕이라면, 용언의 언령은 통하지 않는다. 지수가 웃었다.
“같은 왕끼리, 계급장 떼고 한판 해보자고.”
“네놈이!”
아그리올라가 분노해 포효했다. 검은 마력이 둥지를 부술듯이 흔들렸다. 흥분시킬 수 있었던 건 좋은 징조였다. 지수가 아그리올라의 공략법으로 채택한 것은, 적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걸 빠짐없이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이었다.
정정당당이니 뭐니 엿이나 먹으라 해라. 서로의 전력을 보여주는 싸움 따위에 지수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비장의 수단이든 뭐든 아무 것도 꺼내지 못하게 만든 뒤에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게 지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싸움의 형태였다.
심장은 없다. 용언은 봉인했다. 마법 또한 적막으로 침묵시켰다. 손도 발도 전부 못쓰게 쇠사슬을 걸어놓았다. 결국 아그리올라가 할 수 있는 건 제 거대한 몸뚱이와, 뿜어내는 불길만을 의지해 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상을 해석하는 지수의 눈이 있다면 다음 움직임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필승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그리올라가 들고 있는 패는 전부 틀어막았을 텐데, 왜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인가.
지수가 순간 눈을 번뜩였다. 공격을 감지하고 옆으로 회피했다. 모자장수의 망토가 거칠게 휘말려올라갔다. 지수를 스쳐지나가 둥지의 벽에 거대한 손톱자국을 낸 것은 새까만 칼날이었다. 마력의 칼날들은 계속해서 지수를 몰아쳐왔다.
‘윈드 커터? 어떻게!’
지금도 적막을 발동하고 있는 채였다. 주문은 발동할 수 없을 텐데! 무언가가 이상하다. 지수의 뇌리에서 아찔한 위화감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지수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사실이었다.
‘설마 이게 주문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마력을 쏘아보내는 거라고? 그걸로 이만한 위력이 나온다는 건가?’
어이가 없었다. 주문에는 정해진 위계라는 것이 있고, 1단계 주문과 3단계 주문이 충돌하면 후자가 이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단순히 마력을 쏘아내는 건 위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말하자면 0단계였다. 아그리올라는 그것으로 웬만한 극대 주문에 버금가는 위력을 내뿜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부상당한 상태라고 들어 낙관하고 있었던 점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아그리올라는 지금까지 상대해온 어떤 적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냥 마력을 모아 내려찍는 것만 해도 정유현의 능력에 가까운 압박이 가해졌다.
수십 개의 칼날이 지수를 덮쳐왔다. 지뢰밭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하나의 박자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며, 산재해있는 죽음을 밟지 않도록 모든 지뢰를 피해가야 했다. 잠깐이라도 집중과 긴장을 풀었다간 그대로 끝이었다.
“잡았다, 인간!”
아그리올라가 소리쳤다. 이제 보니 아그리올라는 단순히 무턱대고 공격하고 있던 게 아니라, 어떻게 해도 피하지 못하는 자리까지 지수가 이동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확실히 밴더스내치와 같은 존재답게 상당한 모략가였다.
모든 마력의 칼날을 피한 뒤, 덫을 심어뒀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정면에서 향해오는 칼날. 이건 피할 수 없었다. 부재증명을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지만 그건 정말로 비장의 수단이니 일찍 내보이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수는 피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빙다리 핫바지가 아니었다. 지수는 손에서 파사의 마력을 내뿜어 아그리올라의 검은 칼날을 막아냈다. 새까만 마력은 새하얀 마력에 상쇄되어 사라졌다. 정말 아찔한 농도의 마력이 느껴졌다.
“너무하잖아. 심장이 뽑혀있는데 이 정도라고?”
손을 휙휙 턴 지수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아그리올라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방금 지수가 뿜어낸 파사의 마력을 보고서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은 듯 싶었다. 아그리올라가 조용히 읊조렸다.
“능력을 봉인하는 능력. 마력을 상쇄하는 마력….”
질리지도 않는 듯, 또다시 아그리올라의 주변에서 수백 개의 칼날이 나타났다. 현실에서 슈팅 게임을 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그리올라가 말했다.
“자긴 뭐든지 알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눈동자.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르는 정체불명. 확실히 너는 그 마왕과 닮았군.”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수의 해석 능력은 따지고 보면 마왕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지수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또 검은 칼날들이 지수에게 날아왔다. 날아와 몸통박치기를 하고 발톱을 할퀴어대는 아그리올라는 덤이었다.
‘흐름이 안 좋아.’
틈틈이 룬을 쏘아내며 칼날을 피하는 지수가 생각했다. 아무리 궤도의 예측이 가능하다고 해도, 모든 칼날들을 피할 수는 없다. 이대로 소모전을 계속하면 패배하는 건 이쪽이었다.
싸움에 대한 모든 수식들을 소거한 뒤 남은 본질적인 문제는 간단했다. 집중할 시간을 벌 수가 없다. 지수가 아그리올라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기 위해선 집중해서 용언문자를 빚어낼 필요가 있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아그리올라는 결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수가 결심했다.
“쓸 수밖에 없나.”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용왕 아그리올라는 빈사상태일 때도 육영웅 전부가 덤벼 겨우 쓰러뜨린 상대였다. 그걸 혼자서 토벌하겠다는 건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스크가 큰 수단의 사용을 꺼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수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재버워키. 밴더스내치.”
재버워키가 시계토끼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시곗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속시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지수의 정신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밴더스내치 또한 지수의 영혼에 접촉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용왕의 마력으로 지수의 능력을 폭주시키기 위해서. 지수의 눈동자에서 황금빛 안광이 새어나왔다. 현실을 해체해서 분석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지수의 비장의 수단이었다.
[‘현상해석’ 스킬이 폭주합니다.]
***
정신을 차리면 칼날이 몰아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지수는 곧바로 정신 집중에 들어갔다. 둥지의 허공에 떠있는 룬 문자를 모아 용언 문자를 빚어내기 위해서. 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리자 아그리올라는 곧바로 지수가 뭘 하려는지 눈치챘다. 머리회전이 빠른 상대와 싸우는 건 이래서 싫었다.
사용하는 것은 지수의 필살기, 용언의 마탄.
지수가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은 약 3초 정도였다. 만일 지수를 대신해서 공격을 막아내 줄 전위가 있었다면 충분히 벌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지수 혼자서 싸워야하는 지금 3초라는 시간은 거의 영원에 가까웠다.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여기 나의 왕에게, ‘파열’의 용언을 바친다.>
재버워키가 체셔 고양이의 형태로 바뀌어갔다. 이 공격이라면 아그리올라라도 멀쩡하게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룬이 모여 용언문자가 완성된 순간, 지수의 몸은 아그리올라가 쏘아보낸 칠흑의 칼날에 짓이겨져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지수는 마탄을 쏘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다만, 무모했군.”
날개를 펼친 흑룡이 바닥에 내려앉으며 여인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은발의 여자는 밴더스내치와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아그리올라가 바닥에 쓰러진 지수를 마무리짓기 위해 다가왔다. 이제 용왕은 심장을 되찾고 다시 완전해질 것이다.
지수는 죽었다.
“한 번 더.”
***
정신을 차리면 칼날이 몰아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가만히 집중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용언문자를 빚어내려고 하면 그 사이에 마력의 칼날이 지수를 찢어발겨버린다. 아그리올라가 지수를 덮치려고 내려앉은 순간, 지수는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가 아그리올라의 발톱을 타고 올라갔다.
사용하는 것은 백묵에게 배운 병렬사고.
지수의 그림자에서 보팔의 검들이 튀어나왔다. 룬 문자를 각인해두었다고는 해도, 아그리올라의 비늘을 찢어버리기엔 절삭력이 충분하지 못했다. 바로 저 방어력이 문제였다. 웬만한 주문이나 공격으로는 아예 데미지를 입힐 수 없었다.
하지만 아그리올라라고 해도 눈동자까지 단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구는 모든 생명체의 급소였다. 가까이 붙어서 싸우며 보팔의 검으로 집요하게 눈을 노릴 기회를 엿본다면, 분명 이쪽에도 승기가 있다. 칠흑의 검들이 지수의 의지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수가 끊임없이 칼날들을 피했다.
아그리올라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공격을 피해가면서 상대방을 맞추기 위해 조작해야 했다. 하지만 백묵에게 이야기를 들은 지수는 이미 요령을 잡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세한 것은 지수 쪽이었다.
“너는 얼간이인가?”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그리올라는 눈을 감고 영역의 심안으로 공격을 관측했다. 눈을 찌르려던 보팔의 검은 그녀 눈꺼풀의 비늘에 튕겨나갔다. 지수가 허망함에 빠져 입을 벌렸다. 아그리올라의 새까만 마력이 지수를 덮쳤다.
날개를 펼친 흑룡이 바닥에 내려앉으며 여인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은발의 여자는 밴더스내치와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아그리올라가 바닥에 쓰러진 지수를 마무리짓기 위해 다가왔다. 이제 용왕은 심장을 되찾고 다시 완전해질 것이다.
지수는 죽었다.
“한 번 더.”
정신을 차리면… 칼날이 몰아치는….
지수가 힘겹게 눈을 떴다. 강렬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이곳이 환상인지 현실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리해 능력과 사고를 폭주시킨 탓에 코에서 코피가 주륵 흐르고 있었다.
지수는 해주의 비술을 사용했고, 영혼시를 사용했으며, 병렬사고도 용언 문자도 룬마술도 적막도. 지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했다. 엿본 미래, 수십 번의 넘는 시도에서 지수가 떠올릴 수 있는 전략이란 전략은 전부 다 시험해보았다.
그리고 전부 실패했다. 모든 가능성이 지수의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있었다. 확실한 승리법을 얻기 위해 감행한 모험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한계를 넘어서까지 해석 스킬을 계속 폭주시킨 탓에 마력과 기력의 소모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승부는 났다. 추하게 발악하는구나.”
그 말대로. 이제 지수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최대한 시간을 끌며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 생각에 지수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기적이라니. 누군가가 도와주러 오는 것이라도 기대하는 것인가? 누구도 도와주러 오지 못 하게 아그리올라의 결계를 도로 닫아놓은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것에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와봤자 개죽음을 당할 뿐이라면 지수 혼자서 패배하는 게 나았다.
밴더스내치는 침묵하고 있었다. 지금쯤 내 말대로 육영웅을 다 죽여버리고 빠져나가면 좋았잖아, 하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까. 슬슬 용왕의 둥지를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수의 둥지가 천천히 해체되고, 주변 풍경은 원래 있었던 아그리올라의 은신처로 돌아갔다.
만약 자신이 육영웅들의 뒤통수를 친 뒤 허다인과 백묵, 다른 영웅들을 전부 몰살시켜버렸다면. 지금쯤 봉인 밖으로 빠져나가서 현명한 선택이었다 생각하고 있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했다. 어차피 이제 와선 의미없는 이야기였다.
<왕님이 그런 짓을 할 만큼 요령이 좋았으면, 애초에 이런 상황에 빠지지도 않았겠지. 이 미련퉁이 임금님.>
지수의 생각을 읽은 밴더스내치가 중얼거렸다. 의외로 그녀의 목소리에 경멸은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떠한 종류의 경의가 느껴졌다. 지수는 그것이 조금 기뻤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도 패배했다. 후회는 없었지만 미련은 있었다. 만일 앞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녀석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용왕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각오한 지수가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수는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하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먼저 보인 것은, 연분홍색 머리카락의 끝자락이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 있는 어깨.
“…정말 악질이야.”
지수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분명히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건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존재한다고 해도 지수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야 할 터였다.
그리고 돌아본 서민하가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옆에 있으라고 해놓고, 마음대로 떠나버리는 게 어딨어.”
“야. 뒤에…!”
지수가 놀라서 소리쳤다. 아그리올라가 쏘아보낸 마력의 칼날이 서민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말 돌리지 마.”
서민하가 신경질을 담아 뒤로 팔을 휘둘렀다. 날아오던 마력의 칼날은 서민하가 후려친 손톱에 무력하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