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4) >
문을 열고 은신처에 돌아온 것은 지수와 허다인이었다.
“왔나.”
팔짱을 낀 백묵이 콧숨을 쉬었다. 새로운 동료를 떠들썩하게 환영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우진은 자신의 검에 의심을 느끼게 됐는지 단련하겠다며 나가있었고, 성녀는 누가 들어왔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깊게 기도에 잠긴 상태였다.
“그래서 어떻지? 같은 마법사로서 감상은.”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못하겠네.”
허다인이 완전히 질렸다는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지수와 허다인이 하고 온 것은 서로의 기술을 파악하기 위한 가벼운 대련이었다. 그리고 허다인이 느낀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상대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것도 훨씬 강한.
“손쓸 도리도 없이 당해버렸어. 도깨비들의 약점도 순식간에 간파당하고. 영역도 나보다 잘 다루는 데다 오행까지 꿰고 있던걸. 나만의 특기인 줄 알았는데. 초라해지는 느낌이야.”
지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이라도 들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들 전부 당신이 직접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내 뒤쪽에서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 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건 갑주를 벗고 있는 흑기사 우진이었다.
“즉, 전력은 충분하다는 겁니까.”
당연히 우진에게 지수의 실력에 대한 불만 따위는 없었다. 그는 지수와 싸운 뒤부터 죽 혼자서 명상과 단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자신의 검격을 전부 피해내던 지수의 모습.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아무래도 그에게 공격을 적중시키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진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표정으로 지수를 돌아봤다.
“다인 씨 수준의 마법사가 한 명 더 생겼으니, 어쩌면 용왕의 결계를 직접 뚫고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흥.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겠지.”
우진의 말에 백묵이 바랄 걸 바라라는 얼굴로 입술을 이죽였다. 우진 또한 동의한다는 듯 눈꺼풀을 닫았다.
용왕이 큰 상처를 입어 약화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회복하려고 틀어박힌 용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모인 것이 지금 상황이었다. 하지만 용족은 모든 마법의 종주나 마찬가지인 생물. 하물며 용족의 왕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쳐놓은 결계를 일시에 해체해 퇴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모인 이들은 주변에 숨겨져있을 결계의 ‘말뚝’을 모두 찾아내, 하나하나 부숴가며 정공법으로 결계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가 우글대는 이 부근에 거점을 만들어 계속해서 정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리고 지수가 가볍게 툭 던지듯이 말했다.
“어쩌면이고 뭐고, 용왕의 결계는 지울 수 있어요.”
“뭐라고?”
백묵이 눈을 번뜩였다. 자신이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단언. 그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용왕의 결계를 깨뜨릴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용왕과의 결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진은 냉정을 잃지 않고 지수에게 물어보았다.
“가능하단 근거는 있습니까.”
“근거고 뭐고, 직접 해체해봤으니까요.”
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그리올라가 공들여서 만든 수많은 결계들 중에서도, 가장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둥지의 일곱 결계들. 지수는 그 결계들을 하나하나 전부 박살내본 경험이 있었다. 우진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턱을 매만졌다.
“지금 당장 급습이 가능하다면, 곧바로 돌입하는 게 좋겠군요. 민오가 돌아오는 걸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지수는 눈동자를 굴렸다. 민오. 그 또한 육영웅 중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분명, 다른 누구보다도 야성적인 감으로 상황의 돌파구를 찾아냈다던. 일행과 떨어져 단독행동을 하고 있었던 건가. 팔짱을 낀 백묵이 지수의 반응을 포착했다.
“어디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다는 얼굴이군. 설마 그 녀석과도 구면인가? 우리들 중에서도 특히나 별난 놈인데.”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어요.
“호오? 어떤?”
“온몸에 야수의 형상을 두른 채 싸우는 광전사라고.”
"풉!"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건 허다인이었다. 백묵 또한 어이가 없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우진은 아무 말 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은 채 명상했다. 지수가 왜 그러냐는 시선을 보내자, 작게 한숨을 쉰 백묵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나중에 네 눈으로 확인해보면 되겠지. 너는 너대로 준비할 게 있으면 해둬라. 얼마 안 있어 움직이게 될 테니.”
***
지수가 바깥으로 나와 나무 사이를 걷고 있자, 등 뒤에서 형상이 나타났다.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밴더스내치였다.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사람을 놀리는 듯한 기분 나쁜 미소는 싹 사라지고, 정말 진지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었다. 밴더스내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님. 이거 상황이 안 좋아.>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냐.”
<한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었는데, 방금 확인이 끝났어.>
“무슨 가설이지?”
지수가 고개를 돌리자 밴더스내치가 차분히 설명했다.
<이곳엔 아무래도 용사 김유성이 없어. 아예 언급되지 않는 걸 보니 혼자 어디를 간 게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거야. 봉인의 핵이 되어있으니 기둥에 존재할 리가 없지! 이러면 일이 엄청나게 꼬이게 돼. 멍청하게! 육영웅이 용왕의 결계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눈치채야 했는데.>
“결계랑 김유성은 또 무슨 상관이야.”
지수의 질문에 밴더스내치는 모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용사 김유성은 뭐든지 벨 수 있는 게 능력이니까. 결계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지. 재생하는 적한테는 별 의미가 없긴 하지만 완전히 말도 안 되는 능력이야. 하지만 이곳에 김유성은 없고, 아그리올라는 이미 충분한 시간을 벌었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지 알겠냐고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대전쟁 때 아그리올라가 토벌당한 건, 마왕한테 당한 직후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육영웅이 쳐들어왔기에 문제가 됐던 거였어. 하지만 지금이라면 심장은 몰라도 용언 정도는 회복했겠지. 아그리올라의 전력은 반감했지만, 단순히 반감한 정도로는 육영웅이 다같이 덤벼봐야 전멸할 뿐이야.>
침묵에는 무언의 권유가 섞여있었다. 즉 밴더스내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서, 이곳에 있는 영웅들을 전부 죽이자. 한 명은 단독행동 중인 데다가 김유성까지 없으니 해치우는 건 손쉬울 것이다.
밴더스내치의 손이 지수의 뺨을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렸다.
<솔직히 말해봐, 왕님. 불가살이와 흑기사한테 공격당할 때, 전성기의 육영웅도 그렇게까지 대단할 건 없다고 생각했지? 이 정도라면 어이없게 픽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밴더스내치의 보라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지수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했다. 대전쟁을 끝낸 영웅. 압도적이어야 할 최강의 각성자들. 그런 이들을 보면서도 별 거 아니라는 감상이 들었다.
<나와 달리 아그리올라의 용언은 완전해. 숨을 내쉬듯이 죽음을 내뱉을 수 있지. 왕님이라면 용언에 저항할 수 있겠지만. 다른 인간들은 속수무책일걸. 설마 짐덩이들을 감싸주면서 아그리올라랑 싸울 거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지?>
확실히 밴더스내치의 말대로였다. 전성기의 용왕 아그리올라는 절망적인 상대다. 심지어 심장이 뽑힌 상태라고 해도 그러했다. 그런 존재를 상대하는 데에 다른 사람들을 지키며 싸울 만한 여유는 없었다. 지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그 육영웅들을 짐덩이 취급을 해버리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어느 쪽이든 저것들은 죽어. 아그리올라에게 죽든 왕님의 손에 죽든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지. 그렇다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쪽을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야. 그렇잖아?>
그 말에 대한 반박은 그림자 안에서 튀어나왔다.
<적당히 좀 해주면 좋겠군.>
지수의 어깨를 타고 올라온 건 체셔 고양이의 형태를 하고 있는 재버워키였다. 목소리는 귀여운 외견에 어울리지 않게 중후했다. 털을 세운 재버워키는 마치 적대하는 것처럼 밴더스내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재버워키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적이 강해? 다같이 덤벼봐야 전멸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상처입은 용왕 따위 주인 혼자서도 쓰러뜨릴 수 있다. 미숙했던 주인을 눈에 담아본 적이 없는 너는 모르겠지. 패색이 짙은 적을 눈앞에 뒀을 때, 불가능한 무리를 관철하겠다 고집을 부릴 때 주인이 얼마 만큼이나 빛나는지!>
재버워키의 말에 밴더스내치가 눈썹을 찌푸렸다. 지수의 행적에 대해서라면 그녀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 그 정도는.>
<아니. 너는 단순히 주인의 기억을 엿봤을 뿐이지. 그 자리에서 함께 싸웠다는 긍지 따위 가지고 있을 리 없지!>
활자로 화한 고양이가 소용돌이치며 망토를 휘날리는 모자장수가 되었다. 그 일갈에 밴더스내치 뿐만이 아니라 지수 또한 놀랐다. 재버워키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다니.’
지금까지는 가만히 다물고 있었지만, 사실 재버워키는 밴더스내치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불만이 쌓여있었던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때도 재버워키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서투른 부분을 인정한 지수의 모습에 이끌려 계약한 것이었으니, 끊임없이 타협안만을 내놓는 밴더스내치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비열한 속삭임으로 주인의 귀를 더럽히지 마라.>
<뭐야 그게!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해서…!>
“그만. 싸우지 마.”
지수가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조금만 더 있으면 진짜 둘이서 멱살이라도 잡고 다툴 듯한 분위기였다.
“조언 고맙다, 밴더스내치. 날 생각해준 거란 거 알아. 그래도 나는 원체 미련해서. 이제 와서 고집을 버리지 못해.”
확실히 재버워키가 한 말 그대로였다. 이런 건 위기라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해야 했다.
아그리올라가 난적이라는 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애초에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누군가의 뒤통수를 칠 필요도 없이, 그저 눈앞의 강적을 쓰러뜨리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걸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수가 등을 돌리자, 밴더스내치가 아연해져서 물었다.
<...어디 가려는 셈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걸 전부 하러.”
지수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났다. 결심을 굳히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육영웅과 함께 싸울 수 없다면, 자신이 육영웅이 할 수 있는 걸 전부 할 수 있게 되면 그만이었다.
***
육영웅의 은신처. 조용히 백묵에게 다가간 지수가 물었다.
“백묵 당신은 공중에 뜬 철검들을 자유자재로 제어했죠? 사실 저도 비슷한 기술을 쓸 수 있어요.”
“그래. 그 새까만 검들 말이군.”
지수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룬이 새겨져있는 칠흑의 대검들. 그것은 싸웠을 때 이미 직접 경험해보았다. 강철을 정제해 다루는 백묵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능력이겠지만, 공중에 뜬 질량체를 자신의 의지로 제어한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제가 고민하는 건 이거예요. 집중해서 의식하면 제 뜻대로 보팔의 검들을 조종할 수 있지만, 한창 싸우는 와중에 동시에 제어하는 건 힘들어서요. 대체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 거죠? 이제 동료니까 의견을 공유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아주 욕심에 가득차있는 눈이군. 이쪽 노하우를 다 빼먹으려고. 하지만 괜찮겠지. 네가 강해지면 이쪽 부담도 줄어들 테니까. 이 테크닉은 예전에 만난 수도승에게 배운 거다. 병렬사고라고 해서, 알기 쉽게 말하자면….”
다음 차례는 성녀였다. 지수가 다가가며 깍듯이 말했다.
“성녀님.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과장된 이름입니다. 그냥 가희라고 불러주세요.”
지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 앞에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대화해보니 성녀 또한 허다인처럼 대화하기 편한 성격의 인간이었다. 지수가 어떻게 용왕의 영혼의 파편을 몸에 품게 되어버렸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도 있어보였다.
“영혼시란 건 다른 사람한테 가르칠 수 있는 겁니까? 제 상태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어서요.”
“저처럼 영혼의 파장으로 거짓말을 구별하거나 하는 수준은 무리라도, 영혼시 자체는 재능이 있다면 익힐 수 있을 거예요. 사정이 사정이니 저도 꼭 알려드리고 싶기는 하지만, 이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는 조건이 하나 있어서….”
성녀가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지수가 물었다.
“설마 특이한 체질 같은 게 필요한 겁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교회에서 이 기술을 바깥에 유출하는 걸 엄격하게 금하고 있거든요. ‘성흔’이 있어야 하는데.”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성녀는 아무래도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지수가 공격받게 된 것에 대해 상당한 죄책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으니, 영혼시를 가르쳐주는 것으로 깔끔하게 끝내자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면 불가능했다.
“일단 어디 한 번…어?”
그리고 지수의 상태를 살펴본 성녀는 깜짝 놀랐다. 설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해진 방법으로 성녀의 마력을 흘려넣자 지수의 손등에서 빛나는 성흔이 나타났다. 아무런 힘도 없는 단순한 표식이었지만 그것은 명백한 성흔이었다.
“교회 관계자이신가요? 성흔은 교회에 공헌한 각성자나, 은인으로 지정된 사람한테만 발현되는 건데… 어떻게?”
놀란 것은 성녀뿐만 아니라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을 받은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지수는 교회에 공헌을 세우긴커녕 가본 적도 없었다. 일요일 날 예배하러 교회를 갈 바에야 집에서 영화 한 편, 책 한 권을 더 보겠다는 주의였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은 지수는 번뜩 눈을 떴다.
‘아! 설마 그 때…?’
인형사가 숨어있던 호텔에 서민하를 구하러 들어갔을 때. 실의 결계로 둘러쳐진 지하 주차장, 피투성이로 쓰러져있던 교회의 각성자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미 기억에서 지워 떠올리지도 못하던 일이었다. 짐작이 가는 건 그때 뿐이었다.
“그냥 누구 한 명을 구해줬던 적은 있는데….”
“목숨의 은인입니까? 그렇다면 이해가 가네요. 그 사람은 한 번 밖에 쓸 수 없는 은인 지정권을 지수 님께 사용한 거예요. 숭고한 일입니다. 성흔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죠.”
그리고 지수는 성녀에게 영혼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원리만 안다면 간단한 일이었다. 스스로 연습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혼자 숲속에서 단련을 거듭하고 있던 우진을 찾아갔다. 이쪽은 굳이 지수가 굽히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우진 또한 지수에게 원하는 게 있었으니까. 지수의 요청을 들은 우진이 수건으로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닦았다.
“적막을 발동하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해달라고요?”
상당히 불쾌한 기색이었다. 자신의 성명절기나 마찬가지인 기술을 분석하게 보여달라 부탁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미 실전에서 그 기술을 실컷 파훼해댄 인간이.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서 거절하는 게 당연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무효화시키던 걸로는 분이 안 풀린 겁니까. 그런 짓을 해서 제 쪽에 메리트가 뭐가 있습니까.”
“절 맞히고 싶죠.”
지수의 도발에 우진의 얼굴이 움찔 굳었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그렇게 분하다는 얼굴로 숲속에 틀어박혀 검을 휘두르고 있으면, 아무리 지수라도 알아버리는 것이다. 지금 우진은 머릿속으로 지수의 움직임을 수백 수천 번 복기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피하지 못하게 맞출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지수가 한 번 와보라는 듯 도발하며 손짓했다.
“해드릴게요. 연습상대. 대신에 그쪽도 제 앞에서 적막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기한은 저한테 한 대라도 맞출 때까지.”
“그 말. 철회할 거면 지금 하십시오.”
이내 장검을 꺼내드는 소리가 스르릉 울렸다. 쉬식, 소리가 나자 우진은 흑기사의 갑주를 걸치고 있는 채였다.
“저는 한다면 진심으로 합니다.”
그의 눈빛에 귀기가 깃들었다. 지수는 씨익 웃었다.
***
지수는 스스로 상당히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해석 스킬의 폭주로 보아버렸던 최악의 미래. 협회장을 집어삼킨 아그리올라가 부활해버렸을 때, 지수는 모든 전의를 잃은 채 그저 절망만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싸움이 성립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지수는 이쪽에서 그 상대에게 싸움을 걸려고 와 있었다. 흑룡이 말했다.
“...정말로, 이상한 인간이군.”
거대한 흑룡이 입을 연 것만으로 무진장의 마력이 흘러나왔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했다. 서민하를 잠식하고 있던 아그리올라의 사념뿐만 아니라, 지수와 융합하고 있는 밴더스내치 또한 똑같은 목소리를 하고 있었으니까.
“경보가 울리나싶더니 다가온 것은 단 한 명.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내 결계를 해제하나 싶더니, 들어온 다음엔 결계를 일부러 다시 고쳐놓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결계를 부순 직후, 당황한 아그리올라가 상대를 맞이할 준비를 마치기 전에 싸움을 시작할 귀중한 시간. 지수는 그 시간을 가만히 서서 기껏 부순 결계를 다시 수복시키는 데에 허비한 뒤였다. 그 질문에 지수가 담담히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말려드는 건 사양이라서.”
“하! 내 결계를 해제해낸 걸 보면 마냥 얼간이는 아닐 텐데? 네가 도전하려는 것은 용왕이다. 가능한 만큼 다른 이들을 불러모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로 이해가 안 되는군.”
피식 코웃음을 친 지수는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도 어려울 것 없어. 너를 죽이는 건 육영웅이 아니라, 등장인물 목록에도 나오지 않는 외부인인 나다. 그걸로 이야기의 전제는 무너지겠지.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죽어라.”
“크크……영문 모를 소리만을 하는군. 정체불명인 점은 그 마왕 자식과 똑같아! 하지만 너무나 오만하다. 아무리 심장을 잃었다고 한 들, 인간 주제에 이 용왕과 맞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그저 자기 분수를 깨닫고서 죽어가거라.”
아그리올라의 머리 위에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지수가 검지를 들어올려 그쪽을 가리켰다. 아그리올라는 무언가 주문을 시전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형태를 이루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해주의 비술로 상쇄한 것이 아니었다.
“적막."
지수가 웃었다. 급하게 따라한 것이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해석 스킬은 정말로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그래. 방금, 너와 맞설 자격이라고 했나?”
그리고 아그리올라가 눈을 번뜩였다. 자신의 주문이 불발되어서가 아니었다. 혼자 자신의 은신처에 쳐들어온 배짱 좋은 인간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머리 양쪽에 솟아난 두 뿔의 형태는 마치.
“자격이라면 있겠지."
<마지막 한 번.>
밴더스내치의 속삭임과 함께, 지수 안의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패를 아낄 필요는 없었다. 가진 전력을 쏟아붓는다. 지수가 가지고 있는 마력의 양이 증폭됐다. 심장을 중심으로 모든 걸 빨아들이는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이내 아그리올라가 눈을 뜨자, 그곳은 용왕의 둥지였다.
“일어서라, 아그리올라. 여기 용왕이 왔다.”
그리고 단 혼자만의 대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