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4) >
지수의 목에 장검을 들이대고 있는 우진이 말했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즉시 베겠습니다.”
우진은 말 그대로 기계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위험한 낌새를 느꼈다간, 심문해서 정보를 알아내고 말고 할 것 없이 그대로 목을 베어버린다. 그렇게 마음먹은 눈이었다. 반면 백묵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구속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이상했다. 일단은 성녀의 판단에 따라 곧바로 구속하긴 했지만, 백묵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정말로 지수가 용왕 아그리올라라면 은신처까지 순순히 따라왔을 리가 없다. 따라온다 해도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먼저 기습에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양손을 위로 올린 채인 지수가 입을 열었다.
“일단 차분하게 이야기를….”
그러자 말을 끊은 우진이 날카롭게 선 살기를 내뿜었다.
“…경고하죠. 이쪽이 대답하라고 하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다음에 허락 없이 입을 열었다간 벱니다.”
“미치겠네 진짜.”
지수가 불평하며 입가를 일그러뜨리는 것과 동시.
우진이 경고를 무시한 자를 향해 일섬을 날렸다. 무고한 자를 죽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망설임 따위는 일절 없었다. 그것이 전사의 노련함이자 현명함이라는 것이라면, 지수는 평생 풋내기에 멍청이로 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재버워키의 목소리가 울러퍼졌다.
<부재증명.>
휘둘러진 우진의 장검은 지수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이내 지수는 유령이라도 된 듯 모든 물체를 스쳐지나가 백묵의 구속 또한 단숨에 빠져나왔다. 우진은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자신의 장검을 바라보았다. 백묵 또한 얼굴을 굳혔다.
“허주화.”
지수는 조용히 오른쪽 손바닥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끓어오른 그림자에서 나타난 재버워키가 지수를 감싸 모자장수의 망토로 화했다. 밴더스내치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행운인걸, 네 명밖에 없잖아? 거기다 저쪽이 먼저 공격까지 해주고. 이 정도면 다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물고 있어라. 좀.”
지수가 머리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급격한 상황변화에 따라가지 못해 두통이 지끈대고 있었다. 검은 장발을 늘어뜨린 우진이 장검을 쥔 손에 꽉 힘을 넣었다.
“대체 무슨 술수를 쓴 겁니까.”
“…생각한 것보다도 괴물인가?”
백묵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히 완전히 제압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지수는 너무나 간단하게 빠져나왔다. 양손을 든 채 항복하고 있었던 것은 어린애 장난에 어울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듯이. 지수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현상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지수가 파악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무의식적으로 해석되었다. 다음 공격을 예측한다. 총알처럼 튀어나간 우진은 지수를 향해 장검을 휘둘렀지만, 신속이라 할 속도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계속해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참격을 피해냈다.
마치 잠깐 앞의 미래를 읽어내는 듯한 묘기. 그것을 본 백묵이 기시감을 느끼고 뒤에 서있는 허다인을 돌아보았다.
“이봐, 저건 너의….”
“아니야. 내 내림보다 몇 단계 위 수준으로 완성돼있어…!”
허다인이 경탄하며 표정으로 지수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무당 허다인의 절기인 ‘내림’. 그것은 주변에 마력의 영역을 펼친 채 상대방 동작의 전조를 읽어내고서 반 박자 빨리 대응하는 것이지만, 지수의 경우엔 해석 스킬의 도움을 통해 그 예측을 훨씬 더 복합적인 영역에서 해내고 있었다.
“묵! 같이 몰아붙여주세요!”
“…칫, 상황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닌가?”
우진이 소리치자 백묵 또한 공격에 가세했다. 둘 다 전성기의 육영웅, 최강 수준의 각성자가 내뻗는 공격이었다. 지수는 공격들을 피해가며 현재 상황을 살폈다. 우진이 근거리에서 휘두르는 장검과, 백묵이 중거리에서 쏘아내는 철검. 절묘한 연계와 밸런스였지만 한 가지 구멍이 뚫려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원거리에서 정령마법을 쏟아부어야 할 허다인이 전혀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정말 공격해도 되는 것인지 망설여지는 듯 했다. 성녀의 경우엔 공격 능력 자체가 없어보였다. 이건 상당히 괜찮았다.
‘사실상 두 명 상대…. 이 정도면 감당할 수 있어.’
공중을 떠다니는 만년필이 룬을 필기해 지수의 신체를 강화했다. 순간 지수의 움직임이 가속해 공격들을 피해냈다. 백묵이 조종하고 있는 강철의 검이, 지수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보팔의 검에 가로막혔다. 그러자 우진이 소리쳤다.
“흑기사 앞에서 마법이라니. 같잖은 짓을!”
우진의 갑주에서 흉흉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지수 또한 몇 번이나 겪어본 적 있는 능력이었다. 적막. 주변에서 발동되는 모든 주문을 불발시키는 왜곡 역장. 룬을 틀어막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수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거 참, 같잖은 게 어느 쪽인지….”
이미 눈을 감고도 파훼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지수는 마력의 왜곡을 포착한 뒤 정확한 형태로 파사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적막이 무효화됐다. 주문들의 작용 또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우진은 다른 형태로 적막을 바꾸려 들었다.
‘역시 꼭두각시랑은 다르다는 건가?’
지수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 육영웅이라는 이름값은 했다. 겨우겨우 적막의 구조를 해석해서 무효화했더니 곧바로 패턴을 바꿔버린다면, 그야 누구나 마음이 꺾여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해석에 시간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지수가 또 즉시 적막을 깨뜨렸다. 이미 이 물고 물리는 전개에서 누가 우세한지는 명백했다. 이쪽은 파사의 마력을 살짝 퍼뜨리면 될 뿐이지만, 저쪽은 적막을 한 번 발동시킬 때마다 상당한 수준의 소모가 있을 것이다. 우진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더 이상 적막을 사용하지 않고 장검만을 휘둘렀다.
하지만 다른 방법 없이 우직한 공격만을 할 뿐이라면 지수에게 대단한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현상해석을 발동한 상태라면 단 한 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초조해하는 우진이 허다인을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왜 협공하지 않는 겁니까! 이러다 몰살당한다고요!”
우진의 얼굴에는 엄청난 위기감이 서려있었다. 백묵의 철검을 받아내면서도 자신의 검을 전부 다 피해냈다. 눈앞에 서있는 정체불명의 존재는 육영웅 개개인보다 명백하게 강했다. 하지만 공격을 그만둔 것은 허다인 뿐만이 아니었다.
“…흥. 모욕적이군. 아직도 모르겠나?”
백묵이 더 이상 싸워봤자 의미가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성녀 또한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꾹 입다물고 있었다. 혼자서만 이해하지 못한 우진이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런 우진에게 허다인이 조용히 설명했다.
“백묵이랑 네가 진심으로 공격하는 와중에도…”
그리고 고개를 돌린 허다인이 지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허다인은 자신 생각이 맞았다는 듯 살짝 미소지었다.
“지수는, 이쪽을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어.”
“그런…!”
방금까지의 싸움을 되짚어본 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대로 지수는 철저하게 피하고 막기만 했을 뿐, 견제를 위한 공격 하나 행하지 않았다.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전하기 위함이었다면 정말 과도할 수준의 제스쳐였다.
그리고 지수를 바라보고 있던 성녀가 우진을 제지했다.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고 있던 우진은 성녀를 시선을 받더니 조용히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성녀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했나요?”
“처음부터 이러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안도의 한숨을 쉰 지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야 좀 사람답게 말로 풀어갈 수 있을 듯 했다. 요즘 사람들이 참 먼저 대화부터 하고 시작한다는 상식을 잃어버려서 문제였다. 그리고 지수 안에서 신기하다는 듯 밴더스내치가 감탄했다.
<대단해. 영혼을 간파하는 성녀가 존재하는 시점에서, 육영웅과 왕님이 적대하지 않을 경우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왕님의 눈에는 여기까지의 국면이 보였다는 거야?>
‘당연하지. 이제야 알았냐.’
지수가 입가를 이죽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쳐두는 게 이 얄미운 유령이 분통해하는 표정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성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백묵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모든 거짓말을 간파했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설명하면 될 뿐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것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었다.
“저는….”
지수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용왕과 거래한 대가로 이름이 잊혀져버린 존재입니다. 용왕의 혼의 조각이 제 영혼에 박혀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지금은 시한부 인생이 돼버렸죠. 사실은 저쪽의 백묵 씨와 허다인 씨와도 함께 싸워본 적이 있어요. 기억엔 없겠지만.”
성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수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거짓말과 사실을 구별하는 능력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한다. 밴더스내치는 이제 보니 지수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듯 성격 나쁜 웃음을 흘렸다. 지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가 살기 위해선, 아그리올라를 죽여야 합니다.”
그 말에 모든 육영웅들이 움찔했다. 그들이 이곳에 모여있는 이유는 바로, 용왕 아그리올라를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지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성녀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악수 요청. 누가 봐도 명백한, 동료로 넣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일인분 정도는 충분히 할걸요.”
***
라이브 하우스의 주변,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뒷골목의 공터. 하늘에서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흡혈귀가 내려앉았다.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고개를 들자 찾던 사람이 있었다. 바닥에 선 서민하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늑대 아저씨.”
벤치에 손깍지를 낀 채 앉아있는 건, 미리 나와있어달란 부탁을 들었던 정유현이었다. 요즈음은 원래 워커홀릭이었던 정유현의 삶에서도 최고조에 달할 정도로 일이 바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서민하에게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연락을 들으면 억지로라도 시간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정유현은 서민하에게 대해 커다란 부채감을 안고 있었다. 그녀처럼 전 협회장이 자행한 실험의 피해자들이 생겨나버린 건 자신이 집행부로서 직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유현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볍게 콧숨을 쉰 정유현이 벤치에서 일어나 물었다.
“그래, 중요한 일이라는 건?”
날개를 거둔 서민하의 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내 저지의 주머니에 양손을 꽃아넣은 채 서민하가 말했다.
“미역 씨를 데리러 갈 거야.”
“미역 씨?”
짐작가는 바가 없다는 듯, 정유현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 반응에 서민하가 약간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주변의 공원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곳 또한 지수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였다. 다시 정유현을 바라본 서민하가 말했다.
“모르나? 하긴 다들 잊어버렸으니까….”
다들 잊어버렸다고? 그 말에 순식간에 퍼즐들이 이어졌다. 눈을 번쩍 뜬 정유현이 서민하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박사를 말하는 거냐! 설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상황은! 돌아오는 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지!”
정유현이 서민하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답지 않게 흥분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정유현을 비롯해 각기 다른 세력의 장들이 하고 있는 활동들 자체가 지수가 돌아올 때를 위한 기반 갖추기였다. 그리고 서민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유현 때문이 아니라, 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웅웅대고 있었다.
“몰라. 그래도 어렴풋한 느낌은 있어.”
그 말에 정유현은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 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지수의 귀환은 우선순위의 맨 위에 위치해야 할 사안이지만, 탐색의 방법이 단순한 직감이라면 지금 하는 일을 내팽개치고 서민하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서민하가 이상하다는 듯 정유현에게 말했다.
“그러는 늑대 아저씨야말로. 원래 미역 씨를 박사라고 불렀었지? 설마 미역 씨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거야?”
“모른다. 그래도 어렴풋한 느낌은 있지.”
대답한 정유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신중하게 인선을 검토하고 있었다. 서민하 혼자서 보내는 것은 논외였다. 뱀파이어 엠프레스가 얼마나 강하든지 말든지, 정유현의 인식에서 서민하는 어디까지나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자신이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정유현이 빠지는 순간 차질이 일어날 작업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백묵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도형은 애초에 차기 협회장으로 내세운 상태였고, 김혜성 또한 학원의 건설에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력이 필요하다면 마녀들은 어떨까. 정유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관계지만, 개인적으로 마녀들은 신용할 수 없었다. 애초에 마녀들과는 정기적인 약속을 제외한 연락책도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그 외에 힘이 될 만한 인간은…. 그래. 마침 한 명 있군.”
딱 맞는 인재를 떠올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정유현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요즈음 인생 재미없어 죽겠다는 듯이 푹 퍼져 있던 놈이니 마침 잘 된 일이기도 했다. 통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되었다. 아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상황이래. 댁 쪽에서 전화를 걸다니…?>
“일할 시간이다, 뻥튀기장수.”
정유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오성화의 별명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