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97화 (97/176)

97화.  <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2) >

마왕과 지수 주변을 감싸던 검은 장막이 사라졌다.

장막이 걷혔을 때 나타난 것은 마왕 한 명 뿐이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있던 구슬이 공중으로 떠올라 그대로 사라졌다. 지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른 이들이 경악한 채 굳어있자 마왕은 같잖다는 콧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 죽였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그리고 어깨를 으쓱인 마왕이 가볍게 손가락을 쓸어내리자, 공간이 잘려나가며 가느다란 균열을 만들어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너희들도 살려보내줄 테니 해산하도록. 목숨이 아까우면 헛짓거리 하지 말고.”

다른 모든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검은 장막 안에서 지수와 마왕은 모종의 협상을 했고, 그 결과 지수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거래 의 내용에 따라 백묵과 마녀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들이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은 그 정도 뿐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마왕에게 물은 것은 흑마녀였다.

“...당신은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죠?”

“주말을 즐길 계획을 묻는 건가? 수면양말 신고 이불 속에 들어간 다음 하루종일 텔레비전을 볼 거다. 불만 있나?”

대답해줬으니 용무는 끝났냐는 듯, 마왕이 조금 삐뚤어져있던 가면을 고쳐썼다. 아무도 말이 없자 마왕은 등을 돌려 균열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흑마녀는 그걸 막고자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적어도 지수의 행방은 알아내야 했다.

그런 흑마녀의 손목을 꽉 잡고 제지한 건 정유현이었다.

“뭐예요, 당신! 지금 척척박사 님이!”

“가만히 있어…!”

소리치던 흑마녀가 입을 다물었다. 손을 뿌리치지 못한 것은, 이를 악문 채 마왕을 노려보고 있는 정유현이 너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필사적으로 자신을 제지하고 있었다. 그가 내장을 짜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공법으로 저걸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요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똑같이 했을 거다! 여기선 가만히 있어…!”

꽉 쥐고 있는 손에선 땀이 배어나왔다. 마왕의 가면이 조금 삐둘어진 것. 그게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서 해낸 일의 전부였다. 잔상처는 커녕 옷에 흙먼지 한 톨 묻게 하지 못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마왕이 유유히 어딘가로 사라졌다.

“……고마워요.”

몇 초 뒤 흑마녀가 자신을 말려준 정유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만큼은 이성이 돌아와있었다.

흑마녀는 좌절감에 털썩 무릎을 꿇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지수는 죽지 않았다. 그것 만큼은 저 마왕이 자신의 입으로 확언해주었다. 그러면 이쪽은 지수가 돌아왔을 때를 위해, 미리 해놓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마쳐놓을 뿐이었다.

한창 소란이 일었던 공동은 적막에 휩싸였다.

***

지수는 멍하니 눈을 끔뻑끔뻑 뜨고 있었다.

“상처는 없어보여! 다행이다.”

지수에게 달려온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뿔 달린 하회탈.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짐작이 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허다인이었다. 그 뒤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은 백묵이었고.

문제는 둘 다 엄청나게 젊다는 점이었다.

언제나 탈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허다인은 제쳐두고서라도, 그 백묵이 지금은 지수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혼란해하던 지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이런 괴상망측한 꿈을 왜 꾸겠는가.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어.’

재버워키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집행부에서 일하고 있던 과거의 오성화를 본 적이 있다. 지금도 그와 비슷한 상황일지 몰랐다. 가장 먼저 해야하는 건 상황 파악이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백묵과 한바탕 싸운 뒤 어떻게 잘 풀리려는 순간, 전장 한복판에 마왕이 나타나고…그 양반이 가슴에 구슬을 꽃아 넣었다. 그리고 빛에 감싸여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그것이 지수가 파악하고 있는 정황의 전부였다.

‘그럼 여기가 설마 그 구슬 안이라는 건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지수의 얼굴 앞에서, 허다인이 자그마한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었다. 제정신이 맞는지 확인하고 있는 듯 했다. 퍼뜩 정신차린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잘 됐다는 듯 미소지었다.

“괜찮은 모양이네! 쓰러져있어서 어디 다친 줄 알았어. 나는 허다인. 팀으로 활동하고 있는 요괴잡이야.”

“요괴잡이?”

“가디언을 말하는 거다. 저 녀석 혼자 밀고 있지.”

백묵이 부연했다. 그 말에 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디언. 현대처럼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아니라, 몬스터가 인류에 대한 위협이던 시절 몬스터를 구제하는 이들을 칭하던 말이었다. 가설이 사실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쪽은!”

"......."

허다인은 웃으며 한쪽 손으로 백묵을 가리켰지만, 설렁설렁 걸어온 백묵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입은 뻥끗도 안했다. 팔이 저려서 떨릴 때까지 올린 손을 들고 있던 허다인이 백묵을 돌아보며 외쳤다.

“왜 말 안해 !”

“왜 내 이름을 가르쳐줘야 하지?”

“…아휴. 원래 이런 애야, 신경쓰지 마. 이름은 백묵이고.”

지수의 얼굴이 복잡하게 굳었다. 역시 허다인과 백묵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와 눈앞의 두 명의 정체를 확인했다 해도, 근본적인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한 채였다. 바깥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걸 본 백묵이 눈을 번뜩였다.

“놓치지 않는다.”

“네?”

“방금 우리 이름을 듣는 순간 움찔했군.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겠지. 천천히 일어서. 상처가 없는 건 알고 있다.”

지수가 조용히 일어섰다. 만나자마자 가시 돋힌 태도를 보이는 건 껄끄러웠지만, 척을 지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 둘과는 가까워지는 게 좋을 것이다. 지수가 양손을 들고 적대 의사가 없다고 밝히자, 백묵이 말했다.

“척 봐도 괴물이군. 죽이지.”

“안 돼! 백묵 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딜 어떻게 봐도 인간이잖아! 눈이 삐기라도 했어?”

그 말에 백묵이 혀를 쯧 차면서 지수를 거칠게 턱짓했다.

“머리에 사슴뿔을 달고 다니는 웃기는 인간이 있을까보냐. 오늘이 크리스마스면 루돌프 분장이라는 변명이라도 있었지.”

“아."

그제야 지수는 자신이 용왕으로서의 모습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금색 눈동자와 머리에 드러나있는 뿔. 수상한 인물이니 경계해달라고 얼굴에 써붙이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례한 애들이네. 사슴뿔이 아니라 용뿔인데. >

밴더스내치의 목소리였다. 지수는 정신이 확 드는 것을 느꼈다. 몸에 감각을 집중해보니, 영혼에 붙어있는 밴더스내치도 그림자 속의 재버워키도 무사했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의견을 물어볼 상대가 생긴 건 다행인 일이었다.

특히 자신의 분신이었던 아그리올라의 사념을 포식한 밴더스내치는 가지고 있다.

‘밴더스내치.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죽여. >

‘뭘 갑자기 죽이래? 죽일 필요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지수는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죽일 필요가 어디 있냐고 말한 건가? 그러면 필요하면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인가. 예전의 지수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지수는 새삼 자신의 사고방식이 정상에서 몇 걸음쯤 멀어져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이내 밴더스내치가 대답했다.

<저쪽에서 먼저 죽인다는 말을 꺼냈는데? 그러면 죽여야지. 당연한 거잖아. 조사는 그 뒤에 해도 안 늦어. >

‘정말 지금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다.’

<흐흥. 이제야 자기 반쪽의 소중함을 느낀 건가? >

‘아니. 내가 너보다는 정상이란 걸 확인할 수 있어서’

지수가 내면에 몰두하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바로 앞에서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다인은 백묵의 상완에 매달린 채 발을 흔들며 버둥대고, 백묵은 허다인이 매달려있는 팔을 위아래로 왕복시키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 힘자랑?

“알았으니까 이거 놔! 성녀한테 데려가면 되잖아! 이 고집불통이…나는 분명히 죽이자고 했어. 네 독단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간 다 네 책임이라는 것만 알아둬!”

“어지러워~”

백묵이 짜증나 죽겠다는 듯 소리쳤다. 그리고 땅에 내려선 허다인은 무게중심을 못 잡겠다는 듯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취권을 연상시키는 동작으로 다가온 허다인이 지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단순한 친애에서 우러나온 동작이었다.

“조금 소란이 있었지만 아무튼 잘 끝났어! 백묵 이 애가 조금 신경과민을 앓고 있어서 그래. 우리가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줄게. 운임료는…그래, 먼저 네 이름을 알려줘!”

“이지수입니다.”

지수는 허다인이 내민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한 번 흔들었다. 이것이 바로 상식적인 사람들끼리의 관계였다. 지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합리와 호의에 마음 한쪽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백묵은 입가를 이죽이며 그것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지수구나? 오랫동안 걸어야 하는데 체력은 있어?”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다인은 방향을 가리키며 달려나갔다. 옆에 선 백묵에게 지수는 이렇게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앞서 나간 허다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밤이 되어 하늘이 어두워졌다.

“…아무튼 그런 곳에 쓰러져있었다니 신기하네.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닐 테고. 습격당했다기엔 상처도 별로 없고.”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지금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여기는 제가 있던 곳이랑은 완전히 딴판이거든요.”

“강제전송 함정이라도 밟은 거야? 그나마 다행이야, 잘못하면 벽이나 바위에 박혀서 질식사당할 수도 있거든.”

걷는 중에 대화하는 건 거의 대부분이 허다인과 지수였다. 백묵은 그동안 단 세 마디만을 꺼냈을 뿐이었다.

“역시 죽이는 게 어때.”, "적어도 구속하지.”, “내부사정을 발설하지 마라.” 놀랍게도 허다인은 세 마디 전부 무시하고 떠들었다.

백묵은 계속해서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가고는 있지만, 경계는 전혀 풀려있지 않았다. 지수는 쩝 입맛을 다셨다. 사실 그것이 억울하지는 않았다.

‘경계를 안 하는 게 이상한 거긴 하지.’

걸어가면서 몇 가지 사항을 알게 되었다. 먼저 허다인이 필요 이상으로 지수의 존재에 반가움을 표한 이유. 이것은 간단했다. 백묵과 허다인을 제외하고는 이 주변엔 사람이란 게 없었다. 그에 반해 마물들은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수가 펼친 영역에서 느껴지는 마물의 기척은 많아도, 직접 가까이 다가오는 마물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허다인과 백묵을 경계해서 피해다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연히 야영을 할 때에는 누군가가 불침번을 서야했다.

“제가 할게요. 너무 폐를 끼치는 것도 그러니.”

모닥불을 피운 뒤. 지수가 손을 들어 불침번에 자원했다. 어차피 이리저리 생각과 방침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불침번은 두 사람에게 별 다른 의심을 받을 걱정 없이 혼자 떨어져있을 수 있는 적당한 핑계였다. 이내 밤이 깊어졌다.

모닥불과 조금 떨어진 곳.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는 지수가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재버워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발현된 재버워키는 고양이의 형태를 취한 채로 지수의 손아래에 다가왔다. 지수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수준의 목소리로 물었다.

“...재버워키. 이곳에 대해서 짐작가는 바가 있어? 네가 만든 환상에 갇혔을 때랑 상당히 비슷한 인상을 받았는데.”

<내가 짜낸 가공과는 다르다, 주인이여. 이곳은 물거품 같은 꿈이 아니라 엄연한 무게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이계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재버워키의 말에 지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작은 이계니 뭐니 하는 표현이 나왔다면, 적어도 진짜 시간여행을 해서 과거에 날려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곳은 마왕이 꺼낸 그 빛나는 구슬, 봉인의 기둥 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했다.

<대충 알겠네.>

단서를 얻자 답이 나왔다는 듯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생각하고 있던 지수가 얼른 말해보라며 밴더스내치를 추궁했다.

“설마 어떻게 된 건지 파악이 끝난 거야?”

<그래.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음, 던전이라는 건 세계의 파편에 새겨진 기록을 재현하는 축음기 같은 건데.>

그건 또 상당히 흥미로운 정보였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곳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왜 던전의 기능 같은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지수는 인내심을 갖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밴더스내치가 말을 이었다.

<여긴 그거랑 비슷하게, 대전쟁의 기록을 봉인의 기둥으로 만든 거겠지. 용사를 봉인의 핵이자 고정시키는 말뚝으로 둔 것도 이제 이해가 가네. 그는 대전쟁의 중심이었으니까. >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뇌의 처리용량에 한계가 왔다.

분명히 여왕을 봉인한 것은 마왕이라고 했다.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다면. 지금 아그리올라가 한 말은 마왕이 역사적인 사건 그 자체를 떼어내서 미니어처 세계 같은 걸 만든 다음 그 무게를 이용해 여왕을 짓누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런 짓이 가능하다고? 무슨 신이야?”

그야 지수도 루드비히가 쓴 소설을 막 읽었을 때는 흥분에 가득 차서 그는 신이야 그는 신이야 하고 떠받들기도 했지만, 그게 정말 이 소설의 작가는 전지전능하여 온 세상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다.

<신은 아니지만 마왕이잖아.>

밴더스내치가 간단한 이치라는 듯 대답했다. 지수는 어이가 없었다. ‘마왕이잖아’가 무슨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 변명거리도 아니고. 지수는 스스로 용왕이 된 뒤 상당히 배짱이 늘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이 사안은 스케일이 달랐다.

그리고 밴더스내치가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마왕은 네 능력의 원초나 마찬가지야. 혼자서 던전들의 구조를 해석한 다음 봉인을 만들 때 따라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해. 용왕의 둥지도 마음대로 주무르던데 뭐. >

그렇게 말한 밴더스내치는 목소리가 상당히 삐져있었다. 둥지를 마음대로 제어당한 게 어지간히 분한 듯했다. 아그리올라로서의 정체성을 버렸더라도, 그저 용왕의 영혼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고집일 것이다. 지수가 밴더스내치에게 물었다.

“좋아, 네 가설이 맞다 쳐. 그러면 여기서 나갈 방법은?”

<간단해. 일단 육영웅이 모인 곳까지 가서….>

밴더스내치의 말이 끊긴 이유는 명백했다. 지수가 내면에서 의식을 떼어냈기 때문이다. 지수는 번뜩 눈을 떴다.

뻗친 영역 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수는 재빨리 쓰다듬고 있던 재버워키를 그림자 안으로 풍당 떨어뜨렸다. 그리고 짐짓 아무도 없어서 쓸쓸해하고 있었던 척 먼 곳을 바라보았다. 다가온 것은 백묵이었다.

지수가 태연하게 방금 눈치챈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안 주무시고 오셨어요.”

“흥. 알지도 모르는 놈한테 불침번을 맡기고 잠들 수 있겠나? 그런 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병신이거나 사람 의심할줄 모르는 병자 지. 저기 퍼자고 있는 건 둘 다 해당이고.”

백묵이 저편의 모닥불 쪽을 턱짓했다. 그곳에선 허다인이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지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백묵을 보면서 젊을 때는 좀 부드러운 성격이었다가 중년이 되면서 저렇게 딱딱해진 건가 싶었는데, 다 착각이었다. 백묵은 젊어서도 늙어서도 대단히 한결같은 인간이었다.

“저 녀석 뒷바라지에는 익숙해졌다 생각했지만 이번 건 아주 특대형이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리고 백묵이 지수를 향해 찌릿 시선을 보냈다.

“어차피 성녀 앞에 서면 거짓말은 못 하게 돼있다.”

“그런 능력도 있어요? 되게 신기하네.”

“그때까지는 내가 널 감시하지. 저기서 자빠져 자고 있는 녀석은 머리에 나사 하나가 빠져있어서 너 같이 수상한 놈을 보고서도 헤벌쭉 웃어대지만, 나는 달라. 상식인이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그 즉시 꼬치로 만들어주지. 알겠나?”

그가 노려보자 바닥에서 강철로 된 가시가 솟아나와 지수의 목 앞에서 멈추었다. 언제 상식인이라는 말뜻이 멀쩡한 사람 목에 칼날부터 들이대는 괴한으로 바뀌었대. 위협에도 지수가 겁먹긴커녕 헛웃음을 짓자 백묵이 버럭 소리쳤다.

“알겠냐고 묻고 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꽁무니를 내뺄 건가? 그것도 분명한 선택지의 하나라고 충고해두지!”

“목소리 좀 낮춰요. 시끄러워서 자고 있던 사람 깨버릴라. 이러고 있는 거 들키면 백묵 씨 엄청 혼날 텐데.”

확연하게 동요한 백묵이 비겁하다는 듯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젊어서인지 확실히 눈앞의 백묵은 노련함이나 원숙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관찰하고 있다 보면 썩 유쾌했다. 결국 지수와 백묵은 해가 뜰 때까지 마주앉아 이야기했다.

"아~ 오랜만에 푹 잤네!"

아침이 밝은 뒤 이쪽에 다가온 허다인이 기지개를 폈다.

“어제는 신기하게 한 번도 마물이랑 안 부딪쳤잖아. 둘이서 이 고개 넘어갈 때 엄청 고생했는데. 지수 너 혹시, 마물을 쫓는 부적이라도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 말에 지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은 오히려 백묵과 허다인이 이 주변에서 마물을 엄청나게 죽여대서 어련히 안 다가오는 건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원인은 지수에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수는 뭘 한 적이 없었다.

의아해하는 지수에게 안쪽에서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용왕이잖아? 아무리 아직 반쪽짜리라고 해도, 보통 몬스터들은 무서워서 덜덜 떨게 된다고.>

몬스터 쪽에서 이쪽을 무서워한다니. 분명 편리하긴 했지만 조금쯤 꺼림칙한 일이었다. 지수는 미묘한심정이 되었다. 이내 마주앉아 있는 지수와 백묵을 보고 허다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표정에 드러나있는 건 자그마한 질투였다.

“그런데 나 빼고 둘이서 밤새 얘기 나눈 거야? 치사해.”

그 말에 지수는 웃음을 참으려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맞아요.”

“닥쳐.”

지수의 말에 백묵이 반박하기도 짜증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실 밤새 이야기를 나눈 덕분인지, 백묵의 이쪽에 대한경계는 상당히 느슨해져있었다. 대부분은 백묵이 허튼 짓 말라 협박하고 지수가 알아서 해라 대답하는 모양새였지만.

야영한 곳의 정리가 끝난 뒤엔, 다시 허다인을 따라 걸었다. 점점 사람이 사는 것 같은 흔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점령지에서 인간의 구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내 허다인이 앞에 손가락을 뻗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저기야, 저기!”

저편에서 방위선으로 지켜지고 있는 건물 구획이 보였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교과서 속에서나 보던 육영웅들을 직접 만나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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