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96화 (96/176)

96화.  <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1) >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눈앞에 서있었다.

조금쯤은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주저없이 눈에 띄는 움직임에 들어간 이유는 속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왕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이런 형태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신출귀몰이라는 수준이 아니잖아…!’

마왕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건 적어도 백묵과의 일전이 끝난 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전장의 한복판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지수는 긴장에 침을 꿀꺽 삼키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자유롭지 않았다.

움직임이 완전히 장악당하고 있다. 그 전성기의 아그리올라에게서 용언을 봉인하고 심장을 뽑아버렸다길래 대체 무슨 꼼수를 부린 건가 싶었는데, 직접 눈앞에 대면하고 있으니 알겠다. 압도적인 존재감. 이 자는 꼼수 같은 것 없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낼 수 있는 괴물이었다.

‘합리적일 거기는, 말로 하면 통할 거기는 개뿔이!’

지수는 자신의 낙관에 욕설을 내뱉었다. 예전부터 동경하던 인물과의 만남에 따르는 흥분이나 고양감은 지금 당장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덮여서 밀려나있었다.

"흠."

마왕이 봐도 봐도 신기하다는 듯 지수를 쳐다보았다.

가면 안쪽의 눈동자에서 비치는 감정은 단순한 흥미였다. 관심있는 작가의 신간 소개를 읽을 때, 지수 또한 저런 눈을 하고는 했다. 그것에 자그마한 모욕감을 느꼈다. 대체 뭐가 신기하다고 사람을 곤충 표본 바라보듯이 관찰하고 있어?

그리고 그 사소한 불안은 이내 커다란 경악에 삼켜져 사라졌다. 마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렇군. 이게 이지수의 얼굴이야.”

‘내 이름을 알아?’

지수는 밤중에 찬물을 맞은 듯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마왕이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충격적인 건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수는 살짝 시선을 돌려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다들 척척박사의 이름이. 차기 용왕의 이름이. 불식을 습격한 자의 이름이 이지수였나 하는 얼굴이었다. 저게 정상이었다. 마왕이 지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쳐도, 용왕이 되는 과정에서 지수의 이름은 세상에서 지워져버렸을 터였다.

<…그런 이치 따위는 알 바 아니라며 무시해대는 게 마왕이지. 대전쟁 때랑 똑같아. 완전한 예측불허의 존재.>

지수의 내면에서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바짝 경계가 서있었다. 오히려 지수보다도 긴장한 것 같았다. 밴더스내치에게는 자신이 포식한 아그리올라의 기억이 있다. 그렇기에 마왕의 무서움을 더욱 똑똑히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지수의 뿔을 붙잡은 마왕이 칭찬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대전쟁도 겪지 않고, 어디서 병기로 길러진 것도 아니고, 가진 건 능력 하나뿐이었을 텐데. 별 다른 고생 하나 하지 않고서도 여기까지 도달했나? 역시 난 놈은 난 놈이군.”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별 다른 고생 하나 하지 않고서 여기까지 왔냐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 주제에, 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무례한 것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눈을 감은 지수가 의식을 집중했다.

우선은 몸을 묶고 있는 이 기묘한 주박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마도 용왕의 힘까지 끌어내 전력을 다하면 뿌리칠 수 있다. 계획하고 있던 것과는 상황이 너무나 달라졌지만, 지금 해방의 횟수를 아끼다가는 모든 게 다 박살나버릴 판이었다.

<앞으로 한 번.>

밴더스내치의 속삭임이 들린 것과 동시. 심장이 요동치며 지수의 마력이 급격히 증폭되었다. 저쪽이 마왕이면 이쪽은 용왕이다. 즉시 몸의 자유를 되찾은 지수가 마왕의 손목을 붙잡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째로 둥지로 끌고 갔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풍경이 일변했다. 이제는 이쪽의 홈그라운드였다. 하지만 마왕은 놀이동산이라도 온 듯 느긋하게 둥지를 둘러보았다.

“흠. 용왕의 둥지는 용언으로만 작동할 텐데. 룬을 가지고도 제어할 수 있도록 뜯어고쳐서 바꿔놓은 건가?”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왕은 슬쩍 살펴보는 것만으로 이미 둥지의 제어 체계를 간파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명백했다. 지수는 해석 능력을 이용해 수많은 마법을 익히고, 온갖 마법진을 간파하고, 마력 구조를 분석해왔다.

지금 마왕은 단지 그것을 자력으로 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참 고마운 일도 다 해주는군.”

마왕이 마력을 담은 손가락을 움직여 명령을 짜냈다. 그러자 강제로 조작당한 둥지는 모든 이들을 원래 있던 자리로 내뱉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눈을 뜨자 주변의 풍경은 다시 불식 길드 지하의 공동이었다. 용왕의 둥지가 몇 초만에 파훼당했다.

“어이가 없는데….”

지수가 창백한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그 이상으로 말도 안 됐다. 밴더스내치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말 안 해줘도 알아.”

<아니야, 이건 이상해! 아무리 마왕이라도 이런 게 가능할 리 없어! 용왕의 둥지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다니?>

밴더스내치가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경악했다. 방금 마왕이 한 것은 둥지에 내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명령이었다.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내보내기. 뭐, 지수가 제어 체계를 막 개조하느라 빈틈이 생겨났다거나 그런 것이리라.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수는 끔찍하게 실감했다. 지금의 자신과 마왕의 역량 차이는 한두 단계 정도가 아니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 손도 댈 수 없을 줄은 몰랐다. 더 이상 싸움을 거는 것이 무의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움직임과 능력을 봉인하고 있던 특유의 결박은 사라져있었다. 가장 먼저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마왕과 구면인 백묵이었다.

"마왕! 그때처럼 또 모든 걸 망치겠다는 거냐!"

순식간에 강철의 조각들이 모여 백묵의 온몸을 덮었다. 얼굴까지도 완전히 감싸는 불가살이의 갑옷. 지수와의 싸움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형태였다. 백묵은 아직 전력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온몸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조용하게 마왕이 코웃음을 쳤다.

“모든 걸 망쳐? 내가? 지껄이지 마라, 불가살이.”

바로 한 순간 뒤. 백묵은 온몸에서 수많은 거대한 칼날들을 내뿜으며 마왕을 공격했고, 마왕은 그런 건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이 백묵의 칼날들 위에 앉아있었다. 무릎 위에 팔을 걸친 마왕 루드비히가 한쪽 손으로 은발을 만졌다.

“너는 네가 목격한 대전쟁의 결말이 끔찍하다고,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분명 좀 더 잘 해낼 수 있었을 거라고.”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마왕의 손이 닿아있는 부분부터 백묵의 칼날이 급속도로 녹슬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있는 힘껏 발버둥친 편이야. 사실은 아주 아주, 훨씬 더 최악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었어. 어쩌면 이제부터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네가 멍청한 짓을 벌이는 탓에.”

칼날을 부식시키는 기운은, 그대로 갑옷을 타고 올라가 백묵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사기에 휩싸인 백묵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녀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정유현은 백묵이 휘말려드는 걸 상관치 않고 재빨리 손을 들어올렸다.

“너는 대체…뭐냐!”

“마왕”

연보라색 소용돌이와 함께 마왕을 향해 중압이 내리꽃혔다. 적어도 움직임을 멈출 수 있다면 상황은 변한다. 하지만 마왕은 살짝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중압 자체를 튕겨내버렸다. 중력을 튕겨내버린 손 위에는 새하얀 마력이 서려있었다.

“가만히 있어.”

마왕이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장난치는 어린아이를 혼내는 듯한 어조였다. 그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건지, 눈을 크게 뜬 정유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비장의 기술을 사용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지수가 황급히 정유현에게 소리쳤다.

“늑대 씨! 그거 쓸 생각 하지도 마요!”

중력의 특이점. 정유현이 또 다시 그 기술을 써서 팔다리가 비틀려 피투성이가 되는 꼴은 지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볼 수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던 정유현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냐는 듯 움찔하고 지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기는. 그것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거나 마찬가진데. 입술을 깨문 지수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쪽은 올스타 팀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마왕과의 전력차는 절망적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무엇인가.

지수는 조심스럽게 마왕의 의중을 재어봤다.

“...우릴 다 죽여버리려는 건가?”

지수의 말에 가면을 쓴 마왕은 어이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는 듯한 태도였다. 그 반응을 본 지수는 희망을 가졌다. 생각해보면 마왕은 이곳에 나타난 뒤 이쪽을 향해 직접적인 공격을 해온 적이 없었다.

어쩌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대했던 대로, 마왕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는 평화를 좋아한다. 대화로 해결할수 있다면 그게 최고라 생각하지. 그래서 누가 위험한 짓을 하려고 뭉쳐있으면, 해산시킨 뒤 그만두라고 말로 알아듣게 경고한다.”

분위기가 잠깐 온화해졌지만, 다시 곧바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면 어쩔 수가 없지.”

마왕이 한손을 들어 검지를 치켜세웠다. 차례대로 가리킨 것은 백묵과 황마녀, 흑마녀였다. 발푸르기스의 밤과 불식. 이미 한 번씩 마왕에게 계획이 박살 나 본 적이 있는 세력이었다. 지목한 마왕은 천천히 세 사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희 셋은 아웃이다.”

마왕의 손에 새까만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사형선고였다. 마왕의 움직임이 느긋한 것은, 도망치려 하든 피하려 하든 막으려 하든 반드시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수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안돼.’

마녀도 백묵도 중요한 협력자였다. 지금 여기서 잃을 수는 없었다. 마왕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힘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데다 역효과일 가능성이 있었다. 잘못하면 이쪽까지 적으로 몰려 살해당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걸어갔다.

생각해라. 방법을 떠올려라. 사고를 멈추지 마라! 지수가 온갖 단서를 검토해보며 끊임없이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지수가 낸 해답은, 자신이 능력을 각성하게 된 원점이나 마찬가지인 그 책의 제목이었다. 지수가 조용히 읊조렸다.

“…<악마의 눈동자에 비친 세계>.”

발걸음을 내딛던 마왕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마치 멈추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마왕은 조용히 가면을 쓴 얼굴을 돌렸다. 이미 모든 관심은 지수를 향해 돌아가 있었다. 방금 대체 뭐라고 말했냐는 추궁의 시선이 지수를 겨누었다. 지수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이 나를 알고 있듯이, 나도 당신을 알고 있어.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나는 당신이 쓴 소설의 애독자니까.”

마왕은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갑자기 들은 말에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다른 이들은 지금 지수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확신했다. 이건 통한다. 마왕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수는, 거짓 없는 자신의 본심을 말했다.

“아니, 애독자 수준이 아니라 광팬이다.”

그 말에 마왕이 무서운 기세로 성큼성큼 지수를 향해 다가왔다. 지수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마왕이기 이전에 한 명의 작가였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해해주는 독자를 만난다면 기쁨에 흥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지수의 눈앞까지 걸어온 마왕이 지수의 어깨에 쾅 두 손을 올렸다. 가면 속 입이 지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닥쳐."

"응?"

더없이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지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왕의 반응은 지수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누가 자신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타입인가? 그렇다면 사생활이나 마찬가지인 마왕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과도 약간 태도가 달랐다.

마왕은 지금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가 두르고 있는 털망토에서 새까만 마력이 흘러나왔다. 마력은 이내 반구형의 막이 되어 지수와 마왕을 감싸 덮었다. 지수는 지금 검은 마력으로 둘러싸인 안쪽이 일시적으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왕은 가공할 수준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지수의 코에 닿을 만큼 가면을 가까이 가져다댄 마왕은, 잡힌 범죄자에게 정황을 추궁하듯 엄하게 물었다.

“설마, 전부 봤다고?”

“번역되지 않은 작품까지도.”

지수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다.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상황이 상황이라 이러고 있을 뿐이지, 당장 작가를 붙잡고 내가 당신 소설을 문장 단위로 암기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미칠 수준이었다. 그만큼 좋아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마왕이 지수의 멱살을 콱 움켜잡았다.

“지금부터 평생. 누구에게도 내 책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무조건적으로. 어떤 경우에도 예외는 없다.”

더없이 진지한 어조에, 지수가 눈을 연신 끔뻑였다. 지금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게 차단막 비슷한 것까지 치고서….

‘설마 이 양반,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누가 자신의 소설을 읽었다는 게 부끄러워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지수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오히려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그의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몇 시간이고 칭찬을 떠들며 치켜세워주고 싶었지만, 이것은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이었다. 지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으로 요구했다.

“그럼 당신도 우리를 모두 그냥 놓아주겠다고 맹세해.”

“좋아. 어차피 봉인의 기둥은 회수했다. 당장은 내버려둬도 큰 상관이 없어. 네가 입간수만 잘 한다면 말이다.”

마왕이 초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중대사에 비하면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라는 듯이. 당장에라도 맹세시키고 싶어서 어쩔줄을 모르겠다는 목소리였다. 이 시대 최강이라 할 수 있는 각성자들을 전부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느긋하던 그 마왕이, 지금은 어쩐지 여유가 없어보였다.

그 반응에 지수는 오히려 배짱장사를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한가지 더. 내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마련해줘. 이대론 용왕의 힘을 못 버터. 이쪽은 목숨이 달려있단 말이야. 위험하니까 그만두라는 말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네 삶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되도록이면 엮이지 않고 살아가고 싶을 뿐이지.”

마왕이 착각하지 말라는 듯 검지를 세워 지수의 어깨를 찔렀다. 번뜩 뜨인 파란 눈동자가 가면 안에서 빛났다.

“알겠나? 이지수. 나는 네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네가 뭘 하든지 상관하지도 않아. 만일 네가 갑자기 세계정복에 나선다고 해도, 내 주변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어. 하지만 여왕의 봉인을 풀려는 건 별개다. 그건 네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야. 내 영역을 침범하지 마라.”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스토킹이라도 한 건가? 내가 능력을 얻은 계기랑 뭔가 상관이 있는 건가?”

“대답해줄 생각 없다.”

“좋아. 그러면….”

“그러면?”

태연하게 휘유 휘파람을 분 지수가 마왕에게 물었다.

“<악마의 눈동자에 비친 세계>에서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 가사 말인데,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거야? 분명 첫 소절이…”

“그마아아안!”

마왕이 마력을 풀풀 내뿜으며 강하게 소리쳤다.

마왕에게 그의 소설 이야기를 하는 건 대단한 정신공격 비슷한 효과를 지니고 있는 듯 했다. 지수의 입장에서는 그 훌륭한 작품을 써놓고서도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지만, 써먹을 수 있는 패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가면 안쪽에서 이를 뿌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용왕의 이름과 네 영혼의 격을 맞추는 문제겠지? 그거라면 아주 딱 좋은 해결법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네놈의 입을 막아버리는 데에 있어서도 아주 효과적이겠지.”

그리고 마왕이 손바닥에서 꺼낸 것은 빛나는 구슬, 백묵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형태의 봉인의 기둥이었다. 다가온 마왕이 지수의 가슴팍에 구슬을 꽃아넣었다. 현기증에 휩싸인 지수의 의식에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왕의 자격을 얻는 시련에 용왕을 사냥하는 것보다 더 나은 건 없겠지.

“잘 하면 평생 거기서 살 수도 있겠군.”

마왕의 자그마한 비웃음소리가 멀어져갔다. 마왕이 활성화시킨 구슬은, 섬광을 터뜨리며 지수를 그 안으로 빨아들였다.

***

지수가 눈을 떴을 때, 주변에는 백묵도 인형사도 정유현도 마녀들도 없었다. 당연하지만 마왕도 서있지 않았다. 펼쳐져있는 건 무너져 있는 건물들과 황폐한 대지 뿐이었다.

“윽, 머리 아파….”

쓰러진 지수가 상반신을 일으켰을 때, 저편에서 괜찮냐고 물으며 다가오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다. 목 아래로 땋아내린 갈색 댕기머리와, 초식동물 같은 회갈색 눈동자.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차림새가 익숙했다.

“봐봐, 저기 누가 있어!”

지수가 알고 있는 한 한복에 뿔 달린 하회탈이라는 희한한 소품을 고집하는 인간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지수를 발견해서 달려오고 있는 그 소녀는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리 와보라니까, 백묵!”

지수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곳에는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오고 있는 한 명의 청년이 있었다. 특유의 무뚝뚝해보이는 인상은, 지수가 알고 있는 같은 이름의 사람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닮은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판박이였다.

‘이게 뭐야?’

지수는 그저 멍하니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