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축제는 시끌벅적해야지 (6) >
지수는 백묵의 머리를 그대로 땅바닥에 꽃아넣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충격적이라는 얼굴로 굳어있었다. 심지어 바닥에 머리를 처박힌 백묵 본인까지도 순간 놀라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지수의 등 뒤에 떠오른 밴더스내치만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우쭐대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게 왕이 바라보는 시야라는 거지.>
“떠들지 마, 반디.”
지수의 금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안광을 흘렸다. 현상해석은 반칙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저쪽의 공격, 의도, 다음에 취할 행동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다. 이쪽 혼자서 어떻게 싸워야 이길 수 있을지 답안지를 들고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슬리는 건 늑대 씨 정도였지.’
상성상의 불리함이었다. 범위에 들어가는 순간 움직임의 자유를 봉해버리는 정유현의 능력은, 말하자면 ‘피한다’라는 선택지 그 자체를 부숴버린다. 그건 힘과 속도가 아닌 기술과 지혜로 싸우는 지수에게 있어서 대단히 거슬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유현도 지금은 아군이 되었다.
이길 수 있다. 굳이 심장의 힘을 쓸 필요까지도 없었다. 상대가 육영웅이고 뭐고, 백묵이 숨겨두고 있던 힘을 전부 꺼내쓴다 해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순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지수가 벌떡 일어났다.
‘뒤.’
뒤쪽에서 거대한 철침이 날아왔다. 불의의 습격이었지만 지수는 자신 주변에 영역을 펼친 상태였다. 무언가가 움직이면 곧바로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지수가 슬쩍 옆으로 피하자, 철침은 그대로 맞은편의 땅바닥을 꿰뚫고 들어갔다.
그 광경이 어지간히 인상깊었는지, 일어난 백묵의 눈동자에 강한 이채가 어렸다.
“흥. 미래라도 예지한 것처럼 피해대다니. 무당이랑 비슷한 술수를 쓰는군. 같은 계통의 능력을 가진 건가?”
백묵이 뚜둑 목을 꺾으며 기지개를 폈다. 그는 그리 대단한 타격을 받고 있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육영웅으로서 백묵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절대적인 방어력에 있었다.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기에 불가살(不可殺).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좋았다.
“…왜 웃지?”
“당신은 마음껏 패도 죽을 걱정이 없을 것 같아서.”
지수가 손을 위로 쳐들었다. 그곳에선 날아다니는 만년필이 자동필기로 룬 주문들을 짜내고 있었다. 백묵이 놀라하는 건 당연했다. 지금 이 공간은 흑기사의 적막에 감싸여있다. 어떤 주문도 발동할 수 없을 텐데? 말하자면 그러한 의문.
그러한 의문에, 지수는 유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잔재주에 당황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해.”
인형사 토벌전. 그 호텔에서의 싸움을 생각했다. 흑기사 앞에서 오성화도 김혜성도 전부 전멸당할 뻔했던 때의 일. 지수는 완전히 무력했다. 자신은 왜 이렇게 약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허다인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들어간 주제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구해내지 못하고, 그 누구도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 때 자신이 충분히 강해서 인형사를 이기고, 흑기사를 쓰러뜨리고 서민하의 몸을 빼앗으려던 용왕을 박살낼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엔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
“본 적도 있고 파훼도 해봤어. 원리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우회책도 만들 수 있지. 바보같이. 마술의 트릭을 알아내버린 인간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버렸어야지.”
그 시점에 백묵의 고개가 돌아갔다. 차기 용왕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가려져, 다른 자들에게 경계를 늦추고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의 마녀 둘과 정유현. 누구 하나 눈을 돌려도 될 만한 잔챙이는 없었는데도. 백묵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쪽인가…!”
흑마녀의 앞에 솟아올라있는 것은 커다란 기둥이었다. 일종의 석탑처럼 보이는 검고 뭉툭한 기둥. 그뿐이지만, 조금이라도 마도구 제작에 식견이 있는 자라면 그 표면에 수많은 술리가 숨겨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흑마녀가 세워놓은 그 검은 기둥은 흑기사가 적막으로 비틀어놓은 마력을 즉시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있었다.
‘정말로 이렇게 됐어요.’
흑마녀는 습격 전, 지수가 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 이건 만약의 가정이지만, 백묵을 제압할 때 바깥의 방해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어요. 셋 정도 떠오르는데.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서 각 각 능력이랑 대비책을 알려드릴게요.
흑마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대로 꼭두각시가 된 육영웅이 나타났다. 그것도 거의 모든 정보가 감춰져있던 흑기사 우진. 능력인 적막의 비밀은 지수가 말한대로, 마력장에 왜곡을 일으켜서 주문의 구조를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대체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죠….’
흑마녀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정보 수집 면에서는 마녀들 또한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거의 모든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 봐도 좋았다. 하지만 누각의 구조와 구성원을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육영웅의 기술을 간파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는 정말로 뭐든지 다 알고 있는 척척박사 같았다.
“좋았어!”
그리고 주문의 봉인이 풀림과 동시에, 황마녀가 자신의 포탑들을 일으켰다. 포탑에서 발사하는 마력의 탄환은 한 발 한 발이 웬만한 각성자들을 일격사시킬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런 것이 몇 발이고 계속해서 흑기사를 향해 터져나갔다.
흑기사가 대단한 것인지, 그것을 조종하고 있는 인형사가 대단한 것인지. 흑기사는 모든 탄환을 피하거나 쳐내며 거리를 좁혀왔다. 적막을 지우고 있는 저 기둥만 파괴하면 다시 승기는 이쪽이다. 순식간에 그런 계산을 끝낸 듯 했다.
“거기까지다.”
그리고 달려오던 흑기사가 돌연 땅바닥에 쳐박혔다. 흑기사를 향해 뻗은 손에선 연보라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까처럼 바닥이 무너질까 걱정하며 힘조절을 하고 있지 않았다. 검은 색 제복을 입고 있는 정유현이 말했다.
“이해했다. 나는 이걸 지키면 되는 건가?”
정유현이 흑마녀가 조작하고 있는 검은 기둥을 슬쩍 흘겨보았다. 진형은 갖추어졌다. 흑마녀가 풀고, 정유현이 묶고, 황마녀가 쏜다.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흑기사를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남은 적은 백묵 하나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본 백묵은… 긴장이나 낭패감에 얼굴을 굳히는 게 아니라, 썩 유쾌한 광경이라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흥. 철회하지, 너는 반쪽짜리 용왕 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지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모든 대책을 끝낸 뒤에 싸우는 철두철미함, 휘하의 인물들을 능숙하게 휘두르는 왕의 자질. 너는 이미 그 아그리올라보다 위험하다. 그렇다면 나도 전력을 다할 수밖에.”
이내 천천히 한 손을 올린 백묵이 검지로 지수를 삿대질했다. 대적을 향한 도전의 의사표현. 그런 것이 아니었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백묵의 몸에서 조금씩, 조금씩 강철의 조각들이 흩어지며 모여들고 있었다.
“천근살.”
백묵이 읊조렸다.
그 때 깨달았다. 백묵이 이쪽으로 내밀고 있는 검지의 경로에는 지수뿐만 아니라 흑마녀의 기둥까지 겹쳐있었다. 저것은 도발 같은 게 아니라 단순한 목표 지정이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 걸 싸그리 휩쓸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눈치챈 것은 지수 뿐이었다.
“밴더스내치!”
<지금 여기 나의 왕에게, ‘파열’의 용언을 바친다.>
그려져있는 수많은 룬들이 한 곳으로 모여갔다. 모인 룬들은 밴더스내치의 손 안에서 용언문자로 빚어졌다. 멀찍이서 거대한 질량을 가진 물체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슬아슬했다. 정말로 아슬아슬했지만, 어떻게든 요격할 수 있다.
“용언마탄!”
마탄이 장전된 순간, 뒤쪽의 벽을 부수고 거대하고 뾰족한 철덩어리가 터져나왔다. 무지막지한 질량과 속도를 가진 그것은, 단순하게 자신을 막아서는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이걸 막지 못했다간 뒤쪽은 전멸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정령무장에서 섬광이 터져나갔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참상이었다. 날아오던 거대한 강철의 화살은 정면에서 박살나고, 백묵의 몸은 마탄의 여파에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오른팔의 팔꿈치까지가 없다. 치명상이었지만 백묵의 표정은 냉정했다.
“그렇군. 이 정도인가?”
도저히 팔 한 짝을 잃은 사람의 반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지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백묵의 주변에서 강철 조각들이 모이며 사라진 팔이 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백묵이 인형사에게 명령했다.
“멈춰라.”
그 말에 인형사는 곧바로 흑기사를 멈추었다. 격렬한 싸움의 도중이었는데도 일절 망설임 없이. 무언가 명령을 듣지 않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상황을 살피는 지수에게 백묵은 뭘 아직도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냐는 듯 웃었다.
“그게 통하지 않았다면 승기는 없지. 항복이다.”
항복? 방금 저 남자가 항복이라고 말한 건가? 지수는 눈을 끔뻑이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흑기사는 움직이지 않았고 백묵은 투항하겠다는 듯 양손을 들고 있었다. 해냈다는 달성감보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지수는 결코 긴장을 빼지 않고 백묵에게 요구했다.
“...그렇다면 여왕의 봉인을 넘겨.”
“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기둥을 내주지.”
“그리고 누각의 무당에게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던 백묵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특유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단언했다.
“그건 불가능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백묵의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왜지? 당신들은 한 편이잖아.”
“무당과는 동료다.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지. 하지만 녀석과 나는 근본적으로도, 궁극적으로도 원하는 게 달라.”
백묵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수의 마탄에 날아갔던 오른팔은 이미 완전히 수복되어있었다. 저 남자가 불가살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조금쯤 알 것 같았다. 백묵이 말했다.
“무당은 봉인 안에 있는 동료의 유지를 잇길 원하지. 말하자면 봉인이 깨지지 않게 잘 지켜달라는 거다. 하지만 난 그 놈을 내버려두기 싫어. 혼자서 멋대로 전부 다 짊어진 채 봉인에 틀어박히다니, 억지로라도 끌어내야 마음이 풀리지.”
백묵이 생각만 해도 한 대 패주고 싶다는 얼굴로 입술을 이죽였다. 지수가 해석하는 한 그 표정에 거짓은 없었다.
‘봉인에 갇혀있는 동료.’
누굴 말하는지는 단박에 깨달았다. 딱히 알고 있는 사이인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안다. 이 나라의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교과서에도 쓰여있는 인물이니까. 육영웅의 리더, 여왕을 봉인하고 대전쟁을 끝냈다 전해지는 각성자. 용사 김유성.
그리고 백묵이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내 목적은 여왕을 해방시킨 뒤 죽이는 거다.”
여왕을 죽인다. 죽이기 위해서, 일단 여왕을 통째로 봉인에서 꺼내놓는다. 그것은 봉인을 풀려고 드는 마녀들도, 매드 티 파티도, 지수조차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단순히 무모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각성자들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드려면 봉인을 풀 필요가 있다. 당연히 무당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았지. 그렇기에 나는 무당과 약속했다. 봉인을 풀지 않은 채로 힘을 모아, 확실히 여왕을 죽일 수 있는 전력이 모이면 그 때 해제하기로.”
합리적인 중재점이었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다고 무작정 싸우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애초에 동료이기도 하고. 여왕을 죽일 준비를 하려면, 백묵 또한 허다인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묵이 손에서 작은 구슬을 구현시켰다.
봉인의 기둥이었다. 백묵을 본 지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이쪽 손으로 처리해달라고?”
“나도 협력은 아끼지 않겠다. 무당을 배신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꼴이 되지만. 뭐. 그 녀석이랑은 싸우는 게 일과였다.”
피식 웃은 백묵이 진지한 눈으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기둥을 내주는 조건은 하나다. 여왕을 죽여라.”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백묵은 아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둥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결의를 느꼈다. 하지만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난이도는 올라가지만 백묵과 불식 또한 지수 쪽으로 돌아선다.
‘무적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야.’
불식. 헌터 협회. 발푸르기스의 밤. 매드 티파티. 존재하는 최대 세력들을 모두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적대 세력이라 할 만한 것이 없어진다. 누각과 싸워 이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것은 정말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제안이었다.
“승낙하지. 그런 걸 내버려두는 것도 불안하니까.”
고개를 끄덕인 백묵이 기둥을 넘겨주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정유현에 이어서 백묵까지 아군이 될 조짐이 보였다. 허들은 상당히 올라갔지만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었다.
"방금 너에게서 가능성을 봤다. 지금 시점에서 이 정도의 힘. 봉인의 기둥을 부순 뒤 한층 더 나아가 더욱 더 강해지면, 어떻게든 여왕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주본 지수와 백묵 사이에서.
톡, 하고 땅에 내려앉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니. 못 죽여.”
정체불명의 존재는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수와 백묵 사이에 나타났다. 텔레포트 따위의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주변에 영역을 펼쳐두고 있었을 텐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당장 대응해야…!’
번뜩 뜨인 지수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났다.
“내가 못 죽이는데 이런 놈이 죽일 수 있을 리 없지.”
이내 가면을 쓴 존재가 가볍게 한 번 손가락을 튕긴 순간, 금빛의 안광은 픽 꺼져버렸다. 지수가 망연히 입을 벌렸다.
“...어?"
해석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백묵의 몸을 덮고 있던 강철의 갑옷이 사라졌다. 흑기사는 돌연 실이 풀린 인형처럼 무너져내렸고, 황마녀의 포탑은 완전히 정지했다. 정유현이 아무리 손을 앞으로 뻗어봐도 그에게 중력이 내리꽃히는 일은 없었다.
"쇼 스타퍼."
이윽고 모두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정숙 속에서 그 자의 구두소리만이 뚜벅뚜벅 울렸다.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 아래에서 흔들리는 은발이 보였다. 천천히 백묵에게 다가간 그 자가 기둥을 빼앗았다. 백묵은 두 눈을 뻔히 뜨고 보면서도 어떠한 저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말했지, 시끌벅적한 건 싫어한다고.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걸 왜 소란을 못 피워서 안달인 거냐.”
그리고 가면을 쓴 그 존재가 천천히 지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이채가 돌았다. 지수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지수의 뿔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뭐야 이건. 용왕? 아그리올라의 혼과 융합한 건가? 이런 가능성이 있을 줄은 몰랐군. 재밌는 짓거리를 하고 있어. 인간의 몸과 혼으론 버티지 못해서 터져버릴 텐데….”
이내 명쾌한 해답이 나왔다는 듯, 가면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그래서 여왕의 봉인을 풀겠다고 상관도 없는 일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거였어. 지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힘을 줘도 입술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상태가 된 건지 참 궁금하군.”
대체 누구야. 마음속으로만 내뱉은 지수의 질문에 대답해준 것은, 지수의 영혼에 붙어있는 밴더스내치였다. 밴더스내치는 답지 않게 여유를 전부 잃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지수의 앞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