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축제는 시끌벅적해야지 (3) >
지수는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집행부의 제복을 입은 채, 얼굴에 쓴 것은 용의 가면이었다. 협회 건물에 볼일이 있었다. 정문으로 출입했다간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은밀히 행동해야 하는 집행부들의 통로를 이용했다. 한 가지 문제는 출입에 필요한 암구호였다.
암호 공문은 티파티의 라인으로 입수해두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정확한 구호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을 읽는 방법 또한 별도로 전달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용 모양 가면 속의 금색 눈동자가 빛났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거위?” “백숙."
“황금알?” "반숙.”
지수가 대답하자 문은 간단하게 열렸다. 경계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지수의 외견은 영락없는 집행부였다. 처음 보는 가면 또한 집행부원들이 반쯤 갈려나가버렸기에 적극적으로 충원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한 듯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했다. 협회 내부를 앞마당처럼 드나들 수 있다면, 이후의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영역은 일부러 펼치지 않았다. 이런 데서 경계를 한답시고 마력을 풀풀 뿜어대다간 꼬리를 잡히기 딱 좋았다.
그리고 지수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계단으로 들어선 순간, 뒤통수 쪽에 차가운 총구의 감촉이 느껴졌다. 우뚝 멈춘 지수가 시선을 돌려보았다. 계단 위에 장난감 병정이 있었다.
“이런 흉흉한 때에 무슨 일이실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했다. 집행부의 박사로 일하던 때 같이 활동했던 그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태도가 달랐다. 김도형은 지금 ‘새로 들어온 후배’가 아닌 ‘협회의 적’을 대하는 어조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네. 무슨 수를 써서 들어온 거지? 지금 이거 내가 한눈 팔고 있었으면 큰일날 뻔한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협회 보안이 이렇게 허술했나?”
“병정….”
“집행부인 척을 하고 있으면 적어도 집행부장 님이라고 불러주지 그래. 집행부 제복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나는."
“그만. 말하지 마. 움직이지도 말고. 지금 내가 그쪽을 못 죽일 거라 착각할 만큼 미지근한 위인은 아니지?”
김도형이 지수의 뒤통수에 가져다댄 총구를 꾹 눌렀다.
‘바로 이렇게 되나.’
지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만난 김도형은 잘 벼려진 칼처럼 날이 서있었다. 지금 협회 내부는 지수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민감한 상황인 듯 했다. 인사들의 숙청이라도 진행하고 있는 건가. 지수가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
“겁 먹지 마라. 위협할 생각은 없다.”
그 말에 김도형의 눈이 커졌다. 앞에 서있는 이 인간이 제정신인가 의심스러웠다. 지금 뒤통수에 총구를 겨눈 채 위협하고 있는 건 이쪽이었다.
그런데 겁 먹지 말라니? 차분하게 말을 꺼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젊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협회장과 만나서 할 얘기가 있을 뿐이다.”
김도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상한 것은 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적의가 흐려져간다는 점이었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지금 당장에라도 이 남자의 머리에서 총구를 떼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대체 왜?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이상한 상황이었다. 분명 무언가 술수를 쓰고 있는 거다. 세뇌와 같은 능력으로.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 자는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김도형의 결단은 누구보다 빨랐다.
방아쇠가 딸깍였다.
“부재증명.”
커다란 총성이 울렸고, 탄환이 계단의 벽에 박혔다.
"무슨...!"
김도형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수는 순간 허상이라도 된 것처럼 총알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지수가 김도형을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의 머리에 총을 맞아놓고도 별 일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지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보니 나도 배짱이 상당히 늘었어.’
예전에는 피 한 방울만 나도 아파 죽겠다 호들갑을 떠는 엄살쟁이였는데, 지금은 총구가 겨눠진 채로도 평상심과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히려 총을 쏜 김도형 쪽이 당황하고 있었다. 지수가 검지를 입 가까이 가져다대고 말했다.
“허둥대지 마라. 소리는 지웠다.”
이미 계단 주변에 영역을 펼쳐놓았다. 소란이 일어나면 곤란한 건 이쪽 또한 마찬가지였다. 침을 꿀꺽 삼킨 김도형이 고개를 올렸다. 시선 끝에 있는 것은 계단 위의 장난감 병정이었다. 이 상황은 지금도 협회장에게 전달되고 있을 터였다.
<…재밌는 게 튀어나왔군. 날 만나고 싶다고? >
그리고 김도형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무전기에서 잡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또한 지수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러면 밥이나 한 끼 할까.>
이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김도형은 얼굴을 구긴 채 무전기를 쳐다보았다. 농담이라기엔 너무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놀란 것은 지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자신은 용왕이다. 놀라지 않은 자신을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장소는?”
<근처에 아구찜을 잘하는 곳이 있지.>
“난 생선을 싫어한다.”
그러면 여긴. 안돼. 자신의 무전기를 매개로 이어지는 얼빠진 대화를 들으며, 김도형은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들어가있었다. 우리 협회장님께선 지금 대화하고 있는 게 협회 보안을 간단히 무력화시킨 침입자라는 걸 알고는 있는 것인가?
메뉴와 약속장소가 정해진 건 몇 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
약속장소를 정하는 데에 신경을 쓴 것은 단순한 음식 취향 문제가 아니었다. 접선 장소를 고르게 된다면 무조건 세 번은 거절하고, 가능하다면 이쪽에서 정할 것. 흑마녀로부터 들은 조언이었다. 만나러 나갔다가 습격당한 경험이 많은 거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경계였다. 남의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사실 티파티의 사람들과 마녀 전원 또한 협회 건물 주변곳곳에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곳 교외의 가게는 아슬아슬한 중립 지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낮이라 한적한 매장.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둔 정유현을 바라보며, 지수는 위장 치고는 대단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일곱 번째 영웅’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그 협회장 정유현이, 앞치마를 두른 채 닭갈비를 볶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 이다. 주걱을 든 채 닭갈비를 이리저리 휘젓는 데에 집중하던 정유현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그렇다.”
가면을 쓰고 있는 지수가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협회의 흰 제복을 입고 있는 정유현을 보았을 때, 지수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누르느라 애썼다. 눈앞의 정유현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부분에 대한 마음의 정리는 이미 그 날의 라이브 하우스에서 끝내두었다.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건, 정유현의 미련함 때문이었다.
그가 일종의 부채감에 떠밀리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끔찍한 실험이 자행된 것은 집행부로서 협회장을 충분히 경계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제 매듭지어야 할 일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청산했다.
이번에야말로 손을 떼고, 피투성이로 얼룩진 삶과 작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서민하의 공연을 보러 온 정유현을 만났을 때 지수는 적잖이 안심했다. 하지만 결국 또다시 이런 꼴이다. 정유현은 자신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나 요령이 없는 거야, 이 사람은.’
강하게 팍 치켜뜨고 있던 눈가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그 때, 이쪽을 슥 바라본 정유현이 말했다.
“흠. 예전 동료와 닮았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불의의 습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지수가 동요를 최대한 숨기며 물었다. 말을 더듬지 않은 건 운이 좋은 일이었다. 정유현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콧숨을 내쉬었다.
“이쪽 이야기다. 용 가면을 보니 호랑이가 떠올라서 말이야. 그 놈도 집행부의 자세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뭘 먹을 때도 가면을 벗지 않았지. 결국 전 협회장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다 죽어버렸어. 그 탓에 지금은 완전히 전 국민의 원수다.”
“그런가. 흥미롭군.”
“올곧은 녀석이었는데, 그게 독이 돼버렸지.”
“그렇군.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지.”
정유현의 말에 용 가면을 쓰고 있는 지수가 식은땀을 닦았다. 예전 동료라길래 순간 심장이 철렁했는데, 사천왕의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하긴 지금은 집행부 제복을 입고 있으니. 그런 지수의 모습을 살핀 정유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체면차림은 그만두지 그래.”
“뭐라고?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
“기선을 제압해두려는 건 좋지만, 애초에 성격 자체가 그런 쪽이랑은 안 맞는 것 같은데. 얘기할 게 있으면 편하게 하도록. 지금 걸로 네 정체에 대해서도 대충 짐작이 갔으니.”
정유현이 지글지글 익는 닭갈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기억엔 없지만… 처음 뵙겠습니다가 아니라,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맞겠지? 안 그런가, 척척박사.”
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진정한 경악이었다. 그는 이미 지수의 연기가 전부 억지로 짜낸 태도라는 걸 간파한 듯 했다. 게다가 떠보는 말로 이쪽의 동요를 유도하고, 사천왕의 이야기라며 안심시킨 것까지 전부 정유현의 의도였다.
“불쾌했다면 미안하군. 직업상 심문이 특기라서.”
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강하다느니, 협회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느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유현이라는 남자는 그 자체로, 지수가 지금까지 보아온 누구보다도 노련한 인간이었다.
지수는 결코 방심하면 안 된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요. 저도 피곤하다 생각하는 참이었습니다.”
한숨을 쉰 지수가 연기를 그만두었다. 정유현은 고기를 가위로 잘라서 집개로 지수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닭갈비는 잘 구워져있었다. 우물우물 닭갈비를 씹어먹은 지수가 말했다.
“저희들의 목적은….”
“일단 다 먹고 하지.”
정유현의 말에 지수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이야기가 이어진 건 밥까지 볶아 철판을 싹 비운 다음이었다. 냅킨으로 입을 슥슥 닦은 지수가 다시 분위기를 잡고 말했다.
“저희들의 목적은 한 가지. 이 세상에 던전과 각성자를 만들어낸 이능. 그 영향력을 더 크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 그게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틀어막고 있는 게 육영웅이고요.”
“그래서, 육영웅을 쳐달라고.”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유현이 냉소를 지었다.
“농담이 지나치군. 협회장을 쓰러뜨리는 데에 협력해준 불식과 누각을, 이번에는 협회 쪽에서 함께 공격해달라?”
“협력이 어렵다면 방관만 해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지금 협회는 내부를 다져야 할 시기니 바깥의 일에 참견하기는 어렵겠죠. 엄연한 사실이니까 충분한 변명이 될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인 지수가 컵을 들고 물을 홀짝였다.
“헌터 협회에게 있어서 나쁜 이야기는 아닐걸요. 오히려 영향력을 늘릴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죠. 각성자가 더욱 강해진다는 건 협회의 권한도 그만큼 커진다는 뜻이니까.”
“…정말로 신기하군.”
“네?”
“기억에도 없는데 친근감을 느끼는 건, 이상한 기분이다.”
정유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것은 새로운 협회장으로서 숙청을 진행하고 있는 정유현이 아니라, 그 때 지수의 곁에서 함께 싸우던 늑대의 얼굴이었다. 팔짱을 낀 정유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싸운 두 길드를 공격하는 건 의리를 저버리는 짓이지만, 애초에 그건 척척박사 너도 마찬가지지. 아마 난 너에게 목숨 하나둘쯤을 빚지고 있겠지. 은혜를 갚고 싶다. 할 수 있다면 네 쪽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그런 실감이 있어.”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수는 이미 밴더스내치로부터 ‘이름 지우기’의 대략적인 원리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상태였다. 막연히 친근감이나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라면 몰라도, 저렇게 구체적인 일에 대한 감정이 남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지수가 용왕이 된 것은 정유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눈 계약이다. 그렇기에 그 일 자체를 완전히 없었던 일로 해버리면 계약의 근간이 무너져버릴 위험이 있다…그렇기에 어렴풋하게나마, 상황에 대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수많은 가설들이 떠올랐지만 근거는 없었다. 그리고 지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정유현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하지만 안돼.”
"무슨...!”
정유현이 손바닥을 들자 연보라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 능력은 이미 오성화와 김혜성보다도 위의 영역에 달해있었다. 현역 각성자 중에서는 최강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정유현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적 따위 한 번도 없었다.
“능력자라는 건 편리한 데다 쓸 데도 많지.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나타나는 건 당연한 귀결이야. 그렇게 수많은 아이들의 인생이 시궁창에 떨어졌다. 원치 않은 힘을 각성했다는 이유로. 나도 그런 아이들 중에 한 명이었고… 그리고.”
그리고 그런 아이는 자라서 집행부의 늑대가 되었다.
“배은망덕하다고 욕하려면 마음대로 해. 애초에 각성자란 게 없었다면 그 많은 아이들이 죽어갈 일도, 전 협회장이 웃기지도 않은 실험을 해댈 일도 없었겠지.
각성자들을 더 강하게 만들 거라고? 내가 그런 일을 내버려둘 것 같나?”
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남자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도 정유현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거란 사실을 확인하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지수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서로 적인 거네요.”
“그래. 다음에 만났을 땐… 서로 적이다.”
정유현은 말하기 힘들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얼굴을 본 지수는 참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그런 괴로운 표정으로,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적이라니? 너무나 안일하고 물러터진 인식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전쟁은 시작됐는데.
“…그래도 전 늑대 씨를 죽이기 싫어서요.”
지수는 숨기지 않은 본심을, 본심 그대로의 표정으로 말했다. 정유현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지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수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자신의 스마트폰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어딘가와 통화가 연결되어있었다.
“그렇게 돼버렸어요. 협회를 부숴주세요.”
<알겠습니다.>
전화 저편에서 흑마녀가 가볍게 명령을 수긍했다.
발푸르기스의 밤과 매드 티 파티. 대기하고 있던 전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