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축제는 시끌벅적해야지 (2) >
지수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뉴스 메인에 커다랗게 특필 기사가 쓰여있었다. ‘일곱 번째 영웅 정유현, 신생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 되다.’ 사진에 앉아있는 정유현 옆에 서있는 것은 지수 또한 아는 얼굴이었다. 그 때 반지를 빌려주었던 관리부장이다. 지수가 생각했다.
‘조금쯤은 예상했었던 일이었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간과할 수 있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정유현은 현재 육영웅을 제외한다면 최강의 각성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협회 또한 각성자 사회에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기관이다. 경계할 이유는 충분할 만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웃음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협회장이 된 정유현이 차려입은 화려한 색의 양장은, 이상하리만치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언제나 어두운 색의 집행부 제복을 입은 모습만을 보아왔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을 집어넣은 지수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재비.”
걸어가는 지수의 발아래에서 그림자가 끓어올랐다. 재버워키가 지수의 몸에 휘감기며 융합했다. 허주화한 지수는 모자장수의 망토를 펄럭였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촛불로 밝혀진 공간 안에 네 명의 마녀가 앉아있었다.
"흠."
방 안에 지수가 들어온 순간, 흑마녀를 제외한 세 명의 마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셋이서 먼저 기습했는데도 역으로 압도당해 죽을 뻔한 기억은 그녀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남아있었다. 그런 반응을 살펴본 지수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우직하게 마법만 써줘서 다행이었지.’
마법진 해석. 명경지수. 영역. 해주의 비술. 지수의 기술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아마 마녀들이 아니라 비슷한 수준의 검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면 지수는 훨씬 더 고전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상성이 안 좋았건 뭐건 이긴 것은 이긴 것, 압도한 것은 압도한 것이었다. 마녀들은 처음 경험한 일방적인 패배에 지수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위축되어있었다. 주도권은 이쪽이 쥐고 있다. 이것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오셨군요.”
흑마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수가 방의 중앙에 앉았다.
“들었겠지만 티파티의 방침이 바뀌었다. 이제부터는 전면전이야. 이것저것 따지는 것 없이 밀고 들어간다.”
지수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선언했다.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일반인들이 휘말리지 않게만 하면. 요점은 하나다. 난동을 피워서 마왕을 끌어내는 거지.”
“마왕을 끌어낸다고!”
지수의 말에 마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했다. 이쪽에서 마왕을 끌어내려 들다니. 파격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침과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제정신이야? 아무리 당신이라도 마왕이랑 싸우는 건 무리라고! 전대 용왕을 속수무책으로 끝장내버린 놈이란 말이야! 지금쯤이면 더 강해져있을걸? 자극하지 말고 그냥 놔둬!”
적마녀에 이르러선 아예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있었다. 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얼굴에 빡 힘을 준 채 정색하는 표정을 유지하는 건 상당히 힘들었다. 그것이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적마녀가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손가락으로 푸른 머리카락을 꼬아내며 발언한 건 청마녀였다. 그녀는 지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생각도 없이 막무가내로 마왕을 끌어낼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용왕쯤 되는 남자라면 마왕을 쓰러뜨리는 건 몰라도, 어느 정도 버티는 것 정도야 간단할 거 아냐. 그렇다면 대화를 할 여지가 있어. 마왕과의 협상. 그게 당신의 노림수지? 중요한 때 방해 받지 않도록 미리 어떻게든 해두려는 거야.”
부연한 청마녀의 말에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비슷하긴 했다.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면 마왕을 만나는 것 자체가 지수의 목적이라는 것이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지수는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란 존재를 만나보고 싶었다.
청마녀의 말을 들은 적마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혼자 섣불리 흥분해서 소리친 게 부끄러운 것 같았다. 황마녀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도 벅차다는 듯 이쪽과 저쪽을 연이어 휙휙 돌아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흑마녀가 말했다.
“목적을 다시 확인하는 겸, 정보를 교환해보죠.”
흑마녀가 발언을 시작하자마자 다른 세 마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처음 독단으로 지수를 데려왔을 때는 동료들에게 추궁당했지만, 평소 모든 마녀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리더인 건 틀림없어 보였다. 지수가 흑마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저희들의 비원은 이계의 침식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거예요. 그걸 위해선 여왕의 봉인을 부술 필요가 있고요.”
여왕의 이름을 들은 지수가 턱을 매만졌다. 용왕, 마왕과 함께 대전쟁의 주적이었던 재앙. 세간에선 ‘모든 몬스터의 어머니’라고 불리지만, 마녀가 설명해준 여왕의 정체는 그 이상이었다. 여왕의 능력은 일종의 테라포밍이라 할 수 있었다.
흉계포식. 세계 그 자체를 자신에게 맞는 환경으로 강제로 개변시킨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절대적인 능력이었다.
이치와 법칙을 자신이 살고 있던 세상의 것으로 덮어씌우고, 씨앗을 심듯이 온 세상에 이계의 파편을 퍼트린다. 던전도 게이트도 각성자도, 전부 여왕의 존재로 인해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왕이야말로 이계의 침식의 근원이었다.
“당연히 모든 봉인을 부수는 건 아니예요. 여왕의 본체가 풀려나면 침식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니까. 봉인의 기둥을 절반만 깨버려도 침식은 알아서 다시 시작되겠죠.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기둥은 총 합쳐서 세 개.”
무당 허다인에게 하나, 불가살이 백묵에게 하나. 그 둘이 함께 꽁꽁 숨기고 있는 어딘가에 하나. 나머지 하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추측이 가능했다. 애초에 대전쟁에서 여왕을 멋대로 봉인한 주체는 따로 있었으니까.
“나머지 하나는 마왕에게 있겠지.”
지수의 말에 흑마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잘 된 이야기였다. 마왕이 가진 봉인의 기둥을 파괴하는 건 무리겠지만, 거꾸로 마왕이 누군가에게 쓰러지지 않는 이상 여왕의 본체가 풀려나게 될 일은 없다는 뜻이니까.
콧숨을 내쉰 지수가 손깍지를 꼈다.
“그럼 이번엔 이쪽의 정보를 줄 차롄가. 그 전에 너희들에게 정보의 대가로 약속받아야 할 사항이 있다.”
“뭐? 약속?”
그 말에 적마녀와 황마녀가 얼굴을 찌푸렸고, 청마녀는 재미있다는 듯 눈썹으로 호를 그렸다. 흑마녀는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듯 불만스러워하는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한 번 숨을 들이쉰 지수가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입을 열었다.
“적의 전력과 구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주지. 그 대신, 불식과 누각의 그 누구도 죽이지 마라.”
황마녀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부터 할 것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그런데 적을 죽이지 말라니, 억지를 부리는 것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흑마녀마저 이런 말은 예측하지 못했다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먼저 발끈해서 적막을 깨뜨린 것은 적마녀였다.
“용왕이니 뭐니 하더니 완전히 얼간이잖아!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이쪽이 우세해도 상대는 육영웅이야, 그렇게 봐주다가는 우리 쪽이 다 죽어버릴걸!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읍!”
떠들던 적마녀가 입을 다물었다. 옆에 앉아있던 청마녀가 손으로 적마녀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읍읍대는 적마녀가 저항했지만 청마녀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말했다.
“좋은 판단이군.”
“…별 말씀을.”
청마녀가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웃어보였다.
그리고 휙 고개를 돌려 적마녀를 노려보았다. 대체 얼간이가 어느 쪽인지! 눈앞의 용왕은 지금 이 저택 거의 전체를 자신의 마력으로 덮은 채 대화하고 있었다. 이만한 영역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마녀들에 대한 과시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불식 길드의 전력에 대해선 이미 대강 파악하고 있어요. 그런 조건을 걸기엔 수지가 안 맞는걸요.”
냉정하게 따져본 흑마녀가 말했다. 그녀는 지수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지만, 무조건적으로 그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이끄는 장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말에 지수가 피식 웃었다.
“그건 해봐야 몇 주 전을 기준으로 한 전력이겠지. 불식 1팀의 오성화와 김혜성은 이미 S급 수준에 다다랐다.”
흑마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귀중한 정보였다. 모르고 있었다면 잘못 판단해서 공격했다가 맹점을 찔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아무도 죽이지 말아달라는 지수의 요구를 따르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 흑마녀의 생각을 끊어내며 지수가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누가 불식의 정보만을 알려주겠다고 했지? 당연히 누각의 정보도 알려주겠다는 말이다.”
모든 마녀들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말이 표정에 글자로 쓰여있었다. 누각이라는 길드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정보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바깥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으니까. 도대체 어떤 경로로 알아낸 거지?
하지만 아무리 바라본들 지수의 입에서 대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정말로 온갖 수수께끼에 감싸여있는 인물이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 남자를 아군으로 끌어들여서 다행이라는 점이었다. 마녀들의 긴장을 읽은 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하게 해줄 테니.”
지수가 안주머니에서 펄럭이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
그것은 하나의 도박이었다. 정말로 가능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국면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었다.
이야기의 정령인 재버워키는 처음 계약할 때 지수의 과거를 전부 읽어들였고, 밴더스내치는 서민하의 기억과 정신에 간섭한 용왕 아그리올라의 정수다. 둘이 힘을 합친다면 지수의 기억에서 한 장면을 추출해내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떠올려야 하는 것은 지수가 완전히 풋내기 각성자였던 시절이었다. 헌터 라이센스 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한 직후의 일.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지수에게 오성화가 다가와 넘겨주었던 물건.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면.
‘혹시 이 다음에 예정은 있나?’
‘지금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뒤적여지는 기억 속에서, 페이지가 촤르륵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기억을 포착한 지수의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그때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힐끗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력의 구조를 해석해낼 수 있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어떤 보안도 우회책도 해석 스킬 앞에선 무의미했다. 회로의 구성은 완전히 해명되었다. 그리고 구조를 해명한다면, 이 손으로 똑같이 재현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다행히 부적을 비롯한 스크롤을 만드는 법은 누각에서 배워온 뒤였다. 눈을 뜬 지수는 곧바로 기억에서 홈쳐본 물건의 복제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건 완전히 반칙인데? 기습이라는 말로도 부족해.>
옆에서 보고 있던 밴더스내치가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비장의 카드가 지수의 손에 들어왔다.
***
지수가 안주머니에서 펄럭이는 종이 한 장을 꺼냈을 때, 마녀들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겉보기에 무언가의 스크롤처럼 보였다. 마도구 제작에 깊은 성취를 가지고 있는 흑마녀만이 그 용도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텔레포트 스크롤인가요?”
전송 주문이 담겨있는 일회용의 스크롤. 스크롤에는 마법사의 마력 자체를 묶어둬야 하는 탓에 엄청나게 비싸긴 하지만, 텔레포트 스크롤 그 자체로는 별 대단할 게 없었다. 흑마녀라도 이 자리에서 몇 장이고 뽑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중요한 것은, 스크롤 자체가 아니라 스크롤의 도착점이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의 도착점은 단지 좌표를 지정하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미리 ‘등대’라고 불리는 마력 구조물을 목적지에 새겨 스크롤과 연동시켜두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안전이 보장된 곳 이외로는 이동할 수가 없다.
“그래, 도착점은….”
눈을 감은 지수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김혜성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는 지금 학원의 초기 강사진들을 구성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다고 했다. 김혜성의 이탈. 즉 오성화와 불식 1팀이 다음 원정을 떠나는 순간, 불식의 유효한 전력은 오로지 백묵만이 남게 된다.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이제는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 때, 처음으로 헌터가 되고서 오성화에게 받았던 이 스크롤은. 지수와 불식 길드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나 마찬가지인 이 스크롤에 담긴 도착점은.
“도착점은, 불식의 길드장 백묵의 옆이다.”
마녀들이 숨을 삼켰다. 장기로 따지자면 장군을 둔 한 수나 마찬가지였다. 이걸 사용하는 건 반칙에 가까웠지만 이쪽도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불가살이 사냥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