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90화 (90/176)

90화.  < 축제는 시끌벅적해야지 (1) >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지수가 해석 능력을 가지게 된 원인이 된 남자이자, 지수가 가장 동경하던 작가였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와 ‘마왕루드비히’가 동명이인일 거란 생각 따윈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마성의 작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설마 마왕일 줄이야.

“대체 뭐하는 작자입니까?”

지수가 조금쯤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재버워키의 환상 속에서 보았던 루드비히가 떠올랐다. 정말로 무슨 정보든지 좋았다. 아무튼 그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첫 위화감에서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에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가.

하지만 흑마녀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섣불리 알려줄 수 없는 정보라는 건가? 하지만 흑마녀와 자신은 이미 운명공동체였다. 마왕에 대한 정보가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서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여기서 알려주지 않는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흑마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모른다고요. 완전히 정체불명이예요. 마왕은 그 정도의 힘을 지니고서도 세상 바깥쪽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이쪽 세계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쪽에서도.”

<사실이야. 그래서 아그리올라도 방심했다 그 꼴이 난 거지. 기고만장해서 갖고 놀려고 하다가 심장을 뜯기고 용언을 봉인당하고. 하긴 방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왕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거든.>

안쪽에서 들려온 밴더스내치의 말에 지수가 놀랐다.

‘그렇게까지 강하다고?’

해석 능력의 폭주로 엿본 미래에서, 부활한 직후의 아그리올라를 잠깐 만났던 적이 있다. 그 때 지수가 아그리올라에게서 느꼈던 건 절망이라는 단어 하나였다. 전성기의 용왕이라면 그보다 더 강하겠지. 그런데도 이길 수가 없다고?

<마왕에게는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과정에 상관없이 아무튼 이긴다. 그런 흐름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었어. 하지만 별 일 없으면 어딘 가에 짱박혀있을 테니 싸울 일은 없겠지.>

흑마녀의 말에 따르면 마왕은 아무 사건도 일으키지 않고 어딘가에서 느긋하게 이 세계의 일상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아그리올라처럼 모습을 숨기고 암약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냥 이 세상의 문화에 적응해 자연스레 살고 있다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기분 내킬 때마다 여행을 다니고. 어떨 땐 좋아하는 미술가의 전시회에 참가하고. 팔자 좋게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대전쟁의 마왕이.”

위장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그것이 목적이다. 혼자 조용하게 지내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살고 있다.

“그런 남자예요. 마왕이라는 이름도 자신이 칭했기에 붙은 것일 뿐, 유명세 따윈 요만큼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 불합리한 수준의 힘으로 대전쟁을 억지로 끝내버렸죠. 겨우 이 세계에 왔는데, 자신이 원하는 평온함에 방해가 된다면서.”

나는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전시회나 박물관도 가봐야 하니, 대전쟁인지 뭔지 하는 짓거리를 당장 끝내야겠다.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지수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왕이라고 해서 얼마나 흉악한 자인가 걱정하고 있었지만, 흑마녀의 말만 들어봤을 때 그의 인상은 오히려….

“착한 사람 아니예요?”

“전혀 아니예요. 오히려 다 망쳐버린 거나 마찬가지죠. 그가 개입하지만 않았어도 대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결착이 지어졌을 거예요. 지금처럼 전쟁의 피해란 피해는 다 입고서 해결된 거 하나 없이 시한폭탄을 떠안고 있는 게 아니라.”

흑마녀의 말에 지수가 턱을 매만졌다. 즉, 선악을 초월해서 단지 자기 멋대로라는 것이었다. 상당한 민폐쟁이였다.

흑마녀가 말하는 어투를 보아하니 그녀 또한 마왕을 ‘적’이나 ‘아군’ 같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자연 재해 비슷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 했다. 너무 소란을 피우면 폭풍이 몰려와서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가버린다. 그런 수준의 인식이었다.

‘눈치라도 보고 있는 것 같군….’

하지만 지수의 생각은 달랐다. 루드비히가 쓴 소설을 읽고 심취했던 지수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합리와 지성으로 움직이는 자였다. 다시 말해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와 만나는 건 지수의 소망이기도 했다.

“들어보니 확실히 제가 말한 방법으론 안 될 거 같네요.”

“맞아요.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알아주셔서 다행….”

“더 큰 난동을 부려야겠어요.”

네? 멍하니 눈을 뜬 흑마녀를 내버려두고, 지수가 뚜벅뚜벅 지하의 홀을 향해 걸어갔다. 저쪽이 나타날까 안 나타날까 전전긍긍하며 일을 진행하는 건 계획도 뭣도 아닌 단순한 기도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었다.

“척척박사 님!”

“제가 방석도 깔아놨습니다, 하하하하!”

문을 연 지수는 매드 티 파티의 면면들을 한 번씩 스윽 훑어보고, 마음의 준비를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누가 척척박사라고?”

지수의 얼굴에 차가운 정색이 흘렀다. 웃고 있던 사람들이 충격과 함께 우뚝 멈추었다.

‘그거’를 할 시간이었다.

***

사무실의 오성화는 불만이라는 듯 손바닥에 턱을 괸 채 앉아있었다. 선글라스를 뺀 오성화가 종이를 훑어보았다. 다시 읽어보아도 내용은 똑같았다. 불식 1팀 부팀장으로서의 활동을 쉬고 싶다는 의미였다. 오성하가 앞쪽을 올려다봤다.

“저번에 빌린 맨투맨 아직도 안 돌려줘서 그래? 아끼던 거였으면 그냥 말을 해주지. 이런 식으로 돌려서 표현하는 건 어? 내가 꿍쳐먹으려던 게 아니라 그냥 까먹어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 대체 뭐가 불만이야?”

“불만 같은 거 없는데요.”

오성화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자, 일어서있던 김혜성이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은 상사와 부하의 관계라기보단 단순한 친구에 가까운 사이였다. 김혜성 또한 바지에 주머니를 꽃고 있는 가벼운 태도였다. 오성화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만들어질 학원의 강사로 일한다…. 불식 1팀의 에이스 중 하나가 고작 학원강사라고? 어울리지 않는데.”

“뭐 원래 해보고 싶었던 일이기도 하고, 요즘 던전행이 재미없기도 하고. 불식에서 나간다는 건 아니예요.”

두 손을 뒤통수에 올린 김혜성이 의자를 끼익거리며 말했다. 오성화에게는 개인적인 은혜가 있고, 불식 길드에의 의리 또한 있다. 헌터 1팀의 부팀장으로서 가진 책임감 또한. 자신이 빠지는 것으로 1팀의 일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생길 것 같다면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원정들은… 대장 혼자만 있어도 충분하고도 남잖아요. 제가 있을 필요도 딱히 못 느끼겠고.”

“그래서 너 혼자 재밌는 거 하러 가겠다?”

“부팀장이 쉬는 거랑 팀장이 쉬는 거랑 같나요.”

김혜성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성화는 한숨을 쉬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오성화 스스로도 느끼고 있던 점이었다. 나타나는 던전이 오성화와 김혜성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불식을 탈퇴하겠단 것도 아니고, 딴 일 좀 하다 오겠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었다.

“뭐, 나쁜 이야기는 아니네. 네가 마음먹을 정도면 제대로 된 곳일 테고. 괜찮은 애가 있으면 소개시켜줘.”

“대장 외로워요?”

“인재 말이야, 인재!”

일어난 오성화가 둘둘 만 종이로 김혜성의 머리를 때렸다. 종이엔 약한 투기가 담겨있어 몽둥이처럼 딱딱했다. 아야야. 김혜성이 손으로 맞은 곳을 감쌌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김혜성은 앉아있는 오성화에게 꾸벅 감사인사를 보냈다.

“허락해주셨습니까?”

김혜성이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김혜성의 제자인 전승민이었다. 지수의 헌터 라이센스 시험 동기이자 실기시험 차석 합격자. 그 또한 지금은 B급 헌터로서 당당한 일인분의 마법사였다.

“그래. 이제 고깔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지.”

전승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주머니에서 땡글이 안경을 빼내 쓴 두 남자가, 건물의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

매드 티 파티의 회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굴 보고 척척박사냐니, 그야….”

척척박사. 마법사들만이 모이는 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현자. 이 모임에 있어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아주 커다랬다. 이계의 이치를 해명하고 퍼트리려는 자다. 언젠가 분명히 티 파티의 동지로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오늘 맞아떨어져, 고대하던 그 현자와 만남을 갖게 되었다. ‘접선’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흑마녀가 직접 ‘초대’해서 가입한 회원은 오랜만이었다. 실제로 만난 척척박사는 생각보다 더 유하고 소박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가진 능력에 마땅히 따라붙어야 할 오만함, 또는 상대를 전율시키는 압박감이 없다.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밖에 나갔다 돌아왔을 때 척척 박사는 반쯤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의 표정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너희들이 이 일에 대해 진심이라는 건 잘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 걸맞는 태도를 보여주는 게 예의겠지.”

목소리는 낮게 내리깔렸다. 회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장소 전체가 그의 손아귀에 장악당한 듯한 압박감이 있었다. 실제로, 지금 지수는 영역을 펼쳐 방 안의 모든 움직임을 완전히 수중에 넣고 있었다. 지수가 손을 눈 쪽으로 가져갔다.

지수가 차분한 몸짓으로 렌즈를 빼냈을 때 나타난 건, 은은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였다. 평범한 눈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짐승의 그것처럼 동공이 세로로 열려있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천적을 마주대하는 듯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척척박사? 그건 내가 사용하는 이름 중의 하나일 뿐.”

그리고 지수의 머리에서 감춰두었던 용의 뿔이 발현되었다. 티 파티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저 뿔은 설마!”

“모, 몬스터!”

“인간과 몬스터가 섞인… 그 협회장이 실험했다던?”

번뜩 눈을 뜬 지수가 허둥대는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정숙해라.”

그 말에 실제로 홀 안이 조용해졌다. 말하던 남자들은 숨이 걸리는 소리를 내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단지 위압당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폐가 쪼그라드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우리는 시험당했던 거다.’

그렇게 납득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지금 이 모습에야말로 그가 가지고 있는 힘과 지혜에 걸맞은 품격이 있었다. 이계를 동경하는 예술가까지 가면, 드러난 지수의 풍채를 보고 커다란 감명이라도 받은 듯한 눈이었다.

차갑게 정색한 지수가 자신의 수족의 이름을 불렀다.

"재버워키."

다리를 꼬고 앉은 지수의 아래에서 그림자가 끓어올랐다. 나타난 것은 수백 수천의 활자로 이루어져있는 부정형의 괴물이었다. 새까맣게 흔들리던 괴물은, 이윽고 모자를 눌러쓴 채 망토를 휘날리는 정령으로 변해 지수의 오른쪽에 섰다.

“밴더스내치.”

그리고 지수 곁에서 흐르고 있던 은은한 기운이 형체를 이루었다. 나타난 것은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진보라색 드레스를 흔들던 유령은, 이윽고 그 보석 같은 눈동자로 눈웃음을 흘리며 지수의 왼쪽에 섰다.

“이야기해 봐라.”

검은 괴물과 하얀 여인을 대동한 지수가 말했다.

”너희들 앞에 있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그 말에 재버워키와 밴더스내치가 고개를 숙였다. 피부가 찌릿찌릿해질 정도의 마력이 느껴졌다. 두 존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최대한의 경의를 담고 있는 목소리였다.

<나의 주인. 모든 신비를 풀어헤치는 눈을 가진 자.>

<나의 왕. 아그리올라를 쓰러뜨려 그 이름을 계승한 자.>

재버워키는 허주화의 술로 인간의 인지를 얻었고, 밴더스내치는 지수의 마력 자체를 빙의체로 삼았다. 그 모습과 같이, 목소리 또한 홀에 있는 사람들에게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눈치 빠르게 그 의미를 이해한 몇몇은, 경악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곳은 매드 티 파티였다. 아그리올라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자들 정도야 있었다. 대전쟁의 재앙 아그리올라. 그녀를 쓰러뜨리고 그 이름을 계승했다는 것은.

청년에게 나있는 저 뿔과 금색의 눈동자가 의미하는 것은.

“요… 용왕…?"

“그래, 내가 용왕이다.”

다리를 꼰 채 깍지 낀 지수가 담담하게 수긍했다.

용왕. 대전쟁을 휩쓸었던 재앙. 그럼에도 홀 안에서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웅성거리기는커녕 속삭임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을 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멈춰있는 자들을 향해 지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처럼 후폭풍을 두려워하며 찔끔찔끔 일을 벌일 필요는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날뛰면 그걸로 좋아.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냐고? 그 때는 내가 놈을 죽인다. 이제부터가 너희들이 기대하던 대난동이다.”

"큽."

순간 무언가 난 소리에 사람들이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흑마녀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마치 웃음을 못 참겠다는 듯이. 저 차분하고 단정한 흑마녀가 저렇게 환희에 가득찬 얼굴을 보여주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무엇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반면 앉아있는 지수는 그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수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쟁을 시작해라. 용왕이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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