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그러면 막간을 이용해서 (6) >
‘마법학원’에 대한 출자 의사의 표명은 줄줄이 이어졌다.
티 파티 회원끼리의 자존심 겨루기 문제인지, 아니면 정말 ‘척척박사’에게 호의를 얻는 것이 그만큼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는 건지. 출자액의 일등 경쟁은 치열했다. 마지막에는 지수 쪽에서 믿지 못해 눈을 찌푸릴 수준의 액수가 되어있었다.
결국 파워게임에서 이겨 일등을 차지한 건, 이계 문물의 선독점이 어쨌다느니 하던 그 사업가였다. 그러한 경쟁을 제외하고도 대부분의 회원들이 기꺼이 출자하길 원하고 있었다.
척 봐도 평범한 재력이나 권력 같은 것은 이미 넘치도록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상한 수준의 호응이었다. 아직 제대로 기획을 검토해보지도 않아놓고서, 단지 척척박사라는 이름값만으로 이만한 돈을 융통해주겠다고?
지수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멋져요! 정말 멋집니다!”
“나는 바로 이런 걸 원했어!”
“그렇게 모인 이들을 이용해서 더 큰 신비를!”
지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지수는 이들에게 기관의 설립이 ‘돈이 된다’는 걸 천천히 설명해 납득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어려있는 건 다른 종류의 욕망이었다. 그런 게 세워지면 자신들의 꿈에, 더 깊은 이능에 다가설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솔직히 기쁜 오산이었다. 이 모임에 얼굴을 내비치고 있는 인간들은 지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쳐있는 듯 했다. 아예 집회의 이름을 매드 티 파티에서 이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줄여서 이사모 정도로 바꾸는 게 나을 듯 싶었다.
‘이 정도면…생각하고 있던 건 대충 다 할 수 있겠어.’
지수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애초에 지수는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런 게 목적이라면 이런 번거로운 것 보다 효율적인 수단이 얼마든지 있었다. 단지 이후의 국면에 휘두를 패를 준비할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생각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들볶이던 지수가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오자, 흑마녀가 따라나섰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척척박사 님은 자리를 마련할 때마다 제 예상을 깨버리시네요.”
“그렇게 이상한 소리로 들렸나요?”
“뜬금 없으니까요. 갑자기 학원 설립이라니. 저는 솔직히 이번에도 ‘그걸’ 하실 줄 알고 조금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거’란 게 뭡니까?”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묻자, 흑마녀가 척 정색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이 놈도 저 놈도 하나같이 기분 나쁜 얼굴이군. 척척박사? 그 따위 것이 내 진짜 정체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놈들 앞에 서있는 게 어떤 존재인지 아직도 모르겠나?”
“오케이. 그만!”
식은땀을 흘린 지수가 손바닥을 내밀며 제지했다. 하지만 흑마녀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연극투의 대사를 이어나갔다.
“용왕의 어전이다. 고개를 숙여라!”
“아아아아아아아악!”
지수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들으니 자신이 저렇게 비춰졌나 싶어 자괴감이 흘렀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할 일 이기도 했다. 흑마녀 또한 진심으로 놀리는 얼굴은 아니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한 농담일 것이리라.
이내 흑마녀가 테라스의 선반에 팔을 기댄 채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무슨 생각이에요? 돈이라면 있는데.”
지수는 이런 종류의 계획에 있어 돈은 아무리 있어도 충분하지 않은 법이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말꼬리를 잡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지수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하긴 슬슬 사실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대충 그려놓은 청사진이 있는데요.”
지수가 만들어내려 하는 것은 마법을 가르치는 학원이라기보단, 일종의 기관에 가까웠다. 물론 처음에는 학원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마법사가 아닌 다른 각성자들까지 전부 학생층으로 끌어들인다.
“돈벌이가 목적이라고 생각돼서는 안 돼요. 일종의 사회 기여 같이. 각성자 전체의 질을 높이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돼요. 초기 이미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면 의미가 있나요? 그냥 자원봉사나 마찬가지잖아요.”
흑마녀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두드리며 물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설령 비싼 수업료를 받는다고 해도, 배운 걸 쏙 빼먹고 달아났다간 결국 이쪽의 밑천을 퍼주는 꼴이 된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지수가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점이 좋은 거예요. 수업료니 뭐니 하는 건 대충 적당히 붙이면 돼요. 필요하다면 그냥 무료로 돌려도 상관없는 수준이죠. 중요한 건 학생들에게 공급해주는 정보에 단계별로 차이를 두는 거예요. 상위반과 하위반 개념으로.”
“음, 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갈피를 잡지 못한 듯 흑마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솔직히 말해서 지수 또한 확신 따위 없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방금 자신을 얻었다. 자금도, 인력도, 정보도 이쪽이 전부 쥐고 있다. 이것은 가능성 있는 계획이었다.
손깍지를 낀 지수가 계속해서 자신의 청사진을 말해나갔다.
“어느 정도 지나면 각성자들 사이에서 ‘학원’이 단기간에 상위 헌터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소문이 퍼질 겁니다. 이건 백 퍼센트예요. 그냥 사실이니까요. 얼마 안 있어 학원은 하위 헌터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거미줄은 거의 다 쳐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지수가 검지로 선반을 두드렸다.
“바로 거기서, 단계별 수강의 노림수가 드러나요.”
학생의 형편과 수준에 맞는 과정을 교육한다. 합리적인 시스템이다. 이견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합리에 함정이 있었다. 학원에서 많은 것을 얻었을 수록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 그 구조가 각성자들을 학원에 의존시킨다.
“학원의 커리큘럼이 최종적으로 B급 하위 수준의 헌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가정하면, 학원은 C급에서 F급까지의 헌터들을 체계적으로 나눠서 관리할 수 있게 돼요. 그 과정을 외부에 죄다 공개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길드나 파티들이 그걸 보고 참고하려나요?”
“네. 하위 헌터들 사이에서 평가 기준이 형성됩니다. 저 사람은 학원의 3클래스 과정을 밟고 있구나, 저 사람은 아직 2클래스 과정도 졸업하지 못했구나.
결국 학원은 헌터 협회의 등급 심사나 마찬가지인 입지를 가져가게 되겠죠.”
시기상으로도 딱 적절했다. 유일한 각성자 평가기관이나 마찬가지인 헌터 협회. 그 협회가 지금 전례 없는 수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파이를 나눠먹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리고 토대가 갖춰지는 순간 물어뜯기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은 간단해요. 학원은 모든 각성자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향상되는 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지금 대전쟁의 영웅이란 자들이 자신들만 힘을 독점하려 한다…. 각성자들의 성장이 막혀있는 건 그들 탓이다! 그런 식으로 네거티브를 펼치는 겁니다. 설득력은 충분해요. 이쪽엔 해온 게 있으니.”
불식 길드는 기성 권력의 대표나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협회 내전을 단숨에 제압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단 이야기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 은혜를 통해 신생 협회에도 불식의 입김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누각은 아예 모든 걸 꽁꽁 숨기고 있는 신비주의 길드였다.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갈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해명은 불가능하겠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모든 각성자들의 성장을 막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만약 해명하면 해명하는 대로 좋다. 위험할 수 있어 막아두고 있다. 그런 말을 했다간 책임론부터 시작해 온갖 꼬투리 잡기로 논쟁이 번져나갈 테고, 국면은 혼란한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것 또한 이쪽이 원하는 바였다.
지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일반 각성자들의 여론은 단숨에 뭉치겠죠. 학원에서 빨고 있는 꿀의 맛이 잊혀지지 않을 테니, 꿀을 더 빨 수 있는데 저 놈들이 막고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고 미쳐 날뛸 겁니다. 그렇게 계속 압박하면 저쪽은 고립될 테고.”
우리는 대중 사이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다, 가장 치명적인 순간에 신중하게 전력을 투입한다. 이렇게 하면 섣불리 정면 승부를 하는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봉인을 파괴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말한 지수가 부끄럽다는 듯 앞머리를 만졌다.
“뭐, 실제로 하면 이렇게 생각대로 잘 되지는 않겠죠. 사실 제대로 음모 같은 걸 세워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일단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갖춰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흑마녀는 그런 지수를 질렸다는 듯 쳐다보았다.
“정말 제대로 흑막이시네요.”
“칭찬 맞죠?
“칭찬이예요.”
흑마녀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마녀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상당히 악질적인 방법이었다. 비열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하지만 매드 티 파티의 재력과 영향력이 있다면 실제로 가능할 것 같은 계획이라는 점이 무서웠다.
‘만약 어디서 일이 꼬여도, 상황을 제어하는 데에 쓸 만한 패 하나가 손에 들어온다 치면 본전은 뽑고도 남아.’
하지만 이내 흑마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일반 각성자들의 여론을 이용해 육영웅을 압박하는 시끌시끌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 실현 가능성이니 뭐니 다른 걸 다 제쳐두고서라도 그 방법을 써먹을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있었다.
‘정확히는, 한 명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생각을 정리한 흑마녀가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빙 돌아가는 방법이에요. 용왕이라는 전력이 손에 들어왔는데 굳이 그런 방법을 쓸 필요는 없어요.”
지수가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두 길드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학원이라는 기관 하나를 통째로 만든다는 건 너무 커다란 수고를 들이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 비효율적이었다. 아무래도 수지가 맞지 않았다.
“육영웅 하나에 마녀가 둘씩 붙는다 쳐도 척척박사 님이 남죠. 지금 정면승부를 걸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어요. 육영웅을 빼면 저희를 단독으로 막아설 상대는 없을 테니.”
다른 길드는 수에도 넣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흑마녀 혼자서도 대형 길드를 몇 개나 부수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수가 흑마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흑마녀와 처음 만났을 무렵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협회장과의 싸움, 연구동의 중심에 있던 지수는 알고 있다. 허주의 술을 사용하는 이매와 망량. 흑기사를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던 오성화와 김혜성. 압도적인 출력을 가지고 비룡들을 학살한 정유현. 육영웅인 백묵과 허다인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들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강자들이었다.
‘서민하는 끼어들 일 없을 거라는 게 위안인가.’
다른 이들은 몰라도 서민하는 이 싸움에 개입할 동기 자체가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잊어버렸을 테고. 좋아하는 노래라도 부르고 있으면 된다. 지수가 콧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지수는 웬만해선 그들과 싸우거나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수가 굳이 이계의 침식을 활성화시켜 강대한 마물을 불러낸다는 번거로운 길을 택한 것도 백묵이나 허다인을 죽이라는 게 싫어서였다. 지수가 흑마녀에게 말했다.
“아마 그렇게 만만치는 않을 걸요.”
“만만치 않아도 싸울 거라면 속전속결로 끝내야 돼요.”
어떤 중재도 들어오지 못하게. 선반에 몸을 기댄 흑마녀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지수에게 흑마녀가 말을 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한다면 적어도 은밀하게 해야죠. 시끄럽지 않게. 들키지 않도록. 사람들한테 스스로 이계의 침식을 활성화시키라 요구하게 만들겠다니, 당치도 않아요.”
“왜요?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적어도 비겁하다거나 그러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건 뒤쪽에서 활동하는 마녀들과 지수의 주된 어드밴티지였다. 이걸 활용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러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흑마녀가 말했다.
“용왕인데 모르는 거예요? 대전쟁 때 활동하던 용왕이 그 꼴을 당했잖아요. 저는 척척박사 님이 제일 무서워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싸워보시려는 거예요?”
“무서워해요? 싸워보다뇨. 뭐랑 말입니까.”
지수가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흑마녀가 이름을 꺼내기도 조심스럽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든 걸 망쳐버리는 자….”
대전쟁이 가장 격화된 순간 전장 한복판에 나타나, 용왕의 심장을 뜯어내고 용언을 침묵시킨 뒤, 알아서 죽여보라고 던져줘버린 존재. 마물의 여왕과 인간의 용사 양쪽 모두를 봉인 안에 처박아놓고, 뒤처리는 나 몰라라 하며 떠나버린 존재.
“마왕.”
대전쟁을 다시 벌인다거나 하려는 징조를 보였다간, ‘시끄러운 건 질색이다.’라는 말과 함께 나타나선 모든 걸 다 박살내버리고 유유히 떠나가는 존재. 걸어다니는 자연재해인 주제에, 자신은 느긋하게 이 세계의 일상을 즐기고 있는 존재.
“마왕 루드비히 말이예요.”
혐오와 외경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흑마녀는 지수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