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그러면 막간을 이용해서 (5) >
“협회장 말입니까.”
새까만 집행부의 제복을 입은 채 서있는 정유현이 말했다.
“설마 그쪽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정유현을 찾아온 건, 헌터 협회 이사회의 중책을 맡고 있는 남자였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협회장의 충견이었다. 정유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지금 당장 여기서 이 남자를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년인이 꺼낸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그는 목숨 구걸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유현을 협회장으로 만들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유현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이대로라면 협회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웠다.
게다가 협회 내전의 영웅인 정유현을 협회장으로 올리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중년인은 결사적인 어조로 정유현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취임 과정은 이쪽에서 손을 쓰겠네. 우리는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전대 협회장이 구축해놓고 간 협회의 시스템과 권력을 그대로 이용 할 수 있으니까. 증명해보일 수도 있어!”
"흠."
그리고 정유현은 얼굴마담인 협회장이 되어 협회에 대한 불신과 반발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하면 협회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감탄까지 하고 있었다. 숙청당하기 직전의 국면에서 자신들이 살아날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를 찾아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과감함. 요행으로 권력을 잡은 게 아닌 듯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애초에 정유현은 협회장의 자리 따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코웃음을 친 정유현이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냈다.
“있는 짱구 없는 짱구 열심히 굴리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언으로 남기실 말씀은 따로 있으십니까.”
“자, 잠깐 기다려!”
“잠깐 기다려. 유언치고는 간결하군요.”
정유현의 손에 연보라색 소용돌이가 차올랐다. 설마 영웅이라 추앙받고 있는 지금은 사람을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안일한 생각이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집행부가 반쯤 해체된 지금에 와서도, 정유현은 집행부였다.
세간의 이목을 신경쓰느라 물어뜯어야 할 적을 놓치는 집행부 따윈 없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남자가 소리쳤다.
“협력하자는 게 아니야! 우리를 자네 마음대로 써달라는 거네! 가능한 모든 권한을 주지! 아니, 준다기보단 이미 가지고 있지. 지금 자네가 뭘 한다고 하면 말릴 수 있는 인물은 없어! 힘으로도, 인망으로도, 권력으로도 말이야. 그렇잖나?”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힘을 편리하게 휘두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겠다! 흔해빠진 멘트였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번 뒤, 야금야금 다시 조직을 장악해가는 게 이런 치들의 주된 수법이었다. 정유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확실하게 정유현을 흔들었다.
“…돌봐줘야 할 아이들이 많지 않나!”
남자를 쥐포로 찌부러뜨리려 하던 정유현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식은땀을 주륵 흘린 중년인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정유현이라는 인간의 ‘파고들 수 있는 부분’을, 이제야 찾아냈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약자들을 위해 권력이 움직이는 법은 없지! 다른 이가 협회장에 취임한다면, 내실을 다진다느니 새로운 기강을 세운다느니 하면서 방치된 각성자 아이들의 복지와 뒤처리는 뒷전으로 돌릴 게 뻔해….”
정유현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협회장이 터뜨린 일들의 뒤처리. 실험의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와 보상. 남겨지거나 뒤로 빼돌려진 아이들의 탐색과 보호. 유야무야 덮고 넘어가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협회가 불안정할 때,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을 굳이 끄집어내서 처리할 리는 없었다. 우선순위의 문제였다. 조직의 안정화가 먼저다. 누군가는 잘못된 일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수장으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방법은 하나 뿐이네. 자네가 협회장이 되는 것. 그렇게 하면 외부의 반발도 협회 내부의 파벌도 대충 정리가 되지. 곧바로 실무를 재개할 수 있어. 이게 바로 유일한 길이야.”
살고자 꺼낸 말이겠지만 내용 자체는 정론이었다. 당장 협회 내전의 사후처리에 들어가기 위해선 정유현의 협회장 취임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이 뻔했다. 이 시점에서 모든 파벌의 반발을 묵살하고 조직의 톱에 설 수 있는 이는 오직 정유현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눈을 가늘게 뜬 정유현이 말했다. 앞에 서있는 중년인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중년인이 눈을 끔뻑인 순간, 중년인의 바로 뒤에서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을 겨누고 있는 건 모습을 숨기고 있던 김도형이었다.
"벼, 병정…?”
중년인이 경악에 눈동자를 떨었다. 지금까지 바로 뒤에서 뒤통수가 총구에 겨눠지고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채 대화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은폐와 감시에 특화된 능력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 속내는 없는 것 같은데요. 다른 병정들로 정찰해보니 같이 따라온 인간도 없고. 진짜 그냥 목숨 걸고 설득하러 온 거예요, 이 아저씨는.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셨어.”
“그래? 호위 하나 안 붙인 건 처음이군.”
그 말에 중년인이 움찔 입술을 씹었다. 처음이라니. 그렇다면 나보다 전에 만났던 누군가가 있다는 건가? 중년인은 정보를 떠보기 위해 정유현의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도형이 말을 덧붙였다.
“저 개인적으로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늑대 씨가 올라가면 끝나는 일인데 불필요한 다툼을 만들 필요는 없죠.”
정유현은 팔짱을 낀 채 검지로 팔꿈치를 두드렸다.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눈치였다. 내장이 쪼그라드는 긴장 속에서 중년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일이 조금만 잘못돼도 자신은 지금 여기서 숙청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유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쪽의 그 계획은 이사회의 다른 사람들과도 합의가 된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독단으로 찾아온 겁니까.”
차가운 시선에 얼굴을 찌푸린 중년인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네. 하지만 설득시킬 자신은 있어. 하지만 이치를 따져서 설명하면 그들도 이해할 테지.
지금은 공포 때문에 반쯤 공황상태에 빠져있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냉정함을 되찾을 거야.”
그 말에 콧숨을 내뱉은 정유현이, 중년인의 어깨에 손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격려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유현은 중년인의 등을 돌리게 한 뒤, 어깨를 꽉 쥐어 앞으로 밀기 시작했다. 밀린 중년인이 놀라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멈춘 것은 바로 옆의 사무실이었다. 중년인의 손목을 붙잡은 정유현이, 그의 손을 문손잡이 위에 올려놓았다.
“목줄을 채워놓는 건 한 명이면 충분해요. 당신처럼 속에 뱀이 들어찬 늙은이들이 몇 명이나 있으면, 혹시 개수작을 부리지는 않는지 관리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담담한 탓에 섬뜩했다. 위협 따위가 아니라 단순한 이치를 풀어서 설명해주는 어조였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압박감에 천천히 문을 열자, 그곳에는 집행부로서 늑대와 병정이 행한 숙청의 기록이 있었다.
“아, 아아….”
기형적으로 팔다리가 뒤틀린 채 죽어있는 이들의 대부분은, 정유현을 암살하기 위해 고용된 뒤쪽의 비등록 각성자들이었다. 그리고 널브러진 시체들 중에선 중년인이 알고 있는 얼굴들 또한 있었다. 같은 헌터 협회 이사회의 중역들이었다.
“눈 똑똑히 뜨고 박아넣으십시오. 섣불리 선을 넘은 인간들이 다들 어떻게 되었는지, 제가 당신을 죽이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당신은 똑똑하니 이해할 수 있겠지."
중년인이 쾅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충격받아서 스스로 무릎 꿇은 것이 아니었다. 정유현의 손에서 발현된 연보라색의 압박이 그를 끊임없이 땅바닥에 짓누르고 있었다. 반쯤 엎드린 상태가 된 중년인에게, 정유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열심히 도움이 되도록 해. 내가 계속, 당신은 쓸모 있으니 죽이기엔 아깝다고 생각할 수 있게.”
“그, 그렇다면…!”
필사적으로 올려다보는 얼굴에서 땀이 뻘뻘 흘렀다. 중년인은 바닥에 쳐박히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유현이 연보라색의 압박을 거두어들였다. 그럼에도 중년인은 일어서지 않고 엎드려있는 채였다.
“그래. 내가 다음 협회장이 된다.”
모든 이사회 위원들의 앞에서 정유현이 선언했다. 김도형이 짝짝 박수를 쳤다. 반대를 말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
매드 티 파티는 그 이름답게 반쯤 미쳐있는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지수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그러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지수는 온갖 인간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옆에서 담배를 문 노년이 말했다.
“이계의 문물이라는 건 혁신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아이템이죠. 그 연결통로를 선점하고 독점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부를 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나라를 세울 수도 있겠죠. 이런 시대에 태어난 걸 행운이 아니면 뭐라 하겠습니까.”
“저런 돈에 미친 늙은이 말은 듣지 마세요! 척척박사 님은 빛의 강이 흐르는 숲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하늘에 매달려 거꾸로 서있는 성은요? 그런 풍경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거예요!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다른 사소한 일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딸이 있네. 지금은 병상에 누워있지. 다른 건 필요 없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비약. 그걸 구한다면 말해주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 테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 양반들은 소개해달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다가와서 그들의 인생사와 야망을 풀어내고 있었다. 솔직히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지수는 단지 가볍게 얼굴도장을 찍으러 왔을 뿐이었다.
지수의 영혼 안쪽에서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이 집회는 말 그대로 집회일 뿐, 서로 견고한 동맹은 아니야. 서로 간에도 암암리에 견제나 방해가 들어오고 있겠지. 어지간히도 왕님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고 싶나 본데.>
흑마녀는 이 집회의 시작이자 중심축으로서 완전한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수는 달랐다. 어느 쪽이든 노력한다면 파벌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것도 마녀를 제외하고선 거의 유일하게 이계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거물.
흑마녀의 철칙에 의해 회원끼리의 싸움은 할 수 없지만, 사이가 나쁘고 좋고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같은 목적을 공유한다고 해도, 원하는 과정과 이해관계는 일치하지 않았다.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자신의 야망에 다가서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척척박사라는 인간을 포섭해야만 했다. 그 결과가 지수 하나를 중앙에 두고 몰려들어서 자기 인생사를 떠들고 있는 이 촌극이었다. 지수가 눈길을 돌렸다.
흑마녀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마녀의 입이 움직였지만 뭐라고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들리지 않아도 명확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발푸르기스의 밤을 휘두르고 싶다면, 그 뒤에 있는 매드 티 파티의 인간들까지 포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먹어치워 보세요.’ 흑마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입지를 바닥부터 다져주려는 건가?’
친절했다. 정말 과할 정도로.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들볶이는 게 싫은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찮으니 썩 꺼지라 할 수는 없었다. 이것들 모두 지수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면면들이 바깥에서는 식사 약속 한 번을 잡기도 힘든 재계나 정계의 거물들이었다. 그 모두가 이쪽에 잘 보이려고 알랑방귀를 뀌고 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수가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그것으로 왁자지껄 떠들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모두가 ‘척척박사’의 발언에 집중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수는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일까, 이들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한 뒤,
“교육 기관을 하나 세우려고 합니다.”
천천히. 방금까지 이야기하던 면면들을 쳐다보았다.
“기본적으론 마법사들을 가르치지만, 마법사가 아닌 각성자들에게도 기본적인 마력의 운용에 대해 체계적으로 교육할 계획입니다. 기본 커리큘럼은 이미 완성되어 있고요.”
그들이 가장 원하고 있는 건 아마, 지수와 이 집회 바깥에서도 유지되는 사적인 인연을 맺는 것. 그리고 점수를 따서 잘 보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수는 천천히 과열을 위한 장작을 쌓아갔다.
“마법사 쪽의 라인은 거의 확실하게 쥐고 있으니, 룬 마술을 교육해주는 대가로 독점 계약을 맺어 학원 자체에서 다른 각성자들한테 인챈트 서비스를 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아직은 막 구상이 끝난 준비 단계에 불과합니다만-”
그리고 눈썹을 치켜세운 지수가, 경쟁에 불을 붙였다.
“출자자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생각 있으신 분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