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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86화 (86/176)

86화.  < 그러면 막간을 이용해서 (3) >

지수와 흑마녀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나와 조용한 분위기의 찻집에 들어갔다. 찻잔을 홀짝인 마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중앙엔 이전과 똑같은 결계 구조물이 놓여있었다. 지수가 눈썹을 으쓱이자 마녀가 말했다.

“저번에 뵀을 때랑은 많이 바뀌셨네요, 인상이.”

지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인상이 바뀐 수준이 아니었다. 머리에 사슴 같은 뿔이 난 데다가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온갖 이물에 능통한 흑마녀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이랑 느긋이 차를 마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만요. 이래봬도 일급 수배범이라서요.”

“국가에게 쫓기고 있는 겁니까.”

“아뇨. 경찰 같은 게 아니고, 대부분의 각성자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수배를 붙인 거예요. 벌인 일들이 하도 많아서요.”

흑마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가볍게 말했지만 오히려 훨씬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라의 온 각성자들이 흑마녀의 잠재적인 적인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쪽도 얼마 안 있어 그렇게 될 것이다. 손에 턱을 괸 지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잘도 만나주고 계십니다. 함정이면 어쩌려고.”

“척척박사 님은 특별대우라는 걸로.”

흑마녀가 눈웃음을 지었다. 고깔에서의 활동 덕에 척척박사가 마음에 든 건지, 흑마녀는 이쪽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는 듯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는 관계인 탓에, 옅은 인연이 지워지지 않고 남을 수 있었다.

빨대로 녹차라떼를 쭉 빨아마신 지수가 유리잔을 치웠다.

“아무래도 상관없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피차 시간이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지수와 흑마녀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관계였다. 고깔 카페에서 시작된 인연. 적어도 찻집에 앉아서 요즘 사는 게 어떻다느니 날씨가 좋다느니 하하호호 잡담을 떠들 만한 사이는 아니다. 수긍한다는 듯 흑마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냥 제 얼굴을 보고 싶어서 부르신 건 아닌 것 같고. 마도구 제작이라도 맡기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뒤가 구린 일 대행? 소개받고 싶은 인재라도?”

그 말에 지수가 다시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이계의 침식. 조금 더 서두를 필요가 있어서요.”

흑마녀를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담담한 말이었지만 흑마녀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마치 가시를 쭈뻣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경악에 잠긴 눈동자가 흔들리며 지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마녀의 몸에서 악령들이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이쪽을 돌아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인식을 차단하는 결계 구조물 덕분이었다.

그 반응에 지수는 가볍게 콧숨을 흘렸다.

“뭐 놀랄 일이라고 호들갑입니까? 앉으세요.”

지수가 흑마녀에게 눈짓했다. 흑마녀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범죄자가 몰래 술친구를 만나고 있는데, 다음 번에 훔친다던 그 조각상 며칠만 더 빨리 훔쳐주십시오. 하는 이야기를 갑작스레 들어버린 꼴이었다.

어떻게 알아냈냐, 어디까지 알고 있냐. 가늠하는 시선이 지수의 기색을 살폈다. 하지만 지수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양쪽의 이해관계가 똑같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다물고서 서로 협력하면 될 뿐이다.

“척척박사 님…당신.”

“그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그만두세요. 그건 좀 제대로 된 곳에서 떳떳하게 활동할 때나 쓰는 이름이고, 이렇게 돼먹지 못한 곳에서 활동할 때 쓸 별명은 따로 있어야 할 테니.”

흉흉한 마력이 흘러넘쳤다. 지수의 그림자에서 재버워키가 꿈틀대며 올라왔고, 흐르는 마력에서 형체를 이룬 밴더스내치가 지수의 어깨에 두 팔을 기댔다. 멍하니 입을 벌린 흑마녀에게, 자리에 앉아있는 지수가 새로운 이름을 말했다.

“그래, 용왕이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

나뭇잎 하나 붙어있지 않은 말라 비틀어진 나무들. 지수와 흑마녀는 그런 어둡고 조용한 숲속을 걷고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네 명의 마녀만으로 이루어진 길드예요. 원래라면 한 명이 더 있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백마녀로 각성한 아이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서.”

마녀끼리는 신호 같은 게 있어서 보통 발현되면 확 알거든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는 듯 흑마녀가 말했다. 저번에도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흑마녀가 처음 ‘척척박사’를 추적해 지수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지수가 백마녀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물론 화려한 헛방질일 뿐이었지만.

고목의 숲 깊은 곳에는 낡은 전신 거울이 하나 놓여있었다. 빼빼 마른 나무들 사이의 황량한 공터에 커다란 거울 하나만이 달랑 세워져있는 것은 상당히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다가간 흑마녀는 거울에 손가락으로 부호를 그렸다.

그러자 거울의 표면이 물처럼 일렁거리며 다른 공간과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흑마녀의 마도구 중 하나였다. 지수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작 네 명이서 세상을 뒤흔들고 있을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대단하네요.”

“별 거 아닌 재주인걸요.”

그 말에 지수는 겸손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같은 편이 되면 엄청난 도움이 될 거다.’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의 지수는 용왕의 통찰을 가지고 있기에 알 수 있다. 눈앞의 흑마녀는 협회장 따위보다 훨씬 강했다. 최소 한도로 평가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것이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게 모든 기척을 갈무리하고 있다. 뱃속에 뱀을 백 마리 쯤 키우는 듯한 신중함이었다.

"......."

지수와 함께 거울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흑마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망설여진다는 눈치였다. 고개를 돌린 흑마녀가 곤란해하는 얼굴로 지수에게 말했다.

“역시 제가 말을 해놓을 테니, 며칠 뒤에 만나시는 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습니다. 그냥 좋게 좋게 협력하자는 건데, 일을 굳이 번거롭게 만들 필요 뭐 있습니까.”

지수의 태도는 단호했다. 아직 제대로 된 일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이 따위 사안에 시간을 질질 끌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흑마녀가 지수를 바라보았다. 결국 각오를 한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일단 최대한 좋게 소개하겠지만, 아마 좋은 대접을 받으시진 못할 거예요. 애들 성격이 괴팍한 것도 있지만, 이건 저희에게 있어서 아주 민감한 문제거든요. 저라도 말을 꺼낸 게 척척박사 님이 아니었다면 무조건 적대하고 봤을 정도로….”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위화감을 느낀 건 흑마녀가 이쪽을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아군으로 인정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냥 아는 사이라서 그렇다고 하기엔 이 사안을 다루는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지수가 물었다.

“제가 뭘 했다고 그런 대우를 해주십니까?”

“지식과 분별. 큰 힘은 모두와 나눠야 한다는 사상. 고깔에서 해오신 척척박사 님의 활동 전부가, 당신의 고결함을 증명했으니까요. 흑마녀로서 최대한의 경의를 가지고 있어요.”

지수의 물음에 흑마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흑마녀는 물처럼 흔들리는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지수가 거울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나타난 것은 커다란 서양식의 저택이었다. 정원에선 불타며 날아다니는 호박들이 케케케 웃고 있었다.

지수는 둥지에서 밴더스내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각성자 중의 예외인자인 이레귤러들 중에서도, 마녀라는 부류들은 특별해. 예외 중의 예외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은 각성한 시점에서 처음부터 정점에 가까운 힘을 지니게 돼. 역대 마녀들의 기억과 마력을 그대로 계승받기 때문이야.>

그 말대로 지금 모든 마녀는 S급의 헌터로 지정되어있었다. F급에서 천천히 올라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S급. 쌓아올린 실적이 평가되어 S급으로 지정된 게 아니라, 단지 그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S급으로 지정된 것이었다.

<베이스가 되는 인격은 달라도, 마녀로서의 정체성은 유지되지. 어떤 의미로는 환생이라고 할 수도 있어. 이쪽 세계보다는 저쪽 세계의 존재에 가깝지. 마녀들이 이계의 침식을 확산시키려 하는 것도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테고.>

즉 그녀들은 다른 각성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능력에 눈을 뜬지 몇 년 되지 않은 풋내기가 아니었다. 마법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문외한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수보다 힘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정통하고 노련할 것이다.

생각하고 있던 지수가 걸음을 멈췄다.

등 뒤에서, 탄환이 장전되는 소리가 났다. 흠칫하는 순간 정원의 땅에서 우르르 솟아오른 건 몇 채의 포탑이었다.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유현과 처음 집행부의 일을 하러 갔을 때. 조직의 건물에서 보았던 그 포탑과 똑같았다.

“손님 접대가 상당히 짜릿한데.”

지수가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 명의 마녀들이었다. 누가 무슨 마녀인지는 판별하기가 아주 쉬웠다. 나타난 세 사람의 머리카락 색깔이 각각 빨강, 파랑, 노랑이었기 때문이다. 흑마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게 무슨. 무례해요! 이 분은 제가 데려온 손님…!”

“닥쳐. 움직이지 마.”

흑마녀의 말을 끊은 것은 붉은 머리카락의 마녀였다. 그녀는 짜증나 죽겠다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 개년이 살 일 났다고 화장을 덕지덕지 쳐바르고 나가길래 데이트라도 하나 싶어서 재밌겠다고 미행에다 도청까지 붙여놨더니. 너 미쳤냐? 이런 수상한 새끼를 우리 아지트까지 데리고 와? 심지어 우리한테 상의 한 번도 안 하고?”

“그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움직이지 마 언니~ 지금 언니를 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 중이니까. 허튼 수작 부리면 배신했다고 간주할 거야.”

느긋한 목소리로 흑마녀를 위협한 건, 포탑 위에 앉아있는 황마녀였다. 곱슬이 진 벌꿀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다. 포탑들은 언제라도 이쪽을 일점사할 수 있게 지수의 몸을 향해 포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손으로 물을 갖고 놀고 있는 청마녀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나는 별 상관없어. 하지만 그 자와 정말로 협력할 거라면, 그럴 만한 자격과 실력을 갖추었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

그리고 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아보았다. 안쪽에서는 밴더스내치가 계속 뭐라뭐라 책략을 말해주고 있었고, 옆에선 흑마녀가 입술을 깨문 채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앞을 보았다. 적마녀는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찢어죽이겠다는 듯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마녀는 웃는 얼굴로 포탑을 세워 둔 채 이쪽을 겨누고 있었으며, 청마녀는 어디 실력을 보여보라며 거만한 얼굴로 지수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하하.”

모든 상황을 확인한 지수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양반들일지 몇 가지 예상을 해보기는 했지만, 이것 참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어이없는 인간상들이었다.

이런 치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지수 또한 대강 알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나. 황금색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그리고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과연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간 쏘겠다는 게 단순한 위협은 아니었는지, 황마녀는 곧바로 포탑에 발포를 명령했다. 하지만 포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멈췄어? 멋대로 정지 명령이, 어떻게…!”

“자격? 시험이라고?”

의문에 대답해주지 않고 지수가 비웃음을 흘렸다.

“농담하는 거냐.”

지수에게서 흉흉한 마력이 흘러넘쳤다. 저 녀석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상황 판단을 끝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적마녀는 격렬히 회전하는 마법진과 함께 순식간에 거대한 불꽃의 창을 만들어내, 지수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보냈다.

그리고 그 불꽃의 창은 파사의 마력에 감싸여 헛되이 증발했다. 해주의 비술. 모든 주문은 해명된 뒤 상쇄되어 무로 돌아간다. 미안하지만 상대가 나빠도 나빠도 너무 나빴다. 대(對) 마법사전은 지수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분야였다.

“이용해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증명해야 하는 게 어느 쪽인지, 너희들은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지수와 동화한 용왕의 심장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주변의 존재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준비된 마법사의 공방 안에서 싸우는 건 너무나 불리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지형의 불리함은 그대로 뒤집혀 마녀들의 것이 되어버렸다.

마녀들이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용왕의 둥지였다.

이내 그녀들이 목격한 것은 천장의 문자였다. 마치 하늘을 지면으로 삼아 이야기가 쓰여있는 것처럼. 열 개나 백 개 정도의 단위로 셀 수 없는 룬 문자들이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전부 주문의 폭격으로 변환되었을 때, 어느 정도의 파괴행위가 가능할지 마녀들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협력해달라는 게 아니라, 협력해주겠다고 하고 있는 거다. 자격이니 시험이니. 건방진 데에도 정도가 있지. 지금 너희들의 눈앞에 서있는 게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라.”

재버워키의 망토가 지수의 몸을 감싸며 날아올랐다. 밴더스내치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음을 거두고 차갑게 정색한 지수가 마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용왕의 어전이다. 고개를 숙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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