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그러면 막간을 이용해서 (2) >
헌터 협회 내전의 진압에 개입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불식 길드의 이름값은 하늘 높이 치솟아있었다.
불식이야 원래부터 대한민국에서 견줄 만한 곳이 없는 길드였지만, 지금은 그걸 넘어서 완전히 독주중이었다. 그리고 불식의 에이스 인 오성화와 그가 이끄는 불식 1팀은 치솟은 게 단지 이름값 뿐만이 아니라고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이, 이보세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뭐가요.”
“지금 댁이 저 불타는 개새끼들 수십 마리를 두부 썰듯이 발라버렸잖아! 헬하운드 잡는 게 무슨 어린애 장난이야?”
슬쩍 고개를 돌리자 미궁의 바닥에는 거대한 마견들의 시체가 널부러져있었다. 전부 오성화 혼자 몇 분 안돼서 정리한 것들이었다. 원정대장의 말에 오성화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것은 어린애 장난이 맞았기 때문이다.
“혜성아.”
“또 왜요, 대장.”
“여기가 지금 발견된 곳 중에 제일 센 던전 맞지?”
“맞으니까 이렇게 원정대까지 꾸려서 온 거 아닙니까.”
김혜성이 콧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김이 새있는 건 그 또한 똑같았다. 아무리 던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안전해진 시대라고는 해도, 최전선에서 싸우는 그들은 강대한 마수를 온 힘을 다해 사냥하는 것에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것은 정말 어린애 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게 거창하게 원정대를 꾸릴 필요도 없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불식 1팀을 끌고 올 필요조차 없었다. 오성화와 김혜성 둘만 들어왔어도 공략하기는 충분했을 것이다.
‘던전의 수준이 내려간 게 아니야. 그냥 나랑 대장이 너무 강해진 거지. 수준에 맞지 않는 수준으로.’
김혜성이 한숨을 쉬었다. 아마 오성화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듯한 의문의 공허감. 게다가 오성화는 일생의 목표였던 복수조차 잃어버렸다. 공허감을 잊기 위해 뛰어든 던전도 결국 시원찮은 놈들 뿐이었다.
모처럼의 미궁 원정인데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협회장 만큼 대단한 악당이 하나 더 나타나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스마트폰을 꺼낸 김혜성이 생각했다. 오성화의 몸이 달아있다는 건 뒤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명백했다. 상당히 걱정되었다. 하지만 사실, 김혜성은 오성화 만큼 권태감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남긴 숙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쪽지함 (1/255)]
[제목 : 척척박사입니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바라보는 김혜성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
“내가 너를 빼돌린 이유를 알고 있나?”
의자에 앉아있는 채, 손으로 깍지를 낀 백묵이 말했다.
앞에 구속되어있는 건 인형사인 이유라였다. 강철을 다루는 백묵의 능력. 그 능력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에 묶인 그녀의 몸은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단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그리고 백묵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흑기사…. 우진과는 드물게도 마음이 맞는 친구였다.”
그 말에 이유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 불가살이 백묵. 죽은 뒤에도 인형이 되어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아버지와 똑같이, 대전쟁의 여섯 영웅 중 한 명이었다. 전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친구라고 해서 이상 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넌 그런 우진이 거둔 딸이다. 각성자들을 사냥하던 이유는…그래. 아버지를 부활시키기 위함이었다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만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런 아이를 내 손으로 죽였다가는 저승에서 우진에게 멱살을 잡히겠지.”
백묵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을 죽은 것처럼 위장시켜 오성화까지 속여가며 이렇게 살려놓은 게, 죽은 친구와의 의리 때문이었다고? 이유라는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사람을 보는 눈은 상당히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리고 백묵이라는 남자는 그렇게 감상적인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묶여있는 이유라가 백묵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에요?”
“흥. 표면적으로는 그렇다는 뜻이다. 친구의 딸이라고 너 같은 살인마를 살려둘 수야 있나. 그런 건 그냥 정신병자지.”
백묵이 입술을 이죽였다. 당연히 인형사를 살려놓은 건 그 따위 같잖은 이유가 아니었다. 물론 허다인처럼 물러빠진 인간은 우진의 딸 인데 죽일 것까진 없다 떠들지도 모르지만, 이 계집애는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우진의 수양딸 같은 게 아니라 우진 본인이었어도 백묵의 손으로 죽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빼돌린 것은 단지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조금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 비장의 한 수로 쓸 수 있을 수준의 중요한 장기말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백묵이 흑기사의 인형을 바라보았다.
“싸우면서 보아하니, 그대로 쓸 수 있는 모양이던데. ”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우진의 능력 말이다.”
백묵이 말했다. 육영웅 중의 하나. 흑기사 우진이 가지고 있는 능력, ‘적막’. 그것은 간단명료하면서도 대단히 치명적인 능력이었다. 흑기사의 주변에서 모든 주문의 행사를 차단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모든 마법사들의 천적 같은 힘이었다.
“아마, 이제부터의 싸움에서 그보다 든든한 능력은 없겠지. 아무래도 다음 적은 그 빌어먹을 마녀들이 될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백묵이 이유라에게 걸어가 쇠사슬을 거두었다. 이미 싸움의 청사진은 대강 그려지고 있었다. 마녀들의 전력은 파악하고 있다. 사용할 수 있는 패도, 전황이 전개될 모습도. 여기에 우진의 능력인 적막이 있다면? 필승이었다.
‘적막을 파훼할 수 있는 놈이 나타난다면 모를까.’
잠깐 생각한 백묵은 헛된 망상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진의 적막은 대기 중의 마력 구조를 비틀어 변조시키는 기술이다. 그걸 파훼하기 위해선, 대기의 모든 마력의 구조를 파악하고, 변조된 마력을 정확히 돌려놓는 아찔한 수준의 묘기가 필요했다. 대전쟁 시절에도 그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백묵이 알고 있는 한에서 최고의 술사인 허다인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마왕이라도 나타난다면 모를까, 적어도 마녀 측에 적막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인재가 있을 리 없었다.
“따라와라. 네가 해야할 일을 알려주지.”
팔짱을 낀 백묵이 이유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기말은 갖춰졌다.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지수는 흑마녀를 만나러 오기 전의 일을 생각했다.
막 용왕으로 거듭난 지수는 용왕의 둥지를 둘러보았다. 지수의 영토로서 재구축된 둥지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예전에 비해 상당히 좁아졌군. 이 둥지 전체를 다 합쳐서, 아그리올라의 둥지의 영역 하나 수준인가.”
지수가 조금쯤 자존심이 상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둥지의 규모는 용으로서의 격이다. 하지만 지수는 애초에 용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밴더스내치의 영혼과 동화한다는 방법으로 꼼수를 부린 상태이기에, 용왕의 격에 걸맞긴커녕 평범한 용족 수준의 둥지도 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밴더스내치는 오히려 대단히 감탄한 얼굴이었다. 이걸 보고서 실망을 하는 건 너무 욕심이 크다는 듯, 밴더스내치가 다그치는 목소리로 찌푸리고 있는 지수에게 말했다.
<반대야, 반대. 왕님은 애초에 용족조차 아닌 데다가, 아직 제대로 용왕이 된 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벌써부터 최강의 용왕이었던 아그리올라의 둥지 영역 하나에 버금가는 둥지를 품고 있는 거라고?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알겠어?>
“뭔데.”
<왕님은 진짜, 대왕의 그릇이라는 거야. 이 정도 심상을 품고 있는 건 진짜 흔치 않은 일이라고. 인간 주제에.>
밴더스내치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온갖 칭찬을 듣고 있음에도 지수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솔직히 그 용왕인지 뭔지에 자신이 재능이 있든 말든 지수는 관심도 없었다.
반쯤 남의 힘인데다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이름이다. 빨리 닥친 불부터 끄고 남한테 넘겨버리고 싶었다. 지수가 넘기고 싶다고 해서 넘길 수 있을지가 의문이지만. 지금 그보다 지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둥지의 제어 체계 그 자체였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지수의 황금색 눈동자가 빛났다. 지수는 용언을 읽고 해석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둥지의 제어에는 용언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건 다행히 용언의 힘 자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입력 체계가 용언인 것일 뿐이었다.
“…이건 상당히 달려들 맘 나게 하는데.”
회로는 극도로 복잡하고 섬세했다. 잘못 건드렸다간 전부 다 손 댈 틈 없이 꼬여버린다. 하지만 결계와 주문의 구조에 통달한 지수라면 충분히 뜯어고칠 만 했다. 둥지에 대한 명령 입력 방식을 용언에서 룬 문자로 바꿔버린다. 만년필을 든 지수는 둥지의 중심에 접근해 구조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밴더스내치가 특유의 느긋함과 기분 나쁜 웃음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경악한 채 소리쳤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커스터마이즈.”
지수가 방해하지 말라며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왕의 둥지의 모든 기능은 용언으로 동작하고, 지수는 용언을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러니까 지수도 사용할 수 있도록 뜯어고친다. 간단명료한 공식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받은 물건을 자신의 손에 익도록 고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말도 안 돼! 이건 문화재 파괴야! 그냥 나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간단한 용언쯤이야 나도 발현할 수 있어!>
“미쳤다고 내 물건 쓰는데 너한테 부탁을 하냐.”
지수가 말하는 건 정론이었지만, 반디는 납득할 수 없었다.
지수가 하고 있는 행위는 말하자면 개량이 아니라 개악(改惡)이었다. 편하게 음성인식으로 뭐든 명령할 수 있게 획기적으로 고안된 기계를, 억지로 키보드를 사용해 일일이 입력해야 하는 방식으로 다시 뜯어고치는 것이다. 그 본질이 용족인 밴더스내치는 그 행위에 커다란 모욕을 느끼고 있었다.
<아! 거길 그렇게 건드리면! 명공 루갈반다가 고안한 삼중구조가…으아! 그렇게 가볍게! 못 되돌려, 이제 못 되돌려!>
“호들갑 좀 떨지 마라.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둥지를 건드리고 있는 지수가 입술을 이죽였다. 이 부분은…확실히 감탄이 나올 만한 회로 구성이었지만, 지수에게는 필요 없는 기능이었다. 입력부 조율을 간단하게 하기 위해 그냥 지워버렸다. 만년필이 지수의 마력을 머금었다. 그럴 때마다 밴더스내치는 자기 심장이 뜯기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이건 진짜로 말도 안돼. 천벌받을 짓이야! 저 예술을, 극한까지 효율을 추구한 동작부를 보고서 아무런 감흥도 없어? 용왕의 둥지가 얼마나 수많은 용족들의 미학과 지혜가 결합된 예술작품인지 알기나 하고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내 알 바냐. 그게 싫으면 다시 뺏어가든가.”
들은 척도 안 하는 지수가 둥지의 제어 체계를 휙휙 뜯어고쳐나갔다. 가지기 싫다는데 가지라고 억지로 떠넘겨놓고서는, 어떻게 잘 써 먹어보려고 하니까 또 생떼였다. 지수는 이 둥지를 자신의 새로운 공방으로 쓸 생각이었다. 용왕의 둥지는 은신처로서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이상적이었다.
‘활동을 시작하면 쫓기는 몸이 될 테니.’
이계의 침식을 확장시킬 계획. 그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봤을 때 대단한 범죄행위였다. 마녀들이 어떻게 취급당하는 지 생각해 보면 간단했다. 최악의 각성자들. 걸어다니는 폭탄 덩어리들. 세계의 흑막. 그녀들은 그런 식으로 불렸다.
아마 지수도 이제부터 비슷한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마녀들과 접선해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막간을 이용해서 남아있는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수 본인의 신변이나, 척척 박사로서의 고깔 카페 활동을 끝내는 것. 남아있는 기록과 의심 잡힐 단서의 소거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중 척척박사로서의 활동에 대해선, 이미 대강 정리를 끝내두었다. 신뢰할 수 있는 인물도 있었다. 더 이상 지수는 고깔에서 척척박사로서 활동을 계속하기 힘들겠지만, 지수가 없어도 지속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면 되었다.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잘 해주겠지.’
마녀들이나 지수와 달리, 당당히 표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물. 지수는 김혜성에게 보낸 쪽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이계의 침식을 확장시키기 위한 밑준비이기도 하고, 확장된 뒤를 대비하기 위한 보험이기도 했다.
그곳에 적혀있는 것은 한 계획의 개요였다. 척척박사의 이름으로 마법사를 교육하는 체계적 기관을 만드는 것. 김혜성에게는 마법사 클래스의 각성자들 뿐만 아니라, 마력을 느낄 수 있는 모든 각성자들에게 마력과 주문 구성의 기초를 가르치기 위한 이론과 훈련 커리큘럼을 별도로 첨부해두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식의 확산을 주장하고 또 실제로 실천한 척척박사의 이름을 댄다면 그들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꿀을 빨 만큼 빨았으니까. 그리고 지수는 그렇게 만들어진 기관이 불러들이는 정보와 권력을 충분할 만큼 이용할 예정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흑막 같군.’
지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둥지의 개조를 계속했다. 용왕으로서 마녀를 만나러 가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