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그러면 막간을 이용해서 (1) >
늑대와 병정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건 어폐가 있을 것이다. 지금 집행부는 해체된 상태였으니까. 비단 집행부 뿐만이 아니라 협회 자체의 존속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협회 내부의 전쟁이 끝나고 드러나버린 결과는 그만한 여파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지금은 늑대와 병정이 아니게 된 정유현과 김도형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도형이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짓고 정유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서, 선배. 어떠십니까? 영웅이 된 기분은.”
“...어이없을 뿐이다. 남의 공적을 가로챈 거나 똑같아.”
눈을 내리깐 정유현이 잔을 들고 홀짝였다.
협회장은 죽었다. 그가 자행하고 있던 실험의 진상들은 뚜렷이 드러났다. 연구동에 쓰러져 있는 격전의 흔적. 수백 마리 합성 몬스터들의 시체는, 세상에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칫하면 역사에 남을 재앙이 될 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런 협회장의 음모를 막아낸 중심에 서있는 정유현은, 무슨 구국의 영웅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온갖 세간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평소의 행적부터 시작해 관리부장과 집행부, 현장에서 싸우던 인간들의 증언들. 불식과 누각의 협력까지 이끌어냈다는 게 알려진 뒤엔, 정유현을 ‘일곱 번째 영웅’이라 부르는 자들까지 생겨났다.
‘백묵 씨라면 몰라도…나와 무당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정유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불가살이’ 백묵이 이끄는 불식과 ‘무당’ 허다인이 이끄는 누각. 협회장과의 싸움에서 두 길드의 협력을 끌어낸 것은 정유현이라고 되어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정유현 이외의 누군가가 있었다.
“그래. 말그대로 남의 공적이지. 이번 사태의 숨은 주역이 있어.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지만 분명 같이 싸운 사람이 있었어. 무거운 빚을 지고 있다는 감각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것은 명백한 위화감이었다. 뒤에서 몰래 도와준 것이 아니라, 앞에서 함께 싸운 전우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도 즉시 손에서 빠져나갔다. 머릿속이 통째로 안개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안주를 집어먹은 김도형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거, 척척박사라는 사람일걸요.”
“척척박사?”
정유현이 말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김도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은거하는 현자, 척척박사. 사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끼리의 정보를 외부에 발설하는 것을 극히 꺼려 알려지는 일이 없었을 뿐이었다.
인형사 토벌전에 참가했다는 마법사들이 증언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척척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갔으며, 흑기사의 인형에 전멸 당할 뻔했을 때 그 분의 능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고. 그 분의 얼굴도 주문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척척박사 님께서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황상 인형사를 유도한 것도, 연구동 제압에 누각의 개입을 이끌어낸 것도 그 척척박사라는 양반이겠죠.”
“그만큼 대단한 인간인가?”
“말만 들어보면 거의 마법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수준이던데요.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 그런 거라던데. 저희가 떠올리지 못하는 건 인식 조작 같은 거겠죠 뭐. 종종 있잖아요. 자기 신상을 누가 아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종종 있긴 하지. 정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모습은 신비한 분위기의 수염난 노인이었다. 요정이 날아다니는 숲 같은 곳에서 은거하고 있다 세상에 위기가 닥쳐오면 도우러 나서는…무슨 소설 속 등장인물도 아니고. 정유현이 콧숨을 내쉬었다.
“신비주의자라는 건가? 찝찝한 일이군. 분명히 같이 싸웠을 텐데 감사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이미 했는데 기억을 못하는 걸지도 모르죠.”
김도형이 말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척척박사라는 그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자신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 간 것이라면, 제대로 감사인사를 전하고 헤어졌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유현은 아무래도 납득하지 못했다.
‘정말 그랬다면 이런 느낌이 들 리가 없지.’
정신에 무거운 추가 달려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초조함이 정유현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척척박사. 그 이름을 입으로 발음할 때마다 답답함이 느껴졌다. 정유현이 잔을 내려놓았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전우. 그를 다시 찾아낼 때까지 이 동요는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유현에게 김도형이 턱짓했다.
“근데 그 캠코더는 뭐예요?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
“찍어둬야 할 거 아니야.”
정유현이 무슨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꾸했다. 김도형이 눈썹을 찌푸렸다. 뭘 찍는다는 것인지 몰라도 저 캠코더는 무슨 거의 방송국에서나 쓸 법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 그냥 애 노래하는 거 들으러 온 거 아닌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입니까?“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로 김도형이 물었다. 그것은 라이브 하우스에 놀러온 김도형이 아니라 집행부의 ‘병정’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똑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정유현이 끄덕였다.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날 예정이지. 정유현이 대답했다.
“극비리에 입수한 정보다. 가게 주인이 말해줬지.”
“…선배가 그렇게 말할 정도의 일이라면. 상당한 소란이 일어나겠군요. 소란 때문에 손님들이 다칠지도 모르고.”
“그렇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유현이 담담하게 대답하며 잔에 술을 따랐다. 김도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각오는 만전이라는 얼굴이었다.
“민하가 오늘 새로운 곡을 발표한다더군.”
“엥?”
"응?"
비장미 넘치는 목소리에 김도형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했다. 정유현은 정유현대로 그럼 뭘 생각하고 있었냐는 얼굴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한숨을 쉰 김도형이 어이가 없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 그냥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되지, 뭘 또….”
무슨 초등학교 학예회에 참석하는 학부모도 아니고. 그렇게 고개를 들었을 때, 김도형은 흡 숨을 다물었다. 폐가 쪼그라드는 압박감.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철저함. 눈앞의 남자는 집행부의 ‘늑대’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받아라. 너는 사진 담당이다. 병정들은 배치할 수 있나?”
작전 개요와 임무를 하달하듯이, 정유현이 진지한 목소리로 카메라를 내밀었다. 그 또한 비싸 보이는 DSLR이었다. 김도형이 어이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람이 지금 꼬맹이 무대 사진 찍는 데에 각성자 능력을 사용하라고….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김도형은 지나가던 누군가와 어깨를 툭 부딪혔다. 갑자기 일어난 건 김도형 쪽인데도, 청년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김도형과 정유현은 멍하니 그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어선 채 청년을 바라보던 김도형은 자신이 아직까지 사과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뇨. 이쪽이야말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청년은, 조용히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이내 다시 자리에 앉은 김도형에게, 아직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정유현이 말했다.
“저 사람이랑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
“네? 얼굴을 가렸는데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답지 않은 말을 한다는 듯 김도형이 지적했다. 그 말에 납득한 정유현이 천천히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군.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파티 느낌 물씬 나는 소품이네요~ 머리에는 루돌프 뿔에다가, 얼굴에는 코쟁이 안경에다. 좀 놀 줄 아는 놈인가?”
***
김도형과 정유현이 있던 테이블에서 멀어지며, 가게 안을 뚜벅뚜벅 걸어가던 청년이 코쟁이 안경을 벗었다. 얼굴이 드러난 지수는 조금쯤 쓸쓸함이 섞인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정말 기억 못하는군.”
<이제야 실감이 나나보네. 용왕의 계승식은 용족의 제의(祭儀) 중에서도 제일 정교한 술식이야. 웬만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아무도 왕님의 원래 이름을 떠올릴 수 없겠지.>
용왕으로 거듭나는 용족에게 주어지는 축복, ‘이름 지우기’. 인연을 흐릿하게 해, 용족의 약점인 진명을 잊혀지게 하는 것으로 왕의 힘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인간에게는 저주나 마찬가지였지만 용왕이 되려면 건너뛸 수 없는 과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연을 쌓지 않은… 애초에 왕님의 이름을 모르는 상대라면 효과가 감퇴하겠지만, 그 정도의 옅은 인연이라면 지워지나 지워지지 않나 어차피 똑같은 일이겠지.>
“궁금하지도 않은 걸 설명해대는 게 네 특기냐.”
<말에 날이 서있네. 혹시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는 거야?>
지수의 영혼에 달라붙은 밴더스내치는 좀 더 쓰라린 표정을 보여달라는 듯, 기뻐하는 얼굴로 말했다. 지수가 코웃음을 쳤다. 그 정유현조차 정말로 지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전부 다 알고서 선택한 일이다. 지수가 손 안의 코쟁이 안경을 꽉 쥐어 부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이런 것은 필요 없었다. 세로로 갈라진 지수의 눈동자가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지수가 흔들리지 않는 게 재미없다는 듯 반디가 물었다.
<그 아이도 보고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 됐어.”
어차피 오늘은 해야 할 일도 있고. 지수가 가게 안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걸어가는 건 구석의 구석에 박혀있는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의 중앙에는 워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을 물리고 안쪽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결계 구조물이었다.
‘멋지네.’
소름이 돋는 수준의 솜씨였다. 이 가게 안엔 지금도 상당한 수준의 각성자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당연히 그 중엔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테이블의 구조믈을 간파하기는커녕, 무언가 수작이 부려졌다는 걸 눈치챈 이조차 없었다.
물론 지수를 제외하고서 말한다면 그렇다는 뜻이었다. 지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결계식의 구조를 해석하고, 구조물에 손상 하나 입히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우회해 들어갔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찻잔을 내려놓은 여자가 웃었다.
“곤란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애써 준비한 거였는데. 그렇게 간단히 들어오시면 아무리 저라도 상처받는다고요.”
“실망시키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요, 정말로.”
다리를 꼰 채 앉은 지수를 바라보며, 흑마녀가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척척박사 님.”
***
무대에 섰을 때, 서민하는 아주 약간 실망했다.
관중석에 찾고 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보러 오든 상관없었다. 얼굴을 숨기든 뒤쪽에 가려져있든, 관중석에 그 사람이 있었다면 서민하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서민하가 조용히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 안에 그녀의 노래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서민하의 목소리는 결코 슬픔에 젖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강렬한 의지와 생기로 가득 차있었다. 달아오른 분위기에 관중들의 환호성이 치솟았다. 온 힘을 다해 노래하며 서민하가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만이 멀쩡한 것인지는 몰랐다.
어쩌면 이미 한 번 용언에 당해 기억을 잃은 경험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뱀파이어와그 계약자라는 직접적인 연결이 있어서 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단지, 언제나 강하게 생각하고 있기에 잊어버리게 할 틈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결론적으로, 서민하는 지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서민하에게 있어서는 그것만이 전부였다.
다른 사람에게 왜 떠올리지 못하냐고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지수에 대한 기억을 자기 혼자 독점하고 싶다. 그런 마음도 조금은 있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소란을 피우며 섣불리 찾으려 했다간 더 꽁꽁 숨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신기하게도 초조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수는 서민하의 무대를 보러 오기로 약속했다. 약속했다면 분명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미역 씨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될 뿐이었다. 그때야말로 도망치지 못하게 확실히 붙잡기 위해,
- 좋아. 똑같이 인간에서 반 걸음 비껴서있는 처지니까.
서민하는 누각의 막내가 되었다. 자신의 강함을 저주하던 서민하는 스스로 강해지기로 결심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오지랖 부리길 좋아하는 그 사람이 더 이상 나돌아다니지 못하게 잡아두고 싶으니까.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사람을 마음대로 몇 번이나 구해줘버린 책임이다. 제발 놓아달라고 울고 불며 빌어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불평하지는 못하겠지. 서민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의 오지랖이니까.
“다음 곡.”
기타를 매고 있는 서민하가 번쩍 손가락을 들었다. 가리키고 있는 건 마음 속, 멀리 걸어가고 있는 지수의 등이었다.
“I lov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