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세상에 이럴 수는 없는 건데 (4) >
결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택에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한쪽이 최악의 결말로 이어져버린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지수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나머지 하나의 차악 뿐이었다.
결계의 핵에서 손을 뗀 지수가, 천천히 일어났다.
지수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케이프가 불타며 , 검은 색의 스카프로 변했다. 돌아선 지수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겨누었다. 팔에는 체셔 고양이의 정령무장이 휘감겨있었다. 만년필이 다섯 색깔의 룬을 자동필기해 마탄을 장전시켰다.
지수는 한 치의 타이밍도 어긋나지 않게 마탄을 쏘아보냈다. 그리고 마탄의 표적은 쏘아낸 뒤에야 자리에 나타났다. 정유현의 기술에 휘말려, 둥지로 막 귀환한 협회장이 웃었다.
“흐하하하! 이번 것에는 아무리 나라도 솔직히 놀랐다. 설마 블랙홀처럼 말도 안 되는 것까지……컥!”
결국 마지막 발악도 헛수고로 끝났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연 협회장이 곧바로 피를 토해냈다. 그제야 자신의 옆구리를 꿰뚫어버린 마탄을 깨달은 듯 했다. 피를 줄줄 흘리는 협회장이 털썩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선은 심장이야. 그 정도는 자력으로 가져와보도록 해. 그런 것도 해내지 못하는 그릇에 내 명을 맡길 수야 없지.>
지수가 천천히 협회장을 향해 걸어갔다. 협회장에게서 용왕의 심장을 빼앗아 둥지의 핵의 제어권을 완전히 틀어쥘 것. 그것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최저한의 조건이었다. 신음을 흘리며 협회장의 등 뒤에서 영체들이 나타났다.
“헛된 발악을… 백귀야행!”
공작의 날개처럼 펼쳐져있는 몬스터의 영체 행렬. 이번에 쏟아진 것은 화염구의 비가 아니었다. 수십이 훌쩍 넘어가는 영체들의 손에서 각각 다른 주문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주문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배치였다.
지수는 새삼 감탄했다. 사역한 몬스터의 영체들에게 저 주문들 하나하나를 명령하며 제어하고 있는 건 다름아닌 협회장의 솜씨였다. 말 그대로 조련사라고 할 만했다. 서로 충돌하지 않고 최대의 시너지를 이루어내도록. 최적의 조합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수십 수백 번을 머릿속으로 연습했겠지.
하지만 그뿐. 지수는 어떤 위기감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강렬한 경험으로 ‘해석’ 스킬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단지 현기증이 느껴졌다. 몰려온 과부하에 지금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둥지의 핵에 접근했을 때 엿보고 온 끔찍한 미래의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하지만 한 번 폭주해보고서야 알았다.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해주의 비술’이 ‘해석’ 스킬과 결합합니다.]
[‘현상해석’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수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것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런 말이 있다. 프로게이머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단순한 게임 화면에서도, 내포된 정보를 찾아내 이득을 얻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지금 지수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무의미하게 나열되어있을 뿐인 주변의 온갖 상황정보들이 저절로 의미가 해석된 채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어둠 그 자체를 뭉친듯한 구슬과 맹독의 화살과 불타는 화염구, 붉은 번개의 창. 셀 수 없는 주문들이 지수를 향해 쏟아져내렸다.
“…보여.”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을지, 지수의 눈이 알려주고 있었다. 궤도를 읽느니 마니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땅의 진동. 호흡. 바람. 원래대로라면 판단의 재료조차 되지 못할요소들. 그것들 전부가 자연스럽게 해석되어, 지수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이끌어냈다.
모든 주문은 마치 유령을 통과하는 것처럼 지수를 맞추지 못하고 뒤로 빠져나갔다. 조준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피할 수 있는 때와 장소를 알아챈 지수가 그 시간과 좌표에 맞춰 걸음을 내딛고 있을 뿐이었다.
“박사…!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냐! 그만 체념해라, 어차피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나?”
초조해진 협회장이 소리쳤다. 수십 가지의 주문이 작렬해도 다가오는 지수에게 스친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충분히 압박감을 느낄 수 있는 광경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있는 정유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지수가 입술을 이죽였다.
“그래. 시간 낭비지, 더 이상 질질 끄는 건.”
그리고 협회장의 바로 앞에서 지수가 걸음을 멈췄다.
“크아악!”
비명이 터져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지수의 손가락이 살짝 까닥이자마자,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보팔의 검이 협회장의 팔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날아간 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것을 바라본 협회장의 표정이 경악으로 가득찼다. 그 관심은 자신의 팔이 날아갔다는 것보다도 다른 쪽에 쏠려있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부활이…!”
그 말대로 협회장은 치명상을 입은 순간 재가 되어 회피하지도 못하고,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나 회복하지도 못했다. 불사조의 능력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마력을 끌어오지 못한 것이다. 어디선가 재미있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지고 있던 마력은 벌써 다 써버렸나보네. 바보같이. 이미 준 건 어쩔 수 없어도 더 이상의 공급은 안 돼.>
무진장의 마력이 들어찬 둥지의 핵 안에 잠들어있던 존재. 그녀는 협회장과 지수 둘 모두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금 그 목소리가 들리는 건 지수 뿐인 듯했다. 협회장은 둥지의 핵의 내부와 진정으로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마력 좀 꺼내달라 떼쓰는 게 동시에 두 명이나 있으면 어느 쪽 편을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거든. 누가 진짜 주인인가 따져보고 싶어도, 몰래 숨어들어온 놈이나 열쇠를 훔친 놈이나 도둑놈이긴 마찬가지니.>
용왕의 정수. 그녀는 원래대로라면 스스로 아무 의사도 가지지 않는 순수한 영체였겠지만, 결계를 우회하고 쳐들어온 지수와 직접 접촉한 탓에 인격이라는 것이 형성되어버렸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녀는 협회장에게 마력을 공급해주는 것을 거부했다.
<미안, 사실 거짓말이야.>
협회장은 계속해서 가슴을 움켜쥐고 둥지의 핵에서 마력을 퍼오려고 했다. 빨리 부활을! 이대로라면 정말로 죽는다! 그리고 핵 안쪽의 목소리가 잔혹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이쪽 편 들어주기로 정해두고 있었어.>
룬이 새겨진 보팔의 검이 협회장의 목을 베어냈다.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어느 쪽이든 길게 대화해본 적은 없지만, 지수가 알고 있던 용왕의 사념에 비해, 둥지의 핵 안에 잠들어있던 정수는 상당히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녀는 재미만 있으면 뭐든지 상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야.’
지수는 땅에 쓰러져있는 협회장의 상처를 헤집어 검은 심장을 꺼내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앞에서 이만한 피를 보고 있는데도 지수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잠깐 엿보고 온 미래의 충격에 아직 마음이 굳어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수가 손에 넣은 심장을 가볍게 위로 휙 던져보았다.
그와 동시에, 지수의 뒤에서 거대한 붉은 날개가 펼쳐졌다.
<우둔하군, 마법사! 나를 완전히 구속하고 있다고 생각했나!>
순식간에 심장을 휩싸며 날아든 것은 용왕의 사념이었다. 거의 완벽한 기습이었다. 일부러 난전 중에도 지수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았고, 감지당할 여지를 준 적도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한 번의 기회만을 노리고서 나타났다.
사념체는 승리를 확신했다. 지금 와서 반응해봐야 늦었다. 지수의 공격이 닿을 즈음엔 이미 심장과 융합한 뒤일 것이다. 그때면 하찮은 룬 마술 따위 코웃음치며 튕겨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찰나, 누군가가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용왕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실크햇.”
지수가 읊조렸다. 당연히 지수는 그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당해본 일이니까. 순간적으로 심장과 지수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보라색 망토를 휘감고 있는 지수가 돌연 사념체의 위쪽에 나타나 오른손을 내리꽃았다. 그 손에서는 파사의 마력이 스파크가 되어 파직이고 있었다.
<뭐라고? 마법사, 어떻게…!>
마치 모든 걸 예상하고서 함정을 파둔 것 같은 반응에 사념체가 경악했다. 지수는 말없이 파사의 방진을 만들어냈다. 땅바닥에 처박아진 용왕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구속당했다. 그리고 지수는 천천히 심장을 주워 남은 한 손에 쥐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념체도 제압했고 심장도 손에 넣었다. 이걸로 거래 준비는 끝난 거겠지, 아그리올라?”
<그래, 하지만 지금의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건 조금 안 맞는걸. 나한테는 아그리올라의 기억도 인격도 존재하지 않으니.>
열쇠인 심장을 손에 쥔 채 둥지의 핵과 연결되자, 그녀의 모습이 영체가 되어 떠올랐다. 용왕의 정수가 보랏빛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그녀가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래, 차기 용왕. 네가 내 이름을 지어주렴.>
“그게 무슨 헛소리야.”
<말이 심하구나. 이상한 이야기도 아닐 텐데? 완전히 백지였던 내가 너라는 외부 인자와 접촉하는 것으로 주체성을 가지게 돼버렸지. 어떤 의미로는 네가 나를 낳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부모된 입장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
“궤변이군.”
<지어주지 않는다면 너를 아버님이라 부르겠어.>
지수는 웃기지 말라고 욕을 한 바가지 퍼다주고 싶었지만, 지금 이것과 말싸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정유현의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한쪽 손으로 용왕의 사념체를 땅바닥에 처박고 있는 채, 크게 한숨을 쉰 지수가 말했다.
“…밴더스내치.”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름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괴물의 명칭. 그녀 또한 재버워키와 같은 가공의 괴물이었다.어울린다면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밴더스내치, 밴더스내치. 이름을 몇 번 말하며 음미해보던 용왕의 정수는, 마음에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이제부턴 애정을 담아 반디라고 불러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 그녀가 연결을 타고 둥지의 핵에서 빠져나왔다. 용왕의 정수가 다음 보금자리로 삼은 것은 지수의 몸이었다. 지수의 그림자와 융합한 재버워키와 달리, 밴더스내치가 스며든 것은 심장을 중심으로 한 지수가 가진 마력의 흐름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영체를 이룬 밴더스내치가 지수 옆에 떠올랐다.
<아, 아아…….>
그 모습을 본 용왕의 사념체가 감격에 떨며 말했다.
<아아! 느껴진다. 나의 혼, 나의 정수! 나의 위험을 느끼고, 하나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마중을 나와준 것이냐! 좋다, 지금 최흉의 용왕은 다시 한 번 이곳에 강림할 것이니라!>
<그럴 일 없단다, 가엾은 아그리올라.>
밴더스내치의 표정이 잔혹한 미소로 물들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사념체가 흔들렸다. 허리를 숙인 밴더스내치는 검붉은 용왕의 사념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녀가 손바닥에 꽉 힘을 주자, 용왕의 사념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사념이 이해할 수 없다며 경악했다.
<왜 이러는 거냐! 너는 나일 텐데? 당장 저 마법사에게서 심장을 빼앗고, 생전의 강대했던 '나'로 거듭나잔 말이다! 그게 바로 우리의 유일한 숙원…!>
<같은 취급 하지 마렴. 껍데기의 찌꺼기 주제에. 너는 분명 내게서 비롯됐지만, 나는 굳이 네가 될 필요가 없어.>
밴더스내치의 손 안에 잡힌 사념의 형체가 점점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찢겨나간 사념의 조각은 그대로 밴더스내치의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녀는 지금… 사념이 된 전생의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밴더스내치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름을 받았으니 이미 내 주체성은 확립됐고, 널 먹어치운다고 해서 덮어씌워질 염려도 없지. 아무래도 더 재미있는 광경들을 보려면 네 지식과 기억은 맡아둬서 손해볼 게 없을 것 같거든. 우리 다음 용왕님을 위해 내가 잘 사용해줄게.>
<웃기지… 인정할 수…!>
<잘 가, 아그리올라. 그리고 안녕! 밴더스내치!>
밴더스내치가 명랑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직거리던 사념체는 그대로 완전히 찢겨져나가, 밴더스내치에게 흡수당했다. 원래대로의 미래에선 다시 재앙으로 부활해 용왕으로서 군림했을 텐데, 그걸 생각해보면 허망할 수준의 최후였다.
<와, 지식량이… 이건 소화하려면 오래 걸리겠네.>
밴더스내치는 잘 먹었다는 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쓰러진 정유현과 서있는 서민하가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저 남자를 멀쩡히 돌려놓는 게 거래 조건이었나?>
두 사람을 바라보는 반디는 정말로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간단한 일이라는 듯 밴더스내치가 손가락을 튕겼다. 둥지의 핵에 저장되어있는 마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지금, 정유현의 몸을 되돌려놓는 것은 오히려 쉬운 축에 속하는 일이었다. 막대한 마력이 행사되며 비틀려있던 정유현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만히 선 지수는 잘 됐다는 웃음을 지으며 정유현을 바라보았다.
회복한 정유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멍하니 자신의 몸을 움직이자, 마치 시간이 되감기기라도 한 듯이 팔다리가 완전히 완치되어있었다. 터무니없는 수준의 기적이었다. 웬만한 대가로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아까부터 지수는 무언가 이상했다.
“ 박사!”
“미역 씨!”
곧바로 두 사람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묻기 위해, 지수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것쯤은 옛날 옛적에 예상했다는 듯, 밴더스내치가 휙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돌연 땅에서 거대한 장벽이 솟아올라 지수와 두 사람 사이를 격리했다.
<약속은 지켰어. 이제는 네 차례야.>
벽 뒤에서 쾅쾅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장벽을 쳐다보고 있던 지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분명히 그녀는 지수에게 다음 용왕이 되어보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 형편 좋게 강한 힘만을 넘겨주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애초에 거래 조건으로 내세울 리가 없다.
“좋아.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손에 든 심장을 그대로 씹어먹도록 해. 계승의 의식은 그때부터 시작되지. 첫 번째 과정은 약점을 없애는 것.>
용족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적에게 진명을 들키는 것이다. 진명을 들킨다는 건 곧 언령을 속박당한다는 것. 그래서 새로운 용왕이 탄생할 때, 전대 용왕은 자신의 모든 용언을 사용해 용왕이 될 자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워준다. 그리고 계승자는 용왕으로서 새로운 이름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네 이름이 잊혀질 거야. 철회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좋아. 전부 다 원상태로 되돌려줄 테니.>
그 말을 들은 지수는 손에 들려있는 검은 심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옆에 서있는 반디는 전혀 재촉하는 일 없이, 흥미롭다는 듯 지수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오히려 고뇌하고 있는 지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일분 일초가 그녀에게는 감미로운 꿀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수는 천천히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유현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정하는 것은 간단했다.
“마음대로 해라.”
비교적 손쉽게 수긍한 것은 정유현의 죽음을 본 뒤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지수에겐 자신을 살리려고,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와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정유현 뿐만이 아니다. 서민하라도 위기에 처하면 지수 대신 자신이 죽으려고 들 것이다. 지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정말 쓸데없는 오지랖에도 정도가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상상만 해도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 자신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오히려 잘됐어.”
지수는 손에 든 심장을 남김없이 씹어먹었다. 끔찍하게 쓰고 비릿한 맛이었다. 지수가 손으로 입에 묻은 검은 피를 닦았다. 그리고 지수의 몸 속에 스며들어있는 용의 정수가 더욱 깊은 영역에서 지수와 일체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둥지 저편에서 굉음이 울렸다. 천지가 개벽하듯 둥지의 껍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 지수가 장벽에 손바닥을 올려 놓았다.
"......."
벽으로 막혀있는 탓에 저편의 두 사람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두 사람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다. 눈을 감은 지수는, 잠깐 엿본 미래에서 죽어가는 늑대가 해주었던 말에 대답해주었다.
“늑대 씨는 저랑 만나 다행이라고 했지만, 저도 늑대 씨와 만나 다행이었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박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날뛰는 두 사람 때문에 장벽은 계속해서 쾅쾅 울려댔지만, 부서지기는커녕 표면에 금조차 가지 않았다. 저편에서 쩌렁쩌렁 소리치는 서민하와 정유현의 목소리가 연신 울려퍼졌다. 잠시 아무 말 않고 서있던 지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노래부를 때 가끔씩 몰래 보러 갈게. 갈 수 있으면.”
그때쯤이면 아마 저쪽은 지수를 잊어버렸겠지만, 괜찮다. 이쪽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지수가 눈을 감았다. 장벽 뒤에서 날뛰던 정유현과 서민하는 순식간에 둥지에서 추방당했다.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장벽이 우르르 무너졌다. 저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협회장은 죽고, 용왕의 사념은 소멸당해, 오로지 지수 혼자만이 남았다.
한 순간 지수로부터 터져나온 강렬한 마력에, 협회장의 시체가 불타며 흩어져갔다. 반디는 황홀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훌륭해. 너는 멋진 용왕이 될 거야.>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