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세상에 이럴 수는 없는 건데 (3) >
둥지의 핵을 집어삼키고 용왕이 강림했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흑룡. 사념만이 남은 잔재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부활한 대전쟁의 재앙이 이 자리에 있었다. 둥지 전체를 옭아매오는 압박에 숨조차 쉬지 못할 것 같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지수를 꿰뚫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게 아직 불완전한 부활이라고?’
지수가 꿀꺽 침을 삼켰다. 확신할 수 있었다. 설령 지수와 동료들의 상태가 만전이었던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눈앞의 이것을 쓰러뜨릴 수 있는 확률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건 둥지 바깥에 있는 전원이 합류한다한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말했다.
“둥지의 핵은…처음부터 네 부활을 위한 거였나?”
“그래, 달리 이 어마어마한 마력을 사용할 만한 데가 있겠나? 내 심장을 훔친 멍청이가 잘도 마력을 낭비해준 탓에 완벽한 부활은 하지 못했지만, 차차 복구해나가면 될 일이지.”
용왕이 날개를 펼쳤다. 그것만으로 커다란 폭풍이 몰아쳤다. 지수는 막연하게 이해했다. 이것이 부활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 시점에서 모든 게 끝난 것이다. 더 이상 어쩔 방도가 없다. 그리고 분명 이제부터 또 다시 대전쟁이 시작된다.
“밖으로 나가면 먼저, 지금까지 웅크리고 있었던 답답함을 풀어야겠지. 성가신 영웅 놈들부터 모조리 몰살시켜주마.”
용왕은 희열에 가득찬 목소리였다. 그리도 고대하던 부활을 이루었으니 당연했다. 심장을 가지고 눈앞에 찾아와준 협회장 덕분에, 계획보다 훨씬 더 빨리 일이 진행되었다. 괘씸한 도적놈이지만 그것 만큼은 칭찬해줄 수가 있었다.
천천히 숨을 흘리는 용왕이 지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둥지 안에서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그런 약속이었지? 좋아, 힘으로 그 맹약을 부수는 째째한 짓 따위 하지 않으마. 무엇보다 나는 지금 아주 기분이 좋아.”
설마 그냥 살려주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지수가 용왕을 쳐다보았다.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은 탓에 용왕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지수가 느낀 것은 잔학한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둥지의 핵은 내가 흡수했고, 다른 결계도 전부 마법사 너의 손에 해체돼버렸다. 그 가상한 노력을 치하하며, 아깝긴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시작의 준비라고 생각하겠다. 새로운 삶을 얻었으니, 둥지 또한 새로 만드는 게 도리겠지.”
조금씩, 둥지의 하늘이 조각나 무너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세계가 깨져나가고 있다. 용언의 조건을 회피하기 위해, 둥지 자체를 아예 초기화시켜 버리겠다는 것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는 지수에게 용왕이 말했다.
“영광으로 알고 웃으며 죽어라. 하찮은 너희들의 죽음에 함께 선물하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것이니.”
그리고 날개를 펼친 용왕은 하늘을 날아가, 공간을 찢어버리고 바깥으로 날아가버렸다. 용왕이 사라진 제단에서, 둥지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는다…. 그리고 제단의 기둥에 금이 가며, 이쪽으로 기울어져 쓰러졌다.
"윽!"
생각에 잠겨있던 지수는 순간적으로 방어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지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둥지 안의 모든 것이 지워져버리기 전에, 기둥에 깔려서 죽어버릴 판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되감은 듯 기둥은 둥둥 떠올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연보라색의 기운이 기둥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아.”
눈을 뜬 지수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완전한 피투성이, 팔다리가 비틀려있는 정유현이 숨을 헐떡이며 지수 쪽에 손을 뻗고 있었다. 지수가 눈을 끔뻑였다. 그의 다리는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서있는 거지?
이내 지수는 깨달았다. 정유현은 지금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간신히 띄우고 있을 뿐이다. 지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몸상태로 능력을 썼다간 상태가 악화될 뿐일 것이다. 정유현이 말했다.
“민하. 박사를 안아들고, 내가 가리키는 곳에 날아가다오.”
달싹이는 입술은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보였다. 그럼에도 표정은 더없이 냉정해 의지가 되었다. 날개를 펼친 서민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지수를 안아들었다. 정유현이 가리킨 것은 방금 흑룡이 날아서 둥지를 빠져나간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에는 분명 비틀림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걸 다시 열려면 정유현의 능력을 극도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지금 몸상태로 그런 짓을 하는 건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애초에 출구를 제대로 열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성공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몽롱한 눈으로 하늘에 둥둥 떠있는 정유현이 말했다.
“…민하. 너는 박사보다 훨씬 힘이 센 게 맞겠지.”
“맞아.”
“잘 들어. 지금부터 아마 나를 방해하려 박사가 별 짓을 다할 테니, 무슨 짓 못하게 네가 억지로라도 붙잡고 있어라.”
정유현의 말에 서민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정유현이 무슨 짓을 하려는 생각인지 본능적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놀란 얼굴로 정유현을 바라보고 있던 서민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축받고 있던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늑대 씨. 그게 무슨…."
“박사. 아까… 그런 짓을 할 때는 먼저 솔직히 말해달라고 했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솔직히 말해주마.”
피식 웃은 정유현은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려있는 피투성이의 손을, 덜덜 떨며 비틀려있는 구멍 쪽으로 가져갔다.
“이 안에서 출구를 열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내 몸은 걸레짝이 되어버렸지. 겉보기에도 심하지만 내부는 더 심각해. 내장도 기맥도, 안쪽이 완전히 맛이 가버렸어. 이 상태로는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겠지.”
사실대로 말하면 능력을 발동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정유현에게 상당한 무리를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시야는 새빨갛게 물들었고 이미 고통도 마비되어 느껴지지 않았다. 정유현은 이미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하지만 능력을 제대로 발동시킬 방법이 한 가지 존재한다. 그렇게 한다면 너희들은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단 한 번의 능력 발동을 위해, 비틀려있는 내 몸을 다시 억지로 비틀어버리는 거지. 그런 얼간이 같은 짓을 했다간 곧바로 죽겠지만, 무얼. 어차피 몇 분 안 남은 목숨이다. 처음부터 각오한다면 확실하게 능력을 발동시킬 수 있어.”
피투성이가 된 정유현의 몸에서 연보라색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뿌드득, 기괴한 소리가 들리며 정유현의 제복에서 다시 피가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지수가 눈을 번뜩 뜨며 소리쳤다. 그런 지수를 제지한 건 서민하였다.
“박사, 너랑 만나서 다행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 마지막이 너를 살리기 위함이라는 것만으로도, 내 삶에 의미가 있었다고… 긍지를 느낀다.”
정유현이 달싹이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집행부로 살면서 이렇게 뿌듯함을 느끼며 죽어갈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시야의 초점이 맞지 않는 탓에 보이는 것들이 흐릿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정유현이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민하.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너를 괴물이라고 쫓으며 격리시키려 했던 남자다. 이럴 때는 꼴 좋다고 손가락질하며 통쾌하게 웃어보이는 게 좋아. 분위기가 가라앉잖나.”
“…고마워.”
“그래.”
그 말 한 마디로 만족한다는 듯, 정유현이 웃었다. 삐걱이는 몸은 이미 한계였다. 더 이상 의식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런 몸상태로 능력을 발동시키는 게 가능한 것도 정유현의 강철 같은 정신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웃기지 마. 인정 못해…!”
지수가 버둥거렸지만 서민하의 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지수와 달리 서민하는 이미 결심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정유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이내 연보라색의 나선이 둥지의 출구를 비틀어 열어제꼈다.
“자기 마음대로! 이럴 수는 없단 말이야!”
절규하는 지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완전히 비틀린 정유현의 몸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해갔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서민하의 품에 안긴 지수는 둥지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용왕은 부활했으며 정유현은 죽고 아무 것도 끝내지 못했다.
정말로 최악의 결말이었다.
***
그리고 강렬한 현기증 속에서 지수가 눈을 떴다.
가속된 사고 속에서, 모든 것이 영화의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정유현은? 용왕은? 무너져가고 있던 둥지는? 지수가 황급히 상황을 확인해보았다. 자신의 손이 닿아있는 건 둥지의 핵이었다. 이 결계는 분명히 협회장의 몸을 차지한 용왕이 먹어치워 버렸을 텐데? 그리고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재미있는 능력이군.>
목소리가 들려온 건 둥지의 핵 안쪽에서부터였다.
결계의 보안은 이미 해제되어있었다. 사고의 가속을 몇 번이나 중첩시키며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지수는, 마침내 둥지의 핵을 우회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둥지의 핵에 연결되어 접근한 순간, 안쪽에 있던 무언가가 자신에게 간섭했다.
그리고 보인 것이 방금의 흐름. 목소리가 말했다.
<삼라만상을 해체하여 뜯어보는 능력인가? 소름이 돋는다만,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군. 그래서 감상은 어떻지?>
‘뭐라고….’
<감상 말이다, 감상. 내가 네 능력을 폭주시켰다. 몇 단계나 한계를 돌파해야 도달할 수 있는 영역까지 억지로. 한 순간 모든 것을 해체하고 분석해 미래까지 엿보았겠지?>
그 말에 지수가 실감했다. 둥지의 핵에 접근한 순간, 지수의 머릿속에서 재생된 광경들. 그것은 단순히 지수의 공상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반드시 일어나게 될 미래였다. 현재의 원인들을 모조리 해석한 끝에 도출된 미래의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 거지? 가속된 사고 속에서 의식만이 붕 떠있는 지수가 안쪽의 목소리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야.’
그리고 결계 안에서 나타난 형상, 흘러내리는 은발에 진보라색 드레스를 걸친 여자였다. 지수가 숨을 삼켰다. 그 보석처럼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지수는 본 적이 있었다. 그 예상이 맞다는 걸 다시금 확인시켜주듯 여자가 말했다.
<나는 용왕이다.>
‘웃기지 마, 용왕은 내가… 아니, 방금…!’
<그래. 알고 있다. 그쪽의 나는 사념이지. 내가 죽으면서 남긴 찌꺼기 말이다. 나의 심장은 생명력과 육체, 제어권을 간직하고. 나의 사념은 인격과 기억, 지식을 간직하고. 그리고 나는 용왕이라는 존재의 본질과 영혼을 간직한다.>
그리고 그 셋을 조율할 이 결계의 막대한 마력. 그 모든 것이 한 데 모여야 완전한 용왕, 생전의 아그리올라로 부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타난 여자가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이 자는 제거해야 할 적인가?
<그래, 말하자면 나는 용왕의 정수라고 하면 될까. 나도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원래 나를 읽어들일 수 있는 건 나 자신 밖에 없어야만 해. 결계의 주인으로서 용언을 읽어낼 수 있어야, 내가 있는 핵까지 다다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수는 해석 능력으로 결계의 구조를 간파할 수 있었고, 용언 또한 읽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으로 원래는 없었어야 할 선택지가 생겨버렸다. 뚜벅뚜벅 다가온 여자가 멈춰있는 지수의 뺨을 쓰다듬으며 가학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인간인지는 전부 알고 있다. 네가 나를 읽어내는 동안 나 또한 너를 읽어냈으니.>
‘뭐라고.’
<저기 쓰러져있는 남자를 살리고 싶은 거겠지? 눈이 찌푸려질 정도의 참상이다만… 물론 가능하다. 용왕을 부활시킬 정도의 마력이다. 그 정도는 어린애 장난이라고 할 수 있지.>
그 말에 지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 존재가 정말로 용왕이라면 지수에게 힘을 빌려줄 선택 따위 할 리가 없었다. 육영웅에게 토벌당해 갈갈이 찢겨나간 대전쟁의 재앙이 어째서 이쪽에 힘을 실어주려고 하는 것인가.
그 또한 전부 읽고 있다는 듯, 은발의 여인이 웃었다.
<육영웅이니, 대전쟁이니, 복수전이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에게는 아그리올라의 기억도 인격도 남아있지 않아. 오로지 근본적인 성질만이 남아있는 용왕의 정수다. 그리고 나는 아마, 재미있는 걸 끔찍이도 좋아하는 모양이야.>
큭큭큭 웃는 소리에 지수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지수가 만났던 용왕의 사념체와 그녀는 별개의 존재였다. 대전쟁도 정복도 패배도 겪어본 적이 없는. 그 어떤 기억도 인격도 만들어지기 전의, 가장 순수한 상태의 용왕.
<하지만 당연히 아무 대가도 없이 도와주었다간 재미가 없지. 그래. 너무나도 불완전하고, 강대하긴커녕 약해빠졌으며, 용언을 사용 할 수 없는 용왕이라. 그것 또한 재미있겠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네가 다음 용왕이 되어라. 지금까지의 너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패도를 걸어가는 삶을 택해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기꺼이 저 남자를 살릴 수 있는 마력을 선물해주지.>
귓가의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악마 같았다.
<거절한다면 그것대로 좋다. 나는 용왕의 근본이 되기 위한 존재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계속 이곳에 남아, 내 인격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념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지. 그러면 미래는 네가 본 것과 똑같이 흘러갈 테고… 보고서도 막지 못한 너의 절규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지.>
ㅡ해석 능력의 폭주 속에서 읽어냈던 미래.
땅으로 추락하던 정유현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그리고 혼자 가속하던 사고가 돌아와, 다시 세계가 움직이지 시작했다. 정유현은 헐떡이며 쓰러져있었고 서민하는 출구를 찾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둥지의 핵 안에서는 용왕의 정수가 큭큭 웃었다. 지수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어떻게 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