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세상에 이럴 수는 없어 (1) >
여유롭게 웃는 협회장을 보며, 지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기다려요.”
지수는 휙 팔을 들어올려 정유현과 서민하를 제지했다. 지수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지닌 저쪽과 달리, 이쪽의 스태미너는 한정되어있다. 생각 없이 달려들었다간 전멸하기 딱 좋았다.
확실히 조금이지만 협회장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총량이 늘어나있었다. 정말 협회장이 부활할 때마다 강해지는 거라면, 방책을 정할 때까지 섣불리 죽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지수가 입술을 씹었다. 가능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면돌파. 둥지의 핵에 저장되어있는 마력이 텅텅 비어버릴 때까지, 몇 번이고 협회장을 계속 죽이고 부활시켜 또 죽이기를 반복한다. 그게 가능하려면 대체 몇 번이나 협회장을 죽여야 할까. 백 번? 천 번? 아니면 그보다 더?
‘현실적으로 무리야.’
그만큼 죽이기 전에 이쪽의 체력이 바닥난다. 더욱 답이 없는 것은 죽이면 죽일 때마다 협회장이 둥지의 핵에서 끌어올 수 있는 마력의 양이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계속 죽이다보면 오히려 협회장이 이쪽을 압도할 만큼 강해질지도 몰랐다.
두 번째 방법은, 어떻게든 부활을 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사실상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지수가 쯧 혀를 찼다. 오성화나 김혜성처럼, 불사조의 생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만한 헌터가 여기 함께 있었다면 조언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해볼 수밖에 없었다.
“타이밍에 맞춰서 공격해주세요.”
지수가 정유현과 서민하에게 지시했다. 시행착오를 거칠 때마다 협회장은 계속 강해지겠지만, 지금은 정직하게 가설들을 하나하나 검증해볼 수밖에 없었다. 지수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망토가 체셔 고양이의 스카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작전을 짤 시간은 없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협회장이 다음 부활을 준비하기 전에, 한 번 더 죽이는 것.
협회장이 부활하는 데에는 마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막 되살아난 협회장이 둥지의 핵에서 자신의 몸으로 마력을 퍼오려는 한 순간. 그 한 순간보다도 먼저, 협회장을 다시 한 번 죽일 수 있다면? 부활을 봉쇄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정유현이 발을 묶는 것과 동시에 서민하가 달려나갔다. 기습 같은 게 아닌 정면 공격이었기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협회장은 피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느긋하게 눈을 감은 채. 입가에 웃음까지 띠고서 말했다.
“그래, 몇 번이고 죽여보도록 하게.”
총알처럼 튀어나간 서민하의 손톱이 협회장의 몸을 찢어발겼다. 일격에 치명상을 입은 협회장의 몸이 또다시 재로 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지수는 오로지 영역 안의 기척을 읽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것은 속도의 싸움이었다. 오른팔의 정령무장에는 이미 룬의 마탄이 장전된 채였다.
지수의 영역 안에서 협회장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부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수가 극도로 집중한 채 눈을 감았다. 기척을 느낀 뒤에 쏘면 이미 늦다. 무언가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전조. 그 전조를 읽어서 한 박자 먼저 발사해야 시간에 맞출 수가 있었다. 이내 지수가 눈을 번뜩 떴다.
지수의 팔을 휘감은 고양이의 입에서, 다섯 빛깔의 룬이 들어찬 탄환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부활의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안에서 나타난 협회장은 룬 마탄의 폭발에 직격당해 재가 되어버렸다. 완벽한 타이밍의 요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회장은 다시 되살아났다. 잿가루가 휘날리고, 디시 솟아오른 불기둥 안에서 멀쩡한 협회장이 걸어나왔다. 완전히 태연한 모습을 보니 알 것 같았다. 협회장의 부활 능력은, 빠르게 연속으로 죽여버린다고 해서 봉인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모두가 그것을 실감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왜 그러지, 공격하지 않을 셈인가?”
협회장이 도발하듯 양팔을 벌렸다. 하지만 아무도 공격에 나서지 못했다.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공격하면 공격할 수록 공격받는 쪽이 유리해지는 구도였다. 협회장에게 치명상을 입힐 때마다 이쪽의 기력은 떨어지고 저쪽의 능력은 강해진다.
‘어느 쪽이 먼저 쓰러지나 붙어본다면….’
지수가 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었다. 둥지의 핵에 저장되어있는 마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용왕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무지막지한 양이겠지. 둥지의 핵에 담긴 마력의 반. 아니, 반의 반이라도 소모시킬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을 극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방책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둥지의 핵과 연결되어있는 협회장은… 무적이라고 표현할 만 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공격할 생각은 없나 보군.”
양팔을 벌린 협회장이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리석다고 비웃지는 않겠네. 자네들은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니까. 틀린 판단은 하나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가진 힘의 크기가 너무 달랐다. 최선을 다하기만 해도 이길 수 있다면, 세상에 불공평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겠지.”
그러면 이번엔 이쪽이 공격할 차례인가. 협회장이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서민하가 흠칫하며 뒤쪽으로 거리를 벌렸다. 지수는 신중하게 협회장을 관찰했다. 그가 낼 수 있는 화력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반드시 확인해두어야만 했다.
‘끝없는 생명력에 비해, 공격은 그리 대단치 않을 터.’
낙관 같은 게 아니라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협회장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아무리 둥지의 핵으로부터 막대한 마력을 공급받고 있다고 해도, 그걸 펑펑 터뜨려대며 제대로 활용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쪽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던 지수가 크게 눈을 떴다.
“뭐야 저게.”
그것은 말하자면 활짝 펴진 공작의 깃털 같았다.
협회장의 등 뒤에서 펼쳐진 건 뒤의 제단을 가릴 만큼 거대한 규모의 행렬이었다. 그 행렬을 이루고 있는 건 몬스터의 형상을 한 유령들이었다. 협회장의 뒤에 부채꼴로 떠올라있는 셀 수 없는 영체들은, 전부 하나의 사슬로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협회장이 지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박사. 자네는 말 그대로 괴물이야. 재능만으로 따지면 나보다 훨씬 뛰어나겠지. 하지만 한가지 치명적인 맹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 그건 아직 너무 젊다는 거다. 같은 이레귤러라 해도, 나와 자네는 능력을 연구한 세월이 달라.”
이걸 실전에서 사용하는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황홀한 표정의 협회장이 천천히 팔을 휘둘렀다.
“조련사는, 조련한 몬스터가 죽으면 그 몬스터의 영체를 사역할 수 있다. 영체가 된 몬스터는 그 생전의 능력을 일부 사용할 수 있지. 그리고 몬스터들 중에서는, 스스로 몬스터의 영체를 사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개체가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 펼쳐져있는 수많은 영체의 군세들. 수수께끼의 답이 무엇인지 알겠나? 협회장이 시험하는 듯 지수에게 말을 건넸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지수는 단숨에 이해했다. 협회장의 등에 떠오른 저것의 정체를, 이해해버렸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조련한 특정 몬스터의 영체를 사역해, 다른 몬스터의 영체를 사역시킨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체를 사역하고 있는 영체를, 또 다른 영체에게 사역시킨다. 그리고 그 영체를 또 다시 다른 영체에게 사역시키기를 반복한다….
조련사이기에 가능한능력. 그런 식으로 사역의 사슬을 이어가다보면, 거대한 군세 하나가 생겨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문제는 있었다. 그만한 규모의 힘을 다루기 위해선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격렬하게 소모되겠지만,
‘저 인간에겐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마력이 있다…!’
지수는 협회장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은 탓에 둥지를 활용하지 못할 거라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협회장은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저 둥지의 핵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데에 모든 것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 둥지는 협회장의 비장의 한 수였다. 설령 최악의 상황을 맞이해버려, 온 나라의 각성자 전체와 척을 지게 되더라도 이길 수 있도록 설계해놓은 무대.
“백귀야행.’’
협회장의 등 뒤에서 떠오른 영체들이, 하나씩 불덩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떠오른 불덩이의 숫자는 스무 개나 서른 개 수준이 아니었다. 바위를 박살내는 파괴력의 불덩이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그건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생각하고 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화력이다. 그리고 옆에서 소리친 건 정유현이었다.
“숫자로 승부해봐야 의미없다는 걸 모르나!”
정유현이 주변에 커다란 연보라색 장막을 펼치자, 불덩이들은 조금씩 방향이 비틀리며 땅바닥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거의 완벽한 봉쇄였다. 확실히 정유현의 능력이라면 불덩이 수십 개가 날아오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협회장은 놀라지도 않은 듯 짝짝짝 박수를 치더니,
“훌륭하군.”
“뭐?”
“부디 계속 그러고 있게. 늑대 자네의 힘을 빼는 게 내 최우선 과제니까. 자네는 그걸 몇 분이나 지속시킬 수 있으려나?”
그의 등 뒤에 펼쳐진 셀 수 없는 영체들이 다시금 마력을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폭격. 불꽃의 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안 돼. 완전히 외통수다.’
지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언뜻 보기엔 정유현이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효율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이런 소모전은 저쪽이 원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이 더 계속됐다간 최악의 결과가 찾아올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달라붙어서 방해할게.”
정유현이 펼친 장막의 가운데에서, 날개를 펼친 서민하가 당장에라도 달려나갈 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확실히 어떤 식으로라도 변수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임시변통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과연 그것이 최선일까? 지수가 입술을 이죽였다. 결국 협회장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상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떠올리는 것은 지수의 역할이었다. 장막을 펼치고 있는 정유현이 말했다.
“시간이 없어. 협회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괴물이다. 이 틈에 작전을 생각해내지 못하면 우린 전멸이야. 박사,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도 좋아. 뭐 떠오르는 생각은 없나?”
이 시간에도 전황은 속속들이 불리해지고 있었다.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 지수가 턱을 쓰다듬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러한 종류의 상황을 책에서 많이 읽어본 적이 있었다. 각종 민담이나 신화, 옛날 이야기. 하지만 그런 것을 현실에 적용할 수가 있을까?
“끝없이 부활하는 괴물이 상대라면, 죽이지 않고 봉인을 한다거나. 어디 망망대해로 날려보내 가라앉힌다거나. 뭐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할 텐데.”
“…그거다.”
“네?”
눈동자를 빛낸 정유현의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든 정유현이 말했다.
“다른 어딘가로 날려보내 버린다… 확실히 도박을 해볼 가치는 있어. 어차피 이대로라면 전부 죽어버릴 테니. 박사, 민하. 잠깐 귀를 빌려줘. 나한테 한 가지 생각이 있다.”
그리고 정유현은 두 사람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정유현의 이야기를 들은 지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정유현이 말한 작전은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충분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협회장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그것만이 확실하고 유일한 해답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솔직히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지수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늑대 씨가 블랙홀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요…?”
“아마도 그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다.”
장막을 펼치고 있는 정유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초부터 정유현에 대해선 말도 안 되게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정말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일단 맞추기만 하면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제거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닌가.
그제야 지수는 정유현이 어떻게 둥지 안으로 들어왔는지 깨달았다. 용왕은 공간을 비틀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열쇠 없이도 입구를 열고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었다. 이제 보니 정유현이 바로 그런 능력의 소유자였다.
“처음 썼을 땐 적이 워낙 거대해서 조준 따위 할 필요가 없었지만…협회장을 맞추기 위해선 제대로 조준해야겠지. 이 기술을 쓰려면 애초에 긴 시간 집중해야 하기도 하고.”
협회장이 한 번 공격해보라고 느긋하게 맞아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야 했다. 보통의 경우에는 전위인 서민하가 앞에 나서서 상대방의 발을 묶는 게 정상이겠지만, 이번에 그런 방법을 쓰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당연하게도 정유현은 절대 안 된다며 극구 반대했다.
“민하 네가 앞에 나서는 건 안 돼. 잘못하다간 내 공격에 휘말린다. 휘말렸다간 그걸로 끝이야. 돌아올 수 없어.”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제가 하죠.”
망토를 휘감은 지수가 말했다. 지수가 아직까지 내보이지 않은 능력. 재버워키의 네 번째 페이지. 그것을 사용한다면 굳이 가까이 가지 않고도 협회장의 발목을 묶어둘 수 있었다. 맡기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정유현이 말했다.
“부탁하지.”
그리고 정유현이 펼치고 있던 연보랏빛의 장막을 해제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화염구들이 세 사람을 정면으로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걸 본 협회장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결국 죽기 살기로 덤벼보겠다는 건가?”
퍼붓는 불꽃의 빗속에서, 정유현은 폭격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힘을 끌어올리며 집중하고 있었다. 서민하는 손톱으로 화염구들을 받아내며 그런 정유현을 보호했다. 그리고 지수는 재버워키의 페이지를 펼쳐 망토를 변화시켰다.
“… 미안하다.”
돌연 정유현이 말했다. 그 말에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협회장과의 싸움에 휘말리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듯 했다.
“신경 쓰실 필요 없다니까요. 저희가 싸우기 싫은데 억지로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따져 보면….”
대답하는 지수의 말에 정유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 실행하려고 하는 작전에 대해,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중력의 특이점. 이 기술을 사용했다간 정유현의 몸은 반동에 휘말려 빈사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 단계 위의 영역으로 올라왔기에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이걸 썼다간 끔찍한 꼴이 될 거라는 걸.’
처음 이 기술을 썼다가 그대로 죽을 뻔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설령 여기서 그 기술을 다시 사용해 협회장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해도, 정유현은 제대로 둥지를 걸어나가지도 못할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죽겠지.
‘…거짓말쟁이라고 원망받겠군.’
정유현은 관리부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버린 정유현의 팔다리를 보며 정색했다.
‘말도 안 되는 수술이었어. 다시 하라면 못할 걸세. 적의 공격이 아니라 자기 기술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맙소사, 그 기술 다시는 쓰지 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것 같으면 쓰지 말고 그냥 죽어. 그게 훨씬 나은 꼴로 죽을 수 있을 테니. 이건 약속이야. 알았나?’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듯한 목소리였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서로 업무 관련이 아니면 인사 한 번 나누지 않는 사이였는데…. 정말로,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 인연 또한 박사 덕분이었다. 원래 한 번 죽었어야 할 목숨을, 박사가 여기 까지 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박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변명이 있다면…약속을 어긴다한들 관리부장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행복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야만 할 자를 죽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고 싶은 이를 지킬 수가 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동무 정도야 웃는 얼굴로 해줄 수가 있었다. 그 흔들림 없는 각오에 반응한 것인지, 정유현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더욱 날카롭게 갈무리되었다.
“그러면.”
천천히 고개를 든 정유현이, 협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집행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