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비장의 한 수란 게 있는 법 (6) >
비룡들과의 전투는 격렬했다. 비룡들은 편대를 이룬 채 집요하게 이쪽의 망토만을 노리고 있었다. 격추시켜 제공권을 확보하면 그걸로 끝.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사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었다. 지수는 커다란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지능적이야.’
둥지를 수호해야 한다는 본능 때문인가, 비룡들은 이쪽을 쓰러뜨리려 하기보다는 스스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철저하게 소모를 강요하고 있었다. 생존본능보다도 적의 배제를 우선시하고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지수가 혀를 찼다.
비룡들의 숫자가 해봐야 대여섯 정도였다면 지수가 집중할 수 있게 보호만 해줘도 하나씩 저격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서민하의 신체능력이라도 스무 마리가 넘는 비룡들을 전부 커버할 수는 없었다. 힘이 강하고 말고 이전의 문제였다.
“정정당당하게… 붙으란 말야!”
하늘에서 서민하가 거대한 피의 손톱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엄청나게 짜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심정에는 지수 또한 절절히 동감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로 짜증났다.
비룡들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나는 것을 이용해, 얄밉게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작정하고 이쪽의 기력을 뺄 속셈이었다. 유효한 전략이었다. 그러기만 해도 이쪽은 첫 번째 결계에 마력을 계속 빼앗겨 점점 손해를 보게 되어있었다.
서민하는 몰라도 지수는 몸 자체가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었다. 아무리 재버워키와의 융합과 서민하와의 계약으로 신체능력이 강화되어있다 한들, 지수의 본질은 마법사였다. 비룡들에게 어쩌다 한 번 당하는 공격이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다. 지수는 위기감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이기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비룡들을 전부 쓰러뜨릴 때까지 예상되는 소모가 너무 컸다. 이곳을 돌파한다 해도 둘 다 만신창이가 된다면 이 둥지의 마지막 영역을 돌파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써야 하나?’
지수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허다인과의 수련, 지옥의 끝에서 문지기 도깨비를 쓰러뜨리고 얻은 재버워키의 네 번째 페이지.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싶은 카드였지만 아끼다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면 본전도 못 건지는 꼴이었다.
주먹을 꽉 쥔 지수가 결심하고 땅으로 내려갔다. 영역에 펼쳐놓았던 마력이 지수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지수의 등 뒤에서 나타난 그림책이 활짝 열렸다. 지수를 하늘에 띄우고 있던 망토가 천천히 형태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휘말리지 않게 물러서! 큰 걸로 한 방 날릴 테니까!”
이걸 쓰면 상당히 무리하는 게 되겠지만,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여기서는 비장의 카드를 써서라도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낫다. 지수는 그렇게 판단했다. 재버워키의 마력이 쿠르릉대며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누군가가 뒤에서 지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
지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본 적 있는 무덤덤한 목소리. 그곳에 있는 건 검은 색 집행부의 제복을 입은, 냉정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가 손바닥을 들어올리자, 뒤에서 연이어 쿵쿵대며 땅이 울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장 전체를 휩싸고 있는 연보라색의 거대한 압력에, 공중을 날아다니던 와이번들이 땅에 몸을 처박았다. 멍하니 입을 벌린 지수가 정유현을 바라보았다.
“늑대 씨……어떻게?”
“말했잖아. 협회장을 처리하는 건 이쪽에 맡기라고. 다 죽다 살아나놓고 이런 말을 해봐야 믿음직스럽진 않겠지만.”
정유현은 협회장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적대하던 인물이었다. 협회장을 박살내기 위해 모인 이 자리에 정유현이 나타났다고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수가 궁금한 건, 대체 어떻게 용왕의 둥지 안으로 들어왔냐는 것이었다.
‘늑대 씨가 강한 건 알아. 알긴 하는데.’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정유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수가 보아온 각성자들 중 가장 강한 축에 들어간다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저 비룡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두 사람이 고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유현은 그 모든 비룡들을 한 순간에 제압했다. 비룡들은 지금도 제대로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성가신 비행 능력이 허무할 만큼 간단하게 봉인되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강했던가?’
정유현이 제압했으니 처리하라며 비룡들을 턱짓했다. 놈들의 장기인 공중전이 막힌 이상 이미 게임 끝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준비하고 있던 재버워키가 스르르 원래의 망토 형태로 돌아왔다. 지수와 서민하가 모든 비룡들을 쓰러뜨렸다.
애초에 공중에서 상대하는 게 아니면 별 어려울 것도 없는 놈들이었다. 비룡들의 목숨을 끊는 데에는 각각 일격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정유현이 중력을 해제했다. 서민하와 지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정유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강해졌군. 나랑 싸웠을 때하고는 완전히 달라.”
서민하와 지수가 정유현을 바라보았다.
그 말대로 두 사람은 이미 일류 헌터와 싸워도 전혀 꿀리지 않는, 오히려 압도할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수라장을 헤쳐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만한능력을 얻었다. 단순히 재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유현이 콧숨을 쉬었다.
“너희들과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아무래도 느긋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군. 그렇지?”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 당장 떠들어야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유현이 가세한 덕에 훨씬 빨리 비룡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멈추지 말고 곧장 파죽지세로 나아가야 했다.
정유현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이쪽 문제에 휘말려들게 해서 미안하군. 도움받고 할 말은 아니지만, 너흴 이렇게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죄책감이 묻어나왔다. 그 말에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유현은 지수가 휘말려든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오히려 혼자 조용히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협회장 쪽이 용왕과 지수의 싸움에 휘말려든 꼴이었다.
솔직히 말해 여기 연구동에 오기 전까지, 지수는 협회장을 적극적으로 배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수는 협회장에게 별 원한이 없었으니까. 단지 서민하의 몸에서 내쫓으러 용왕을 찾아간 자리에 협회장이 사은품처럼 딸려온 것 뿐이었다.
“상관 없어요. 나쁜 놈 박살내자는 건데.”
“그러면, 그 남자의 마무리는 내가 지어도 괜찮겠나?”
그것이 정유현이 가진 집행부로서의 고집인 듯 했다. 말한 그가 살핀 것은 지수가 아니라 서민하 쪽의 표정이었다. 지수와 달리 서민하는 협회장과 직접적인 원한관계가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겠다 고집부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가능하다면의 이야기다. 싸우는 중에 그런 걸 따지느라 기회를 놓치는 건 멍청한 일이지. 만일 생포하는 게 가능하다면, 손에 피를 묻히는 역할은 내게 맡겨주면 좋겠군.”
“난 상관없어. 방도 구해줬으니까….”
날개를 편 서민하가 가볍게 수긍했다. 그 말에는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정유현 또한 놀란 듯 했다. 서민하는 협회장의 실험체였다. 자신의 인생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린 장본인일 텐데, 어이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복수를 포기했다.
그리고 지수는 다른 면에서도 놀라고 있었다.
‘진짜 아무한테나 반말 쓰는구나.’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서민하가 존댓말을 쓴 상대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힘든 상황이 주변 사람들한테 가시를 세우도록 만들었던 걸까? 지수는 휙휙 고개를 저었다. 남의 인격에 대해 마음대로 넘겨짚는 것은 주제넘는 짓이었다.
싸우는 도중의 잡념은 치명적인 빈틈이 되었다. 마지막 구역으로 이어지는 공동을 바라보며 지수가 생각했다.
‘일곱 번째 결계, 둥지의 핵.’
그것이 바로 마지막 결계의 이름이었다. 둥지의 핵에 대해 용왕이 해준 조언은 간단했다. 하지만 간단하다고 해서 해결책 또한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다 할 약점이 없기에 막막했다. 지수가 용왕의 말을 떠올렸다.
‘간단히 말하면 그거다. 그 안에서 내 심장을 훔쳐간 도적놈의 마력은 사실상 무한대가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때 지수는 거짓말 말라고 단박에 부정했다. 지수는 그럭저럭 주문 구조와 마력에 대해 능통해있는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그것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계가 복잡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그런 건 불가능했다.
결계 안에서 마력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다고? 그건 건전지를 넣어 쓰는 보조배터리가 핸드폰의 전력을 무한정 충전시킬 수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인 말이었다. 애초에 말 자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용왕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착각하지 마라. 결계의 능력은 마력을 스스로 생산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저장하는 거다. 그것뿐이라면 별 대단한 게 없겠지만, 둥지의 핵이 내 결계들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인 이유는 저장할 수 있는 상한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지.’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외부에서 공급된 마력을 결계 안에 저장해놓는다. 기능만을 따지자면 하급 중의 하급이었다. 그런데도 이 용왕이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할 정도라면, 정말로 어마어마한 양을 담아놓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알겠나? 입김 하나로 마을을 불태우던 전성기 시절의 내가, 훗날을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두고 있던 마력량이다. 반의 반 정도만 남아있다고 해도 너희들이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겠지. 시간을 몇 초 멈출 수 있을 정도라면 이해가 갈까. 그냥 무한대라 생각하는 게 편할걸.’
용왕의 태도를 보니 지수가 가진 총 마력량을 10이라고 쳤을 때, 둥지의 핵에 저장된 마력량은 적어도 1만은 우습게 넘어가는 듯 했다. 지수의 마력은 환상의 반동을 겪는 과정에서 온갖 영약에 의해 뻥튀기된 뒤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용왕의 심장을 몸에 받아들이고 있는 협회장은, 그 모든 마력을 원하는 대로 빼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물론 한 번에 빼낼 수 있는 건 그의 그릇이 가득찰 때까지가 한계겠지만 말이다. 그것이 지금 유일한 위안이었다.
‘협회장이 마법사가 아닌 걸 기뻐해야 하나.’
지수가 앞머리를 꼬집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마법사의 경우, 마력을 몇 배 더 사용한다면 지수의 룬 마술처럼 영창을 생략하고 주문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이 둥지의 핵과 조합됐다간 극대 주문의 폭격들이 날아올 것이다.
긴장하고 있는 지수를 보며 정유현이 물었다.
“왜 그러지, 걱정된다는 표정인데. 뭔가 짐작가는 부분이라도 있는 건가? 이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간다기보다는…그냥 알아요. 협회장이 무슨 능력을 쓸지 이미 들었거든요. 아마 쉽지 않을 거예요.”
“허. 그것도 박사 네 능력으로 알아낸 건가.”
“뭐. 그런 셈이죠.”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석 능력이 직접적으로 알아낸 사실은 아니지만, 해석 능력 덕분에 용언을 간파해서 용왕의 사념체를 얽어 맬 수 있던 게 사실이었다. 이내 지수는 둥지의 핵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협회장이 가지고 있는 건 엄청나게 커다란 보조 배터리예요. 말 그대로 그냥 필요한 만큼 무한히 꺼내 쓸 수 있는 수준으로 마력이 저장돼있고요. 그러니까 서로 천천히 기력을 소모하는 장기전이 됐다간 우리가 무조건 질 거예요.”
“그 배터리 자체를 박살내는 건?”
“아마 불가능할거예요. 제가 오랫동안 달라붙어있으면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내버려둘 것 같지도 않고. 또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위험해요.”
둥지의 핵은 측정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마력이 잔뜩 들어차있는 그릇이었다. 대해가 담긴 잔이라고 해도 좋았다. 안을 비우지 않고 섣불리 해제했다간 저장되어있던 마력이 한 순간 터져나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버릴지도 몰랐다.
“정면승부, 초전박살이 답이라 이거네.”
“그래. 삼 대 일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지수가 서민하의 말에 수긍했다. 괜히 힘조절할 필요는 없겠군. 정유현 또한 연보랏빛 기운을 갈무리하며 걸어나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가자, 이윽고 거대한 공동이 나왔다. 외벽은 마치 생명체의 체내처럼 끊임없이 박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거대한 제단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박사.”
용을 형상화한 석상들과 횃불이 불타고 있는 기둥. 고개를 치켜올려야 할 만큼 길게 이어진 계단. 그리고 그 제단의 꼭대기에 협회장이 서있었다. 지수와 서민하, 그리고 정유현. 협회장은 제단의 입구에 다다른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칭찬해주지. 아무리 임시변통으로 펼친 둥지라 해도… 별 상처도 입지 않고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을 줄이야.”
그 말과 함께, 협회장을 감싸고 있던 둥지의 제어창들이 스르륵 사라졌다. 지수가 영역을 뻗쳐 협회장의 상태를 살폈다. 협회장의 심장은 이 장소 전체와 연결되어있었다. 이 제단 자체가 둥지의 결계를 이루는 구성 요소인 듯 했다.
지수가 피식 웃으면서 협회장에게 대답했다.
“여기 원래 집주인께서 길을 다 가르쳐줬거든.”
“역시 협력하기로 한 건가…. 그렇다면 용왕은 어디로 간 거지? 용을 써봤자 둥지에서 나갈 순 없다는 걸 알 텐데.”
조련사라는 클래스 덕분인가, 협회장은 서민하의 몸에서 용왕이 떠났다는 걸 감지한 모양이었다. 용왕의 사념체는 지수가 고이 빼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놨지만, 그걸 협회장에게 가르쳐줄 필요는 없었다. 지수가 이죽댔다.
“그런 것보다 놀랄 건 따로 있을 텐데. 당신이 초대하지도 않은 불청객이 한 명 껴있잖아. 애써 모른 척 하는 건가?”
“놀랍지 않네. 당연히 올 거라 생각했으니까.”
협회장이 지수의 질문에 담담히 대답했다. 말 그대로 자신의 마지막 결전. 정유현이 지금 이곳에 서있는 건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협회장의 시선이, 정유현과 똑바로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늑대 자네야말로, 내 최대의 적수가 될 것이라고.”
집행부의 늑대와 협회장은 해묵은 악연이었다.
권력을 쫓는 이들은 협회장이란 지위로 굴복시키면 되었다. 힘을 쫓는 이들은 괴물의 인자를 내밀어주면 되었다. 신념을 쫓는 이들은 자신의 언변으로 속여넘기면 되었다. 그조차 불가능한 이들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죽여버리면 되었다.
“오직 자네뿐이다.”
모든 협회를 통틀어서 단 한 명, 정유현이란 사내에게만큼은 그 어떤 수단도 통하지가 않았다. 지금껏 협회장이 키메라를 이용해 늑대를 전투불능에 빠뜨리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쉽게 풀린다고 느껴지던 이 모든 계획에서, 늑대 자네만이 나의 진정한 적수였다. 그렇기에 즐거웠지. 애초부터 확신하고 있었어. 내가 만일 파국을 맞이한다면 적어도 그곳에는 자네가 서있을 것이고, 내 계획이 성공했을 때는 반드시 자네의 시체를 앞에 두고 있을 거라고.”
“미안하지만, 난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유현이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연보라색 소용돌이가 그의 손등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전투 시작의 신호였다. 지수와 서민하 또한 공격을 위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중력이 협회장이 있는 주변을 덮치며 내리찍었다.
“전혀 즐겁지도 않았고 적수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너를 죽일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 그게 집행부의 방식이다.”
그리고 잠깐 동안 움직임이 묶인 협회장을, 총알처럼 튀어나간 서민하가 손톱으로 갈갈이 찢어발겼다. 마무리를 양보해달라는 정유현의 부탁은 요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훌륭했다. 괜히 신경쓰다가 반응이 한 박자 늦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찢어발겨진 협회장은 잿가루로 화해버렸다.
“...확실한 감촉이 있었어.”
서민하가 말했다. 돌연 바람이 휘날려 잿가루가 된 협회장의 시체를 멀리 흩날렸다. 지수는 조용히 영역 안을 감지해보았다. 다른 기척은 영역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진짜 죽은 건가? 정말로, 정말 이렇게 끝나버렸다는 말인가.
“해치웠나.”
정유현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순간 휙 소름이 끼치는 걸 느낀 지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안 끝났어요!”
지수가 바라본 곳에선 커다란 불기둥이 터져올랐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상처 하나 없는 협회장이었다. 영역의 감지에 따르면 분명히 아무 것도 없던 곳인데, 돌연 협회장이 나타났다. 새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지수가 말했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그 말에 협회장이 만족스럽게 입가를 올렸다.
“내가 사역하고 흡수한 몬스터 중 하나라네. 불사조라는 녀석이지. 꽤 강하긴 하네만, 전투력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다만 특이한 건 그 능력. 치명상을 입은 순간 스스로 재가 되어, 주변의 안전한 곳에서 다시금 부활할 수가 있다.”
심지어 조금 더 강해진 상태로 말이야. 협회장이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퍼즐이라도 보여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 자리에 헌터인 오성화가 있었다면 설명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자리에 없으니 내가 말해주지. 불사조를 상대하는 법은 간단하네. 부활엔 커다란 마력이 들기 때문에, 마력을 회복하기 전에 다시 처치하면 그만이지.”
거기까지 들은 지수가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이런 미친.”
아무리 용왕의 둥지라 해도 이 정도로 이쪽을 압도할 비장의 한 수다 뭐다 하고 떠드는 게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야 협회장의 노림수가 이해가 갔다. 조련사로서 가진 불사조의 능력과 둥지의 핵. 이건 말 그대로 최악의 조합이었다.
둥지의 핵에 담겨있는 무한대에 가까운 마력을 전부 소진시킬 때까지, 협회장은 계속 부활하면서 강해진다. 저 능력 앞에서는 초전박살이고 뭐고 의미가 없었다. 양팔을 벌린 협회장이 여유롭게 웃으며 앞에 선 세 사람을 도발했다.
“나를 죽이고 싶다고 했었나? 그렇다면 와보도록 하게. 나는 관대하니, 자네의 그 희망을 몇 번이고 들어주도록 하지."
지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건, 정말로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