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비장의 한 수란 게 있는 법 (5) >
세 번째 결계와 네 번째 결계를 돌파하는 건 비교적 간단했다. 눈보라치는 혹한의 빙판과, 용암이 흐르는 불꽃의 대지. 결계 자체만으로 위협이 된다기보단 그 환경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수호자나 둥지 기능과 함께해야 빛을 보는 결계였다.
‘걸맞은 군세와 책략을 갖춘다면, 그 두 결계는 적에게 있어 최악의 전장으로 변모하지. 하지만 그 도적놈이 그렇게까지 내 둥지를 활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든다.’
그런 용왕의 예상대로, 빙하의 결계와 용암의 결계엔 적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단지 그런 극한의 환경에 던져놓아도 적응할 수 있는 몬스터 몇몇만이 적당히 배치돼있을 뿐이었다. 사실 협회장 그에게 있어서도 원래 용왕의 둥지는 아직 내보일 생각이 없는 능력이었을 테니.
네 번째 결계까지는 지수가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다. 좋은 징조였다. 용왕의 둥지 전체에 쳐져있는 첫 번째 결계 탓에, 지금도 서민하의 마력이 조금씩이지만 줄어들고 있었다. 가능한 빠르게 초전박살을 내는 것이 좋았다.
다음 결계의 구역에 들어가면서, 지수는 용왕의 말을 떠올렸다. 이 앞에서 걱정되는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다섯 번째 결계는…글쎄? 보통의 인간에겐 치명적이겠다만, 너와 나에겐 별 의미가 없을 거다. 나는 애초에 정신 침식의 대가이고, 네 정령 또한 환상을 다루는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대응하는 것쯤은 문제가 없겠지.’
다섯 번째 결계, 그림자 미로. 그 결계의 능력은 죄책감을 증폭시키며 원망을 퍼붓는 원령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환상은 적의 기억을 읽어내 가장 효율적인 형태를 취하기에, 마음에 빈틈이 많다면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쉽사리 무너질 수가 있었다.
지수는 솔직히 지겹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냥 질린다. 비슷한 것만 몇 번을 당했는데.’
용왕과 함께했다면 그냥 무시하고 걸어가기만 해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서민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민하에게 정신적 공격에 대한 방비가 갖춰져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또 땅 파고 들어가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너 귀신의 집 같은 데 가면 잘 견뎌?”
“그게 뭐야. 가본 적 없는데.”
“그럼 공포 영화는.”
“못 봐.”
단호한 대답이었다. 무대에서 메탈 밴드 같은 걸 하고 있으니, 오히려 호러 영화쯤은 가볍게 즐길 거라는 인상이었는데. 아무튼 서민하에게 정신 공격에 대한 대응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 듯 싶었다. 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앞에 귀신 범벅이라네. 그냥 들어가면 눈 감고 귀 막은 다음 내 손 잡고 따라와. 다 끝나면 알려줄 테니.”
“그런 걸로 막을 수 있어?”
“모르겠지만 응급처치 정돈 될 것 같은데. 일단 해봐야지.”
그 말에 서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리에 나있는 달려있는 작은 박쥐날개가 반으로 접혀 두 귀를 꽉 막았다.
지수가 서민하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사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잠깐 기절시켜서 업고 가면 될 뿐이었다. 결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자, 어딘가 싸늘한 공기와 함께 공동묘지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역겨운 인간. 너를 경멸해.>
걷기 시작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유령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 유령들은 전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파사의 마력을 휘둘러도 제대로 지워지지 않는 걸 보니, 진짜 유령을 사역하는 게 아니라 정신 계열 환상의 일종인 듯했다.
‘트라우마 재생… 비슷한 건가.’
이 비슷한 걸 한 번 당했었던 적이 있었다. 지수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재버워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네 장기잖아.”
<흥. 하찮은 정신 마법과 똑같은 취급 하지 마라. 내 시련은, 계약자의 이야기를 읽고 행간에 숨겨져있는 이면을 보여주는 것. 겉으로 비슷해보인다 한들 본질 자체가 다르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더 잘났다는 이야기인 듯 했다. 확실히 그렇긴 했다. 재버워키와 계약할 때 당했던 시련은 이런 식으로 속삭임이 들리니 모습이 바뀌니 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의 과거를 아예 통째로 재현하는 수준이었다.
‘진짜 별 감흥이 없네. 익숙해져서 이런가.’
유령들을 바라보는 지수가 생각했다. 용왕에게 문제가 없을 거라 듣긴 했지만, 이건 좀 너무 담담했다. 원래부터 자신이 적당히 철면피를 깔 줄 아는 성격이긴 해도 일단은 정신계 공격일 텐데 이 많은 원성에 둘러싸여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기분만이 느껴졌다. 지수가 재버워키에게 말했다.
“이거 네가 막아주고 있는 거야?”
<그렇다.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이야기의 정령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능력이지. 정신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공격이라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 내가 임의로 차단할 수 있다.>
“정령 하나 잘 둬서 고생 안 하고 좋네.”
<흠. 그걸 이제 알았는가. 주인이여.>
재버워키가 지수의 그림자 안에서 꿈틀댔다. 태연한 지수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건지 뭔지 유령들의 상태가 더욱 거세졌다. 생긴 꼴도 끔찍한 피투성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양심도 없이.>
<살아갈 자격이 없어.>
<너는 여기서 죽을 거야!>
유령들은 단순히 원망을 속삭이기만 하는 걸 그만두고, 반쯤 실체화해 지수의 팔다리에 달라붙었다. 끈적한 무게감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불편했다. 상당히 기분 나쁜 감촉이었다. 서민하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비명을 지르며 뛰쳐올랐다.
“흐아! 이거 뭐야!”
“별 거 아니니까 그냥 좀 참아.”
이쪽에 달라붙어온 서민하는 거의 지수의 등에 업혀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이까지 딱딱 부딪히며 덜덜 떨고 있었다. 자신이 흡혈귀인 주제에 귀신을 무서워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서민하가 정신을 공격당하고 있진 않은 것 같은데.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별 영향을 못 끼치는 종류인가?’
그 생각대로 서민하는 단순히 겁 먹어서 놀라고 있을 뿐, 특별히 정신 공격 같은 것에 당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각과 청각을 차단하는 건 올바른 공략법인 듯 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통용되는 건 이곳에 파수꾼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다 정신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언데드나 그런 것들을 꽉꽉 채워놨으면 상당히 골치 아팠겠는데.’
그림자 미로를 걸어가는 지수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것은 치명적인 이지선다였다. 유령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싸우려면 눈과 귀를 막은 채 싸워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움직임을 방해받는 걸 넘어서, 싸우는 도중에 유령들이 보여주는 자신의 트라우마들과 직시해야 했다.
서로 전력이 비등하다면 그림자 미로의 결계 하나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수가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었다. 정신 공격에 면역이 없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전투불능에 빠질 테고, 최악의 경우 아군까지 공격할지도 몰랐다.
‘준비가 끝나기 전에 몰아붙인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지수가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 용왕의 둥지는 제대로 된 주인이 없기 때문에 거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있었다. 이른바 빈집털이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둥지의 결계들을 돌파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치명적인 결계들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일 뿐이라니. 용왕이 자신의 둥지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품는 것도 이해가 갔다. 텅 빈 둥지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전성기의 용왕은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오히려 일이 꼬여서 여기 한데 모인 게 다행일지도.’
직접 붙어보니 알 수 있었다. 협회장도 용왕도, 가만 놔뒀다간 손댈 수조차 없는 거대한 재앙으로 거듭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쓰러뜨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왕의 경우엔 거대한 재앙으로 거듭난다기보단 원래 그러했던 존재가 힘을 되찾는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림자 미로의 중심을 찾아가는 건 상당히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다다랐다. 유령에 둘러싸여있는 지수가 결계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해석 스킬이 결계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지수는 천천히 공들여 결계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이제 눈 떠도 돼.”
결계를 없애버리자마자, 주변에 펼쳐져있던 미로와 유령들이 그대로 사라졌다. 덜덜 떨고 있던 서민하는 눈을 뜨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다음 영역으로 나아갈 시간이었다. 지수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말했다.
“허주화.”
지수가 탈을 쓰는 듯한 손짓을 하자, 몸아래의 그림자가 꿈틀대며 솟아오르더니 소용돌이가 되어 지수를 집어삼켰다. 재버워키와 융합한 지수의 몸에서 진보라색의 망토가 흔들렸다. 머리 한쪽에는 오페라 가면 같은 것이 걸려있었다.
“뭐야. 여기 적이라도 있어?”
“이제부터 나올걸, 아마도.”
깜짝 놀란 서민하의 말에 지수가 대답했다. 다섯 번째 결계인 그림자 미로. 여기까지는 결계의 매커니즘만 파악한다면 무리 없이 공략하는 게 가능했지만, 다음 영역의 결계부터는 그런 게 통하지 않는 진짜 싸움이었다. 조용히 마력을 갈무리한 지수가 둥지 입구, 용왕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섯 번째 결계. 낙인의 감옥. 이곳이 아마도 제일 커다란 난관일 거다. 이 결계는 그 도적놈이 가지고 있는 조련사라는 능력과 너무 상성이 잘 맞아. 내 둥지에 펼쳐진 결계들 중 유일하게, 그놈이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결계일 거다.’
두 사람은 다음 영역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민하 또한 지수의 반응을 보고 전투 상황이 될걸 직감했는지, 신체능력과 집중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결계에서 지수와 서민하를 맞이한 건… 소리지르는 비룡들의 군세였다.
"저것들 뭐야."
서민하가 멍하니 입을 벌리며 말했다. 여섯 번째 결계, 낙인의 감옥. 그 넓은 공간에선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 수많은 와이번들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룡은 하나하나가 보스 몬스터 수준으로 지극히 거대했다. 협회장의 연구동에서 보았던 키메라나, 집행부의 사천왕이 괴물로 변한 형상처럼.
지수가 질렸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것들을 잘도 안 꺼내고서 참고 있었네. 아니, 결계 밖으로는 못 꺼내는 건가? 아무튼 대단하셔, 참.”
솔직한 감탄이었다. 활공하고 있는 비룡의 군세. 이 정도면 충분히 비장의 한 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온갖 인간을 휘두르는 협회장으로서도 아니고, 온갖 실험을 자행하는 연구자로서도 아닌, 조련사로서의 그가 가진 진면목이었다.
지수가 용왕이 말해주었던 여섯 번째 결계의 능력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것은 조련사와 찰떡궁합인 능력이었다.
‘낙인의 감옥이 가진 능력은 아주 단순하다. 결계 안의 다른 괴물에게 용의 낙인을 찍는 것이지. 낙인은 괴물의 모든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둥지에 대한 수호의식을 본능 수준에서 박아넣는다. 용의 노예가 되는 대신 그대, 힘을 얻을지니.’
비룡들의 이마 부분에선 용 모양 문장이 빛나고 있었다. 깍깍대는 비룡들은 둥지의 불청객들을 포악하게 위협했다.
“저것들 전부한테 물어뜯기면 뼈도 안 남겠는데.”
지수가 긴장을 풀지 않고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비룡들의 숫자는 대강 세어도 스물을 넘어갔다. 하나나 둘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많은 적이 상대라면 영역으로 움직임을 읽으며 대응하는 것도 힘들었다.
다른 무엇보다 공중전을 강요당하는 게 좋지 않았다. 이쪽도 재버워키가 가진 모자장수의 망토로, 서민하도 뱀파이어 엠프레스로서 달고 있는 박쥐 날개로 비행할 수 있긴 하지만, 공중전은 결코 익숙하지 않았다. 저 미친 와이번 무리들처럼 자유자재로 상승하고 활공하며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비룡들은 이쪽을 경계하는 모양인지 아직 섣불리 덤벼들어오지 않았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키며 서민하에게 말했다.
“하나씩 처리해서 숫자를 줄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것들 설마 편대를 짜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땅으로 끌어내릴 수 있으면 편할 텐데.”
서민하의 말에 지수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저만한 숫자의 비룡들을 땅으로 끌어내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때맞춰서 그런 사람이 이 자리에 나타나준다면 인생 살기 참 편할 것이다.
게다가 저번에 용왕이 한 이야기에 따르면, 바깥에서 다른 사람이 도우러 올 가능성은 완전히 없다고 봐도 좋았다. 입구 자체는 존재 해도, 공간 자체를 비트는 종류의 능력이 아니면 둥지 안으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으니까.
“둘이서 어떻게든 해볼 수밖에 없어.”
적의 전력은 상정했던 것보다 강했지만, 싸우는 도중 계산 착오라는 건 항상 일어나는 법이었다. 읊조린 지수의 말에 서민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망토를 두른 지수와 날개를 편 서민하가 비룡들을 향해 날아올랐다.
***
그리고 그 때, 바깥에서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연구동 가운데에 서있는 그 남자는 집행부의 검은 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비틀렸던 팔다리는 관리부장의 손에 어떻게든 고쳐져, 지금은 다시 전장에 설 수 있는 몸상태가 되었다. 남자는 상황을 정리하듯 작게 읊조렸다.
“사천왕은 죽었고. 협회장은 자신의 요새에 숨어들어가, 그곳에 박사와 민하 또한 함께 빨려들어가 버렸다….”
콧숨을 한 번 내쉰 남자가, 공간이 비틀려있는 구멍을 쳐다보았다. 한 번 한계를 넘어선 특이점에 다다르는 것으로, 그의 중력 제어는 제 수족을 움직이는 것처럼 안정화되어 있었다. 그것은 헌터의 세계에서 S급이라 불리는 경지였다.
“흠, 만나고 싶은 면면은 다 모여있군.”
목소리는 극도로 무덤덤했다. 둥지의 구멍을 향해 뻗은 정유현의 손에서, 연보라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