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비장의 한 수란 게 있는 법 (4) >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새까만 늪에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다. 서민하의 내면은 말하자면 그런 상태였다.
지금껏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늪은 온몸에 얽혀올 뿐이었다. 어차피 이런 인생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늪의 가장 깊은 곳까지 떨어져버리자. 괴물은 괴물답게 복수에 미쳐버려라, 옆에서 그런 속삭임이 들렸다.
“……어.”
그리고 돌연 누군가가 서민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손은 별 거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던 늪에서 서민하를 끌어내주었다. 서민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고 있는 것은 이지수의 얼굴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서민하 씨.”
“……미역 씨.”
“깨어나자마자 미안한데 지금 상황이 급해.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돼. 바로 싸울 수 있겠어?”
부축하고 있던 손을 놓은 지수가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둥지의 입구에 들어서있었다. 그러자 얼굴이 창백해진 서민하가 지수의 손을 홱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뭐야. 왜 그러는데.”
지수가 얼굴을 찌푸리며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도 기억이 다 안 돌아온 건가? 지수는 순간 걱정했지만 지금 상황은 그 반대 였다. 서민하는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서민하가 이를 딱딱 부딪히며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호텔에서의 일부터 시작해서 지수가 죽을 뻔한 것도, 온갖 고생을 한 것도, 지금 이런 곳에 갇혀 위기에 처한 것도 전부 따지고 보면 자신 때문이었다. 민폐를 끼쳤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수의 인생에 있어서 완전히 방해물이었다.
“나, 난…."
- 사실은 너 같은 것은 싫어한다. 어디든 꺼져 버리라 하고 싶지만, 친절한 인간이니까 밀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진흙투성이인 네가 달라붙을 수록 그 인간 또한 더러워지겠지. 친구라는 건 착각이다. 너같은 괴물을 진짜로 좋아해줄 사람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너는 혼자가 어울린다.
내면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던 목소리가 서민하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정말로 그 말 그대로다. 그녀의 등에서 박쥐 날개가 사라지고 붉은 색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서민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같은 건 내버려둬…”
“뭐?”
“언제나 짐덩이밖에 안돼. 이제 됐어. 폐 끼치고 싶지 않아. 어차피 미역 씨도 속으론 짜증난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고개를 돌린 지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급해 죽겠다니까 이 계집애는 또 자조 모드에 들어가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거라는 죄책감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건 처음 만났을 즈음에 짓던 어두운 표정이었다.
뭐라 한 소리 해주고 싶어 목까지 말이 차올랐던 지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불만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서 터벅터벅 서민하에게 다가갔다.
지수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서민하에게 말했다.
“밀어봐.”
“뭐?”
“밀어보라고.”
지수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서민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지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지수는 진지한 눈치였다. 말하는대로 하기 전에는 계속 서있을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킨 서민하는 손을 올려 조심스럽게 아주 살짝, 지수의 어깨를 툭 밀쳤다.
지수가 지금 뭐 하냐는 듯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세게.”
이 정도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입을 꽉 다문 서민하가 지수를 툭 밀었다. 이번에는 지수의 몸이 조금 흔들렸다.
“더 세게. 뒤로 자빠져 쓰러질 만큼.”
그리고 서민하가 양손으로 지수를 떠밀었다. 무게중심을 잃은 지수의 몸은 뒤로 넘어가 털썩 땅바닥에 쓰러졌다. 서민하가 놀란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은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는 천천히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었다.
서민하는 그런 지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러면. 이제 내가 화낼 것 같아?”
“어?”
“네가 폐 끼치는 거. 너 도와주겠다고 고생하는 거, 너한테 뭔 일 생길 때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거. 다 익숙하니까 혼자 끙끙대지 좀 마. 네 눈에는 내가 싫어하는 인간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할 만큼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서민하는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 서민하의 눈에 비치는 이지수라는 인간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으면 못본 척 지나가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무엇이든 오지랖을 부리며 참견해서 문제를 다 해결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리고 지수가 진지한 눈으로 서민하의 양쪽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서민하가 움찔대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네가 도와줘야 돼.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진짜 나 혼자서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힘들 것 같거든. 알았지?”
불안하게 지수를 쳐다보고 있던 서민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필요하다는 한 마디가 서민하에게 커다란 안심감을 주었다. 고개를 마주 끄덕인 지수는 둥지의 안쪽으로 걸어나갔다. 생각한 건 용왕에게 들었던 조언이었다.
‘지금 둥지는 아마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을 거다.’
주인인 자신이 없으니 당연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면, 돌파할 수 있을 가능성 따위 요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선 절대적인 자신감이 느껴졌다.
‘둥지의 중요한 부분은 전부 용언으로 직접 가동시켜야 하니, 지금은 기본적인 결계들만 움직이고 있겠지. 문제는 그 결계들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 거다. 내 둥지는 대전쟁 때도 침범당한 적이 없으니.’
허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용왕이 설명해준 결계의 능력들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그런 것들이 이 둥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일 뿐 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첫 번째 결계가 지금 펼쳐져있는 ‘신비의 무덤’이었다. 둥지에 들어온 모든 자의 마력 일부를 지속적으로 빼앗아, 둥지의 핵에 저장 한다. 지수야 마력을 계속 회복시킬 수 있으니 큰 타격이 없지만 지금도 자신의 마력이 조금씩 협회장에게 흘러가고 있다는 건 상당히 기분이 더러운 일이었다.
‘만일 결계들이 전부 용왕이 말해준 그대로의 능력이라면… 혼자서 뚫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서민하와 함께 싸운다면, 돌파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지수가 둥지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뻗어있는 영역이 또다른 결계가 시작되는 부분을 감지했다. 멈춰선 지수는 뒤에서 따라오는 서민하에게 말했다.
“잘 들어. 여기부터가 진짜 중요해.”
둥지의 두 번째 결계, ‘저주의 포대’.
침입한 적의 움직임을 감지해, 사각에서 보이지 않는 저주의 화살을 발사하는 결계였다. 화살에 맞았다가는 약체화의 저주에 걸려 제대로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단 한 발이라도 맞는 걸 허용한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지수는 영역으로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하기에 보이지 않는 화살이라도 피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지수라도 화살을 피하거나 막아내는 것과 결계를 파훼하는 것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곳이 서민하가 나서야 할 차례였다.
“화살이 장전되는 순간 내가 방향을 말해줄 테니까, 네 손톱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전부 쳐내는 거야. 할 수 있겠어?”
“……해볼게.”
상당히 부담이 되는 지시였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했다. 용왕은 날아오는 방향만 알려준다면 화살에 반응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서민하 또한 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신체능력과 반응속도, 감각을 지녔을 테니까.
‘오히려 몸의 원래 주인이니 더 나을 수도 있고.’
용왕이 깃들어있을 때처럼 용언을 쓸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지수가 서민하에게 바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압도적인 신체능력, 피지컬적인 면이었다. 지금의 서민하가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상대해본 지수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원래 셌는데… 더 말도 안 되게 세졌어.’
지수는 혀를 내둘렀다. 온몸에서 마력을 풀풀 뿜어내고 있는 탓에 영역으로 미리 움직임을 읽어 공격을 전부 피할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칙에 가까운 묘기였다. 순수한 힘과 속도만으로 따지면 지수와는 비교 자체가 안 됐다.
“바짝 붙어있어줘. 바로 옆에서.”
"...응."
지수가 영역의 감각에 집중하며, 두 번째 결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서민하는 지수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주변을 바라보며 따라왔다. 마치 영주를 호위하는 기사 같은 모양새였다. 지수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왼쪽.”
사소한 변화가 느껴지자마자 지수가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서 저주를 품고 있는 화살이 총탄처럼 터져나왔다. 붉은 눈동자를 빛낸 서민하가 박쥐 날개를 펼쳤다. 콰직! 휘둘러진 악마의 손톱은 화살을 가볍게 찢어발겨버렸다. 결계에서 쏘아지는 요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른쪽 상단.”
“왼쪽 하단.”
지수는 전적으로 서민하를 믿고 냉정하게 걸어갔다. 콰직! 콰직! 과직! 저주의 화살이 부서지는 소리들이 연이어 들렸다. 서민하는 모든 화살들을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막아냈다. 결계의 중심까지는 앞으로 몇 걸음이었다. 지수가 물었다.
“이제 속도엔 좀 익숙해졌어?”
“그럭저럭….”
그 말에 지수가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미리 방향을 안 알려줘도 반응할 수 있을 것 같아? 부담 가질 필요 없고 자신 있을 때만 말해.”
지수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결계의 해제를 최대한 빠르게 끝내기 위해선 잠시 주변의 경계를 풀고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서민하에게 화살을 막을 자신이 없다면, 지수가 조금 무리해서라도 두 쪽 모두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잠깐 주저하던 서민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반드시 해낼게.”
“좋은 자세야. 이런 데 있지 말고 빨리 돌아가야지. 네 라이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미역 씨 포함해서?”
“그래. 나 포함해서.”
콰직! 또 다른 화살 하나가 서민하의 손톱에 찢겨나갔다. 지수가 방향을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서민하는 완벽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확인한 지수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결계의 마력 구조를 단숨에 해석하기 시작했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용왕의 둥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결계의 짜임새는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주문의 구조보다도 복잡했다. 해석 능력 덕분에 보자마자 모든 구조를 해석해 간파할 수 있는 지수도 이 결계를 완전히 해제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이걸 해체하려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지?’
침을 꿀꺽 삼킨 지수가 서민하에게 감사했다. 정말로, 결계 해제에 전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건 결코 다른 데에 신경을 쓰면서 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간만에 제대로 덤빌 맘 들게 해주는군. 지수가 극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지수의 주변에서.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서민하의 손톱이 계속해서 날아오는 화살을 부숴버렸다. 저주의 화살이 눈에 보이지 않고 뭐고 알 바 아니었다. 서민하는 이 순간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그녀가 화살을 놓쳐버릴 확률은 요만큼도 존재 하지 않았다.
“미역 씨.”
서민하가 지수를 불렀지만,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짓을 보내지도 않았다. 신경이 분산되지 않게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들리지 않은 것뿐이었다. 지수는 지금 주변을 잊을 정도로 결계 해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 말이야.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라 생각했어. 몇 번이고 죽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어.”
이번에도 지수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괴물이 되어버린 것에, 죽을 용기도 없던 겁쟁이였던 것에 지금은 감사할 수 있어.”
휘익! 손이 채찍처럼 튀어나갔다. 서민하는 화살을 정확히 붙잡아 으스러뜨렸다. 통제할 수 없는 힘에 휘둘린 적도 있었다. 분노에 몸을 맡겨 힘을 휘두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쓰는 것에 ‘긍지’를 느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겁쟁이였으니까 미역 씨를 만날 수 있었어. 이런 괴물이니까 미역 씨를 지킬 수 있어. 그걸로 충분해. 미역 씨의 도움이 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나는 나를 긍정할 수 있어.”
휘둘러진 손톱은 몇 개나 되는 화살이 동시에 쏘아져도 하나도 남김없이 격추시켰다. 앉아있는 지수를 필사적으로 지키는 서민하의 움직임에선, 긴장감은커녕 환희마저 느껴졌다. 한쪽 손을 늘어뜨린 서민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나라도, 옆에 있어도 괜찮은 거지.”
그리고 그 순간 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당연하지! 당연히 그렇게 돼야지!”
돌연 소리친 지수의 말에 서민하가 깜짝 놀라 움찔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서민하는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지수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펼 뿐이었다. 이쪽을 노리고 있던 화살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지수가 상쾌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처음 것부터 계단식으로 풀리게 돼있었구만. 용왕의 결계고 뭐고 내 손에 걸리면 이렇게 되는 거지…. 이렇게만 가면 아무 문제 없겠네. 다음으로 가자, 다음으로.”
아무래도 방금 말은 서민하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그냥 혼잣말이었던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에 결계 해제에 성공한 지수가 자신감이 붙어 앞으로 나아갔다. 몇 걸음 걸어가던 지수는 고개를 돌려 자리에 서있는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멀뚱히 서있어? 무슨 일 있어?”
“됐어. 이쪽도 그냥 혼잣말 한 거야.”
다행이란 건지 유감이란 건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서민하가 입술을 이죽이며 지수를 따라왔다. 지수가 피식 웃었다. 틱틱대는 모습이 익숙했다. 축 처져있더니 이제야 평소대로 돌아왔네. 어깨를 으쓱인 지수는 다음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