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비장의 한 수란 게 있는 법(3) >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용왕이 말한 것은 의외의 한 마디였다. 그녀는 더없이 진지한 눈동자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우린 협력해야 한다, 마법사.”
“무슨 헛소리야?”
지수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수에게 있어 우선순위의 제일 앞에 있는 건 서민하의 해방이었다.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용왕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른다. 깔끔하게 여기서 끝장을 보는 게 맞았다.
“신나가지고 둘이서 다구리를 칠 때는 언제고.”
협력은 개뿔. 지수의 손에서 파사의 마력이 파직거리자,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킨 용왕이 격노하며 소리쳤다.
“어리석긴! 아직도 상황을 모르겠나? 하긴 마법사, 너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를 테지. 만일 어디인지 안다면….”
“네 둥지잖아.”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에 빨려들어올 때 해석 능력으로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용왕의 둥지. 분명 용왕이라고 하면 지금 서민하의 몸에 깃들어있는 저것을 칭하는 표현이었다. 지수의 말에 용왕이 눈을 연신 끔뻑였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알 거 없고. 여기가 정말 네 둥지라면 오히려 너한테는 좋은 일 아닌가? 자기 홈플레이스 같은 거니까.”
“불가능하다. 둥지의 결계를 제어하는 건 내 심장이다. 지금은 그 도적놈이 더러운 몸에 박아넣고 있는 내 심장 말이다. 용언으로 몇 가지 설정을 바꾸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모르겠군. 그 놈이 무슨 수작을 부려뒀을지 모르니.”
드래곤의 레어는 드래곤이 걸어다니는 던전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그들은 자신의 심장을 열쇠로 둥지를 잠구어두고 안쪽엔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바깥쪽엔 강대한 수호 마물들과 마법적인 결계들을 거느린다. 그리고 이곳은 모든 드래곤의 정점인 용왕의 둥지, 사룡 아그리올라의 레어였다.
지수가 그 이야기를 이해한 바는 이러했다. 둥지란 것은 마법사에게 있어서 공방이나 마찬가지인 장소인데, 드래곤이라는 몬스터들은 누구나 던전 하나 크기의 고유한 둥지를 몸 안에 달고 다니고, 그곳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있다.
“드래곤이 자신의 둥지에 다른 존재를 들인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신뢰할 수 있는 친우이거나, 반드시 죽여야만 할 적이거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둘 다 놈과 친하지는 않지.”
지수는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과거의 자신이 너무 강해 발목이 잡힌 꼴이었다. 전성기에 자신의 집을 너무 잘 꾸며놓은 탓에, 영락한 지금 열쇠를 훔쳐 집을 빼앗은 도둑놈의 손에 죽어버릴 판이다. 지수가 피식 웃었다.
“피차일반이네. 너도 지금 남의 몸에 무단으로 가택침입을 하고 있으니, 저 양반한테 뭐라 따질 건덕지는 없지.”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지 마라! 난 이 아이를…!”
순간 발끈했던 용왕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이내 지수가 불쾌함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게 왜 너랑 협력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그냥 내가 혼자서 여길 돌파할 수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마법사. 네 능력은 확실히 인상적이다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곳은 다름 아닌 내 레어니까. 사념만이 남아 영락해버린 지금의 나와 같은 수준이라 생각하면 곤란하지.”
피식 웃은 용왕은 오만함으로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감을 느껴봐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지수를 향해 휙 고개를 돌린 용왕이 훈계조의 노호성을 터뜨렸다.
“알겠나? 나 용왕이 직접 설계한 둥지란 말이다! 협력하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죽는다! 아니, 셋 다라고 하는 게 맞겠지,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아이도 죽어버릴 테니까!”
이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르냐고 답답하다 따지는 목소리였지만, 결국 그녀가 말하는 내용의 본질은 나 없이는 여길 빠져나가기 힘들 테니 제발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턱을 쓰다듬던 지수가 몇 가지 신경쓰이는 점들을 물어보았다.
“일단 여기랑 바깥의 시간은 똑같이 흐르고 있나?”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지수의 질문을 들은 용왕은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지수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한동안 허다인의 환술 속에서 있다 보니 그러한 감각이 느슨해져있었다. 지수는 연이어 다음으로 떠오른 의문을 던졌다.
“바깥에서 추가로 다른 사람이 여기 들어올 확률은?”
“그럴 리는 없다. 둥지의 입구는 아까까지 우리가 있던 곳에 계속 존재하겠지만, 열쇠가 없는 이상 그곳과 이곳은 거의 완벽하게 단절 되어있으니까. 공간을 왜곡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다면 억지로 열고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러면….”
지수가 턱을 매만지며 말을 꺼내려 하자, 휘휘 고개를 저은 용왕이 단호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신의 둥지의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상당히 느긋한 태도인 지수와 달리 용왕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용왕이 지수에게 소리쳤다.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둥지의 핵까지 돌파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실날같은 가능성도 사라져버린다. 마법사,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너의 힘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 거냐?”
그 말에 지수가 자신 주변에 펼쳐놓은 영역을 확인해보았다. 확실히 바깥으로 조금씩 마력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지수의 감각으로는, 어딘가로 빨려들어간다기 보다는 마력 자체가 증발해서 이 둥지 전체에 다시 분배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뭐야, 진짜네. 이거 뭐야?”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치명적인 결계인 ‘신비의 무덤’. 나의 둥지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 모든 존재가 마력을 점점 둥지의 핵에 빼앗긴다…. 그런 구조로 되어있지.”
지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용왕은 간단하다는 듯 말했지만,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능력의 결계인지는 지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결계가 비장의 수단 같은 것도 아니고 둥지의 모든 구역에서 상시 발동되고 있는 상태라고?
“어떻게 해야 그런 게 가능한지 감도 안 잡히는데.”
“용왕은 원래 그 정도 한다.”
용왕이 서민하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지수가 순수하게 감탄하자 조금 자신만만해진 얼굴이었다. 대단하든 어쨌든 어차피 지금은 다 도둑맞아서 빼앗긴 주제에. 안내하겠다는 듯 앞으로 나선 용왕이 말했다.
“그 도적놈은 분명 레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을 거다. 둥지의 결계들을 제어하기 위해선 핵에 있을 필요가 있으니까. 우리는 둥지의 계층을 하나하나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기다려 봐. 언제 내가 너랑 협력하겠다고 했지?”
그 말에 용왕이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대체 왜 말귀를 못 알아먹냐는 표정이었다. 지수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용왕의 노림수는 명백했다. 시시각각 마력이 증발하고 있는 지금은 협상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은 협력하도록 하자.
자신이 불리한 입장이라 주도권을 잡고 있지 않을 땐 상황을 이용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상당히 교묘했다.
하지만 지수는 걸어다니면서도 싸우면서도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계속해서 영역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마력은 분명히 불편했으나, 그 정도는 마도 명상으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었다. 지수가 자리에 가만히 서서 말했다.
“아쉬운 건 네 쪽이지. 난 여기서 당장 너를 죽일 수도 있어. 공동전선을 펼치고 싶으면 이쪽의 요구에 응해.”
“바보 같긴!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용언으로 계악 강제할 수 있지?”
그 말에 용왕이 우뚝 멈추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그 사항에 대해선 이미 확인이 끝나있었다. 지수는 용의 혈정을 정화할 때 안에 담긴 용언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지수가 용왕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친구도 아니고 반쯤 원수지간인데, 말로만 한 약속으로 널 믿으라는 건 좀 웃긴 이야기잖아. 같이 싸우고 싶으면 서로 신뢰를 줘야지. 깔끔하게 계약서 하나 쓰자고.”
“마법사, 지금은 한시가 급한….”
“꺼지고. 요구할 건 두 가지다. 내가 이곳 둥지의 결계랑 이것저것에 대해 질문하면 거짓말 하지 말고 성실하게 대답할 것. 두 번째, 둥지 안에서 서로 죽이는 걸 금지할 것.”
지수의 말에 용왕이 눈썹을 찌푸린 채 두 눈을 뻐끔였다.
‘……무슨 속셈이지?’
용왕이 보기에 그것은 더없이 양심적인 요구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지수가 용왕을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목숨을 인질로 치킨 게임을 시도하기만 해도 더한 요구를 몇 개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지수는 오로지 공동전선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최소 한도의 조건만을 꺼내놓고 있었다.
용왕으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의 협상이었다. 하지만 일단 끌려가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한 번 거절하는 기색을 내보이기로 했다. 용왕이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정말로 한시가 급하다. 나로서는 당장에라도 둥지 안쪽으로 들어가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만.”
“너야말로 지금 마력 빨리고 있네. 시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네 쪽일 텐데, 할 거면 그냥 빨리 하지?”
“...알겠다. 어쩔 수 없구나.”
그리고 용왕은 용언을 이용해 강제계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다른 상대방을 대상으로 강제계약을 맺을 때는 커다란 제약이 있지만,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맹세’로서 적용하는 것뿐이라면 비교적 간단히 발현시킬 수 있었다.
완성된 기미가 보이자 지수가 용왕에게 물었다.
“말한 내용 그대로 다 넣었어?”
“그래. 진위를 판별하는 아티팩트로 확인해도 좋다. 용왕 아그리올라의 명예에 걸고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리고 지수는 용왕에게 다가가, 그녀가 짜놓은 용언의 형태를 살펴보았다. 의미는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1. 계약 주체에게 위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아닌 이상, 계약 주체는 ‘이지수’의 질문에 성실히 응할 것.
2. ‘이지수’가 계약 주체를 먼저 살해하려 시도하지 않는 한, 계약 주체 또한 ‘이지수’를 살해하려 시도하지 않을 것.
3. 위의 모든 조건은 ‘용왕의 둥지’를 나갈 시 자동으로 해제된다. 또는 5초가 지날 시에 자동으로 해제된다.
“너 미쳤냐?"
손을 올린 지수가 서민하의 몸에 깃든 용왕의 뒤통수를 확 내리쳤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용왕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수를 노려보았다. 지수는 그 눈빛이 참 가증스러웠다. 이게 사람을 완전히 호구로 보고서.
“뭐? 5초가 지날 시 해제? 긍지가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남 뒤통수칠 생각으로 아주 머릿속이 가득 차 계시네?”
“말도 안 돼,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용왕이 경악했다. 진위 확인 능력도 통과할 수 있게 교묘히 조건을 짜두었는데, 그걸 곧바로 눈치채버리다니.
“무슨 수를 쓴 거냐!”
“내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필요 없고, 지금은 네가 속임수를 썼다는 게 중요하지.”
유감스럽지만 용왕이 용언으로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해도, 지수는 해석 능력 덕분에 내용 자체를 읽을 수 있었다. 화가 나는 걸 참고 있다는 듯 미간을 꼬집은 지수가 말했다.
“괘씸해서 안 되겠네 이건. 장난 쳐놓은 거 당장 지우고 세 번째 조건 추가해. 둥지 안에서는 내 지시에 따를 것.”
“웃기지 마라. 네가 죽으라면 죽으란 말이냐?”
“좋아. 너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 지시에 따를 것. 먼저 속이려다가 걸린 건 너야. 이 정도면 납득하겠지?”
지수가 용왕의 보라색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용왕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이쪽이 배신 하려고 했던 게 바로 들켰는데 협력을 유지해주겠다는 것만 해도, 지수는 크게 마음을 쓴 것이었다.
이내 바뀐 용언의 내용을 확인한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공동전선을 위한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지수는 둥지에 들어가기전에 용왕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구조는 나도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계약에 의해, 용왕은 지수의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었다.
용왕은 둥지 안의 기본 구조와, 둥지에 펼쳐진 일곱 가지 결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지수는 나머지 궁금한 내용들도 물어보았다. 예를 들어 서민하에게 무슨 수작을 부려놨길래 내 얼굴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던 건가.
잠깐 동안 주저하던 용왕은, 이내 솔직히 대답해주었다.
“이 아이의 내면에 간섭해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을 가라앉힌 뒤, 외부와의 연결고리 또한 비활성화시켰다. 너는 복수의 동기부여에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이 아이가 행복해지는 길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마법사, 너는 말해봤자 이해하지 못하겠지.”
서민하의 모습을 한 용왕이 냉소 어린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등에 나있는 박쥐 날개가 천천히 흔들렸다.
“똑같이 비틀려있는 괴물이니까 알 수 있다. 너처럼 ‘똑바른 자’의 옆에 있다 보면, 이 아이는 끊임없는 자책에 시달리게 될 거다. 자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민폐만 끼치는 방해물일 뿐이다 하고 괴로워하다 결국 파국을 맞이할 테지.”
그 말을 들은 지수가 천천히 앞머리를 만졌다.
즉 서민하는 지수와 얽히지 않은 편이, 사람다운 일상을 손에 쥐지 못한 채 쭉 괴물로 살아가는 편이 더 행복했을 것이란 뜻인가? 지수가 잠깐 동안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용왕이 말이 맞았다. 지수는 그런 헛소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외부와의 연결이란 게 다시 활성화되면 기억들도 다시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가? 그것 말곤 뭐 다른 거 없고?”
“기억이 떠오르는 걸 내가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렇겠지.”
그렇군, 숨을 내쉰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건 전부 얻어냈고 더 이상 이것에게 볼 일은 없었다. 일어난 지수는 서민하의 몸을 바라보며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다.
“용왕 아그리올라, 계약에 따라 지시한다. 내 피를 빨아.”
“뭣..!”
용왕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둥지 안에서 편 공동전선의 조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닌 한, 용왕은 지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용언은 충실하게 계약을 이행시켰다. 달려온 용왕이 지수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다댔다.
<직접 흡혈당하는 것으로, 비활성화되어있던 ‘뱀파이어 엠프레스의 계약자’가 활성화됩니다!>
용왕이 지수의 피를 강제로 빨아들였다. 끊어져있던 연결이 이어지며, 뱀파이어의 계약자 효과가 다시 활성화됐다. 심지어 이전보다 한층 강화된 효과였다. 이내 지수의 모든 신체능력과 감각이 다시금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서 잠깐 나와봐.”
지수가 서민하의 몸에 깃든 용왕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말에 용왕의 사념체는 스스로 서민하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 한 사념체는 지수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지수가 사념체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보통의 경우 사념체에겐 온갖 수를 써도 제대로 간섭할 수 없지만, 지수에게는 사념체 종류에 극도로 상성인 마력이 있었다. 지수는 파사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룬의 방진을 쏘아내, 용왕의 사념체의 정수를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했다.
<마법사,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목소리는 경악에 차있었지만 지수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여기선 죽이지 않는 약속이니까 성불은 나가서 시켜줄게.”
<뭐? 잠깐 기다려라, 마법사!>
“나갈 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유언이나 생각하고 있어.”
둥지에 대한 설명도 들었고, 궁금했던 점도 풀렸고. 이제 저런 것에 더 볼일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거래에서 뒤통수를 치는 것은 지수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사실 뒤통수를 때린 것은 저쪽이 먼저니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걸로, 협회장만 박살내면 깔끔하게 해결이군.’
지수가 축 늘어진 서민하의 몸을 부축해 안아들었다. 사실 처음 계약하자고 할 때부터 용왕과 공동전선 따위를 펼 생각은 없었다. 미쳤다고 저딴 자식이랑 아군이 되어 같이 싸우겠는가? 파사의 마력에 구속되어있는 용왕의 사념이 소리쳤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함께 싸우자고 했을 텐데! 마법사 너 혼자선 아무리 용을 써봤자 이곳을 돌파할 수 없다!>
그 말에 지수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지수가 턱짓한 것은 한 손으로 부축해 안아들고 있는 서민하였다.
“혼자는 무슨 혼자야. 파트너 여기 있잖아.”
그리고, 서민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