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비장의 한 수란 게 있는 법 (2) >
지수는 천천히, 망량과 대련할 때의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다루기 어려우실 겁니다. 스킬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감각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건”
그런 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수는 스킬 시스템의 도움을 이용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금 지수가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건 깃털처럼 가벼운 자신의 몸과, 몸 안에서 들끓고 있는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 때문이었다.
입을 벌린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망량에게 물었다.
“대체 저한테 뭘 하신 겁니까?”
몸 안에 흐르고 있는 마력은 지수 스스로도 두려워질 만큼 엄청나게 불어나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건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성장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망량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반동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누각 창고의 영약들을 털다시피 먹여버렸으니 저 정도는 당연했다.
‘아니, 당연하다고 말할 건 아니다.’
단(丹) 한 알로 웬만한 길드 하나를 살 수 있을 만한 진귀한 영약들. 지수가 가지고 있는 소질과 마도 명상의 효능, 모든 복합적인 변수를 고려한 망량의 처방. 그 모든 게 한 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대련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 지수의 적응력은 인상적이었다. 정령과 동화한 것은 처음일 텐데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무리 없이 움직임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장을 감싸고 있는 영역. 그것으로 상대방의 다음 움직임을 파악하는 능력.
‘마치 누각주 님을 보는 것 같군.’
‘내림’. 단순한 몸싸움에서 허다인을 무적에 가깝게 만들어주는, 미래예지에 가까운 예측. 저것은 허다인이 누군가에게 가르치고 싶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망량은 눈앞에 있는 청년의 누각주의 제자라는 걸 진정 납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 했다. 망량이 공격을 멈추었다.
“왜 제대로 공격하지 않습니까.”
망량이 말했다. 지수는 아까부터 오로지 체술만으로 이쪽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망량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의미가 달랐다. 전투 시의 망량은 몸에 정령을 두르고 주먹과 발을 이용해 싸우는 무투가였다.
그리고 지수는 무투가 같은 것이 아니라 마법사였다.
환상의 반동에 적응해 주문의 힘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테고, 정령과 융합한 상태라면 그 위력을 더욱 증폭시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약사로서의 망량은 지금 지수의 힘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반드시 확인해보고 싶었다
곤란하다는 듯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몸에선 모자장수의 진보라색 망토가 연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문제는 간단했다. 지수가 주문을 사용한 건 거의 모든 능력치가 극도로 제한되어있던 지옥에서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재버워키와 일체화해 모든 능력치가 뻥튀기된 상태였다.
“그냥 대련인데 위험할 것 같아서요.”
솔직히 말해서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지수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바에 의하면 지금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힘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마음 먹고 공격한다면 망량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 말에 망량이 웃었다.
“좋습니다. 단 한 번.”
가면을 쓴 망량이 손에서 검지를 치켜들었다.
“이건 도련님의 힘을 가늠하는 과정이기도 하니, 도련님께서 가능한 가장 강한 일격을 단 한 번만 보여주십시오. 저는 다치지 않게 방어에 전념하고 있겠습니다.”
“단 한 번.”
“네. 그걸 막아낸다면 도련님도 안심하실 수 있겠죠.”
납득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사실 지수 또한 이 상태의 자신이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싶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수가 공격을 위해 정령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지수의 등 뒤에서 나타난 그림책이 촤라락 넘어갔다. 이내 지수의 몸을 감싸고 있던 진보라색 망토와 모자가 새까만 스카프로 변했다. 팔에는 고양이 형상을 한 영체 무장이 휘감겨있었다. 룬을 먹는 체셔 고양이의 정령 무기 형태였다.
지수가 입을 벌린 고양이에게 먹인 것은 단순한 룬이 아니었다. 다섯 속성의 룬을 상극, 증폭시켜 파사의 마력으로 고정시킨 ‘룬의 마탄’. 단순히 마탄만으로 운용했을 때도 상당한 파괴력이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증폭시켜 쏘아낸다면….
“진짜 쏴도 됩니까?”
머뭇거리며 망량을 겨눈 지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튼튼함 하나는 자신 있으니. 오히려 상처 하나 못 입혔다고 해서 풀 죽을 필요 없으십니다.”
반쯤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말까지 한다면 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주의 술을 이용해 정령과 융합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재버워키와 일체화하는 것으로 어떠한 능력을 가졌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지수의 정령무장에서 룬의 마탄이 터져나갔다.
체셔 고양이의 영체를 거친 마탄은 정제되어 훨씬 커다란 마력을 띠고 있었다. 고양이의 정령무장은 일종의 영체로 된 자동 사출, 증폭 마법진이라 할 수 있었다. 파사의 마력 안에 봉입되어있던 룬들이 서로 들끓으며 막대한 파괴력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발사된 직후, 망량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응?"
외부가 파사의 마력으로 감싸여있는 덕분에, 날아간 룬의 마탄은 망량이 굳혀놓았던 보호막들을 가볍게 관통해 돌파했다. 폭발 직전에 느껴진 파괴력은 망량이 상정해두었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있었다. 완전히 계산 외의 상황이었다.
커다란 폭발과 함께 대련실 한쪽에 거대한 구멍이 났다.
그리고 연기가 걷혔을 때, 나타난 망량은 상반신 반쪽이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몸 일부가 불길이 되어 타오르고 있는 걸 보니, 반 정령 반 인간인 덕분에 어느 정도 피해가 상쇄된 것 같았다.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망량이 말했다.
“도련님.”
“네, 네? 괜찮으세요…?”
“용이 빼앗은 친구의 몸을 되찾으러 간다고 하셨습니까.”
그 말에 지수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망량은 천천히 방어 자세를 풀고, 흐느적거리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수가 황급히 달려가서 부축하자, 망량이 지수에게 말했다.
“몸째로 친구까지 죽이고 싶은 게 아니면, 이 기술은 절대 쓰지 마십시오…. 반드시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여기까지 회상 끝.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망량의 충고를 떠올리며, 지수는 허수의 술을 발동시켰다.
“허주화虛主化.”
지수 발밑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올라와 몸과 동화하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정령사의 오의인 허주의 술과 마법사 클래스는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 몸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력이 정령과의 동화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수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지수는 자신의 마력을 전부 바깥의 영역에 고정시킨 채, 몸 안의 마력은 텅 비워 명경지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령을 담을 태(胎)로서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지수과 정령과 융합하고 있는 한 순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협회장과 용왕이 협공해왔다.
그것은 전혀 비겁한 일이 아니었지만, 지수는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폼을 잡으며 변신하고 있는데 공격하는 것은 완전한 반칙이었다. 반칙이라기보단,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멋없는 일이다. 변신 뒤에 말할 대사도 다 생각해뒀는데.
“재버워키.”
<알고 있다.>
채찍처럼 휘어지며 늘어난 망토가, 반대쪽 바닥에 달라붙어 지수의 몸을 끌어당겼다. 모자장수의 망토를 이용한 기동은 이미 완전히 숙달되어있었다. 그림자에서 솟아난 세 자루의 검에는 룬이 새겨져있었다. 지수가 용왕을 가리켰다.
“놀고 있어.”
허공을 날아간 세 자루 검이 저절로 움직이며 서민하의 몸에 깃든 용왕을 가로막았다. 보팔의 검에 깃들어있는 마력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맹했다.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잠깐 발을 붙잡는 정도는 가능했다.
“이 따위 장난감으로…!”
종횡무진 휘둘러지던 마검들은 용왕의 손톱에 튕겨나갔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날아가 계속해서 그녀를 요격했다. 어차피 한 순간의 시간 끌기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수는 몸을 돌려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협회장을 쳐다보았다.
‘신기한 일이다.’
헌터 협회의 협회장. 지수는 정말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저 인간과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지수는 남자를 충분할 만큼 증오할 수 있었다. 서민하를 흡혈귀로 만든 원흉이라서? 정유현에게 그 악행들을 들었기 때문에?
아니었다. 그것과는 달랐다. 지수가 서민하를 알기도 전의 예전 일이나, 늑대에게 말로만 들은 악행들 때문에 생겨난 혐오가 아니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지수가 정답을 깨달았다. 한 가지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정유현과 함께한 집행부 아르바이트 첫날.
"그 때 저랑 늑대 씨가 구했던 아이들."
마치 상품이나 가축처럼 컨테이너 안에 묶여있던 아이들. 집행부가 나타나자 증언하지 못하게 한답시고 독가스를 풀어 죄다 죽여버리려 했었다. 아이들을 구하느라 탈진해 쓰러질 뻔했지만, 분명히 지켜냈다는 뿌듯함을 느꼈었다.
“그 애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글쎄, 정확히 어디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부러 한 숨 뜸을 들인 협회장이 피식 웃었다.
“어쩌면 지금쯤 자네의 동료가 죽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불쌍한 아이들이 죽어버릴 거야. 막으러 가는 게 어떻겠나?”
협회장이 고개를 까닥였다. 모니터에서는 키메라를 비롯한 수많은 실험체들과, 누각의 길드원들이 얽혀 싸우고 있었다. 지금 협회장은, 그 애들이라면 저기 괴물이 된 실험체들 중 하나이지 않겠느냐. 그런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었다.
“좋아.”
아마 정신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밝힌 것일 테지.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결정했다.
“당신은 뒤졌어.”
솔직히 말해서, 지수는 아직 각성자의 세계란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정신도 가치관도 아직 일반인인 그대로였다. 달리 말하면 유약 했다. 뭐든지 웬만하면 말로 해결하고 싶었고, 사람을 패거나 죽이는 건 악당이라도 상당히 꺼려졌다.
그리고 저 인간은 기념할 만한 첫 번째 예외가 되었다.
한 순간 재버워키의 형태가 변화했다. 지수의 등 뒤에 나타난 그림책의 페이지가 촤르륵 넘어가며, 보라색 망토가 스카프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쪽 팔에 체셔 고양이의 정령무장이 휘감겼다. 지수는 망량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죽이고 싶은 게 아니면, 이 기술은 절대 쓰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이 정확하게 지수의 목적이였다. 오색의 룬이 서로 휘감기며 고양이의 입 안에 장전되었다. 서민하의 몸에 깃든 용왕과는 달리, 협회장에게 힘조절을 하며 싸워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지수가 망설임 없이 협회장을 겨누었다.
“뭣?”
협회장은 한순간 대응하려 했으나 돌연 자세가 무너졌다. 내려다보면 그의 발밑이 늪으로 변해있었다. 지수가 차고 있는 늪지옥 여왕의 반지의 효과였다. 한 번 사용하면 다시는 쓸 수 없는 속임수였지만 상관없었다. 협회장은 지금 죽을 테니까. 지수의 총구에서 룬의 마탄이 터져나갔다.
단순한 룬 주문이나 방진과 달리, 마탄은 영역에서 마력을 끌어들이고, 서로 상극이 되도록 각 속성의 룬을 배치하고, 파사의 마력을 짜내 장전시킨 뒤 조준까지 해야했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만큼 위력은 확실했다.
연구동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다. 용왕 또한 그 광경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기가 걷혀들었을 때 놀란 것은 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야 저게…”
마탄에 직격당한 협회장은 가슴 아래가 통째로 날아갔는데도 아직 살아있었다. 단순히 숨이 붙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급속도로 생체 조직이 재생되며 몸과 팔다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재생되고 있는 부분은 수백 마리의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찡그린 지수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애초에 인간도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지수의 생각과 달리 저것은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냐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용왕이 경악에 찬 얼굴로 협회장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잔상처가 아니라 몸의 절반이 날아갔다. 그런데 저런 속도로 회복하고 있다니. 트롤 같은 몬스터라도 저만한 재생력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게 이레귤러 클래스의 특성 따위일 리 없다.’
모든 몬스터의 정점에 선 용왕이기에 알 수 있었다. 뱀파이어 엠프레스인 서민하조차, 저 정도 속도로 몸을 재생시킬 수는 없다. 저런 게 가능한 건 말 그대로 드래곤, 그 중에서도 가장 짙은 피를 지닌 상위 혈족들 정도 뿐이었다.
“설마….”
협회장의 팔다리는 이미 거의 재생이 끝나있었다. 한 가지 생각에 미친 용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용왕이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직접 용왕 토벌전에 참여했던 육영웅, 그리고 대전쟁 시절을 살고 있던 몇몇 인간들 뿐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어떻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확신하고서 이토록 치밀한 계획을 옮기고 있었는가. 아무리 조련사라는 이레귤러 클래스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저만한 몬스터들의 힘들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한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면 모든 의문이 맞아떨어진다.
모든 용혈의 정수가 모여있는 사룡 아그리올라의 심장. 사념만 남은 용왕이 그리 찾아헤매던 잃어버린 본체의 열쇠. 그것을 모종의 경로로 손에 넣은 자가 존재한다면, 용왕이 살아있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협회장이 찢어진 상처 사이에서 검은 심장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서민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가증스럽다는 증오 반, 드디어 찾아 냈다는 기쁨 반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지수를 경계하고 있던 그녀가 냉정함을 잃고 소리쳤다.
“네놈이… 네놈 따위가! 내 심장을!”
용왕 사냥 같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꾸미던 놈이니, 어떤 형태로든 본체의 단서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단서 따위가 아니라 정답 자체를 손에 쥐고 있었나! 하지만 이상했다. 인간이 용의 심장 같은 것을 직접 몸에 박아넣으면, 저주에 먹혀 곧바로 미쳐서 날뛰게 되어버릴 텐데?
“웃기지 마라! 네놈 따위가 내 심장의 저주를 견뎌냈다고?”
“유감스럽게도 ‘조련사’는 몬스터의 정신공격에 완전히 면역이다. 들켜버렸으니 더 이상 자제할 필요는 없겠군.”
용왕 본인의 앞에서 이 능력을 사용하면 변수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사념체를 확보해 장악하기 전엔 ‘심장’의 능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상황은 예측불능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큰 도박에 나서야만 할 때였다.
“결국은 자네다.”
휙 고개를 돌린 협회장은, 자신을 일격에 반죽음으로 만들어버린 경이로운 실력의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박사. 내가 자네를 경계하고 있던 것처럼, 자네도 나를 경계하고 있었겠지. 그러니 내가 숨긴 힘을 드러내자마자, 자네 또한 숨긴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하지만 깨닫도록 하게.”
협회장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것은, 먼저 전력을 드러내지 않은 자. 한 장이라도 더 비장의 패를 손에 쥐고 있던 쪽이라는 걸.”
협회장이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후벼파 심장을 움켜쥐었다. 거대한 마력과 함께 생겨난 구멍이 소용돌이처럼 주변의 풍경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구멍의 외곽에는 빛나는 글자들이 떠올라있었다. 지수의 눈에 문자의 내용이 해석되었다.
[ 인스턴스 던전 - 용왕의 둥지 ]
빨아들이는 힘에 저항은 불가능했다. 세계가 어둠에 잠기고 지수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하나의 커다란 미궁이었다.
“뭐야 여긴. 무슨 둥지?”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옆에서 용왕이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수가 빤히 쳐다보고 있자 용왕이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이제 다 죽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