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비장의 한 수란 게 있는 법 (1) >
문에서 걸어나온 남자를 보았을 때, 협회장은 경악하였지만 그 이상으로 어이가 없다는 감정을 느꼈다.
“박사…?"
곱슬머리를 찰랑대며 걸어나온 청년. 집행부 제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웃기는 안경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눈앞의 청년이 누구인지 쯤이야 곧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어떤 변수를 품고 있을지 몰라 요주의하고 있던 인물이었으니까.
‘인형사의 손에 제거된 줄 알았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협회장이 곤란하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인형사가 엉뚱하게 이쪽을 공격하고 있는 이상, 박사가 살아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당한 일이었다. 그가 가진 능력이 다소 특이하다는 건 인정하나, 어째서 박사가 이곳에 직접 나타난단 말인가? 이곳은 국내 최강의 각성자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박사 같은 풋내기가 발을 들여놓아도 되는 무대가 아니다.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에도 정도란 게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지수는 협회장 따위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오로지 서민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엔 위기감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동네 마실을 나온 것 같은 느긋함까지 느껴지는 태도였다. 협회장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특별한 능력을 각성하고, 되도 않는 자만에 취해서.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 착각하고 있나?’
협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련사로 막 각성했을 때의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자신보다 강한 적과는 싸우지 않는 지혜를 갖췄다.
그리고 위험한 싹은 먼저 밟아두는 철저함도.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두고 싶었던 상대가 제 발로 나타나준 것이다. 여기서 당장 박사를 죽여버리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협회장의 손에 검붉은 불꽃의 구가 떠올랐다.
“나타나자마자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네.”
방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박사 또한 인형사나 조련사와 같이, 이레귤러 클래스라고 추정되는 각성자였다. 협회장은 지수의 실력을 적어도 B급 상위의 수준이라고 상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A급의 영역에 걸쳐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자네에게는 너무 과분한 공격이겠지. 막을 생각 하지 말게. 그대로 썩어들어갈 테니.”
검붉은 화염이 지수를 덮쳤다. 협회장은 자신이 조련하고 있는 몬스터의 스킬과 능력 일부들을 계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흉악한 화염은, 막아낸다 해도 결코 꺼지지 않고 적의 몸을 저주로 부패시킨다.
그리고 그제야 지수가 협회장 쪽을 쳐다보았다.
“촌스럽게 굴지 마요.”
만년필의 자동필기(自動)筆記). 지수가 손가락을 살짝 쳐들자, 수많은 룬들이 허공에 그려지며 방진을 이루었다. 그리고 지수의 방진에 작렬한 검붉은 불꽃은, 그대로 힘을 잃으며 흩어졌다. 막아낸 것이 아니라 저절로 분해되어 사라진 듯이.
"모르겠어요? 이쪽은 오랜만에 친구랑 만난 거란 말입니다. 잠깐 느긋하게 얘기할 시간 정도는 달라고요.”
눈썹을 찌푸린 지수의 말에, 협회장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확실한 일격필살을 목표로 쏘아낸 공격이, 저쪽이 손사래 한번 친 것으로 무력화당했다. 부패의 화염을 정면에서 저리 완벽하게 막아 낼 각성자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집행부 안에서도 그런 게 가능한 것은 해봐야 늑대 정도 뿐이었다.
‘설마 박사 또한,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이윽고 협회장은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애초에 협회장 자신 또한 평범한 각성자로 가장하고 있었다. 박사도 똑같이 ‘풋내기’를 연기하면서, 적들을 기만하고 있었던 것인가!
협회장은 그런 추궁이 담긴 시선을 보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지수가 대답해주는 일은 없었다. 물론 대답해줬다 해도 협회장은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수는 지금껏 힘을 숨기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을 한 것 뿐이었다. 지수가 협회장으로부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민하는, 지수를 노려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으........"
“이보세요, 서민하 씨.”
그녀는 지수의 모습이 시야에 담기자마자,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히 눈앞의 상대를 알고 있는데,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떠올리면 안 된다는 강박과 떠올려야 한다는 본능이 마구 뒤섞여 서민하의 내면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흡혈귀가 포효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내 서민하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은 더없이 흉흉한 기운이었다. 이것과 똑같은 느낌을 지수는 이전에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호텔에서의 싸움, 최상층에서 풀풀 흘러나오던 바로 그 기척이었다.
지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나타나셨구만, 무단 입주자.”
서민하의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변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무감정한 표정은 분명히 다른 존재의 것이었다.
“마주치자마자 나한테 육체의 주도권이 옮겨올 정도라니… 이 아이에게 너의 존재감이 얼마나 커다란지 알 만 하구나.”
기억도 연결도 전부 끊어버렸을 텐데, 정면에서 마주보지조차 못해. 그녀가 혼자서 읊조렸다. 분노와 난폭함이 느껴지던 방금 전까지의 서민하와 달리, 지금 그 몸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는 몸짓 하나하나에서 고풍스러움이 흘러나왔다.
“그래, 무단 입주자라고 했나? 골계스럽군. 너는 저 흔한 기생자 따위의 하찮은 몬스터라도 대하는 듯한 말투로 나를 대하는구나. 만일 네가 내 이름을 안다면 얼마나….”
“대전쟁의 용왕. 사룡 아그리올라.”
지수가 용왕의 말을 끊고서 입을 열었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그게 대체 뭐가 어쨌냐는 표정이었다.
“왕씩이나 되신다는 양반이 여자애 몸 뺏어서 갖고 놀고 있으면 부끄러운 줄이나 알아.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은 내가 걔한테 당신 피 먹여서 사단이 난 거니 조금 책임감을 느끼거든. 그러니까 얌전히 몸 내놓고 꺼지면 그걸로 봐줄게.”
“봐준다는 게……무슨 뜻이지?”
“이 자리에서 널 죽이지 않아주겠다는 뜻이다.”
지수가 뭘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대답했다.
여러 가지 계산을 한끝에 건넨 제안이었다. 강제로 끌어냈다간 서민하의 몸에 악영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옆에 있는 협회장이란 아저씨도 박살내야 하니 지금은 상황이 복잡하다. 그러니 순순히 서민하의 몸에서 나가면 일단 살려는 주겠다.
지수의 입장에서는 정말 선심을 쓴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나, 용왕은 그 말을 도발 내지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용왕은, 이내 강렬한 분노로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협상 결렬이었다.
“용언 하나 막아냈다고 해서,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날개를 편 용왕은 피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을 만들어냈다. 피부가 찌릿찌릿해질 정도의 흉악한 힘이 느껴졌다. 쏘아내진 창은 수십 갈래로 분열해 날아갔다. 연구동의 바닥이 부서지고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렇다니까.”
그리고 지수는 상처 하나 없이 창들 사이에 서있었다.
“사람의 선의로 뭔가를 제시해줘도, 돌아오는 건 엿이나 먹으라는 조롱 뿐이지. 세상 각박해서 어디 살겠냐고.”
지수가 앞머리를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용왕이 지수를 쳐다보았다. 급습이나 마찬가지인 공격이었다. 눈치챌 여지는 주지 않았다. 속도도 위력도, 공격이 시작된 뒤 반응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 텐데.
하지만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오히려 지수 쪽이었다.
애초에 떨어져 싸우고 있는 허다인과 백묵이 왜 지수에게 이 자리를 순순히 맡기고 있다 생각하는 것인가. 지금의 지수는 서민하의 몸에 깃든 용왕과 정면에서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발로 걷어차서 내쫓아줄 수밖에.”
지수가 서민하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 그녀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용왕은 단순한 사념체였다. 우선 싸워서 제압해 용왕의 사념을 몸에서 강제로 끄집어낸 뒤, 사념체의 정수에 파사의 마력을 박아넣으면 그걸로 깔끔하게 끝나는 일이었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서민하의 몸에 조금 상처가 날 수도 있겠지만 무얼, 그 정도는 이해해줄 것이다. 게다가 흡혈귀의 회복력이 있으니 얼마 안 있어 말끔하게 회복될 테고.
용왕은 다가오는 지수를 죽이기 위해 손톱을 휘두르고 창을 쏘아내고 날개로 폭풍을 일으켰으나, 지수는 용왕의 모든 공격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간단하게 피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이상했다. 마치 미래라도 보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미래를 보고 있는 게 맞았다.
그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 나비 피하기 훈련으로 인해, 지수에게 마력의 전조를 감지하는 건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내뿜는 마력이 크면 클수록, 그 안의 사소한 전조들을 읽어내기 쉬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걸 상성이라고 하는 건가?’
일반적으로 몸 안의 마력이 요동치는 건 기술을 사용할 때 뿐이다. 하지만 격이 높은 마물들은 단순한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그 정점이 바로 눈앞의 용왕이었다. 날개를 편 용왕은 마력의 약동을 감추려는 기색도 없이, 온몸에서 힘의 흐름을 풀풀 뿜어내며 싸우고 있었다.
그것이 딱히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마력이 강대하다는 건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결코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마력 내부의 전조를 읽고서 다음 행동을 예측한다는 묘기는 전성기의 허다인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웃기는 짓거리가 가능한 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 한 사람이 지금 용왕의 상대라는 것이었다.
‘읽기 쉬운 데에도 정도란 게 있는 건데.’
영역을 펼치고 있는 지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지금의 용왕은 온 힘을 다해 다음 공격은 오른쪽이야! 지금 왼쪽으로 움직일 거야! 하고 꽥꽥 소리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지수를 상대하며 용왕은 처음 느끼는 공포를 경험했다. 왜 눈앞의 인간을 죽일 수가 없는가? 어째서 죽이기는커녕 공격 한 대를 맞힐 수조차 없는 것인가?
자신이 사념체이기 때문에? 본신에 비해 힘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서민하의 몸은 눈앞의 마법사를 사냥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힘도 속도도, 심지어 마력까지도 이쪽이 우위였다. 그런데도 압도당하고 있는 건 이쪽이었다.
완전히 간파당하고 있다. 갑자기 기습해도 반응한다. 눈을 가려도 감지한다. 수십 개의 페인트를 넣어도 진짜가 무엇인지 완전히 읽히고 있다. 마법사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공격만을 가볍게 흘려넘기며 이쪽의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용언을…!’
용언이라면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용왕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용언을 파훼해 심각한 반동을 입힌 장본인이 바로 이 마법사였다… 용왕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서로 치고 받는 난전에서 그것은 치명적인 빈틈이었다.
한 순간 접근한 지수가 오른손을 뻗어 서민하의 이마를 잡았다. 주변에 뻗쳐있던 영역에서 지수의 몸으로 마력이 흘러들어왔다. 그 마력은 몸 안에서 파사의 마력으로 변환되어 새하얀 스파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수가 입을 열었다.
“성불할 시간이다.”
일을 일단락지을 기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히 찾아왔다. 서민하의 보랏빛 눈동자가 경악에 떨렸다. 정말로, 이 용왕 아그리올라가 이런 곳에서 끝나버리는 것인가!
"응?"
그녀의 눈이 번뜩 뜨인 순간, 무언가를 느낀 지수가 황급히 서민하에게서 손을 떼내었다. 영역으로 감지한 것은 저편에서 날아온 공격이었다. 몸을 돌린 지수가 룬의 방벽을 만들었다. 방벽이 협회장이 날린 검붉은 불꽃을 막아냈다.
지수가 얼굴을 찡그리며 협회장을 쳐다보았다. 방금 어째서 방해한 것인지가 의문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다 남은 한 명과 싸워 어부지리를 취하는 게 이득일 텐데. 이 삼파전, 한쪽이 무너지면 다음으로 박살나는 건 자신일 테니 절묘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뭐 그런 고도의 판단이라도 한 것인가?
그러나 협회장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그런 예상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기에 충분했다. 그가 방금 지수의 결정타를 막은 것은 아주 단순하고도 순수한 이유였다.
“...용왕은 내 거다. 죽이게 둘 수는 없어!”
“가지가지 하시네 진짜.”
지수가 한심하다는 듯 협회장을 바라보았다.
그 한 순간, 용왕은 이미 멀찍이 튀어나가 지수와 상당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방금 죽을 뻔했기에 얼굴은 완전히 백지장이 되어있었다. 이쪽에 사념체를 박살낼 수단이 있다는 게 들켰으니, 용왕은 이제 훨씬 겁쟁이가 될 것이었다.
‘아깝네….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는데.’
그리고 지수는 전장의 이변을 눈치챘다.
두 사람이 지수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일단 먼저 지수를 치우는 게 좋겠다고 암묵의 합의가된 것 같았다. 협회장과 용왕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이 대 일의 구도였다. 지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양반들은 자존심도 없나?”
아까까지만 해도 이쪽을 얕보지 못해 안달이 나있던 자들이, 지금은 둘이서 힘을 합해 이쪽을 죽이자고 공동전선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쪽도 둘이었기 때문이다.
“재버워키. 갑작스럽지만 첫 실전이다.”
<문제 없다. 나의 주인이여.>
정령과의 동조를 시작한다. 지수가 들어올린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덮고, 미리 정해놓은 변신 자세를 취했다.
“허주화虛主化.”
그리고 발아래에서 몰아친 그림자가 지수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