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여기가 핫플레이스구만 (9) >
망량은 지수에게 허주의 술의 구결을 설명해주었다.
지수가 납득하지 못한 채 혼자서 이상한 방법으로 시도해보다 실패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기술이라는 걸 확실히 이해시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망량이 보기에 지수는 대단히 총명한 인간이었다. 적어도 안 되는 걸 되게 하겠다고 고집 피우다가 제 몸을 망칠 위인은 아니었다.
허주의 술은 이를 테면 정령사의 극의였다. 오로지 정령과의 교감에 모든 재능을 쏟아부은, 초일류의 정령사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 그리고 망량이 생각하기에 지수가 정령을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이었다. 그의 본질은 서로 다른 다채로운 능력들을 섞어가며 싸우는 올라운더였다.
‘허주의 술은 도련님과는 맞지 않아.’
결코 지수의 재능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수는 수많은 능력을 섞어 쓰면서도 하나하나의 숙련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치고 올라오는 성장속도도 전례 없는 수준이니, 말 그대로 규격외의 이레귤러라 할 만 했다.
누각주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면, 망량은 지수가 각성한 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은 루키라는 걸 절대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괴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에게 맞는 기술과 맞지 않는 기술이라는 것이 있었다.
허주의 술은 제너럴리스트가 아닌 스페셜리스트, 오로지 정령술에만 모든 것을 건 이들 중에서도 한 줌의 각성자만이 입문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것 하나에 얽매여서 펼쳐져있는 다른 선택지들을 등한시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해하셨습니까, 도련님?”
“네, 다시 말해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런 착상에서 시작된 기술이라 이거네요.”
지수의 말에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지도 못한 장해가 나타날까봐 걱정했는데, 지수가 들은 대로 라면 지수에게 불가능한 이유는 없었다.
‘즉, 오로지 정신의 문제다.’
자신 내부의 흐름을 자연의 일부와 같이 환원시켜, 그 몸을 둥지 삼아 계약한 정령을 스스로 품는다. 정령이 자연에 동화할수 있다면, 자기 자신이 자연이 되는 것으로 정령과 동화할 수도 있을 터. 이것을 허인虛人의 경지라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오행에 통달한 이라면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었다. 특히 자신 내부의 흐름을 조율하는 건 지수의 특기라고 해도 좋았다. 명경지수니 영역이니, 지수의 주특기들은 전부 마력을 극도로 섬세하게 제어하는 기술의 응용이었다.
“도련님…?”
망량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누워있는 지수의 몸에서 기척이 흐릿해졌다. 지수는 지금 허주의 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허인의 경지에 다다라 정령을 몸에 품을 준비는 끝났지만, 문제는 바로 이 다음이었다. 이쪽의 의지를 전달하고, 저쪽의 의사를 파악 하는 것.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교감하여 정령의 고삐를 쥐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폭주해서 커다란 중상을 입을 것이다.
무모해도 너무 무모했다. 지수의 교감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허주의 술을 제어하는 건 4나 5 정도의 레벨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심지어 지금 지수의 몸은 환술의 반동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까딱하다간 정령과 마구잡이로 뒤섞여, 인격마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망량이 소리쳤다.
“도련님! 그만두십시오! 지금 써봐야 폭주할…!”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수의 몸아래에서 그림자가 꿈틀대며 휘몰아쳤다. 검은 그림자는 무대에서 흔들리는 장막 같았다. 이내 그림자의 소용돌이가 지수를 집어삼키듯이 그 몸에 휘감겼다. 새까만 막이 걷혔을 때, 지수는 자리에 서있었다.
지수의 머리 한쪽에는 가면이 걸려있었고, 그의 상의 위엔 보라색의 망토가 덧씌워져 일렁거리고 있었다. 외견상의 변화는 극단적이지 않았으나 이미 영구적으로 정령과 융합해 반인반령이 된 망량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지수는 자신의 정령과의 동화에 성공해있었다. 그것도 극히 안정적인 상태로.
“폭주할. 그 다음 말이 뭐였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던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도련님, 당신은 대체…?”
망량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끔뻑였다.
당연히 폭주하고 실패. 만에 하나 성공한다 해도 몇 초 유지하지 못하고 분리당할 거라 생각했다. 첫 시도에서 허주의 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성공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뭐 정령과 대화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이 가능한 재능은 살면서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모든 환요와 통(通)해있는 누각의 주인. 무당 허다인.
‘그런가.’
망량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짜맞추어지는 느낌이었다. 누각주 님께서 지수를 구태여 자신의 제자라고 칭했던 이유. 그것은 이 청년이, 무당 허다인이 오랜 세월을 지내오며 처음으로 찾아낸 자신의 동류였기 때문인가?
‘드디어 나타난 것인가, 누각의 후계자가?’
망량은 결코 지수의 재능을 과소평가할 생각이 없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없는 무례다. 망량은 사죄의 의미로 무릎을 꿇었다. 누각주의 제자인 데다 허주의 술을 사용하는 것까지 가능하다면, 눈앞의 청년은 이미 단순한 누각의 귀빈이 아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무릎을 꿇으시고.”
“제 어리석음을 탓하는 중입니다. 제 상식으로 누각주 님의 제자 분을 재단하려고 하다니,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망량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계산들이 재빠르게 지나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누워있던 지수는 이미 움직이고 있는 채였다. 정령과 융합하고 있는 동안은 모든 신진대사와 신체능력이 크게 활성화된다. 그 축복이 반동에 따른 데미지를 상쇄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수의 몸을 오히려 회복시키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만, 시간이 비었어.’
얻어 걸린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수가 허주의 술을 습득한 것으로 인해 일이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정령과 융합한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지수의 회복 속도는 망량이 상정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라질 것이다.
‘누각주 님께서 말씀하셨던 ‘때’까지 아직 조금 남았다.’
그렇다면 그 비어있는 시간에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의문의 답은 금방 나왔다. 망량은 지수를 누각의 대련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터져나온 불꽃과 함께 나타난 것은, 얼굴에 말뚝이탈을 쓰고 있는 망량의 허주 상태였다.
“전력으로 덤벼보십시오. 저 또한 그렇게 할 테니.”
허주의 술을 완벽히 체화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자신이 허주 상태로 계속 싸워보는 것과, 다른 허주가 싸우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 다행히 지금 상황에선 그 두 가지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망량이 손에 든 시계를 바라보았다.
“허주의 싸움법에 대해서 박아넣어 드리겠습니다.”
가면을 쓴 망량이 도발하듯이 지수에게 손짓했다. 한바탕 탈진한 뒤의 초회복까지 겸해, 시간은 정말로 딱 맞았다.
***
아수라장의 한복판에서, 백묵은 부적을 던졌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괴물들이 으르렁대는 연구동 한복판에 나타난 것은 고풍스러운 한옥의 문이었다.
문이 안쪽에서 드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협회장과 서민하 둘 모두가 곧바로 반응했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된다. 저 문이 열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경지에 달한 자 특유의 직감이었다.
“유감스럽지만, 더 이상의 변수는 달갑지 않군.”
“방해하지 말고 꺼져.”
서민하의 손톱은 허공에서 나타난 한옥의 문을, 키메라의 발톱은 서있던 백묵을 수십 갈래로 갈갈이 찢어버렸다. 폭풍의 눈. 시끌벅적히 난리가 나있던 혼란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은 회심의 진입이었으나, 문이 열린 뒤 누군가가 나올 단 한 순간의 빈틈조차 두 괴물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라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협회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갈기갈기 찢겨나갔을 터인 백묵과 한옥의 문은, 수십 마리의 황금색 나비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었던 것처럼. 협회장이 휙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오나, 기척을 일그러뜨리는 게 제 특기기에.”
그곳에 있는 건 흑의로 몸을 감싸고 있는 여인이었다. 분명히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정말 그곳에 있는 것인지 어떤지 확신할수 없을 만큼 희미한 기척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건 뿔 달린 하회탈을 쓰고 있는 여자.
“무당 허다인…! 몰래 숨어서 같잖은 환술을!”
협회장이 소리쳤다. 정말 맞는 말을 하고 있다는 듯이, 허다인의 옆에 팔짱을 낀 채 서있는 백묵이 입술을 이죽였다.
“그래. 그냥 내 몸으로 버터도 막을 수 있었다.”
“맞을 필요 없는 공격까지 왜 맞으려 해? 당신 변태야?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의 백묵에게 허다인이 쏘아붙였다. 그리고 부적이 발현시킨 한옥의 문은 이미 열린지 오래였다. 문 안쪽에서 나타난 것은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망량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이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행색이 왜 그 모양입니까? 망량. 누각주 님 앞입니다.”
“그게, 도련님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변명은 집어치우세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협회장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들이야말로 헌터 협회장이라는 위치에서도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신비에 감싸여 있는 길드, ‘누각’의 구성원들인 게 분명했다. 누각이 본모습을 드러낸 데다 육영웅이 두 명. 국내 최고의 헌터라 불리는 오성화와 김혜성까지. 이 중요한 때에 어째서 이리 사사건건 방해가 들어 오는가.
“…용왕이다. 수도 없이 꿈에 그리던 그 용왕이, 드디어 내 앞에 섰단 말이다. 내 사냥을 방해하지 마라…!”
협회장이 꽉 쥔 주먹을 내려쳐 버튼을 눌렀다. 지금까지 연구동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던 단순한 실험체들 뿐만이 아니라, 따로 격리 시켜놓았던 위험한 소체들까지 전부 해방시켰다. 곧바로 망량이 심상치 않은 기척들을 느꼈다.
“…이거 상당한 괴물들인데요.”
“인간을 그만두었다는 점에선 저희도 마찬가지.”
이매와 망량이 기척들이 다가가는 방향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지금 다가오는 괴물들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혼합물이라고 한다면, 이매와 망량 또한 같은 동류였다.
“두억시니!”
“어둑시니.”
이매와 망량의 얼굴에 말뚝이탈과 미얄탈이 씌워졌다. 이미 정령과 융합해있는 두 사람은 굳이 허주의 술을 발동할 것까지도 없었다. 새빨간 불꽃과 차가운 그림자가 그들의 몸에 휘감겨 신체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한 벽에서, 기괴한 포효와 함께 이형의 괴물들이 터져나왔다.
“키메라! 너는 가서 놈들을 배제해라!”
협회장이 소리쳤다. 거대한 키메라는 바깥에서 뛰쳐드는 괴물들과 함께, 정령과 융합한 이매와 망량을 포위했다.
그러는 한편, 무너져내린 것은 반대쪽의 벽 또한 마찬가지였다. 품에 인형사를 끌어안고 있는 흑기사가 맞은편 벽에서 터져나왔다. 그 앞에선 김혜성과 오성화가 끈질기게 들러붙어 싸우고 있었다. 이쪽도 저쪽도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이내 허다인과 백묵이 천천히 걸어나갔다.
“...마치 대전쟁의 재현이군.”
“그 말대로야.”
백묵의 말에 허다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수긍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우스울만치 빛바래있었다. 재앙이었던 용왕은 토벌되어 사념만이 남았으며, 흑기사 우진은 죽어서 단순한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백묵과 허다인은 봉인 탓에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이형의 괴물들과 키메라는 대전쟁에서 날뛰던 마물들의 조악한 복제품일 뿐이었다.
이내 함께 걸어가던 두 사람의 방향이 갈라졌다.
“내 부하들이 곤란해보이는군. 힘의 절반도 낼 수 없지만, 이런 우스꽝스러운 무대라면 그 정도로 충분하겠지.”
쭉 기지개를 펴며 뚜두둑 목을 푼 백묵은, 오성화와 김혜성이 흑기사와 싸우고 있는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마찬가지야. 우리 식구들도 조금 곤란해보이네. 애초에 우리는 이제 주인공이 아니니까, 어깨에 힘을 줄 필요도 없지.”
빛나는 나비들을 대동하며 손을 휘저은 허다인은, 이매와 망량이 키메라와 싸우고 있는 왼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운데에선 협회장과 서민하 둘만이 남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저 자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가장 중요한 이쪽은 내버려두고 방해물들을 치우는 데에만 전념하다니. 마치 이쪽을 전담할 인간은 따로 있다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
그리고 그러한 의문에 도달한 협회장과 서민하는, 동시에 휙 고개를 돌려 한옥의 문을 쳐다보았다. 열려있는 한옥의 문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협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뚜벅뚜벅 들려왔다.
극히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였다. 장지문 끝자락에 먼저 비친 것은, 미역처럼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이었다.
마지막으로 문에서 나온 청년이 문을 드르륵 닫자, 그제야 서있던 한옥의 장지문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깥으로 나온 청년은 천천히 연구동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아는 얼굴들이 총집합해서 싸우고 있었다.
지수가 한 번 휘유 휘파람을 불고서 말했다.
“여기가 핫플레이스구만.”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정면에 있는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상당히 바뀌어있는 모습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등에는 커다란 박쥐 날개가 달려있었다. 그렇지만 저것은 서민하였다. 사실은 호텔에서의 싸움으로부터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수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오랜만이다.”
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등장한 지수가 한 손을 들어보이며 느긋하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