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여기가 핫플레이스구만 (6) >
모든 과정은 어이없을 만치 간단했다.
서민하는 우선 자신에게 섞여있는 뱀파이어의 인자를 바깥으로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피를 지배하여 억지로 인자의 ‘기록’을 끄집어 냈다. 귀족, 뱀파이어 프린세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최고위의 흡혈귀가 되었기에 가능한 권능이었다.
피의 기록을 끄집어내 살펴보니 서민하에게 이식된 원본 흡혈귀를 관리하고 있던 존재, 협회장의 진짜 본거지가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으로 용무는 끝났다.
“불쾌해.”
서민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서 몰아치고 있던 피의 격류가 축 늘어져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흡수되었다. 서민하는 자신 속 흡혈귀의 인자에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아주 작은 의식의 파편까지 완전히 짓밟아버렸다.
흡혈귀의 인자에 휘둘려 폭주하던 이전의 자신과는 달랐다. 불행하다며, 불길하다며 자책하던 자신과도 달랐다. 서민하는 지금 누구 보다도 당당하며 강했다. 착취하는 것도 지배하는 것도 이쪽이었다. 이 모든 것이 복수라는 동기 덕분이었다.
<바로 갈 테냐?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게 좋을 텐데.>
“웃기는 소리하고 앉아있지 마.”
서민하가 내면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일축했다. 지금 그녀의 안쪽에 가득 차오른 것은 분노와 증오였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모든 인간들을 생지옥에 처박아버리는 일을 더 이상 일 초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했다.
“너희까지 쿠데타에 가담한 거냐? 미쳤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우리 집행부는 협회의 안정을…”
“우리 집행부라고? 더러운 입으로 집행부를 논하지 마라!”
바깥은 싸우고 있는 인간들로 소란스러웠지만,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저들끼리 싸우든 말든 서민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서민하는 이유라를 대동한 채 그저 뚜벅뚜벅 전장을 걸었다. 그것만으로 주변의 인간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서민하의 눈동자는 금방 숨겨져있는 결계를 포착했다.
결계가 파훼되었다는 걸 알리지 않고 들어가기 위해선, 교묘한 술리를 정확히 짜맞추어낼 필요가 있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몰래 잠입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박살내고 유린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서민하는 복잡하게 짜여진 거대한 결계를 그 몇 배나 되는 마력을 가하여 찢어버렸다. 목소리가 만족스레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된다.>
거대한 연구동 안에 들어서자마자, 안쪽에서 수많은 생명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인간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은 들키면 끝장날 실험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실험의 결과물들만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예상대로구나. 군대 하나를 숨겨두고 있었어. 어디다 쓰려고 이런 병력을 차곡차곡 쌓아왔던 것일까 궁금하지 않나?>
그 따위 것 전혀 안 궁금했다. 자신의 뺨을 때린 자에게 왜 때렸냐고 물어볼 필요는 하등 없었다. 단지 열 대로 되갚아주면 될 뿐이다.
서민하는 온종일 자신의 내면에서 조잘조잘대고 있는 목소리에게 슬슬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잘도 이곳을 찾아냈군.”
들려온 목소리에 서민하와 이유라가 걸음을 멈췄다. 소리 없이 다가온 건 검은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는 얼굴에 아무 무늬도 없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알고 있나? 집행부 사천왕에는 알려지지 않은 다섯 번째가 존재한다는 걸. 그래. 나야말로 쭉 그 이름도 존재도 알려지는 일 없이 홀로 협회장 님을 섬겨오던 그림자…!”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눈 깜짝할 새에 서민하의 손톱이 남자의 허리 위를 찢어발겨, 벽에 날아간 팬케이크 반죽처럼 치덕이는 고깃덩이를 만들었다. 이유라도 서민하도, 그 끔찍한 광경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시 걸어갔다.
그리고 가면을 쓴 남자를 죽인 것이 방아쇠가 된 건지, 여기저기서 철창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며 괴물들이 쏟아져나왔다. 대부분은 이미 제대로 된 괴물의 형상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형(異形)이었다. 불쌍한 실험체의 말로들이다.
“전부 죽이고 따라와.”
“네!”
마물의 군세에 포위됐다는 걸 알고서도, 서민하는 걸음을 멈추지조차 않았다. 그 말에 이유라가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며 수긍했다. 차 한 잔 끓여줘, 같은 간단한 부탁을 받은 듯이. 이유라의 손가락에서 마력의 실들이 뻗어나왔다.
“저도 협회장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이유라가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판 함정에 빠져 이유라는 모든 인형을 잃고,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
협회장이 ‘아기 손목 비틀 듯 죽일 수 있는 간단한 상대’라며 내밀었던 표적은, 마력의 실이 전혀 통하지 않는 데다가 기술 하나로 인형 전부를 무력화시키는 악몽 같은 인간이었다. 의도적으로 인형사를 사지에 몰아넣은 것이 확실했다.
절삭되어 갈려나가는 몬스터들의 시체를 뒤로 하고, 서민하는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서민하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연구동의 구조는 미로처럼 꼬여있었다. 하지만 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서민하가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뒤이어 폭풍이 휘몰아쳤다. 혹시 괴물들이 날뛰더라도 탈출할 수 없도록, 걸맞은 설비로 세워졌을 연구동의 외벽이 가볍게 찢어졌다. 서민하는 이 안에서 가장 흉악하고 커다란 기척이 있는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갔다.
그리고 가장 흉악한 기척이 느껴지고 있는 그곳에는,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한 중년 남자가 있었다.
“웃기는 일이군. 적을 죽여버리라고 했더니 역으로 이쪽을 습격할 줄이야.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던 건가.”
협회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협회장과 인형사는 서로 직접 얼굴을 마주대한 적은 없지만, 모종의 기브 앤 테이크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먼저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전투능력은 역시 경이로워. 같은 이레귤러로서 질투를 느낄 만큼. 어떻게든 손에 넣어서 소체로 삼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죽일 수밖에 없겠군. 그래서, 어디 보자. 자네는 인형사를 따라온 동료인가?”
협회장이 여유로운 태도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서민하가 연구동을 습격해온 것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는 수많은 남자들이 싸우고 있었는데도 이미 그런 ‘사소한 해프닝’쯤이야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서민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유라를 따라온 게 아니라, 유라가 날 따라온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손으로 찢어발기고 싶어서.”
“응? 그건 이상하군. 나에게 원한이라도 있다는 건가.”
"...각성자 아이들을 납치해, 몬스터의 인자를 섞는 실험."
그 말에 서민하가 휙 손을 휘둘렀다. 악마의 갈퀴손처럼 변형된 오른팔이 연구동의 바닥을 쓸어냈다. 한 순간 기괴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손톱자국이 깊게 파였다. 자신의 변형된 오른손을 힐끗 바라보며, 서민하가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쪽이 손수 내 인생에 이런 빌어먹을 선물을 해주셨는데. 당연히 몇 배로 답례를 해주는 게 예의 아니겠어.”
그 말에 처음으로 협회장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방금의 발언에서 생각할 때 그녀의 정체는 확연했다.
3기 이상의 진행이 확인된 실험체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한 실험체. 이름이 서민하라고 했던가. 흡혈귀를 소체로 삼아 융합한 바로 그 아이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내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수도 없이 많았다.
협회장에게는 지금까지 수많은 몬스터들을 다뤄온 경험이 있었다. 적어도 몬스터에 대한 지식에 있어선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을 거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몬스터가 한 단계 ‘격’이 높아졌을 때, 어느 정도로 강해지는지도 알고 있다.
“……흥미로워.”
그리고 눈앞의 계집애가 방금 보여준 힘은 걸맞은 경험과 성장의 계기를 쌓아, 한 단계 진화했다… 그런 수준이 아니다. 강해지는 과정을 몇 단계나 건너뛴 듯한 불합리한 위력이었다. 이 단기간에 저런 수준으로 성장할 수는 없었다.
“흥미롭군. 너무 흥미로워서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던 내용들이 전부 날아가버렸어. 제발 부탁이니 말해다오. 무슨 수를 쓴 거지? 탈주한 뒤 어떤 자극을 받으며 살아왔던 거냐.”
그리고 협회장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긴 순간. 방 안에 수많은 몬스터들이 돌연 나타났다. 자그마한 서민하를 둘러싼 괴물들은, 하나 하나가 웬만한 던전의 보스 몬스터 수준의 힘과 위압을 갖추고 있었다. 희열에 차있는 협회장이 말했다.
“좀 더 보여다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모든 몬스터가 격살당했다.
서민하의 등뒤에서 터져나온 새빨간 피의 파도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괴물인 것처럼 단숨에 입을 벌려 포위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전부 집어삼켰다. 협회장이 불러낸 몬스터들은 팔다리만이 남아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핏물 속에서 서민하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야말로 보여주지 그래.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얼굴.”
협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상위종의 피를 착취하는 것. 각성자로서 가지고 있던 원래의 능력과 시너지를 일으킨 것. 아니면 그녀 또한 이레귤러? 서민하가 어떻게 해서 저런 힘을 손에 넣은 것인지 몇 가지 경우가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지만, 방금 것으로 그 모든 것이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단순한 뱀파이어 융합체가 저 정도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협회장이 알고 있는 한 단 한 가지 뿐이었다. 몬스터의 힘을 강제로 각성시킬 수 있는 특정한 존재의 개입.
“그런가. 이 타이밍에, 네 쪽이 먼저 치고 들어왔나.”
협회장이 희열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건 오히려 꿈 꾸던 연예인이나 가수를 눈앞에서 만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기쁨이 담겨있는 얼굴이었다. 협회장 또한 ‘인형사‘ 이유라와 같은 이레귤러였다. 그의 눈에 서민하의 정보가 표기되고 있었다.
[종족명 : 드래고닉 뱀파이어 / 뱀파이어 엠프레스]
“역시 너였나, 용왕…!”
현재 사회에서 게이트 바깥에 나온 몬스터의 취급은 극히 민감하다. 시민들의 안전 문제와 직결되기에, 헌터 라이센스 시험에서조차 실기시험용 몬스터를 조달할 수 없어 다른 방식의 테스트를 고안해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무리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라고 하더라도 몬스터를 아무도 모르게 뒤쪽으로 빼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고블린 같은 하위 몬스터이긴커녕, 악마종이나 보스 몬스터 따위의 거대한 괴물을 들키는 일 없이 바깥으로 가져오고,
몬스터를 가지고 위험한 생체실험을 반복하면서도 커다란 사건 하나 일으키지 않고 조용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오로지 협회장이라는 직책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능력에서 기인한 일이었다. 그 또한 각성자들 중의 이레귤러.
…무엇이든 인형으로 만들어 다룰 수 있는 ‘인형사’처럼. 몬스터를 지배하는 협회장의 클래스는 ‘조련사’였다.
“그렇다면 너는 계산을 잘못했다.”
협회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말했다. 사룡 아그리올라. 그녀가 대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함이었으니까. 그것은 조련사로서 가지고 있는 협회장의 꿈이었다.
용왕 사냥.
대전쟁에서 날뛰던 용왕을, 내 몬스터로 삼고 싶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그 순수한 소망만을 위한 것이었다.
“…각성자에게 몬스터의 인자를 섞는 실험이라고 말했나?”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큭큭 웃음을 참고 있던 협회장이 소리치며 양팔을 벌렸다. 서민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이 느끼고서 찾아 온 흉악한 기척. 그것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대야. 정확히 반대다! 이것은 각성자에게 몬스터의 인자를 섞어 강화시키는 따위의 시시한 실험이 아니야! 내가 조련한 몬스터에 각성자를 섞어 강화시키려는 실험이지!”
그리고 돌연 거대한 발톱이 공간을 찢고 튀어나왔다.
나타난 존재는 참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뱀이었다. 그것은 거미였다. 그것은 사자였고 그것은 와이번이었다. 온갖 마물의 형상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진흙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윤곽은, 용이었다.
“보고 있겠지? 용왕이여. 너를 꿈꾸며 만들어낸 몬스터다. 설마 이 정도까지 완성되어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나?”
언젠가 용왕을 사냥하기 위해서 갈아오던 어금니. 협회장이 자행한 생체실험의 궁극에 위치한 괴물이었다. 협회장이 어떠냐는 듯 웃었다. 이런 것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단어가 있었다. 키메라. 그것은 조련사가 만들어낸 최악의 키메라였다.
“놀라긴 이르다. 내 장난감 상자에는 아직도 꺼낼 게 잔뜩 남아있으니까. 나는 준비가 철두철미한 성격이라서, 확실하지 않으면 싸움을 걸지 않는다만… 용왕 네가 먼저 찾아와줬다면 전력으로 맞이하는 게 예의지.”
협회장은 유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중요한 시기, 연구동이 제3자에게 습격당했다…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호기였다.
자그마치 용왕이 직접 각성시킨 뱀파이어 엠프레스다. 저것을 키메라가 먹어치워 흡수한다면…더 이상 거리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육영웅이고 나발이고 전부 집어치우고, 당장 협회장 자신이 용왕의 군주로서 군림할 수도 있었다.
“밥 먹을 시간이다, 키메라.”
남아있는 사천왕 또한 완전히 폭주해서 몬스터화(化)한 것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늑대가 생각보다 분투해준 모양이었다. 키메라의 먹이로 주기 위한 성장은 끝났다. 애초에 모든 융합체는 폭주시킨 뒤 키메라에게 흡수시킬 예정이었다.
협회장이 조련사로서 가진 능력인 '보유 몬스터 귀환’이 발동되었다. 지금쯤 아마 정유현의 시체를 물어뜯은 뒤 황야를 날뛰고 있을 거대한 괴물들. 그들이 키메라를 강화시킬 양분이 되기 위해 협회장의 곁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타난 것은, 두 명의 남자였다.
“엉?"
“뭐하는 상황이야, 이건….”
거대한 비밀 연구동. 전송에 합류해온 오성화와 김혜성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서민하와 키메라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