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67화 (67/176)

67화.  < 여기가 핫플레이스구만 (4) >

“꼴이 말이 아니시구만?”

대검을 든 오성화가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정유현을 내려다보았다. 오성화가 집행부를 나오고서 거진 몇 년만의 재회였지만 그의 얼굴에 별다른 감회는 내비치지 않았다. 마치 바로 어제라도 만났다는 것 같은 가벼운 표정이었다.

“맨날 잘난 척만 해대고 있더니. 내가 말했지? 그쪽 그렇게 뭐든 혼자 하겠다 뻗대다 큰코 다칠 거라고.”

쓰러져있는 정유현을 보며 오성화가 코웃음을 쳤다. 정유현이 입술을 이죽였다. 지금 정유현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있는데도, 오성화의 목소리는 길을 가다 만난 것처럼 느긋했다. 걱정 따위는 하나도 안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옆에 서있던 김혜성은 신기하다는 듯 오성화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오성화는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과보호 수준으로 들러붙으며 괜찮냐 걱정하는 피곤한 인간이었는데. 오성화가 이런 태도를 내보이는 상대는 처음 보았다. 그럼에도 말투에 경멸이나 불쾌감 따윈 느껴지지 않으니 신기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이건 집행부의 일이다.”

시답잖은 소리는 집어치우라는 듯 정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인간이었다. 연인을 만난 뒤 오성화는 집행부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는 집행부에 있어봐야 얻을 것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다.

더욱 피폐해지기 전에 집행부에서 나가기로 결심한 것은 잘 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집행부의 일에 개입하다니.

“착각하지 마셔. 난 불식 부길드장 자격으로 온 거니까.”

그 말에 정유현의 눈썹이 더더욱 좁혀졌다. 분명 불식의 길드장인 백묵과는 모종의 거래관계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보 교환 정도일 뿐, 이런 때에 지원군을 보내줄 정도로 적극적인 우호를 받고 있던 기억은 없었다.

“저거. 하나는 댁이 쓰러뜨린 건가?”

코웃음 친 오성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거대한 괴물 두 마리가 갑자기 나타난 오성화를 경계하며 크르릉대고 있었다. 오성화가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저거 저번에 잡은 케르베로스보다 더 세보이는데. 오성화가 정유현에게 말했다.

“저런 것들이 던전 밖에 튀어나오다니, 1급 경보 사태잖아. 대체 뭐가 어떻게 돼야 이런 상황이 되는 거야?”

“...협회장의 실험이다.”

실험? 정유현의 대답에 오성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실험을 해야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들이 동시에 세 마리나 튀어나오는 건가. 저건 이미 A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보다 더한 수준이었다. 마을 하나 둘쯤은 가볍게 박살내겠지.

“인간을 괴물로 만들어버리는…큭!”

혼자 일어서려던 정유현이 또다시 자세를 무너뜨렸다.

적에게 받은 상처가 아니라 자신이 사용한 기술의 반동이었다. 중력의 특이점. 가능하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정말 제대로 써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어를 벗어나지 않게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였는데도 팔다리가 반쯤 비틀려있었다.

휘청거리는 정유현의 몸이 앞으로 넘어갔다. 재빨리 팔을 뻗어 붙잡은 오성화가 정유현의 몸을 휙 던졌다.

“이러다 죽겠네. 그 양반한테 가져다 줘.”

옆에 서있던 김혜성이 정유현의 몸을 받아들었다. 바람 마법의 응용으로 만든 쿠션이 공중에서 그의 몸을 잡아챘다. 정유현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중상이었다. 곧바로 텔레포트를 하려던 김혜성이 잠시간 오성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장 혼자서 버틸 수 있을까.’

텔레포트에 일순 제동을 건 것은 그런 걱정이었다.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는 두 괴물들. 호흡만으로도 여기까지 마력이 풀풀 풍겼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잠깐 뒤, 김혜성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그 말과 함께 김혜성과 정유현의 신형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달려들고 있던 거대한 괴물 호랑이의 발톱이 바위를 무너뜨렸다. 모래먼지와 함께 굉음이 울려퍼졌다. 정유현을 노리고 한 공격이었지만, 이미 두 사람은 사라진 상태였다.

<늑대를 놓친 데다, 폭탄마까지…!>

“이제 폭탄마 아니라니까.”

세로로 열린 호랑이의 동공이 번득였다.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공격의 여파에 같이 휩쓸린 줄 알았던 오성화는, 그 한 순간 호랑이의 머리 위로 올라와 서있었다. 오성화가 여유 있는 얼굴로 어깨에 대검을 툭툭 두드렸다.

“몬스터가 말도 하는 거 보니까 실험인지 뭔지 진짠가 보네. 협회가 완전히 미쳤구만? 인간을 몬스터로 만들어?“

호랑이의 머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내리쳐진 참격에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올려다보기도 힘든 거대한 체격 차. 보통이라면 압도되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으나, 오성화는 오히려 이 편이 요리하기 쉽다는 듯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폭탄마! 네가 왜 지금 여기에 나타나는 거냐!>

“길드장 명령이야.”

폭발을 몸에 두른 오성화가 한 순간 사라졌다. 직후 그의 모습이 나타난 건 무너진 땅 위에서였다. 호랑이의 앞발에 참격을 박아넣자,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거대한 호랑이의 몸이 무너졌다. 제 몸집에 발목이 걸려 넘어진 꼴이었다.

“너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아무래도 우리 길드 동맹이 엮여있는 모양이거든. 적대관계는 모조리 쓸어버리는 게 불식의 방침이라서.”

확실히 느껴지는 힘 자체는 대단하지만, 척 봐도 자기 몸 하나 가누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반편이들이었다. 몬스터 특유의 소름 끼치는 살의와 야성도 없다. 정유현은 무시무시한 실험이니 뭐니 했지만, 지금껏 몇백 몇천 마리의 괴물을 상대해온 오성화가 보기엔 단순한 실패작일 뿐이었다.

“그리고 잘 모르겠는데…너희가 내 원수를 끌어낼 미끼라네. 너희들을 다 반쯤 죽여놓고 기다리면 찾아오는 건가?”

삽시간에 오성화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백묵의 전언이었다. 놈들을 정리해두고 기다리면 인형사 쪽에서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고. 그것이 오성화가 이곳에 온 최대의 이유였다.

괴물 호랑이는 이 정도쯤이야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금방 일어났다. 상당히 인상깊은 맷집이었다. 하지만 오성화는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인형사의 인형들이나 백묵과 싸울 때보다 훨씬, 제자리에 있다는 안정감이 있었다.

“준비운동 치곤 딱 좋아.”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야말로 오성화의 본업이었다.

***

김혜성에게 부축받은 정유현은 반쯤 체념하고 있었다.

아마도 죽을 것이다. 자신의 몸이기에 알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바깥쪽보다도 더 치명적인 것은 안쪽의 상처였다. 전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중상이다. 회복에 대단한 일가견이 있는 이가 아니면 시간에 맞춰 처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만큼 정유현의 팔다리는 기이한 형태로 비틀려있었다. 방어불능의 필살기. 모든 걸 집어삼키는 극소의 블랙홀. 확실히 중력 능력의 정점다운 위력이었지만 한 번 사용하는 것으로 이런 꼴이 되어버린다면 단순한 자폭기일 뿐이었다.

‘무언가 손에 잡힐 것 같았는데.’

시야가 조금쯤 흐려진 것을 느끼며 정유현이 생각했다. 중력의 특이점. 그 영역에 한 번 도달해보고 나니, 확실하게 자신의 능력이 완전하게 체화되려는 감각이 느껴졌다. 가능한 한계에 부딪혔다 생각했던 역량이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은 죽는다.

이걸 살려내려면 강력한 회복 스킬 뿐만이 아니라 재생 촉진, 마취, 외과 수술 전부의 소양을 갖추고 있는 올라운더라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런 대단한 인재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을 리는 없다. 수십 번의 사선을 넘어온 경험이 있는 정유현이기에 알 수 있었다. 납득하는 건 생각보다 담담했다.

어차피 시체처럼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미처 박살내지 못한 사천왕도, 반가운 후배가 나타나 마무리를 지어주었다. 오성화.

놈이라면 분명히 나머지 두 사천왕쯤이야 가볍게 쓰러뜨려 줄 것이다. 실력 만큼은 확실한 놈이니까.

남은 미련이라고는 한 가지 뿐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박사와 서민하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용서받고 싶었다. 하긴 자신처럼 배배 꼬여있는 인간에게 그런 사치가 허락될 리는 없었다.

‘사과의 말은, 유언으로라도 남기는 게 좋겠군.'

하지만 김혜성이 텔레포트로 데려간 곳에서 나타난 한 남자는, 그런 정유현의 체념을 떨쳐내버리기에 충분했다.

“무슨……당신이, 왜 여기에?”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 이 남자를 여기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정유현의 눈에 비친 것은 피에 푹 절어있는 정유현의 검은색 제복과는 대비되는, 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색의 제복이었다.

“관리부장….”

그의 곁에 있는 것은 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관리부의 스태프들이었다. 정유현의 눈동자가 답지 않게 당혹으로 흔들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집행부 간의 전쟁에 그가 관여할 리가 없다. 아니, 만일 관여한다고 해도 그가 서있을 곳은 협회장의 옆 이지 이곳이 아니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인간이라도 보는 얼굴이군.”

관리부장은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단숨에 정유현의 상태를 파악하고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미 일 분 일 초가 너무나 소중했다. 투여되는 약제들과 함께 발동된 수많은 회복 스킬들이 정유현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었다.

마력의 메스를 든 관리부장이 정유현의 몸에 하나씩 처치를 취해나갔다. 결코 성급해하지 않지만 지체 하나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의식을 놓지 마. 관리부장이 정유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그의 몸을 절단하고 재생시키고 봉합했다.

“나는 집행부가 싫었네. 함께 협회에서 일하고는 있지만 웬만해서는 연관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

정유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협회 안의 모두가 그러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현장의 집행부는 비밀 많고, 규정은 무시하며, 언제나 피투성이에 험상궂은 일들만 하니까…그런 자들에게 가까워지려 드는 것이 별종이었다.

“그중에서도 늑대 자네를 가장 꺼려했지. 위급한 아이들을 보면서도 본 체 만 체 하고서, 우리 관리부한테 알아서 하라며 떠넘기고 다음 현장으로 향하는 자네의 등을 볼 때마다… 나는 솔직히 자네를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생각했어.”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구해주고 싶다는 동기가 아니라, 단지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만 현장에 나서는 야만스러운 인간들. 그것이 관리부장이 집행부에게 가지고 있던 인식이었다. 집행부가 과격한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느라 무고하게 다친 피해자들을 보면 그들에게 증오마저 느껴졌다.

관리부장이 이를 꽉 깨물며 혈관을 묶었다. 아무리 경감됐다고는 하나 끔찍한 고통이 엄습하고 있을 텐데, 정유현은 신음 한 조각 흘리지 않으며 관리부장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지만 말일세, 그런 내 인식을 결정적으로 뒤집는 사건이 있었네. 혹시 그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겠나?”

정유현은 말없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관리부장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지금에야 처음 안 사실이었다. 짐작 가는 부분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관리부장이 말했다.

“자네가 사수를 맡았던 청년이었네. 집행부 제복을 입은 그 청년은…아이들을 노린 가스 공격을 날려버리느라 기절하기 직전까지 탈진해버렸는데도,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며 쉬지도 않고 다음 현장에 달려가려 들었지.”

정유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면서 내 손에 반지를 꽉 쥐어줬어. 척 봐도 귀해보이는 그 반지를, 내가 잃어버렸다고 둘러대거나 빼돌릴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 아이는 내 손을 꽉 쥐고서 말했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이 반지엔 해독 효과가 있으니 부디 아이들을 구하는 데에 써달라고.”

관리부장의 눈동자에 따뜻한 기색이 스쳤다. 다른 관리부원의 스태프들도 알고 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였나. 정유현은 피식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네. 그런 아이가 곁에서 따르고 있다면, 자네 또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고.”

관리부장의 눈이 정유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유현은 흐릿해진 시야에서도 그가 자신에게 강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지. 한 번 그렇게 선입견을 걷어내고 자네를 바라보니, 자네의 시선은 범죄에 이용당해 버려진 아이들을 본 체 만 체 하며 떠넘기는 게 아니라, 차마 직시할 수도 없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신기한 일이었다. 언제나 반쯤 벌레 보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이 관리부장에게서 이런 시선을 받아보는 날이 오다니. 이윽고 한쪽 팔의 처치가 모두 끝났다. 메스를 든 관리부장이,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근거 같은 건 하나도 없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협회장을 배신했다면……자네는 바보같은 인간이라며 나를 비웃을 텐가?”

비웃기는. 피차일반이다. 전에 없던 편안함과 안심을 느끼며, 정유현이 조용히 입가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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