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여기가 핫플레이스구만 (2) >
“...정말로 누각주 님 말대로 됐군요.”
흑의의 여자, 이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진짜 들은 대로 된 것이 신기하다기보단,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건 기둥 너머의 결계였다.
거기선 망량이 누각의 창고에서 연고와 단약들을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그가 창고에서 꺼낸 약재들은 귀면엽(鬼面葉)부터 시작해서, 척 봐도 누각의 손에 꼽는 보약들이었다. 반동에 괴로워하고 있는 그 청년에게 사용하려는 속셈이었다.
“망량 놈이 저렇게 몰염치한 녀석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이 이매가 불편해하고 있는 이유였다. 물론 창고의 약재들을 관리하는 건 망량 그의 재량이었다. 하지만 저 귀한 것들을 누각주 님과 상의도 없이 외부인에게 베푸는 것은 엄격하게 꾸짖어야 할 일이었다. 허다인이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몰염치한 건 내 쪽이지. 어차피 망량이 먼저 나서지 않더라도 내가 시킬 요량이었어. 저 아이는 용왕 토벌전의 핵심이 될 테니,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줘야 하거든. 지금은 창고에 쌓인 물건들을 아끼고 있을 때도 아니고.”
“그렇다면……"
이매가 누각주의 의중을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시키려고 했던 일을 굳이 명령으로 내리지 않은 이유는, 약재에 미친 자인 망량이라면 어차피 최선의 배합으로 환자를 보살피려 들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거기에서 누각주 님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허다인이 대답했다.
“망량은 명령에 잘 따르긴 하지만 매사에 느긋한 면이 있으니 어떤 일이라도 힘을 빼고 일하지. 나도 그런 망량을 좋아하지만, 이제부터는 안 돼. 전력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움직여줄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즉, 일부러 엄벌에 처하게 해서 몰아붙인다는.”
“아니. 그냥 괜찮다고 용서해줘도 혼자 마음을 다잡을 거야. 망량은 그런 아이니까. 자책이 조금 심한 게 탈이야.”
그 말에 이매가 납득하며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망량 그 남자는 너무나 긴장감이 없었다. 능력 하나 만큼은 인정하지만 유약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그의 기강과 태세를 다잡기 위해, 일부러 멋대로 약재를 꺼내가는 걸 방치했다는 말이었다.
“과연. 그러한 곳까지 생각이 미치셨을 줄은."
“비겁한 방식이지? 알고 있어.”
“아뇨, 훌륭한 용단이십니다.”
이매가 허다인의 말을 곧장 부정했다. 이매의 생각을 말하자면, 오히려 망량에겐 더 극약 처방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이매가 누각주에게 보내는 충성심은 거의 맹목적인 수준이었다. 어느 날 누각주가 무고한 인간을 죽였다 해도 반드시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매 너는… 내가 알려주는 위치로 가서 용의 동향을 파악해줘. 아주 대략적이라도 괜찮으니까, 절대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접근하지는 말고.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알지?”
“네. 숙지하고 있습니다.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매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허다인이 마주 끄덕였다. 그녀가 알겠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이매는 공명심 같은 것에 휩싸여 무리하느라 위험을 감수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임무만을 수행하는 기계에 가까웠다.
복도를 소리 없이 걷는 이매가 허다인을 보고 말했다.
“깨어난 용왕은, 십중팔구 본체를 되찾으려 들겠군요.”
“그래. 바야흐로 헌터의 시대에 균열이 가겠지.”
각성자가 일방적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는 시대. 대전쟁이 종결된 뒤부터 쭉 이어지고 있던 그 평온은 이미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빙의체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용왕이 몸을 얻어 부활했다 함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진까지….’
허다인이 말없이 꽉 주먹을 쥐었다. 무당 허다인과 같은 육영융 중 하나이자, 대전쟁의 전우였던 흑기사 우진. 종적을 감추었던 그가 인형으로 전락한 채 용왕의 수족이 되어있다는 사실은 이미 직접 눈으로 확인이 끝난 상태였다.
우진을 보았을 때 느낀 것은 동료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원통함 같은 게 아니라, 한 방 먹었다는 경악이었다. 설마 그런 히든카드를 끝까지 안 내보인 채 감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옆을 걷고 있는 이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누각주 님. 설마해서 묻는 겁니다만, 용왕이 여왕의 봉인을 먼저 풀려고 들지는 않을까요. 저희가 날뛰는 여왕을 처리하려 하는 동안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도 용왕 입장에선…”
이매가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어깨를 떨었다.
대전쟁의 끝에서 용사 유성이 봉인했다고 전해지는 ‘여왕’. 그 존재는 모든 몬스터들의 군주이자 용왕 이상 가는 괴물이었다. 만일 그것이 풀려나버리면 곧바로 대전쟁보다 더한 재앙이 시작될 테고, 그 혼란 속에서 용왕 또한 마음대로 날뛰게 될 것이다. 이쪽이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허다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 마.”
다른 건 몰라도 그것 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애초에 여왕을 봉인시키거나 죽이기 위해서 온갖 판을 짜며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 용왕 본인이었다. 용왕이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을 지배하며 군림하는 것이었고, 여왕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계를 멸망시켜 가는 이물(異物)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세계 정복과 세계 멸망.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의 대재앙이었던 마왕의 목적은….”
궁금하다는 듯 묻는 이매의 질문에 허다인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이내 하회탈을 고쳐쓴 허다인이 침음을 흘렸다.
“마왕이라.”
모르겠다. 그 자야말로 어떻게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 싫증났으니 그만하라는 듯, 갑자기 나타나 수많은 희생을 강요하며 대전쟁을 억지로 끝내버린 존재.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실히 결말을 지었어야 했는데, 놈이 개입해 모든 걸 어중간하게 마무리한 탓에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는 대전쟁 자체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세상 모든 게 마왕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를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강렬한 두통이 찾아왔다.
“모르겠네. 그놈 목적이 뭐였는지야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금 코앞에 닥쳐온 위협은 마왕이 아니라 용왕이니까.”
허다인이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매의 지적은 확실히 적절했다. 여왕의 봉인을 푼다거나 하는 초강수는 두지 못하더라도, 용왕이 단순히 본체를 되찾기 위해 직진만을 하진 않을 것이다. 이쪽의 움직임이 최대한 불편해지도록 온갖 방해 공작을 해올 게 틀림없었다.
용왕 아그리올라는 압도적인 격과 힘을 지녔지만, 그에 못지 않을 만큼 교묘하고 용의주도했다. 대전쟁에서 그런 그녀를 토벌할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그녀에게 각성자의 능력에 대한 예비 지식과 대응책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야.'
허다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용왕은 적응을 끝냈다. 본체를 봉인당한 탓에 어느 정도 힘을 잃었을 지언정, 그녀는 각성자에 대해서도 지구의 환경에 대해서도 충분히 학습했다.
안타깝게도, 몸을 얻은지 얼마 안 됐다고 해서 용왕이 현재의 정세에 대해 잘 모를 것이라 낙관하긴 어려웠다. 용왕은 훨씬 전부터 사념 상태로 인형사를 비롯한 장기짝들을 부리며 헌터 사회의 뒷편에서 암약해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본체에 다가갈 방법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를 끝내두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방해되는 전력들을 약화 시킬지, 어딜 공격해야 최대의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을지도 계획을 짜놓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을 녀석이었다.
***
불식 길드의 연무장은 원형을 알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있었다. 박살이 난 땅 위에서 서있는 것은 철갑의 비늘로 둘러싸인 한 사내였다. 오만해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은,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두 남자를 보며 흥 코웃음을 쳤다.
“한 놈은 어깨가 나갔고, 한 놈은 탈진인가.”
쓰러진 두 남자. 오성화와 김혜성은 악에 받친 얼굴로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국내 최고의 헌터라는 자부심이 완전히 꾸깃꾸깃 구겨졌다. 아무리 대전쟁 세대의 최강, 육영웅이라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불식 1팀의 두 사람이 전력을 다했는데도 백묵의 한쪽 무릎 마저 꿇리지 못했다.
“미련하군. 바보 같기 그지없어. 얼마나 대단한 공격이란들, 자기 몸이 더 크게 상해서야 아무런 의미도 없지.”
백묵이 얼간이들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김혜성은 자신의 체력까지 마력으로 변환시켜 백묵의 빈틈을 만들어냈고. 오성화는 자신의 팔이 비틀리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고 최대 화력의 폭검을 박아넣었다.
그런 특공을 하고서도 백묵을 쓰러뜨리지 못했으니, 결국 단순한 자폭 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멍청한짓이라 훈계당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백묵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어깨를 감싼 철비늘에서 뚝 하고 핏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지.”
애초에 조건이 그러했다. 백묵에게서 한 방울이라도 피를 흘리게 한다면, 오성화와 김혜성의 승리였다. 하지만 아직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 귀기 서린 눈빛의 오성화와 김혜성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됐으니 싸움을 계속하자는 뜻이었다.
“……웃기지 마십쇼. 이 정도로는 안 돼. 나는 아직 싸울 수 있어. 당신을 나 혼자서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인형사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할 거 아냐…!”
“말 한 번 잘했습니다 대장. 적어도 그 녀석 만큼의 근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든다고요….”
오성화와 김혜성은 똑같은 풍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호텔에서의 싸움. 김혜성이 텔레포트를 발동하기 바로 직전, 지수는 손을 놓고 쓴 웃음을 지었다. 자신 혼자서 그곳에 남아 나머지 모두를 탈출시키기 위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행동이었는지, 살아남은 두 사람은 감히 평가할 수조차 없었다.
지수의 목숨을 먹어치우고 살아남은 두 사람이 인형사와 흑기사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희생을 모욕하는 일이었다. 그런 집착, 광기에 가까운 힘의 추구가 두 명의 헌터가 부딪혀있던 한계를 억지로 깨부수고 있었다.
‘결국 내 방어를 뚫고 상처를 입히고야 말았나.’
백묵이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상처는 아주 살짝피부가 베인 정도지만, 그 의미는 대단했다. 백묵에게 한 방울이라도 피를 흘리게 했다는 것은 ‘불가살이의 갑옷’을 완전히 손상시켜 버렸다는 뜻이었다. 대전쟁 시대에서도 그게 가능한 각성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지.
백묵이 유쾌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과 더 놀아줄 여유는 없다. 날 따라오고 싶다면 당장 의무팀에 가서 치료부터 받도록.”
백묵이 두 사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하지만 오성화와 김혜성은 꼿꼿이 서있는 채였다. 백묵에게 싸울 생각이 있든 말든 기절할 때까지 한 번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몸은 엉망진창에다 남아있는 힘도 거의 없는 상태였을 텐데, 두 사람에게서는 또 다시 강렬한 기백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고개만 살짝 돌린 백묵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인상깊기는 하지만… 제 살 파먹는 꼴이지.’
백묵이 쯧 혀를 찼다. 한계 이상의 힘을 내는 건 좋지만, 더 이상 해봐야 오히려 몸만 상할 터였다. 다행히 백묵에게는 으르렁대는 두 젊은 놈들을 멈춰버릴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그 애송이는 살아있다.”
백묵은 가볍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말에, 두 사람이 마법의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우뚝 정지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몇 번이고 방금의 말을 곱씹고 있던 오성화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라고요?”
“불식의 동맹. 그 놈은 멀쩡히 살아있다고 말했다.”
백묵이 입가를 이죽이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내뿜고 있던 흉흉한 기백이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고깔을 푹 눌러쓴 김혜성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고, 선글라스를 쓴 오성화가 두 눈을 끔뻑였다. 천천히 연무장을 걸어나가는 백묵이 말했다.
“그 애송이는 무당이 잘 주워가서 굴리고 있다 하더군. 그러니 네놈들은 걱정 말고 추월당하지 않을 걱정이나 하도록.”
그리고 문을 열려는 백묵의 손목을, 헐레벌떡 달려온 오성화가 잡아챘다. 만신창이가 된 몸인데도 피로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오성화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아까까지의 썩은 동태눈깔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자, 잠깐만요! 무당이라고요? 지수가 누각에 들어간 거예요? 확실한 거 맞죠? 상처는 없고요? 지금 통화는 할 수 있습니까! 아니, 통화가 아니라 만나러 갈 수는 없는 겁니까? 그리고 저흰 또 어디로 데려간다는 거예요!”
김혜성은 멀찍이서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얼굴엔 믿기지 않는 심정과 기쁨이 반반씩 섞인 헛웃음이 떠올라있었다. 백묵은 이내 미간을 꼬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 자식은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하라는 말이 그렇게나 어려웠던가. 백묵이 손가락으로 오성화의 이마를 툭툭 찔렀다.
“그래. 맞아. 아니야. 맞아. 몰라. 못해. 못 만나.”
대답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오성화의 이마가 꾹꾹 밀려났다. 이내 밀쳐진 오성화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연무장의 문을 열고 나간 백묵이 오성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예전 직장동료 놈 구해주러 간다. 준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