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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63화 (63/176)

63화.  < 말 그대로 지옥 훈련이네 (3) >

<보면서 느낀 건데… 너 죽는 걸 정말 싫어하는구나.>

이곳에선 어차피 다시 살아나는데도 정말 엄청나게 싫어해. 옆에서 나풀대는 나비가 말했다. 딱히 그게 잘못이라기보단, 그냥 신기해서 말하는 거란 목소리였다. 지수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어이없어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면 뭐 죽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계속 죽다 보면 무감각해져서 필요하다면 죽는 것도 상관 없다고 여기게 되니까. 그런데 넌 한 번 죽어서 확인해보면 간단한 일도 엄청 불편하게 빙 돌아가려 하잖아. 마치 이곳이 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다인의 말에 지수가 침음을 흘렸다.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죽어봤자 곧바로 살아나니, 어떤 도깨비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선 일부러 몇 번 죽어보는 게 가장 효율적인 길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러기 싫었다.

‘왜냐면 무섭잖아.’

곧바로 살아나든 말든 죽는 것 자체가 아주 짜증나고 불쾌했다. 정확히는 그냥 아픈 것과 다치는 게 싫었다. 싸우다가 빈틈을 찔려 죽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시간만 들이면 알아낼 수 있는 일 가지고 일부러 죽여달라 목을 내밀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그건 좀 정신병자 같지 않은가.

하지만 아픈 게 싫어서요, 라고 말하는 것은 지수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의 머리가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여기서 그런 식으로 싸우다가 몇 번 죽어보는 걸 전제로 싸우는 버릇이 들어버리면 현실로 나간 다음 큰일일 거 아니예요. 바깥에서 죽으면 살아나지도 못하는데.”

지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해놓고 나니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런 건 여기서나 통용되는 비정상적인 싸움법이었다. 정답이라는 듯 나비가 말없이 날개를 펄럭였다.

<가르칠 게 없어서 얄밉네. 정보 몇 개 얻겠다고 일부러 죽으려 들면 따끔하게 훈계해주려 했는데.>

“미련한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대답한 지수는 지옥의 청소를 계속했다.

지수가 죽이지 않고 넘어간 도깨비들을 마지막 문지기가 소환한다는 걸 안 이상, 어느 한 마리도 불러내지 못하게 모조리 쓰러뜨리는 게 최선이었다. 지옥의 모든 도깨비를 사냥한다. 힘든 일이겠지만 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 한 번씩은 이겨봤으니.’

도깨비들이 다 같이 뭉쳐서 덤비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한 번 이긴 상대 두 번이라고 못 이길 건 없었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지수와 달리, 도깨비는 몇 번을 상대해도 대응하는 방법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지수는 자리에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도깨비에게 다가섰다. 도깨비의 손엔 예리한 도가 칼집에 납도되어 있었다. 고요한 명상에서 격렬한 발도로의 이행은 한 순간이었다.

선비 삿갓을 쓰고 있는 도깨비의 손이 움찔댔다. 그 순간 지수가 몸을 옆으로 비껴섰다. 동시에 날카로운 참격이 날아와 지수 뒤의 바위를 두부처럼 잘라냈다. 지수의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이제는 이 정도 반응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재버워키."

룬이 각인된 마검이 지수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도깨비의 목을 찔렀다. 그것만으로 도깨비는 간단하게 죽어버렸다. 그 모습에 옆에서 나풀대는 허다인의 나비가 연실 조잘댔다.

<정답이야. 딸깍발이는 멀리서 공격해봐야 주문째로 베어낼 테니, 가까이서 참격을 피할 자신만 있으면 오히려 접근하는 쪽이 간단히 무력화시킬 수 있지.>

"......."

지수는 말없이 콧숨을 쉬었다. 저번에 쓰러뜨려 본 적이 있는 도깨비라도 횟수를 거듭할 수록 죽이는 방법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온갖 방법을 쓰며 전력을 다해 사냥했지만, 지금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결정타를 먹였다.

확실히 허다인의 말대로였다. 이 환상 안에서 지수의 신체능력은 오르지 않지만, 지식과 기량 만큼은 확실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목숨을 건 실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이른바 ‘싸우는 방법’이라는 것을 억지로 개화시키고 있다.

“이게 마지막인가….”

지수가 터벅터벅 걸어갔다. 딸깍발이가 지키고 있던 사당의 문에는 최후의 거울 조각이 안치되어 있었다. 지수는 손에 들고 있는 액자에 거울 조각을 끼워맞췄다. 모든 조각들이 모이자 사이의 균열이 사라지며 완전한 거울이 되었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지수가 완성된 거울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걸로 까막눈 대책도 끝났다.

솔직히 말해서,

바라보기만 해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그 괴물딱지를 정면에서 상대하긴 꺼림칙했다. 저번에는 어떻게든 거울 없이 사냥할 수 있었지만, 공략법이라 하긴 뭐했다. 지수의 생각에 그 방법의 성공률은 반반정도였다. 백 퍼센트 확실하게 통하는 방법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는 쪽이 미련한 짓이었다.

그리고 지수는 지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족족 도깨비들을 죽여갔다. 지루함을 느낄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지옥의 도깨비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퍼즐이었다. 제대로 된 공략법을 쓰지 않고 그냥 멀리서 주문을 뿅뿅 쏜다고 해서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텅 빈 지옥을 순회하며 남은 도깨비는 한 마리도 없다고 확신했을 때. 지수는 까막눈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옥의 출구로 가는 길목, 까막눈은 움직이는 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에서 새까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외눈박이의 섬뜩한 도깨비.

하지만 비장의 수단이 갖추어진 이상 무섭지 않았다. 놈이 이쪽을 바라보자마자 시선에 맞춰 거울을 꺼내들었다.

“긱-끼기긱!”

그리고 거울과 눈이 마주친 까막눈은 새된 비명을 지르더니 온몸이 새까만 먹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까막눈의 저주를 반사한 거울 또한 산산조각이 되어 깨져나갔다. 지수를 몇 번이나 죽이며 고생시킨 것 치고는 너무 간단한 최후였다.

뭐라고 할까. 괴물을 쓰러뜨렸다기보단 그냥 출입증을 가져다대니 문이 열렸다는 느낌이었다. 지수는 무언가 허망함을 느끼며 안쪽의 정원으로 걸어들어갔다. 지수는 침을 끌끽 삼켰다. 바로 여기서부터가 제대로 된 싸움이었다.

‘이놈만 이기면 진짜 끝이야.’

저편에 지옥문의 출구가 보였다. 지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모든 도깨비들은 최소한 한 번씩 쓰러뜨려 본 경험이 있었지만 문지기 만큼은 달랐다.

이내 지수가 펼치고 있는 영역 안에서, 문지기의 기척이 나타난 것이 느껴졌다.

영역은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움직임을 감지한다. 눈에 보이지도 소리가 들리지도 않지만, 문지기가 나타났다는 것이 손으로 만지고 있는 것처럼 확연하게 느껴졌다. 지수는 어이가 없는 것을 느꼈다. 도깨비 감투…. 자신은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저 따위 것에 어떻게 대항하라는 말인가?

어쨌든 여기까지는 저번에도 경험한 것이었다.

문지기는 제 딴에 불의의 기습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지, 뻔히 보이는 궤도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가볍게 피한 지수는 거리를 벌린 뒤 장전한 룬 마탄을 쏘아냈다. 폭발과 함께 문지기의 감투가 벗겨졌다. 문지기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가 나는지 문지기는 도깨비 방망이를 땅바닥에 두드렸지만, 저번과 달리 어떤 도깨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지수가 지옥에 있는 모든 도깨비를 사냥했기 때문이었다. 지수가 씨익 미소지었다. 싸움은 준비하고 임해야 하는 법이지.

그러자 문지기가 꺼낸 것은 하나의 보따리였다. 싸우는 중에 갑자기 무슨 보따리를 꺼내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수는 방심을 늦추지 않았다. 아마 저것에도 기괴한 능력이 숨겨져있을 것이다. 지수의 그림자에서 재버워키가 말했다.

<바로 저것이다, 나의 주인이여. 저 보따리에서 나와 같은 공상과 재현의 힘이 느껴지고 있다.>

지수가 도깨비 보따리를 보며 생각했다. 보따리 안에서 무기나 괴물 같은 것을 꺼내는 것인가? 아니면 이쪽을 보따리로 덮치기라도 할 셈인가? 어느 쪽이든 가만히 기다려주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지수가 룬을 각인한 마검을 사출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문지기 도깨비의 행동은 지수의 상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문지기는 입구를 활짝 편 보자기 안에 스스로 들어가 매듭을 묶었다. 지수는 순간적으로 공격을 주춤했다. 대체 뭐하자는 생각이지. 때려달라는 것인가?

지수가 멍하니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는 커다란 보자기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무방비해서 오히려 공격하기가 꺼려졌다. 하지만 이런 공세를 놓칠 수야 없었다. 지수는 몇 번이고 방진으로 룬을 쏘아냈지만 보따리는 완전히 멀쩡했다.

지수는 곧바로 눈치챘다. 지금 보따리에는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듯 싶었다. 위력이나 방어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법칙이었다. 그냥 안 통하니까 안 통하는 것이다. 수많은 도깨비들을 상대하면서 몇 번이고 경험해본 현상이었다.

공격하기를 포기한 지수는 태세의 정비에 전념했다. 문지기가 들어간 보따리 안에서는 온갖 난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신나서 춤을 추는 것처럼도 보였고, 꺼내달라는 듯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재버워키가 경고했다.

<재현의 능력이 내보이는 건 보통 둘 중 하나다. 그대가 생각하는 가장 강한 존재나, 제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존재. 시련의 마지막으론 적당하군. 힘든 싸움이 되겠지.>

그리고 보따리 안의 움직임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축 늘어져있는 보따리를 보니, 거구였던 문지기의 몸집이 크게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보따리의 매듭이 스르르 풀리며 안개가 흘러나왔다. 안개 속에서 보인 그림자는 익숙했다.

보따리 안에서 나온 문지기의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인간으로 변해있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분홍색 머리카락. 악마의 갈퀴처럼 변형되어있는 오른팔. 단지 한 가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뿔 달린 하회탈만은 그대로였다.

재버워키는 보따리 안에서 지수가 생각하는 가장 강한 존재나, 제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튀어나올 것이라 예측했었다. 그리고 눈앞의 모습은 분명한 후자였다.

문지기는 지금 서민하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것도 처음 만났을 때의, 흡혈귀로서 폭주하고 있는 서민하였다.

"......."

지수는 자연스레 납득했다. 지옥에 있는 도깨비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지옥의 마지막 적인 문지기가 상대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워하는 존재를 재현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짜증이 났다.

초조해하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납득시키면서, 지금은 수련에만 집중하는 게 최선이라고. 반쯤 억지로 머리 한구석에 밀어넣은 채 애써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서민하의 모습을 보자마자 꽉꽉 눌러두었던 자책이 흘러넘쳤다.

수백 마리의 나비를 헤쳐나가면서도, 도깨비들한테 몇 번이고 죽으면서도. 우는 소리를 하고 짜증을 낼지언정 진심으로 하가 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지수는 처음으로 완전히 정색하고 있었다. 자신조차 놀랄 만큼 머리가 차가워졌다.

“껄껄껄! 꺼거거거거걸!”

문지기가 거대한 갈퀴손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때의 지수는 서민하의 속도에 반응하지도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손에 잡힐 듯이 알 수 있었다. 궤도 또한 간단하게 읽을 수 있다. 지수는 몸을 슬쩍 비껴냈다.

공격을 피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내리쳐진 손톱이 지수 옆의 땅을 거칠게 헤집었다. 지수가 한 번 더 표현을 음미했다. ‘제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존재’. 그 말대로였다. 차라리 오성화나 정유현이 나타났다면 고전할지언정 훨씬 마음 편하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가 간과한 점은, 상대하기 껄끄럽다는 것과 상대하지 못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수가 서민하의 모습을 한 도깨비에게 다가가, ㅡ기형적으로 변해있는 오른손을 꽉 쥐었다. 칼날 같은 갈퀴손은 손을 잡는 것만으로 지수의 살갗을 베어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지수의 손바닥에서 새하얀 스파크가 파직 튀기 시작했다.

“기다려.”

"꺼, 꺼걸!”

“바로 찾으러 갈 테니까.”

“꺼거거거거거걸!”

파사의 마력을 흘려넣자 도깨비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펼쳐져있던 지수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어갔다. 이윽고 영역이 완전히 사라졌다. 회수된 모든 마력은 파사의 마력으로 전환되어, 곧장 도깨비에게 쏟아졌다. 완전히 상극의 공격을 이리 직접 때려넣으면 누구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계 이상의 충격을 받은 문지기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나는 종이 한 장이 펄럭이며 떨어졌다. 재버워키의 새로운 페이지였다. 페이지를 잡은 지수가 터벅터벅 걸어가 지옥문을 열었다.

문 저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나왔다.

눈을 떠보니 한옥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눈앞의 선반엔 지수가 마시다 놓아둔 찻잔이 놓여있었다. 환상 속 특유의 붕 떠있는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무게감 있는 현실이었다. 지수 앞에 앉아있는 허다인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꿈 꿨니?”

지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커다란 변화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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