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말 그대로 지옥 훈련이네 (1) >
씩씩대는 괴물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뿔 달린 탈로 가려진 얼굴에서는 전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곧장 지수를 향해 달려들지 않는 건, 싸울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경계하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움직이지 마.>
"응?"
<한 걸음이라도 움직였다간 망나니들이 달려들어 올 거야. 거기 가만히 서서 내가 하는 말을 듣도록 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찾아보면 지수의 주변에 한 마리 나비가 나풀대고 있었다. 지수가 지긋지긋하게 보아 왔던 그 나비들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아마도 허다인이 연락책으로 붙여놓은 것 같았다.
허다인의 목소리를 들은 지수가 짜증을 부렸다.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이런 곳에 사람을 던져두고!”
<네가 들어온 ‘입구’ 말고도 이 안 어딘가에 또 다른 문이 하나 더 있어. 너는 그 ‘출구’를 찾아서 나오면 돼.>
허다인은 지수의 항의를 무시하고서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지수가 쯧 혀를 찼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시 말해 굳이 눈 앞에 보이는 괴물들과 싸워서 쓰러뜨릴 필요 없이, 도망쳐 다니면서 나가는 문을 발견하기만 하면 끝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도망치는 것쯤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아직 눈앞의 괴물들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괴물들에게서 딱히 압도적인 박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그 정유현처럼, 도망치는 것도 대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위압 같은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지수의 낙관은 바로 다음 순간 산산조각났다.
지수는 경계 태세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우선은 영역을 전개하려 들었다. 하지만 영역은 극히 작은 범위로만 간신히 만들어졌을 뿐이었다. 확인해보면 지수가 가지고 있는 마력 자체가 크게 줄어들어있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반응을 확인해볼 때, 신체능력 또한 원래 지수의 능력보다 약화되어있었다. 마치 맨 처음 각성했을 때처럼 지수가 가진 모든 능력치가 약화되어있는 상태였다.
“뭐, 뭐예요 이거?"
당황한 지수의 목소리에 나비가 담담히 대답했다.
<지옥의 영향을 받아 능력에 역으로 보정이 걸려있는 거지. 이곳은 그런 곳이니까. 바깥에서 얼마나 강하든 누구나 똑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웩.... ”
정말 짜증나는 발상이라는 듯 지수가 질렸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분명히 효과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한계까지 활용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능력을 한계까지 활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 노출시키면 된다. 실패했다간 죽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런 걱정이 없었다.
환술 속에서는 죽음조차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니까. 그리고 능력치가 백지 상태로 돌아가버린다면 단순히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지옥에 도전하는 자의 정신이 충분히 강인하다면, 이곳은 분명히 최고의 수련장소였다.
그리고 지수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러면 혹시….”
지수가 망나니라고 불리는 괴물들을 쳐다보았다. 저것들과 엮일 필요 없이 도망쳐 다니기만 해도 상관없다. 수련을 위한 장소에서 그런 걸 허락해준다는 게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긴 했다. 설마. 네가 추측하는 게 맞다는 듯 나비가 대답했다.
<그래. 막 지옥에 선 너는 지금 알몸바람 상태나 마찬가지. 그리고 이곳에서 힘을 불리기 위해선, 온갖 도깨비들을 처치할 필요가 있어. 게임에서 레벨 업을 하는 것처럼.>
적을 쓰러뜨릴 때마다 강해진다. 그렇다면 무작정 출구를 찾아 도망치기만 하는 건 악수였다. 정말로 악취미적인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싸우지 않고 도망쳐도 상관없다 해놓고, 사실은 싸울 수밖에 없도록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주인이여.>
지수의 그림자가 늪처럼 꿈틀대며 말했다. 그림자 안에서 튀어나온 건 새까만 세 자루의 검이었다. 보팔의 검. 지수의 힘 대부분이 제한된 상태에서도 정령인 재버워키는 기능하고 있었다. 지수 주변을 회전하는 검들이 떨리며 공명했다.
<같은 환상, 같은 가공의 존재라도 격의 차이는 존재하는 법. 나를 제대로 사용한다면 저런 것들쯤은 문제가 안 된다.>
재버워키는 상당히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주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만일 능력치 자체가 한 수치로 고정된 거라면, 지수가 여기 가부좌를 틀고 얼마나 오랫동안 마도 명상을 하고 있는들 가지고 있는 마력은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수가 결심하고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것과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망나니들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었다. 지수의 눈동자가 이쪽저쪽으로 휙휙 움직였다.
‘확실히 전과는 달라. 의도가 읽힌다.’
아무리 힘이 제한되어있다고 해도, 지수가 가지고 있는 시야 자체가 예전과는 달랐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잘 보고 예측한다. 그리고 저쪽이 가장 꺼려할 만한 공격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보팔의 검이 날카로운 경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수가 허리를 기묘하게 비틀고, 망나니가 내리친 대검 둘이 아슬아슬하게 지수를 빗겨갔다. 나머지 하나의 대검이 옆에서 지수에게 휘둘러졌지만, 지수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보팔의 검으로 튕겨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응?"
서걱. 망나니의 대검이 보팔의 검을 그대로 잘라내, 지수의 목 위쪽과 아래쪽을 깔끔하게 분리했다. 아프다는 생각이 든 것과 동시에 시야가 빙그르르 회전했다. 의식이 암전했다.
눈을 떠보니 지옥문의 입구 앞에 앉아있었다. 멀찍이서 망나니 세 마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고통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방금 자신이 한 번 죽었다는 건 생각보다 쉽게 납득이 되었다. 지수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항복. 포기. 이거 못합니다. 나는 못해.”
<무슨 시작하자마자 포기 선언이야?>
나풀대는 나비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더욱 어이없는 건 이쪽이라는 듯이 지수가 흥분해서 대답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칼로 막았더니 그걸 베고 들어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목숨 걸고 싸우긴커녕 친구랑 주먹질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고요! 목이 떨어져보는 경험은 한평생 오늘이 처음이란 말입니다!”
<그런 경험은 네가 아니라도 누구나 처음이겠지.>
허다인이 정론을 말했다. 하긴 불사신 같은 게 아닌 이상, 몸에서 머리통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고서 살아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솔직히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보팔의 검을 두부처럼 잘라내버리는 수준의 상대를 대체 어떻게 이기라는 말인가. 지수가 입 꼬리를 비틀며 항의했다.
“아무튼 난이도가 이상하다고요, 여기는.”
<당연하지. 몇 번이고 죽는 걸 전제로 만들어졌으니까.>
그것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방금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죽었는데도, 그런 경험을 또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죽음의 유사체험이라는 건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서 그냥 나가게 해줄 수는 없다고요.”
<솔직히 말해줄게. 굳이 내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될 거야. 마음이 꺾여버리면 환술에서 저절로 깨어나게 될 테니까. 하지만 한 번 더 환술로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무언가 수틀리면 다시 환상 속에 들어와 수련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수의 머릿속에 분명히 있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지수가 나풀대는 나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나가면 다시는 못 들어오는 겁니까?”
<이곳에서 현실로 돌아가 깨어나면, 네 무의식이 이곳이 환상이었다는 걸 완전히 납득하게 될 테니까. 내성이 생기는 거야.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이곳에서 무언가를 이뤄내봤자 아무 것도 얻어갈 수 없을걸.>
환상 속 수련장이라는 꼼수를 써서 단기간에 폭풍처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확실히 피똥을 싸면서라도 최대한 얻을 걸 얻어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린 지수에게 나비가 말했다.
<정 그러면 한 가지만 힌트를 줄게.>
“네?"
아무 설명도 없이 지옥에 던져넣은 게 조금쯤 미안하다는 듯, 허다인이 뒤늦은 안내를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의 요지는 간단했다. 지옥문 안에 있는 도깨비들은, 단순하게 정정당당히 부딪히며 싸우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
<네 정령이 약한 게 아니라, 망나니의 칼은 원래 막을 수가 없어. 동작이 큰 대신 뭐든지 베어버리니, 피하거나 자기들끼리 공격하게 해서 자멸시키는 게 주된 공략법이지.>
뭐든지 베어버린다는 건 칼이 엄청나게 날카롭다는 의미의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뭐든지 베어버린다는 뜻인 듯 했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환상 속의 세계이기에 그런 것 또한 가능한 것인가. 상식이란 게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굳어있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하는 건가.’
고개를 든 지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망나니들을 바라보았다. 보팔의 검을 두부처럼 자르고 자신의 목을 따버린 게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다시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바라만 봐도 본능적으로 위축되었다.
<저기 있는 망나니부터 지게꾼, 딸깍발이, 문지기. 지옥에 있는 모든 도깨비들은 다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어. 강점이 있으면 약점이 있고, 그걸 이용해 파훼법을 찾아낼 수 있지. 그걸 끊임없이 싸우면서 관찰하는 게 네가 할 일이고.>
확실히 수련장이라는 컨셉에 걸맞는 배치였다. 정확히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관찰과 분석. 어떻게 행동해야 이길 수 있을까. 전략의 입안과 필승법의 구축. 실전에서 필요한 모든 역량들을 반쯤 억지로 박아넣는 구조였다.
지옥문에 손을 올린 지수가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마 죽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이곳 ‘입구’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망나니가 이쪽이 움직이기 전에는 먼저 공격하지 않는 것도, 부활하자마자 도깨비에게 습격당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배려겠지. 이 주변의 지형은 파악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페이지 넘기기, 체셔 고양이.”
지수가 재버워키의 형태를 바꾸었다. 어딘가에서 그림책의 페이지가 촤라라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뿅 하고 그림자의 늪 속에서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망나니의 칼이 모든 걸 잘라내버린다는 사실이 판명된 시점에서, 지수의 몸을 둘러싸며 보호하는 보팔의 검은 큰 의미가 없었다.
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을 너무나 간단하게 죽여버린 적에게 다가가는 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봐야 상황은 진전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지수가 망나니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수가 가진 정보. 망나니라는 괴물이 가진 성질과 특징에 대해, 지수는 이미 허다인으로부터 모든 정답을 들은 상태였다. 그걸 알고서 마주대하니 확실히 보이는 것이 달랐다.
세 마리의 망나니가 들고 있는 거대한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세운 뒤, 한 박자 뒤쪽으로 늘어뜨리며 힘을 모았다.
‘확실히 준비 동작이 커. 충분히 읽을 수 있어.’
이쪽을 노리고 있는 망나니는 총 세 마리. 지수가 피하는 위치에 다른 검의 경로가 겹치지 않도록 재빨리 생각해서 피해내면 그만이었다.
내리쳐진 세 자루 대검이 폭음과 함께 모래먼지를 피워올렸다. 지수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딴 것보다 이놈들, 완전히 멍청이야.’
망나니들은 정확하게 이쪽의 목만을 정조준하고, 한 번 휘두르면 궤도를 바꾸지 않았다. 단순히 읽을 수만 있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궤도로 칼을 휘두르게 할지 유도까지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지수의 밥이었다.
망나니들이 다음 참격을 준비했다. 지수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망나니들의 칼을 잘 보고, 최적의 위치가 어디일지 고민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은 지수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만히 멈추어섰다. 망나니들이 대검을 휘둘렀다.
“부재증명.”
그 말과 동시에 체셔 고양이의 능력이 발동되어, 망나니의 칼들은 지수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다. 그리고 통과한 각각의 대검들이 잘라낸 것은 바로 자신의 동료들이었다.
휘둘러진 칼은 방어할 수도 없었다. 첫 번째 망나니는 두 번째 망나니를. 두 번째 망나니는 세 번째 망나니를. 세 번째 망나니는 첫 번째 망나니를 각각 일도양단 해버리고 말았다. 완벽한 자멸이었다. 공격당한 건 지수였지만, 공격이 끝난 뒤 자리에 멀쩡히 서있는 것 또한 지수 뿐이었다.
도깨비들을 처치한 것으로, 마력과 신체능력이 어느 정도 불어난 것이 느껴졌다. 지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바보 같은 녀석들에게 한 번 머리통을 잘렸다니,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허다인이 정답을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놈들에게 몇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안일하게 공격을 받아내자마자 목이 잘렸다. 자신의 힘으론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망나니들을, 약점과 파훼법을 찾아내는 것 만으로 이렇게 간단히 쓰러뜨려버렸다.
‘정보라는 게 이만큼이나 중요했던 건가.’
새삼 느끼는 교훈에 조금쯤 반성의 시간을 가지면서, 지수는 출구인 지옥문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