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대충 감이 잡혀가는데 (5) >
지수는 이미 몇 시간 동안이나 시작점에서 걸어나오는 일 없이,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채였다. 언뜻 보기엔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허다인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지수는 지금도 영역을 전개하고 있는 채였다.
명경지수와 영역. 서로 반대의 원리를 지니고 있는 두 기술을 동시에 발동시키는 것. 그러한 이율배반을 수십 수백 번 시도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지수는 자신이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었다.
‘애초에 접근방식이 잘못됐었어.’
만일 명경지수와 영역을 동시에 펼칠 수 있게 된다쳐도 그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명경지수에 돌입한다는 건 다시 말해 몸 안의 마력의 흐름에다 브레이크를 걸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 상태에서 상대방과 싸웠다가는 상대의 움직임을 아무리 예측해봤자 이쪽에서 공격할 수가 없었다.
‘뭐 명경지수랑 전투 태세라는 게 버튼 하나 누른다고 해서 눈 깜빡할 사이에 전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만일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데 쏟을 노력을 다른 데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거라는 게 지수의 생각이었다. 감지 → 전환 → 공격. 아무리 용을 써봤자 중간에 절차 하나가 추가되면 필연적으로 지체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담….’
지금 지수가 당면한 과제는 그것이었다.
마력의 흐름을 멈추지 않고서 명경지수와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만큼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남을 따라할 수가 없었다. 지수는 지금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려 들고 있었으니까.
‘그냥 죽자살자 나비랑 부대낀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차라리 그랬다면 아플지언정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아닌가? 하긴 아파 죽겠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아무튼 이것은 기술의 숙련도가 아니라 그 이전, 방법론의 문제였다. 지수 혼자 끊임없이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수는 무언가 방법이 생각날 때마다 아낌없이 마력을 쏟아부으며 시도해보았다. 한계 이상으로 마력을 사용한다면 곧바로 탈진해버리지만, 어차피 이곳은 환상이기에 조금만 있으면 회복되었다. 그리고 지수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만, 방금 뭔가.’
다른 방법의 시도를 계속할 때마다, 주변의 마력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한 순간이 있었다. 마치 명경지수에 진입한 것처럼. 그 타이밍은 정확히 한계까지 마력을 사용해, 지수의 몸 안에서 흐르고 있는 마력이 텅 비어버렸을 때였다.
“그런가!”
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휘동그레 뜬 얼굴은 목욕탕에서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의 표정 같았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원리였다. 명경지수라는 건 자신 안에서 흐르고 있는 마력에 감지를 방해받지 않도록 흐름을 멈춰 고요하게 가라 앉히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냥 몸 안에 마력이 존재하지 않으면 흐름이고 뭐고 없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이 발상에까지 도달했다면, 정답을 찾아내는 건 간단했다. 지수가 웃으며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짙고 거대한 영역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느낀 허다인이 당황해서 말했다.
“무슨 생각이야? 마력을 그렇게 전부….”
지수가 이것이 맞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영역이라는 기술의 원리는 자신의 마력을 일정 부분 방출해 바깥에 묶어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이 마력의 배분이었다. 영역을 전개한 채로 싸우기 위해선 다른 마법을 사용할 마력을 충분히 남겨둬야 했다. 영역에 사용하는 건 많아야 3할 정도.
바로 그것이 지수가 착각하고 있던 점이었다. 지금 지수는 자신의 마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영역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 결과 지수의 몸 안에는 요만큼의 마력도 남지 않았고, 텅 비어있는 고요함은 명경지수와 같은 감지능력을 주었다.
이걸로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한 가지 문제점은 몸 안에 마력이 없기에 지수가 주문을 발동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의 마력을 바깥의 영역에서 뽑아내 쓴다. 보통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겠으나, 지수에게는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예바우드 식 마도 명상.
지수는 이미 싸우는 도중에도 외부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마도 명상을 익히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외부의 마력이 아니라, 지수 자신이 펼쳐둔 영역의 마력이라면 흡수하는 건 훨씬 간단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요령이 필요하긴 했다.
‘계속해서 순환을 의식하고 있어야 해.’
마도 명상으로 얻는 마력을 계속해서 영역으로 내보낸다. 주문을 사용할 때에는 영역의 마력을 끌고 와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분량만을 사용한다.
남은 마력은 다시 영역에 반환. 공 세 개로 저글링을 하는 것 같은 묘기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사고를 해야하는 게 상당히 피곤했다. 운용 난이도가 까다롭다. 패를 한 장도 들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카드 게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 생각없이 싸웠다간 여기저기가 다 꼬여서 무너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가능했다. 이론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실전에도 곧바로 적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수 자신의 기량이 올라갈수록 효율적으로 변하는 스타일이라는 게 훌륭했다. 자리에 선 지수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허다인은 그런 지수를 보며 고민하며 부딪히는 모습이 훌륭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수는 달랐다.
‘무소유? 그게 아니면 진(眞) 명경지수? 뭔가 확 하고 안 오는데. 절대영역이라고 하는 건 어떨까….’
턱을 매만지고 있는 지수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찾아낸 자신의 총명함에 취해 이 기술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게 더 멋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몇 가지 후보가 떠올랐지만 다 어딘지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몇 분 간 고민을 계속하던 지수가 획휙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보류였다. 네이밍이란 건 전의를 불태우는 데에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 확 하고 오는 이름이 없는 이상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이제는 실전 응용의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비들이 나풀거리며 지수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지수는 시작점 앞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채로 영역 안의 나비들을 느끼고 있었다. 마력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의도와 미묘한 변화까지도 모조리 읽어내는 것.
범위 안의 모든 움직임을 간파하는 영역의 감지능력과, 훨씬 선명하게 마력을 느끼는 명경지수의 감응능력. 두 가지를 양립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나비의 파장이 흔들린다. 사람의 몸이 움직이기 전 근육이 수축하는 것처럼, 마력에도 또한 전조가 있었다.
“왼쪽.”
안대를 쓴 지수가 한 마리 나비에 의식을 집중하며, 다음 움직임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나비는 계속해서 나풀거렸다.
“위로. 멈추고. 오른쪽으로… 멈추고.”
영역 안에서 감지되고 있는 나비는 지수가 읽어낸 것과 똑같이 움직였다. 한 발짝 빠르게 움직임이 보인다. 사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나비는 가장 읽기 쉬운 움직임을 하고 있었고, 가만히 서서 읽는 것과 모든 나비들을 피하면서 읽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읽어낸 것은 읽어낸 거였다.
지수가 짜릿한 달성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문제는 산재해있었다. 전조는 말 그대로 전조일 뿐이었기에, 바로 다음의 움직임만 읽어낼 수 있을 뿐 몇 초 뒤의 움직임까지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만한 반응속도가 필요했다.
슈팅게임에서 각각의 총알들이 어떻게 날아오는지 알고 있어도, 직접 전투기로 그것을 피하는 건 게이머의 기량 문제였다. 그리고 이 수련을 끝내기 위해선 하나의 나비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나비의 움직임들을 전부 간파하며 나아가야 했다.
지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나비들의 움직임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섣불리 발을 내딛었다가 또다시 짜릿한 감전을 당하기는 싫다. 일단 어느 정도 돌파할 수 있는 자신이 들 때까지 이곳에 서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기로 했다.
그리고 한참 고개를 떨구고 있던 지수가 얼굴을 들었다.
“좋아. 완벽해."
지수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머릿속에서 지수는 모든 경로를 예측하고, 날아드는 나비들을 전부 피했다. 지금 생각한 대로만 움직이면 된다. 나비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도 않다. 지수는 자신만만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째. 비명이 울려퍼졌다.
“끄아아아아아악!”
당연히, 상상으로 피하는 것과 직접 몸으로 피하는 건 전혀 달랐다. 시작점으로 되돌아온 지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나비와 죽자살자 부대끼는 것만이 남았다.
* * *
지수가 허다인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와. 진짜. 드디어……!”
미칠 것 같았다는 듯이 지수가 안대를 거칠게 풀었다. 그리고 몸을 비틀며 요상한 소리를 냈다. 눈앞에 스승이 있다는 건 이미 아무래도 좋은 문제가 되어버린 듯 했다.
허다인의 어깨에 지수의 손이 닿은 순간, 방 안에서 나풀거리던 황금색 나비들이 일제히 빛의 가루로 흩날리며 사라졌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확신이 들 때만 시도했는데도, 지수는 통과하기까지 백 번이 넘는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다.
“음……축하해.”
허다인은 솔직히 말해서 조금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지수가 당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나비들을 훨씬 더 잘 피하길래, 과연
이렇게 해도 피할 수 있을까 하고 도중부터 나비의 수나 속도, 움직임의 패턴들을 점점 올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지수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든 돌파해냈다.
“와 진짜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데요? 이건 뭐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것 같고.”
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 말에 허다인이 정곡을 찔려 움찔 어깨를 떨었다. 자신은 제자를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니다. 최대의 학습 효율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허다인은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고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지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기지개를 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미 지금의 지수는 맨 처음에 깔려있던 나비들 정도는 휘파람을 불면서 여유롭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수가 펼치고 있던 영역을 회수했다. 연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영역을 유지하고 있는 버릇을 들이는 게 좋았지만, 계속해서 집중을 유지하고 있는 건 상당히 피로했다. 지긋지긋한 나비 피하기가 끝났으니 조금 신경을 풀고 싶었다.
“이 짓거리도 드디어 끝났으니, 이제 다시 방에서 책 읽는 거 맞죠? 다음 방은 뭡니까? 인체 해부도라도 공부하나?”
지수가 기대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허다인과 같이 영역을 펼치는 것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어내기 위해선 인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또다시 책이나 읽으며 느긋하게 보낼 시간을 상상하니 지수는 상당히 즐거워졌다.
하지만 꿈 깨라는 듯 뿔 달린 하회탈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런 지식은 첫 번째 방에서 다 몸이랑 머리에 박아넣었어. 게다가 이번 과제를 지켜보면서 확신한 것도 있고.”
허다인이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의 수련. 혼자서 몇 번이고 방법의 개선을 거듭하며 나비를 피해가는 지수를 보고서, 허다인은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압도적으로 부족한 실전 경험. 확실히 알았다. 자신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지수는 어찌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릴 때마다 부러지고 꺾이는 게 아니라 극복하고 발전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혼자서 나는 방 안에 틀어박히는 게 좋다고 꾀병 비슷한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일 뿐, 정신력 자체는 강인했다.
허다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연약한 모범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느긋하게 방구석에 앉아 친절하게 가르쳐줄 필요 없이, 시련에 던져두고 내버려두면 알아서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것도 허다인이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보다 더 개선된 방법으로.
‘원망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허다인이 복도를 걸으며 다음 방으로 지수를 안내했다.
“···이게 뭡니까?”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리며 허다인이 안내한 문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지금까지의 문하고는 뭔가 달랐다. 무슨 괴물 얼굴 같은 형태를 한 거대한 문짝이 삼중으로 걸려있다. 적어도 안에 책들이 꽂혀있을 만한 차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열고 들어가봐.”
그 말에 지수가 양손으로 문을 밀어제꼈다.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며 안쪽의 풍경이 필쳐졌다. 그리고 지수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안에는 먹구름 낀 보랏빛 하늘과 넓은 황야가 펼쳐져있었다. 무슨 이계의 문도 아니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간 지수가 주변을 둘러보다 허다인에게 질문했다.
“이게 뭡니까?”
“지옥문.”
“네?"
“···여기선 죽어도 안 죽으니까 걱정 말고.”
허다인이 건투를 바란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가 멍하니 뒤를 돌아본 순간, 쾅! 소리를 내며 거대한 문이 닫혔다. 그리고 무언가가 철컥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쌔한 느낌에 지수가 문을 밀어봤지만 전혀 열리지 않았다. 손으로 쾅쾅쾅 두드려도 저쪽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뭐야. 이보세요?”
그리고 어딘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냥 혼자 놓고 갈 리가 없지. 지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뿔 달린 하회탈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체구의 괴물들이었다.
"···응?"
지수는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괴물들은 어깨에 백정처럼 거대한 칼을 걸치고 있었다. 크르르르 적의에 찬 신음을 흘리는 걸 보니 적어도 이쪽을 아군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칼날에 서려있는 날카로운 예기로 보건대, 휘두르면 지수의 몸쯤이야 간단히 잘라내버릴 수 있을 듯 했다.
“···이건 아니지. 진짜 아니야.”
우리 스승께서 나에게 엿을 먹였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지수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