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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58화 (58/176)

58화.  < 대충 감이 잡혀가는데 (3) >

용왕이 준비해둔 은신처 중 하나에 두 여자의 인영이 비쳤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은 새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 분홍색 머리의 소녀였고, 바닥에 무릎을 껴안은 채 주저앉아있는 건 커다란 관을 등에 매고 있는 흑발의 여성이었다.

“그래. 전부 잃어버렸나.”

서민하의 몸에 깃든 용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해는 막심했다. 요 일 년 간 인형사가 용왕의 지시에 따라 차곡차곡 모아둔 비장의 전력. 대전쟁에서 활약한 구세대 전사들의 시체들. 그 모든 인형들이 단 한 번의 전투로 전부 박살나버렸다. 하지만 용의 목소리에서 노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오히려 기꺼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디언들의 인형은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주전력으로 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용왕이 활동하기 쉽도록 난리를 일으키는 버림패 정도의 역할만 수행하면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용왕은 직접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빙의체를 얻었다.

체스말을 잃어 손해를 보긴커녕, 오히려 계획이 몇 단계나 건너뛰어 진행된 꼴이었다. 게다가 무당 또한 끌어냈고 용왕의 계획에 결정적인 역할이 될지도 모르는 변수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짜증나게 무당을 놓쳤다는 것만 빼면 대체로 훌륭한 결과였다. 그리고 옆에서 이유라가 소리쳤다.

“민하는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짓을 한 거냐구요! 이 괴물 도마뱀! 제 친구를 건드렸다간 죽여버릴 거예요!”

“징징대지 마라. 조치가 끝나면 바꿔줄 테니.”

검은 드레스를 팔락이는 용왕이 말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지금 의식을 잃고 잠들어있었다. 이대로 몸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휘두르는 것도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우회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 마법사만 아니었어도.’

용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해하라」는 용왕의 언령을 싫다라는 한 마디로 간단히 거부해버린 인간.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지? 그 남자가 용언을 이해하고라도 있지 않은 이상 이론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전쟁 때에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가능했던 건 해봐야 마왕 정도 뿐이었다.

의지를 담은 용언이 정면에서 파훼당한 건, 본체 없이 사념만으로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용왕에게는 너무 커다란 타격이었다. 내면에 가라앉아 당분간 운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몸이 내보인 거부반응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 마법사. 반응을 보니 이 빙의체와 아는 사이였다.’

용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용언에 저항한 정체불명의 남자. 그 남자를 공격하려는 순간, 몸 자체에 무의식적으로 격렬한 제동이 걸렸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갑자기 난입해온 무당을 그리 간단히 놓치진 않았을 것이다.

빙의체에게 있어 그 남자가 어지간히도 소중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공격한다는 행동 자체가 정말 엄청나게 꺼려지는 게 아닌 이상, 주도권을 빼앗긴 몸에서 그 정도 거부반응은 나올 수가 없었다. 이 문제는 어떻게든 극복해야만 했다.

“···조금 정성을 들여서라도 틀어막는 게 좋겠어.”

고개를 끄덕인 용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만한 상대라면 몸에 제동이 걸리든 말든 용언 하나로 전부 무릎꿇릴 수 있었지만, 그 남자만은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거부반응 따위로 반응이 늦어졌다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고개를 돌아본 용왕이 이유라에게 말했다.

“수족이여. 이 빙의체의 주인과 면식이 있다 했던가? 암시에 들어갈 테니, 기억의 누락은 네가 알아서 설명하도록.”

이유라는 눈앞의 도마뱀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대로 서민하의 몸이 기절하듯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유라는 황급히 쓰러진 서민하의 몸을 부축해 상태를 바라볼 뿐이었다.

***

불식 길드의 연무장 한쪽에는 두 남자가 서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독기를 넘어서 귀기까지 서려있는 채였다. 한쪽은 양복을 입은 채 검을 치켜들고 있는 오성화, 나머지 한쪽은 고깔을 눌러쓰고 있는 김혜성이었다.

인형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주변 기록을 쥐 잡듯이 뒤져봐도 호텔에서 나온 인형사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마법사가 텔레포트라도 쓴 것처럼 깔끔한 이동이었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건 지수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지수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와 다른 점은 이번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지수가 희생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지수가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끝없는 자기혐오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성화가 칼자루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인형사가 무슨 짓을 해도 박살낼 수 있을 만큼 단련했다고 확신했다.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결과를 봐라. 인형사는 죽이지도 못하고, 한 명 더 친구를 잃어버렸다. 똑같았다. 이번에도 또다시 지키지 못했다.

“좋은 눈이군.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리고 불식 1팀의 팀장과 부팀장의 맞은편에 서있는 것은 한 명의 남자였다. 팔짱을 끼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어떠한 여유까지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묵을 본 오성화가 이를 빠득 갈았다. 안쪽에서 무언가가 무너져내려가고 있었다.

육영웅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흑기사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다시 싸운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강해져야 한다. 더욱 더. 어떻게 해야 그걸 쓰러뜨릴 수 있지? 그리고 이것이 오성화가 낸 해답이었다.

“···당신을 이기면 되는 거잖아.”

폭발을 두른 오성화가 백묵의 목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단순한 대련인데도 오성화는 정말 죽일 생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 일격에 백묵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상태다. 지금까지 원숙해져서 완성된 실력과, 예전의 오성화에게 엿보였던 광기 섞인 야성이 공존하고 있다.

‘도달할까 말까 하고 있군. S급의 영역에.’

꼬맹이를 무사히 빼냈다는 건 이미 무당에게서 보고받았지만,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그 편이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까. 용왕이 표면에 나타난 이상 여유부릴 수는 없었다.

“이게 안 통한다고…?”

이를 꽉 깨문 오성화가 경악했다. 백묵은 방어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목을 노린 일격이 완벽하게 들어갔는데, 직격당한 백묵의 피부에서 금속이 돋아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게 육영웅 최강의 방어력을 지닌 자, 불가살이 백묵이라고 불렸던 남자였다. 백묵이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한 방울이다.”

백묵의 말에 오성화와 김혜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갑옷을 뚫고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한다면. 내가 향할 곳에 너희들도 데려가주지. 그곳에 가면 쓰러져 죽거나 S급이 되거나, 둘 중 하나 뿐이다. 상처를 입히지도 못한다면 기회는 없다. 스스로 벽을 깨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도록.”

“길드장이라고 보자보자 하니까, 웃기고 있어….”

오성화에게서 터져나오는 기운이 더욱 격렬해졌다.

백묵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깔보는 수준을 넘어서서 완전히 바보 취급하는 발언이었다. 어디 한 번 피투성이 돼보십쇼. 정색한 김혜성의 말과 함께, 현역 최강의 헌터라 불리는 두 남자가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

지수는 십수 개의 두루마리와 쌓여있는 서책의 산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반쯤 현대미술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서책의 내용을 읽고 있는 지수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첫 번째 방. 무술에 대한 저술들을 읽을 땐 지수에게 있어 완전히 생소한 분야였기에 반쯤 흥미 본위로 읽은 면이 있었지만, 마법은 말하자면 지수의 전공이었다. 몇 번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대조 하고 재검토하며 정독했다.

오행의 방진은 특정한 하나의 기술이라기보단, 모든 속성 마법에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었다. 각 속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부딪혔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단순한 상극과 상생 이외에도 연구할 만한 화두들이 까마득히 펼쳐져있었다.

지수가 허공에 손가락을 그었다. 그 손가락이 지나간 옆을, 지수의 마력을 머금은 만년필이 자동필기로 뒤따랐다. 지금 지수는 룬마술을 그저 한 글자 단발로 쏘는 것이 아니라 다중으로 배치해 섞어 쓰고 있었다. 이른바 룬의 방진이었다.

“2색진 족보가 어떻게 됐더라……"

각 속성의 정확한 배치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를 부여잡은 지수가 암기한 걸 기억해내는 대신, 원리에 따라 직접 유도해보려고 고민을 계속했다. 방진을 완성하는 데엔 몇 초 정도가 걸렸지만 결국 정확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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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O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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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한 룬을 사용할 때 주변에 다른 룬을 방진으로 두름으로써 수많은 효과를 꾀할 수 있었다. 상생(相生)을 이용한 안정화와 촉진, 상극(相鬼)을 이용한 집중과 증폭, 상승(相乘)을 이용한 제압, 상모(相海)를 이용한 흡수와 재반격.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만으로 이러했으니, 응용하는 것에 따라 불리한 속성으로도 오히려 적의 공격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방진의 형태를 떠올려 곧바로 발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 지금 지수의 목표였다.

‘말 그대로 어느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탄탄한 기본기.’

확실하게 실력을 늘려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떤 현상에 대해 대충 이렇게 되겠지 생각하는 것과 모든 과정을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것 또한 싸움에 있어서 지수의 사고를 넓혀주는 거름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 배우고 있는 분야는 바로 온갖 부적을 다루는 주술, 부주술이었다. 지수의 체감으로는 단순한 마법이라기보다는 마법과 연금술의 중간쯤에 있는 것 같은 분야였다. 특별한 방식의 즉발 스크톨 제작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것에 관해서는 지수가 사용하고 있는 마법 체계를 곧장 이식해 응용할 수 있도록 상당한 개량을 거치고 있었다.

이름 붙이자면 룬 부적이었다. 허다인을 부적을 영창 과정의 생략을 도와주는 촉매로서 사용했지만, 지수의 룬 마술에는 애초에 영창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다. 대신에 지수가 생각한 것은 일종의 매크로였다.

‘리피트(Repeat)’와 ‘다우트(Doubt)’.

한 가지는 지수가 바로 전에 사용한 룬 방진의 형태를 기억해서 발동시 그걸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고, 한 가지는 지수가 미리 속성을 선언하는 것으로, 그것과 똑같은 속성의 공격이 덮쳐올 때 최적화된 방진으로 룬 그물을 짜는 것이었다.

부적 자체에 마력이나 주문을 담는 것이 아니라, 명령 체계를 설정하는 것뿐이기에 부주술의 기초만을 뗀 지수도 구상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패턴에 대응되는 방진을 지수가 일일이 생각해 지정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우트.”

지수가 만들어낸 부적을 들고서 발동을 선언했다. 하지만 부적은 파직 마력의 스파크를 일으키며 잿가루로 흩어졌을 뿐이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였다. 부적이라는 물건은 어떤 경우에 대한 명령이 누락되었거나 두 가지 명령이 충돌하는 등, 구조상에 아주 약간의 빈틈 이라도 있으면 발동 자체가 되지 않았다. 지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두루마리를 찾아보았다.

“이번엔 대체 뭐가 충돌한 거야?”

이번에는 정말 될 거라 생각했는데 또 실패였다.

당최 어디서 부적의 구조가 꼬인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발동이 안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청사진을 점검해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마력을 넣으면 불의 룬을 발동한다’ 같은 간단한 부적은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런 것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애초에 손가락을 한 번 휘적이는 게 더 빠르니까.

지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상황에서나 범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쓸만한 부적을 만드려면, 정말로 끊임없는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그 사이에 낭비되는 재료도 재료였고.

환술 안에서야 모든 재료가 갖추어져있기에 이렇게 몇 번이고 걱정 없이 부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방 안에 놓여있는 것 처럼 주술적인 효과가 깃들어있는 괴황지와 경면주사액은 바깥에서는 쉬이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정통적인 부적을 만들 것도 아니고 상관없기는 하지.’

다행히 지수는 부적에 무언가 주술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수가 생각하고 있는 룬 부적의 재료는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림이 프린트되어있지 않은 트럼프 카드였다. 부족하면 언제든지 보충할 수 있는 공산품.

그렇게 끊임없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부적을 만들고 있는 지수를, 허다인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다름이 아니라 체셔 고양이 형태로 변화한 재버워키였다. 상냥하게 털을 어루만지던 허다인이 말했다.

“재미있는 정령을 지니고 있구나….”

그 말에 종이에 그려놓은 수십 가지 방진들과, 빼곡히 쓰여있는 부적의 설계를 바라보던 지수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댁 보고 재미있다는데 안 화내세요?”

<이야기의 정령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찬사다.>

지수가 도발하듯 이죽댔지만, 재버워키는 난동부리지 않고 가만히 허다인의 품에 안겨 따르고 있었다. 똑같이 환상이니 환술이니 하는 것을 다루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죽이 잘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수는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바깥의 하늘은 멈춰있었다. 환술 안의 세계에서 바깥은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없이 언제나 화창한 낮이었다.

그 탓에, 지수는 자신이 두 번째 방에 틀어박힌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감이 안 잡혔다. 하지만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요만큼도 안 들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박혀있던 시간보다 몇 배는 더 박혀있어야 하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직 제대로 된 수련은 시작도 안 했는데 해야 할 일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지수야. 지금 하는 것까지 정리되면 일단 한 번 멈추자.”

“네? 아직 괜찮은데….”

지수가 연구하다 벽에 막히면, 숨을 돌릴 겸 실전에서 응용하는 경험을 쌓을 겸 해서 허다인과 가벼운 스파링을 하는 편이었지만, 지수는 아직 그렇게까지 피로를 느끼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오기가 붙어 흐름을 탔다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허다인은 휴식을 목적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확인해 볼 게 있어.”

그리고 허다인이 가늘게 뜬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해주의 비술이라고 했던가. 그 말도 안 되게 대단한 기술을, 너는 아직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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