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대충 감이 잡혀가는데 (2) >
솔직히 허다인이라 해도 지수가 사흘 동안 책에 빠져 살고 있는 것쯤은 그러려니 했다. 분명 대단한 집중력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분명 이런 경험은 다시 없을 기회니,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가자는 욕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흘, 닷새가 되고 일주일이 지나자 허다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지수는 다시 없을 기회니 힘든 걸 참으며 열심히 하자,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가 좋아서 저러고 있는 거였다. 오로지 자신의 흥미 본위로 일주일 동안 앉아서 책만 읽고 있는 것이다.
한 책을 덮고 다른 책에 손을 뻗는 사이 지수가 말했다.
“여기 진짜 대단하네요. 원래 책이란 게 쌓아놓고서 읽으면 읽을수록 집중하게 되잖아요. 그래도 졸음을 이길 수는 없으니 읽다 잠들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잠잘 필요가 없으니.”
그저 집중만이 점점 가속하게 된다. 한 번 잡힌 흐름이, 몰입이 끊어질 일이 없다. 허다인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녀 안에서 떠오른 것은 한 가지 가설이었다.
환상 속은 여러 모로 불편하다. 다른 사람과 접할 수 없다는 불만족.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초조함. 결코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답답함. 그런 감정들이 가속된 환상 속에서 몇 배나 증폭되어 심력을 소모시키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현실에서도 방에 틀어박히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다른 사람과 만나는 데에 미련도 없고, 혼자 책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최고의 놀이거리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심력을 소모시킬 원인 자체가 거의 없다. 0에다 몇 배를 곱한다한들 0이었다. 허다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혹시……친구가 별로 없니?”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거거든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변명하는 지수를, 허다인이 조금쯤 연민이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 안에서는 더없이 훌륭한 성격이었다. 벌써 환상 안에 들어온 지 일주일 째였지만 지수는 심력이 거의 소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정도 페이스라면……'
허다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용왕의 빙의체가 되어버린 친구의 일을 생각하느라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나가려들까 싶어 걱정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고 있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납득한 듯했다.
‘이성적으로 그렇게 납득해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어지간히도 냉정한 성격인가 보지.’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무당에게 지수를 맡긴 백묵의 인선은 정답이었다. 몸을 쓰는 전사와 마법사의 차이를 떼어두고서라도, 그 자기 멋대로인 고집불통은 오로지 재능에 의지한 근성론으로밖에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니까.
지수가 첫 번째 서고의 모든 책들을 절반 넘게 독파하자, 허다인은 지수의 독서를 강제로 멈추게 했다. 여기서부터는 읽은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감각에 익숙해지도록 중간 쪽지시험 비슷한 것을 병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품새의 점검 같았다. 기본은 맨손 박투. 무당이 천천히 한 동작을 취하면 그에 대한 대응을 요구받고, 철저히 이론적인 면에서 그것이 최선인지 토론했다. 박투는 오로지 대응에만 집중해 지수 쪽에서 공세로는 나가지 않았다.
‘신체를 단련한다기보다는, 퍼즐을 푸는 것 같아.’
그리고 지수 나름대로의 ‘최선’들을 계속해서 개선해나갔다. 특정 상황의 확실한 정답들을 계속해서 암기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고 있자니,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생각없이 싸우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지수가 며칠 전의 지수와 싸운다면 열 번 싸워 아홉 번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거기서 뛰어버리면, 봐. 다음 것까진 막을 수 있어도. 이렇게 내가 한 발짝 나가서 치켜들면… 옆구리가 텅 비어서 도망칠 곳이 없어지지? 이 정도 빈틈은 누구나 읽을 거야.”
“아.”
“난폭하게 공격하는 쪽이라면 몰라도, 방어하고 피하는 쪽은 항상 몇 수 앞을 생각하고 있어야 돼. 네 본질은 어디까지나 마법사니까, 시간을 끌기만 해도 이기는 거라 생각해.”
허다인과 한바탕 몸을 움직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다시 온갖 정석들, 이론들을 파고 들었다. 단순히 몸을 사용하는 것이라 해도 그 사이엔 수많은 심리전과 수읽기가 있었다. 장기나 체스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고의 책들을 모두 읽었을 때, 허다인은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일 없이 평범하게 지수를 몰아쳐왔다. 힘과 속도 자체는 지수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그녀의 전투 경험이나 노련함은 지수와는 비교를 불허했다. 공방 몇 번을 교환하고 나면 지수는 영문도 모르게 제압당해있었다.
“이번 실수는?”
“세 번째에서 앞으로 뛴 게 그냥 기세에 맡긴 거라서….”
그리고 공방이 끝나면 둘이 서고 바닥에 앉아 움직임을 복기하며 여기서 이렇게 하면 안 됐다, 저렇게 했다면 그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는 검토를 반복했다. 상당히 죽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어떠한 기세나 직감 따위에 맡기는 일 없이, 철저히 이성과 사고에 기반한 싸움 방식을 고집했다.
‘또 졌어. 멍청이 같이, 거기서 그러면 안 됐는데.’
지수는 분함을 느꼈다. 그저 압도적인 힘과 속도에 밀린다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할 것이다. 하지만 무당은 지수와 똑같은 속도와 힘으로 몸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제압당한 건 몸이 아니라 머리의 문제. 상대방의 다음 수를 읽어내는 사고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하죠.”
“좀 더 생각하고서 도전하는 게?”
“다시 하자고요.”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세를 잡았다.
무언가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해내는 일도 아니고, 몸 안의 불가사의한 잠재능력을 이끌어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자신에게 가능한 최선수를 찾는 것, 그것 뿐이다.
공평한 게임, 조건은 똑같다. 필요한 지식들도 이미 머릿속에 갖추어져 있다. 다다음의 다다음, 그 다음 수를 읽는다. 적어도 머리를 쓰는 일에 있어서 남에게 밀리고 싶지는 않았다.
‘예상 외인데…? 느긋한 줄 알았더니 경쟁심도 상당해.’
허다인은 기쁜 오해를 깨닫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향이 맞아서 그런가, 정말로 가르칠 맛이 나는 제자였다. 사실은 팔다리가 짧은 만큼 이쪽이 조금 더 불리하지만, 그걸 굳이 말해서 자존심을 긁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절대 안 집니다.”
그렇게 말한 지수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지지 않는다, 라고…?’
자신은 지금껏 허다인에게 몇 번이고 제압당하며, 이번에야말로 자신 쪽에서 제압해주겠다고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애초에 지수가 지금까지 연구해온 것들은 상대를 제압할 목적이 아니었다.
지지만 않으면, 시간만 끌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드디어 깨달았나 보네. 애초에 이긴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면 돼. 꼴사납게, 답답하게, 상황이 진전되지 않게. 상대를 최대한 짜증나게 하는 한 수를 반복하는 거야.”
지수의 태세가 바뀌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라는 말은 엿이나 바꿔 먹으라지. 상대의 빈틈이 보인다 해서 좋다고 파고들어갔다가 역으로 잡혀버릴 생각은 없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철저하게 버티기와 도망치기에만 특화된 움직임.
그리고 지수는 처음으로 허다인에게 제압당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기본은 됐나. 실전을 하면서 더 나아지겠지.”
지수를 제압하는 걸 포기한 허다인이 손을 털었다. 사실 그녀가 제대로 힘을 쓰기 시작한다면 지수 따위는 몇 초 만에 제압당하겠지만, 같은 신체능력이라는 조건에서라면 허다인이 진심으로 공격해도 쉬이 잡히지 않을 만큼 지수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되어있었다. 하기야 공격하는 건 꽝이지만.
지수 또한 만족감을 느꼈다. 필살기 같은 게 생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수가 공격받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 중에 무엇이 최선인지 판별할 만큼의 지식은 생겼다.
사실 빈틈을 찔러 저 뿔 달린 하회탈을 치워버리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다. 스승님이라 부르라고 말은 했지만 허다인은 아직 지수 앞에서 맨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열흘을 넘게 박혀있던 첫 번째 방에서 드디어 나오게 되었다.
“너무 오래 걸렸어. 그만큼 기초를 탄탄히 쌓긴 했지만.”
“네? 전 나름대로 상당히 빠른 편이라 생각했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얼마나 빨리 읽는 겁니까?”
누각의 복도. 두 사람의 발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지수의 말에 허다인이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첫 번째 방의 모든 책을 다 독파 한 인간은 지수가 처음이었다. 다음 방에 걸려있는 간판의 글자는 ‘吸'였다. 아마도 주술을 말하는 것이리라.
“먼저 말하자면, 난 네가 쓰는 룬마술에 대해서 잘 몰라.”
그럴 것이다. 지수가 당연한 이야기라는 듯 납득했다. 로즈레이드 룬마술은 지수가 던전의 고서를 해석해서 손에 넣은 주문체계였다. 온갖 마법사들이 다 모여있는 고깔에서도 룬마술 체계를 사용하는 다른 마법사를 만나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네가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 지켜보며 조언해줄 수는 있어도, 그 능력 자체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수는 없을 거야. 너한테 가르쳐줄 건, 오행과 부주술.”
허다인이 두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은 아까까지 있던 무예백반의 서고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수많은 서책들과 두루마리가 꽂혀있다는 것은 첫 번째 방과 같았지만, 그와 별개로 마치 연금술사의 공방처럼 누런색의 괴황지와 새빨간 경면주사(鏡面朱砂) 광물 덩어리들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물론 네 몸의 움직임을 교정한 것과 똑같이, 네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방법도 찾아내서 익숙해질 때까지 박아넣을 거야. 오히려 이쪽이 훨씬 중요하다고 봐도 되겠지. 아무래도 네 주력은 주문을 이용한 마법전인 것 같으니까.”
허다인이 쌓인 숙제가 많다는 듯 콧숨을 쉬었다.
경계에 걸친 채 지수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은 ‘아깝다’는 것이었다. 물론 인상깊은 부분들도 많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랬다. 연금술의 응용, 정령의 사용법, 마력 구조물 활용, 룬 주문의 변칙 구성. 개선해야 할 부분이 생각나는 것만 해도 수십 가지였다. 그리고 지수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일단 이것들 다 읽으면 되는 거죠?”
“왜 그렇게 급하니.”
허다인이 웃기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몸. 즉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인 무술과 달리, 오행술과 부주술의 묘리는 단순히 읽어본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옆에서 해석해주며 강의를 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일단 내가 기본적인 해술을…”
거기까지 말하던 허다인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너무 잘 따라오고 있어서 왠지 모를 섭섭함이 느껴지고 있는 중이었다. 성취가 빠른 건 물론 좋은 일이지만, 제자라는 게 너무 어렵다고 어리광도 부리고 해야 귀엽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허다인이 가만히 의자에 앉았다.
‘곤란해하면서 모르겠다고 울상짓는 얼굴도 한 번 보고 싶네. 후후. 자존심 때문에 자기 쪽에선 말을 못 꺼낼까?’
조금쯤 심술궂은 심보였지만, 원래 그러면서 스승과 제자의 유대도 깊어지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허다인은 자리에 앉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식은땀에 뻘뻘 절어서 이쪽을 연신 흠칫거리며 쳐다보는 지수의 얼굴을 상상했다. 상당히 귀여웠다. 곤란해하고 있으면 그 때 도와주도록 하자.
그리고 지수가 첫 번째 두루마리를 정관한 눈으로 읽어내려갔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그 두루마리는 오행에 있어서 비교적 쉬운 개론들이 적혀있는 입문서였다. 허다인은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결국 자신의 해설이 필요한 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수가 과연 그렇다는 듯 작게 흠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바라보며, 허다인은 웃음을 삼켰다. 필사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척 하고 있는 것이 이제야 제자다워서 귀여웠다. 그리고 저기, 하고 오른손을 든 지수가 허다인을 바라보았다.
“질문이 있어서요.”
“그래, 뭐든지 물어보렴.”
허다인이 대단히 흐뭇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뭐든지라고 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모르겠어요…” 정도의 대답이 나올까?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아니에요, 그냥 혼자 더 해볼게요.” 하고 고개를 돌릴까? 허다인이 기대했지만, 지수는 그저 눈썹을 찌푸린 채 두루마리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인과 묘를 각각 3시랑 9시에 놓고 경과 신을 12시와 6시에 놓으면 행의 상극과 열의 상생으로 증폭이 가능하다…여기까지는 알겠는데, 이러면 배치하는 과정에서 붕괴하지 않을까요? 무언가 고정시킬 촉매가 필요한 겁니까?”
"......응?"
“네?”
마주본 두 사람이 서로 한 번씩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제가 뭐 이해를 잘못한 겁니까?”
지수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허다인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정확히 그 반대이기에 문제였다. 방금 지수가 말한 것은 기초의 핵심을 짚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허다인이 놀랐다는 목소리로 지수에게 말했다.
“그것들 전부… 혼자서 이해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지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원래 해석이 특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