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대충 감이 잡혀가는데 (1) >
지수가 건네받은 녹차를 홀짝였다. 잎의 품질이나 끓이는 방법에 차이가 있는 것인지, 대단히 맛있었다. 녹차를 마시자 어딘가 몽롱해지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감각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지. 지수가 눈을 떴다.
‘분명히 누각이라고 했지.’
누각.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은 이름이 끝이었다. 애초에 누각은 길드장이 그 유명한 ‘무당’ 허다인이라는 사실 말고는 외부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길드였다. 백묵에게 부탁받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기, 당신의 이름은.”
“내 이름? 허다인이야. 보통 무당이라 불리지.”
지수의 생각대로 눈앞의 여자는 육영웅 중의 하나, 무당 허다인이었다. 사실 그쯤 되는 깜냥이 아니면 흑기사와 용왕, 둘을 상대로 지수를 빼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육영융이라면 지금쯤 적어도 중년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가면을 쓴 무당의 외견은 영락 없이 소녀의 그것이었다.
아무튼 생명의 은인이었다. 지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당 씨…라 부르면 되나요?”
“스승님이라 불러. 그러려고 널 데려온 거니까.”
“네?”
지수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놀랍지만 그 격전을 치르면서도 지수는 별 상처를 입지 않았기에, 몇 군데의 찰과상에만 치료 처치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또한 지수 자신도 이미 그러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넌 여기서 수행을 하게 될 거야. 네 기준으로 일 주일쯤?”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허다인이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방적인 통보 수준이었다. 지수는 어이가 없어서 눈썹을 찌푸렸다. 일주일이란 게 말이 일주일이지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이곳에 박혀있으라는 것인가.
서민하 뿐만이 아니다. 정유현과 집행부의 문제도 그렇고, 아래에 내려가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지금 지수에게 여기서 수행한답시고 느긋이 쉬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집행부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지원군이 갔으니까. 네 친구의 몸을 무단점거한 용왕을 치우고 싶으면, 수행을 받는 게 제일 빠른 길이고.”
그 말에 지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게 뭐하는 자식인지 아십니까?”
“모를 리가 있나? 용왕 아그리올라. 여왕이랑 마왕과 함께, 대전쟁의 중심에서 날뛰던 세 괴물 중 하나. 힘들게 죽여버리고 봉인까지 했으니까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빙의체를 얻을 줄이야. 내버려두면 본체까지 부활해 버릴지도.”
빙의체라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분명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지수가 서민하에게 용의 피를 마시게 해버렸기에 그런 적성이 갖추어진 것이겠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지를 고르겠지만, 자책이 느껴지는 것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지수를 보며, 하회탈을 쓴 허다인이 콧숨을 내쉬었다.
“얼굴 좀 펴.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은 알겠는데.”
"........"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지금 너로서 용왕의 빙의체와 대적하는 건 무리야. 네가 백 명쯤 있어도 안 될걸. 하지만 너는 이레귤러인 데다 내가 본 어떤 각성자보다 성장이 빠르지. 네 능력으로 용언을 깨부순 걸 보아하니, 조커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그러니까 내가 널 데려온 거고.”
애초에 진짜 일주일을 여기서 보내란 말은 아니야. 허다인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나긋나긋했지만 어딘지 모를 박력이 있었다.
“따라와.”
지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갔다. 기이한 한옥의 복도는 길게 이어졌다. 분명 이곳은 길드의 아지트일 텐데, 다른 사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허다인이 창호지가 발려있는 미닫이문을 열자, 방 안에는 수많은 두루마리와 서책들이 늘어서있었다. 마치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문파의 비밀 서고 같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며 방 안을 바라보고 있던 지수가 허다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것들을 읽는 게 수행입니까?”
“정확히는, 수행하기 전에 필요한 준비운동이지.”
허다인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사르르 금색 나비들이 흩날리며 창호문이 저절로 닫혔다. 걸어간 지수가 서책들을 뽑아서 살펴보았다.
그곳에 쓰여있는 건 지수가 기대한 마법이나 주술에 대한 저술들이 아니라, 온갖 무술 및 무기술의 이론들과 구결이 쓰여있는 백병전 전과에 대한 책들이었다.
“죄송한데 전…”
“마법산데 왜 이런 걸 읽으라 하세요, 같은 말이겠지.”
지수가 그 말 그대로라는 듯 빤히 허다인을 쳐다보았다.
“너보다 훨씬 약한 상대와 싸우는 거라면 몰라도, 너보다 강한 상대를 이기려면 이론 전반들에 대해선 당연히 꿰뚫고 있어야 해. 상대방의 움직임이 내포하고 있는 의도를 이해하고 있는 것과 아무 것도 모른 채 싸우는 건 전혀 달라.”
솔직히 그 말은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AOS 같은 게임을 할 때도 그랬다. 상대 캐릭터 스킬이 뭔지 쿨타임은 어느 정도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니까. 하지만 기본기를 차곡차곡 쌓는 것은 적어도 지금 해야할 일이 아니었다. 지수는 현재 일 분 일 초가 급한 상황이었고, 이런 걸 하나씩 배우고 있기엔 너무나 초조했다.
그런 지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다인이 말했다.
“이번에 네 싸움을 보면서 내가 느낀 거야. 애초에 너는 자기 스타일 자체가 확립이 안 돼있어. 뭐든지 할 줄 아는 건 훌륭하지만,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기술을 쓰며 막무가내로 싸우고 있지. 그러니 이기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상대를 어떻게 유도해야 할지도 갈피를 못 잡고.”
“무슨 말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시간이 없어요.”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만 적어도 지금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허다인은 그렇지 않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라면 있어.”
허다인이 손가락으로 한쪽 창문을 가리켰다. 지수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바깥에 펼쳐져있는 건 평범한 하늘이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바라본 뒤에야 깨달았다. 구름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 또한 불지 않았다. 바깥의 풍경이 완전히 멈춰있었다.
“서, 설마 시간정지…?”
“그런 대단한 걸 쓸 수 있었으면 이 고생을 왜 하겠니.”
그랬으면 참 좋겠다는 듯 허다인이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시간을 정지시키는 게 가능하다면 그냥 무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건? 대답은 얼마 가지 않아 떠올랐다. 분명, 무당은 사람의 감각을 속이는 환술을 장기로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지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는 환술 안입니까?”
“그래. 나는 누각 안의 모든 풍경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환술로 이렇게 재현할 수도 있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네가 깨어나서 나랑 만났을 때까지가 현실이고, 내가 준 녹차를 받아 마셨을 때 정신을 잃으면서 환술에 진입했지.”
지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분명히 녹차를 마셨을 때 한 순간 몽롱함을 느끼긴 했다. 그것이 정말로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고? 지수는 자신이 환술 속으로 들어왔다는 걸 눈치채지조차 못했다. 만약 눈앞의 무당이 아군이 아니라 적이었다면, 그걸로 이미 게임 오버였다. 너무나 두려운 능력이었다.
허다인이 지수 앞에 두루마리를 펼쳐주며 말했다.
"환술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착각일 뿐, 이곳에서 백 년을 지낸다고 한들 마력이 증대된다거나 근육이 늘어난다거나 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아.
그 대신에 얻을 수 있는 건 정신적인 숙련과, 실전에 한없이 가까운 경험의 반복.”
무(武)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이곳은 첫 번째 방일 뿐이었고, 두 번째 방도 세 번째 방도 당연히 존재했다. 거름이 될 지식들을 전부 쑤셔넣으면, 씨앗이 새싹을 띄워 자라날 때까지 몇 번이고 죽음을 전제로 한 실전경험을 시킬 생각이었다.
“네가 가진 최선의 조합은 무엇인지, 네가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능력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몇 번이고 시행착오 해보도록 해. 이론도 실전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니.”
“그러니까, 대충 그런 말입니까? 여기서 얼마나 책을 읽고 뻐기고 있다한들, 바깥에서는 하루도 안 지나있다는….”
“조금씩은 바깥의 시간도 흘러가겠지만, 아마 하루라도 지나게 하려면 여기서 한 일 년쯤은 있어야 할걸?”
허다인은 웃으며 대답해주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환술을 이용한 수련의 효용은 들어온 자의 정신력에 비례 한다. 환술 속 압축된 시간 안에서 행동할수록, 정신에 압박이 가해지며 초조해지기 때문이다.
우선은 일 주일쯤이라고 말해두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균치일 뿐이었다. 사람에 따라 며칠도 못 버티는 경우도 있었다. 그에 반해 한 달 이상을 버티는 경우도 아주 가끔씩 있었지만. 과연 너는 얼마나 마모되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완전 대박이잖아…?”
그 웃음이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지. 허다인이 흥미롭다는 듯 콧숨을 내쉬며 흥분한 지수를 바라보았다.
***
그리고 며칠 뒤. 허다인은 어이가 없어 놀라고 있었다.
환술 속에서는 먹지 않아도 되고 자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의식해서 잠을 자는 것으로 어느 정도 심력을 회복할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의 그것처럼 절박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죽음에 달하는 상처나 치명상을 입는다해도 정신적인 충격만이 남을 뿐 금세 원상태로 되돌아오는 곳이다. 다시 말해 다른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생리현상을 전부 무시하고서 오직 집중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렇다는 것일 뿐이었다. 사람이란 게 어디 계속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다고 해서 계속 집중 할 수 있는 생물인가. 오히려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는 환술 안이기에 평소보다 더 농땡이를 피우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청년은 그 정반대였다.
‘미쳤어….'
환술에 들어와서 삼일이 지났는데, 그는 서고에 앉아 책 페이지를 넘기는 것 말고 다른 행위를 일절 하지 않았다. 아, 한 가지 허다인에게 부탁한 것이 있기는 했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하고 싶으니 종이와 펜을 좀 가져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 미친 듯한 강행군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정신에는 초조함의 기색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냥 띵가띵가 놀면서 보내고 있는 사람처럼 만족감만이 가득차있었다. 허다인이 조금쯤 섬뜩하다는 목소리로 지수에게 말했다.
“너 지금 삼일 밤낮 동안 거기 앉아서 책만 읽고 있는 거 알고 있니…? 잠도 좀 자고 마법도 좀 써보고….”
“네? 여기 있는 책들 다 읽어야 하잖아요.”
지수가 지금도 진도가 안 나가 답답하다는 듯 의아하게 물었다. 허다인은 깜짝 놀랐다. 눈앞의 아이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허다인으로서는 전혀! 그런 요구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이 서고에 있는 책들이 다 해서 몇 권인데 한 번의 수행을 거치는 동안 전부 다 읽으라고 하겠는가. 각 무술 및 병장기에 대한 대강의 이론적 이해만 하고 넘어가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수는 말 그대로 전부 독파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정말 질리지도 않는 것인가? 저게 말로만 듣던 책벌레라는 생물인가? 게다가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 아마도 그가 가진 능력 덕분에 속독하면서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허다인이 긴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초조해하지 않는 건 좋은 신호지만… 일단 멈춰볼까.’
백병전에 있어 무술에 관련한 이해가 중요한 건 맞지만, 마법사인 지수에게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지식일 뿐이다. 여기서 스퍼트를 끌어올려 심력을 과하게 소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허다인은 그가 설마 이 방의 책들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이쯤에서 압박을 줘야한다고 판단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면 주눅이 들 것이다.
“저기, 미안한데. 두 번째 방도 있고 세 번째 방도 있어.”
“진짭니까?”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돌린 지수의 얼굴은, 그것 참 짜릿하고 신나는 사실이라며 완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