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용이 왜 거기서 나와 (9) >
흑기사가 연신 장검을 내리치며 오성화를 몰아붙였다.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었지만, 오성화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몸에 폭발을 두르고 가속해도 흑기사의 속도를 제대로 따라갈 수 없다. 정면에서 이렇게까지 밀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딱 한 번 있었다.
‘우리 길드장이랑 싸웠을 때.’
불식에 입단할 때. 백묵과 싸워보면서 느낀 압도적인 존재감.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을 마주한 기분. 오성화는 눈앞의 흑기사에게서 그것과 같은 인상을 받고 있었다.
“틀렸어…. 완전히 격이 달라.”
폭검 오성화가 아무리 대단해봐야 상대는 육영웅이다. 그 손으로 대전쟁을 종결시킨 자.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공방이 이어질 때마다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가는 오성화를 바라보며, 김혜성이 피가 배어나올 듯 주먹을 꽉 쥐었다.
흑기사는 오성화를 박살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제대로 된 전력이라고 할 만한 건 오성화 뿐이었다. 마법사들을 내버려두고 있는 건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일 뿐이었다. 이쪽이 복도 밖으로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였다간 당장에라도 죽여 버릴 것이다.
복도에 늘어서있는 십수 명의 마법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주문을 발동시켜도 전부 불발로 끝나버렸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가지고 있는 마력을 그대로 쏘아내는 것 정도. 그런 걸로는 흑기사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대전쟁의 현역들을 쓰러뜨렸다고 기고만장해있었지만, 저건 그런 수준이 아니잖아…. 저런 반칙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지금까지 꺼내지 않고 있었던 거지.”
우릴 가지고 놀고 있었던 건가? 김혜성이 분하다는 듯 이를 갈며 말했지만, 지수의 생각에 아마 그건 아니었다. 인형사는 확실히 궁지에 몰려있었다. 스스로 저 인형을 꺼낼 수 있었다면 진작에 꺼냈을 것이다. 아마 모든 인형이 파괴당한 다음에야 꺼낼 수 있다, 같은 조건이 붙어있는 거겠지.
하지만 몇 가지 알 수 있는 점이 있었다. 적막이라는 능력은 주문의 발동은 불발시킬 수 있어도, 이미 발동되어 있는 마법적인 효과는 취소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형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자기 자신부터 붕괴해버렸을 테니까.
지수가 천천히 눈을 감자, 김혜성이 물었다.
“기도라도 하겠다는 거야?”
고개를 저은 지수가 몸 안에서 파사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명경지수를 이용해 주변 마나의 상태를 감지했다. 지금은 오성화가 어떻게든 버텨주고 있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 문제였다. 흑기사가 이쪽에 집중하지 않고 있을 때를 이용해 어떻게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타개책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예전 폭주하고 있던 서민하부터 시작해, 정유현. 인형사. 그리고 눈앞에 있는 흑기사. 자신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와 마주대하는 것은 지수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확실히 주변에 퍼져있는 마나는 무언가의 작용을 받아 비틀려있었다. 정확히는 이미 한 번 ‘변조’라는 간단한 구조화를 거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상태의 마나를 다시 구조화시켜봤자 제대로 된 주문이 도출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떠오르는 파훼법은 대충 세 가지.’
첫 번째. 흑기사의 몸에서 적막의 구조식을 방출하고 있는 아티팩트를 찾아내서 박살내거나, 아티팩트가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이라면 흑기사를 쓰러뜨린다. 웃기는 이야기다. 그딴 것이 가능하다면 지금 고민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변조된 마나에 맞춰 주문의 구조식을 실시간으로 바꿔가며 적용한다. 하자면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분명히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묘기가 가능하려면 아마 머릿속에 슈퍼컴퓨터가 달려있어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수는 인조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돌겠네 진짜….”
지수가 조용히 혼잣말했다. 적막의 원리는 대충 알았다. 같은 구조식이라면 간섭할 수 있다. 몇 번이고 검토해보았으나 분명히 가능했고, 당장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당히 착잡한 방법이었다.
“...김혜성 씨.”
"응?"
“지금부터 딱 한 번, 텔레포트를 쓸 수 있게 해볼게요.”
김혜성이 경악한 얼굴로 지수를 바라봤지만,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김혜성은 지수가 알고 있는 가장 우수한 마법사 중 하나였다. 설명한다면 지수가 숨기고 싶은 한 가지 빈틈을 눈치채버릴 것이다. 다행히 김혜성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재
빨리 계획의 입안에 들어갔다.
고깔에서 온 마법사들 중에서도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김혜성은 전원 다같이 탈출하기 위해서 필요한 동선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아마 지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저쪽은 김혜성이 텔레포트를 발동할 거란 생각을 애초에 하지 못할 테니까.
오성화는 온몸에 자잘한 자상을 입고 있었다. 흑기사의 공격을 완전히 받아내는 걸 포기하고,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이길 선택한 결과 였다. 육영웅과 일 대 일로 싸워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는 건 오성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수와 김혜성이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적막을 파훼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방법은 이른바 변조된 마나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 마나를 조율하는 필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한 것은 마나에 간섭할 수 있는 파사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지수 뿐이었다.
이 방법에도 당연히 단점은 있었다. 변조된 마나를 조율하고 있는 중에는 다른 주문을 발동할 수 없고, 변조된 마나를 조율하지 않으면 주문을 발동해봤자 불발한다. 혼자서라면 이런 방법을 가지고 있어봤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널려있는 게 마법사였다. 지수가 마나를 조율하는 동안 대신 주문을 발동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사실 말이 쉽지 지금 주변의 마나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변조되어있는 건지 알지 못하면 원래대로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나가 비틀려있는 방향과 원래대로 돌려놓는 방향의 각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수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마력의 구조식인 이상,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전부 간파할 수 있다. 적막을 조율한다. 파사의 마력이 주변의 변조된 마나를 원래대로 되돌려놓기 시작했다. 김혜성과 고깔의 마법사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이제부터는 한 순간의 승부였다. 김혜성이 소리쳤다.
“대장! 여기서 탈출하겠어!”
김혜성은 마력의 사슬을 내뿜어 오성화를 낚아채 이쪽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이 다 함께 마법진을 발현시키자, 복도의 바닥이 급속도로 융기해 커다란 벽을 만들었다. 하지만 흑기사라면 저런 벽 따위 단숨에 뚫고 들어올 것이다.
‘타이밍은 맞는다, 먼저 도망칠 수 있어…!’
텔레포트 주문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김혜성이 갈고닦아온 전투에 대한 직감이 확신했다. 이쪽이 한 발 빠르다! 그가 마나를 조율하고 있는 지수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지수가 김혜성의 손을 쳐내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게 최선이예요.”
지수가 쓴웃음을 짓자, 김혜성과 오성화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것이 지수가 숨기고 있었던 세 번째 방법의 빈틈.
다른 주문이라면 몰라도 텔레포트를 사용하려고 한다면, 지수는 옆에서 계속 마나를 조율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조율하는 지수까지 텔레포트에 휩쓸려버리면, 아마 곧바로 마나가 다시 변조당해 어딘가 괴상한 곳에 처박혀버릴 것이다.
사실을 숨긴 이유는 간단했다. 이렇게 될걸 알았다면, 김혜성과 오성화는 성격상 절대 도망치려 들지 않았을 테니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손ㅡ"
소리치는 목소리는 도중에 끊겼다. 완성되어가던 텔레포트가 발동하고, 모든 사람들이 쉬익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 번 눈을 감았다 뜨자, 복도에 남아있는 건 지수 뿐이었다. 자기 희생 따위를 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여기서 도망치지 않고 다같이 싸워봤자 백 퍼센트 전멸하니까, 조금이라도 자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혼자 남아있는 건 씁쓸했다.
<...경의를 표한다, 나의 주인이여.>
그림자 속의 재버워키가 그렇게 속삭였다. 계약자에서 주인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기뻤지만 지금은 위로가 안 됐다.
마법사들이 만들어내 앞을 막고 있던 암벽이 한 순간에 양단되었다. 장검을 휘두른 검은 갑주의 남자가 뚜벅뚜벅 이쪽으로 다가왔다. 탈출은 이미 성공했고 이 승부는 흑기사의 판정패였다. 꼴 좋군.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은 뭐 싸울 힘도 없는데, 제발 살려달라고 빌면 살려주지 않을까.
물론 흑기사가 그런 지수의 희망을 들어주는 일은 없이, 단 한 명 남은 생존자를 말살하기 위해 장검을 쳐들었다. 휙 내리쳐지는 장검에 지수가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수는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하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먼저 보인 것은, 찰랑대는 분홍색 머리칼의 끝자락이었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차분한 어깨.
“...서민하!”
지수가 헛웃음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서민하는 검지 하나로 흑기사의 장검을 멈추고 있는 채였다. 서민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모습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혼자서라면 몰라도 서민하가 있다면 어떻게든 싸울 수 있다. 힘들겠지만 이길 방법을 궁리해서…
그리고 지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무언가가 달랐다.
우선은 옷차림부터가 그랬다. 지금 서민하가 입고 있는 것은 언제나 걸치고 있던 추리닝 저지에 반바지 차림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새까만 드레스였다. 무엇보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서민하의 시선. 앞에 있는 건 결코 서민하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네가 이 몸의 계약자인가.”
이쪽을 내려다보는 서민하의 시선은 거목처럼 메마른 눈빛이었다. 아주 약간의 흥미와 끝없는 냉소가 들어차있었다. 저것은 애초에 같은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훌륭하다. 나, 용왕 아그리올라의 피를 각성에 이용해놓고도 용언의 속박을 멋지게 피해갔군. 이런 짓이 가능한 사기꾼은 해봐야 마왕 그놈 정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민하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아무 근거도 없지만, 지수는 순식간에 이해해버렸다. 인형사와 싸우고 있는 동안, 호텔 최상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무언가 끔찍한 일’. 눈앞에 서있는 서민하는 그 끔찍한 일을 제때 막아내지 못한 결과였다.
용왕 아그리올라라고? 아그리올라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분명 서민하의 흡혈충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용의 혈정을 가공할 때. 그 피의 주인이 바로 아그리올라였다.
그런데 그 이름이 왜 지금 서민하의 입에서 나오지? 순간적으로 지수의 머릿속에 최악의 가능성이 스쳐지나갔고, 곰곰이 생각해볼 수록 그 결론이 가장 타당했다. 즉, 지금 서민하의 몸을 뺴앗아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용이란 말인가.
“상당히 불쾌하다만 용서해주마. 이만큼 나에게 잘 맞는 몸을 얻을 수 있게 된 건 오로지 마법사 네 덕분이니. 그러면 왕 앞에 예의를 갖춰, 적어도 스스로의 손으로 죽거라.”
그리고 드레스를 입은 서민하가 뭐라고 읊조렸다. 어떻게 발음한 건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언어였다. 하지만 해석 스킬 덕분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자해해라’. 눈앞의 서민하는 지수에게 그렇게 명령하고 있었다. 힘 있는 말의 압박에 반사적으로 저항하며, 입에서 대답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싫다.”
지수가 거부했다. 동시에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복도 안에 울려퍼졌다. 서민하가 입에 담은 ‘힘 있는 말’은, 명백한 거절의 의사와 함께 파훼되었다. 처음으로 서민하의 몸에 깃든 용왕의 얼굴에 당황과 경악이 깃들었다.
“...지금 뭘 한 거지?”
용왕이 진지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용언을 정면에서 깨뜨리려면 정말로 규격외 수준의 마력 또는 항마력을 지녔거나 용언을 이해할 수 있는 용족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 눈앞의 지수는 둘 모두 해당되는 사항이 없었다.
사실 지수가 방금 딱히 별다른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무언가 괴상한 언어로 명령을 내리길래 싫다고 거부했을 뿐. 가만히 있는 지수의 기색을 살피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 마왕의 하수인인가?”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마왕의 하수인이고 뭐고, 애초에 지수는 마왕이란 게 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머리에서 쪼개질 듯 지끈거리는 커다란 두통이 느껴졌다. 아마 방금 그녀의 ‘명령’을 거부한 것에 대한 반동인 듯 싶었다.
"무례하군, 내가 묻고 있다. 침묵은 선택지에 없어.”
지수로부터 대답이 없자, 그녀의 표정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서민하의 몸에서 마력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지수가 알고 있는 서민하의 마력이 아니라, 아까부터 호텔의 최상층에서 느껴지던 끔찍한 그것이었다. 마력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압박당해 죽는다. 지수가 충혈된 눈을 번뜩였을 때.
사르륵.
지수와 용왕 사이에,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들었다.
빛나는 황금색의 나비는 한 마리에서 두 마리, 두 마리에서 수십 마리로 늘어나, 꽃보라가 몰아치는 것처럼 한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공중에서 나타나 천천히 복도에 내려앉은 건 한복을 입은 채 뿔 달린 하회탈을 쓰고 있는 여자였다.
“……너는.”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이 용왕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탈을 쓰고 있는 여자가 천천히 복도를 둘러보았다. 인형이 되어있는 흑기사와 용의 마력을 풀풀 내뿜고 있는 서민하. 나긋나긋하게 상황을 살펴본 하회탈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옛 친구와, 옛 적수. 그리운 얼굴들이네. 백묵의 부탁을 받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정말 깜짝 놀랐어.”
그리고 그녀는 벽에 기댄 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치명상을 입으면 환술로 죽은 척 속이고서 몰래 빼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겠구나, 모든 환술을 간파하는 용께서 떡하니 계시니. 왜 저게 여기서 나타나는 건지.”
지수의 기억에 따르면 분명 초대면일 텐데, 하회탈을 쓴 여자는 이쪽을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말투였다.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 짓는 그녀와 반대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용왕은 증오로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마치 원수를 보는 듯 했다.
“무당. 잘도 내 앞에 얼굴을 내밀었군!”
순간 서민하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한 인광을 흘렸다. 흩날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에서 검은 뿔이 솟아났다. 검은 드레스가 펄럭이며, 격렬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공간을 찢어발길 듯 용솟음쳤다. 흑기사 또한 장검을 치켜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공격에, 무당은 가볍게 한 손을 휘저었다.
“미안해. 너 상대하려고 온 게 아니라서.”
그와 동시에 복도의 땅 밑에서 거대한 두 장승이 튀어나와, 달려들고 있던 용왕과 흑기사를 거칠게 밀쳐냈다.
<처, 처처처처, 천하대장군이오~!〉
<지! 지지지지! 지하여장군이오~!〉
살짝 손을 흔들었을 뿐인데, 웬만한 지진 버금가는 강대한 위력이었다. 나타난 장승에 휩쓸린 용왕이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지수를 안아든 무당은 빛나는 나비들로 흩어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
지수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전장이 되어있던 호텔의 복도가 아니라 예스러운 한옥의 창문이었다.
"......윽."
지수가 몸을 일으켰다. 한옥의 창문 바깥에 보이고 있는 풍경은 구름이었다. 마치 비행기라도 타고 있는 것처럼, 바로 옆에서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인형사는. 서민하는? 사고가 기억을 따라잡지 못했다. 지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옆에서 조로록 차를 따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어, 당신은….”
“백묵에게 부탁받아서, 잠시 너를 돌보게 됐어.”
이제 밑에서는 큰 난리가 나겠지….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양갈래로 땋은 갈색 머리에, 뿔 달린 하회탈을 쓰고 있는 한복의 여자. 이름도 정체도 모르지만 일단 사지에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녀가 차분히 지수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지수가 건네받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누각에 온 걸 환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