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용이 왜 거기서 나와 (8) >
마법사라는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최고급 인력이었다.
많고 많은 인형사의 컬렉션 중에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형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숫자가 너무 적은 것이다. 단지 클래스가 마법사라는 것만으로도, 착실히 경험을 쌓았다면 웬만한 중소 길드의 에이스가 될 수 있었다.
마법사 클래스의 각성자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지금 고깔 카페 척척박사의 부름에 응해 찾아온 동그란 안경의 마법사 집단, 이른바 ‘학파‘들은 적어도 자신의 마법에 자각을 가지고, 척척박사의 지식을 어느 정도 활용하는 게 가능한 정예들이었다. 일류라 칭하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었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저런 얼토당토 않은 지원군들이 나타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이가 없어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예요!”
인형사가 억울하다는 듯 항의를 내뱉었다. 이만한 숫자의 마법사가 모인다는 건 웬만한 A급 던전의 대형 토벌대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거기에 국내 최고의 검사라 불리는 오성화와, 그의 오른팔 김혜성까지. 무엇보다 불길한 것은 자신의 인형을 무력화시킨 정체불명의 저 남자.
사실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의 일 대 다수는 오히려 인형사의 장기였다. 그런데 저 정체불명의 남자 하나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열심히 실들을 걸어 상대를 찢어발길 거미줄을 쳐놔도, 저 남자가 마력 한 번 뿜으면 다 녹아버린다.
결코 꺼내지 말아야 할 금단의 수단까지 썼는데 압도하질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지?
인형사가 손톱을 깨물며 생각했다.
맨 위층에서 풀풀 흘러나오는 도마뱀 자식의 마력. 그것이 바깥으로 흘러나가 누군가가 호텔 안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다고 해도, 곧 바로 대응할 수 있는 건 원래 이 동네에 살고 있는 헌터들 정도다. 그 중에서도 마력사(絲)의 트랩을 돌파하고 호텔 안까지 다다를 수 있는 인간은 손에 꼽을 테고.
'이 동네에 뭔가가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내가 무엇 때문에 이 동네에 찾아온 거였지. 거기까지 생각한 인형사가 흠칫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복도의 저편을 쳐다보았다.
김혜성의 부축을 받고 있는 남자.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인형사의 천적. 귀찮게 졸졸 따라붙길래 일부러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 단서를 남겨준 교회의 사냥개들을 제외하면, 이 호텔의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접근해온 인간이었다.
“그래요.”
그리고 지금 그가 안주머니에서 꺼내 얼굴에 쓰고 있는 건, 매부리코가 달린 땡글이 안경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이어졌다. ‘땡글이 안경을 쓰고 있는 곱슬머리의 남자’…. 자신과 같은 이레귤러로 추정되는 각성자. 인형사가 이 도시에 발을 들인 건, 바로 그 남자를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이었던 거군요.”
그렇다면 모든 것은 필연이었다.
처음부터, 남자에 대한 정보의 출처가 조금 찝찝하긴 했다. 중간에 협회의 사주가 들어가있다는 걸 눈치챘으니까. 하지만 협회장이 자신을 편리한 청소부 비슷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던 건 하루이틀 된 일이 아니었고, 이번에도 똑같이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처리당하고 있던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만난 인형사 능력의 완벽한 천적. 사냥하고 있다 생각한 사냥감에게 반대로 사냥당하고 있다. 협회장은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서 자신에게 정보를 쥐어준 것인가?
“웃기고 있네요. 뱃속에 뱀만 들어차선…!”
지금까지는 이쪽에 손해가 없으니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도 적당히 어울려줬지만, 이렇게 자신의 뒤통수를 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떻게 해서든 이 국면을 타파하고, 협회장 또한 반드시 죽인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증오와 원망은 강한 힘이 되었다. 인형사의 두 눈이 결의로 물들었다.
“노래부르세요, 성녀님.”
수녀복을 입은 인형의 입에서 저주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외톨이의 노래였다. 피아를 구분하는 일 없이 듣는 자 모두의 정신에 공격을 가하기에, 아군이 있는 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생전 성녀는 한 번도 이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인형들에게는 마음이란 것이 없었고, 지금 저주의 선율은 오직 적들에게만 작용하고 있었다.
흉악하리만치 효율적인 시너지였다.
"어이가 없군…!"
김혜성이 달려드는 인형에게 얼음창을 쏘아내며 말했다.
이만큼의 전력이 모였는데도, 겨우겨우 길항상태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 인형들이 그녀가 가진 능력의 일부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 인형사는 사실상 혼자서 폭검 오성화를 포함한 십수 명 마법사들의 협공을 받아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사상 최악의 이레귤러라고 불릴 만했다.
“저것들 정말로 인형 맞아? 완전히 싸움에 이골이 났잖아! 인형 주제에 이쪽의 페이크를 다 읽고 있다고!”
“빈틈 보이지 마! 둘이 붙어서 서로 빈틈을 커버해!”
“토할 것 같아…. 대체 뭐야? 이 노래는!”
협력하러 와준 마법사들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성으로 울려퍼지고 있는 저주의 선율에는 딱히 능력치를 감소시킨다느니 하는 효과는 없었다.. 그것은 그저 감정적인 면에 작용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끔찍하게 찌뿌둥하고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김혜성이 눈썹을 찌푸렸다.
“•••인형사는 이 노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난전이 되어 싸우고 있는 다른 인형들이라면 몰라도, 인형사는 엄연히 인간이다.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탓에 오히려 이쪽보다 더 극단적으로 노래의 효과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형사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평상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싸우고 있었다.
“저 미친년은 이미 우울증 말기 환자라, 사람 우울하게 하는 노래 같은 건 자장가로밖에 안 들리나 보지!”
짜증나 죽겠다는 듯, 칼을 휘두르고 있는 오성화가 소리쳤다. 지금까지 상대한 단순한 인형들과는 달리, 대전쟁 시절의 가디언들은 하나하나가 백전연마의 강적이었다. 허, 그거 말 되네요. 주문을 쏴대는 김혜성이 수긍했다. 되는 대로 내뱉은 말인 것 같았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는 발언이었다.
지수는 또다시 해주의 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지수가 해주의 비술을 실전에서 성공시킨 건 바로 방금 전, 단 한 번 뿐이었고 그 또한 발동 전 극한의 집중이 필요했다.
당연히 인형사는 지수가 또 그 끔찍한 기술을 쓰도록 내버려두려 들지 않았다. 인형사 자신을 포함해 모든 인형들이 지수를 최우선 타겟으로 삼고 있었고, 작은 틈만 보여도 지수의 집중을 방해하거나, 잘 되면 그대로 죽여버리려고 했다.
“인기가 많구만, 아주.”
또다시, 옆구리에 칼을 찔릴 뻔한 지수를 날아든 김혜성이 구해주었다. 해주의 비술이 발동하는 걸 보지 못했던 김혜성 입장에서는 인형들이 왜 이렇게까지 지수를 노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인형들의 주의를 분산시켜주는 것만해도 지수는 충분하고도 남는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완전히 쫄았네.’
인형사가 지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은 싸우고 있는 누구나가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심지어는 인형을 차곡차곡 하나씩 부숴가고 있는 오성화를 막는 것보다도, 뒤에 서있는 지수의 견제를 우선하고 있었다. 모든 인형이 단숨에 무력화당했던 것이 어지간히 커다란 충격으로 남은 듯 했다.
지수는 방침을 바꾸기로 했다. 모든 경계가 이쪽에 쓸려있는 상황에서 해주의 비술을 한 번 더 사용하는 건 무리였다. 이쪽은 이쪽대로 인형사의 실에 대한 견제와 보조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지수가 몸 안에서 파사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돼요. 뭔가 있어요, 위에.”
“그래. 이 건물 들어오기 전부터 풀풀 느껴지더라.”
김혜성이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수긍했다. 사실 아무리 대전쟁 시절의 인형들이 강적이라고 해도, 고깔 카페의 마법사들이 진입해온 순간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있었다. 시간이 걸릴 뿐 결국 싸움의 끝에서 이기는 건 이쪽일 것이다.
그럼에도 싸우는 이들 모두가 초조해하고 있는 건, 호텔 꼭대기에서 점점 농도를 더해가는 흉측한 마력 때문이었다.
“설마 이게 사람이 뿜고 있는 마력은 아닐 테고. 별에 별 던전에서 몬스터란 몬스터는 다 구경했지만, 이딴 건 한 번도 못 느껴봤어. 이 호텔이 사실 S급 던전이라도 되나?”
김혜성이 물어봤지만 지수라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계속 욱씬거리는 목덜미의 각인이, 이 건물 위쪽에 서민하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즉 인형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건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승리 조건은 인형사를 얼마나 빠르게 제압해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언가 끔찍한 일’을 막을 수 있느냐다. 호텔 안의 모든 마법사들이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대로는 아마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하!”
전장을 바라보던 지수가 휙 손짓하자, 헛방질해 허공을 날아가던 주문이 파사의 마력에 부딪힌 뒤 인형의 등에 작렬했다. 미역! 나이스 커버! 뒤쪽에서 한 마법사가 엄지를 치켜들며 환호했다. 이제 보니 스터디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수가 옆에 서있는 김혜성에게 말했다.
“저 좀 블링크로 인형들 한복판에 떨궈주실 수 있으세요? 가능하면 저기 노래 부르고 있는 인형이랑 가까운 쪽으로.”
“무슨 헛소리야 그게.”
그 말에 김혜성이 정신병자를 바라보는 얼굴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인형들이 다 지수만 노리고 있어서 옆에서 지켜주고 있는데, 인형들 한복판에 던져넣었다간 단숨에 난도질당할 것이다. 하지만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지수는 그냥 믿어달라 부탁했고, 김혜성은 콧숨을 쉬었다.
‘이놈이 적어도 판단을 잘못할 놈은 아니지.’
헌터 시험 때 보여줬던 말도 안 되는 수읽기 능력도 그렇고, D급 헌터가 인형사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게 가능했다는 점부터가 보통 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적어도 김혜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내 ‘이지수 상륙작전’의 입안이 결정되었을 때.. 지수가 오성화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오성화 씨! 저랑 ‘바꿔칠게요’!”
“뭐?”
검을 휘두르던 와중, 오성화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리며 인형 하나를 저만치 날려보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시작되었고,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저 반응해줄 것이라 믿을 뿐이다. 날아가는 지수의 그림자가 부글부글 끓으며, 중절모와 망토를 두른 모자장수가 나타났다.
<자~ 그 어떤 사기도 속임수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 선보이는 건 봐도 봐도 신비한 바꿔치기 마술!>
<실크햇!>
지수가 인형들의 한복판, 노래부르는 성녀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그리고 등 뒤에서 나타난 미친 모자장수가 휘릭 손짓하자마자, 지수와 오성화 두 사람의 위치가 한 순간에 바뀌었다. 갑자기 주변이 바뀌었음에도 오성화는 당황하는 일 하나 없이, 과연 그렇군, 하고 감탄하며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정당방위니까 뒤끝 없기입니다.”
시체에도 성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폭음이 터져나갔다. 인형이 되었다고는 한들 성녀의 유해. 원형을 알 수 없게 훼손해버린다면 교회에 추궁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휘둘러진 오성화의 대검이 폭발과 함께 성녀의 유해로 만들어진 인형을 그대로 박살냈다.
저주의 선율을 연주하던 아카펠라가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끔찍한 노래의 영향을 받고 있던 모든 아군들이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가장 꺼려지던 인형을 처리한 것으로, 전황은 단숨에 활기를 띠었다. 고화력의 주문들에 대전쟁 시대의 인형들이 차례차례 하나씩 부서져갔다.
“클리어!”
“클리어!”
“척-멘!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인형까지 박살나 작동을 멈추었다.
“진짜 다행이지. 여기서 쓰러뜨릴 수 있어서.”
김혜성이 질렸다는 듯 말했다. 이겨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열 명 이상의 일류 마법사와 국내 최강의 검사가 한꺼번에 덤비는데 혼자서 이 정도까지 분투했다. 정말로 일인군단, 거대 길드 하나에 필적하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모든 인형들은 세상에 내보여지는 일조차 없이 여기서 전부 부서졌다.
복도는 온갖 인형의 부서진 팔다리와 유해로 가득차있었다. 어떤 의미로 소름이 돋는 광경이었다. 더 이상 남아있는 인형은 없다. 인형 없는 인형사는 그리 무서울 게 없었다. 막말로 이제부터는 지수 혼자서도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먼저 올라가라.”
오성화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개인적인 복수의 시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동료에게 사람을 죽이는 걸 보여주기는 싫다는 배려인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김혜성이 사람들을 통솔해 호텔 위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지수 또한 일 초라도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 서민하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고깔 카페의 마법사들은 그 와중에도 사인 해줄 수 있냐며, 그리고 척척박사 님은 어디 있는 거냐며 김혜성에게 연신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인형사가 고개를 푹 떨군 채 속삭였다.
“혼자는 싫어….”
그녀가 뭐라고 연신 중얼중얼거렸다.
“혼자는 싫어. 혼 자,혼자는. 혼자는-”
망가진 복화인형 같은 목소리였다. 인형이 모두 부서지자 버팀목이 사라져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건지, 인형사는 정말로 착란해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미친 척 하고 동정을 구걸하는 건가. 오성화 또한 그 모습에 눈썹을 찌푸렸다.
“같이 있어준다고 했잖아. 거짓말쟁이! 날 혼자 두지 마! 죄송해요…. 나 때문에 죽었어. 괜찮아. 살려준다고 했어. 그 용이, 자기 말을 들으면. 인형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살려주겠다고. 그러면 다시 둘이서. 계속 계속 같이 있는 거야!”
인형사가 비명을 지르며 격렬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상층으로 향하던 마법사들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인형사가 손톱으로 연신 양뺨을 긁었다. 손톱으로 낸 얼굴의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 등에 매여있던 커다란 관이 끼익-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건, 모든 인형이 부서지고 그녀가 진정으로 혼자가 되었을 때만.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나타나는 최초이자 최후의 인형.
새까만 갑주의 남자가 철걱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섰다.
“잠깐 기다려…..”
김혜성과 오성화가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인형사의 원점이었다.
언제나 혼자였던 삶. 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전쟁 영웅. 유일한 가족이 죽었을 때,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가족의 시체를 보며 다시 움직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자로 돌아가는 건 싫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미쳐버릴 만큼, 시체가 움직여주길 바랬다. 그렇게 각성한 능력이 인형사,
그렇게 처음으로 만들어낸 인형이 바로.
"아빠."
관 속에서 나타난 검은 갑주의 남자를 보며, 인형사는 어린아이의 표정이 되어 남자의 허리를 꼬옥 안았다. 남자는 보랏빛 망토를 휙 휘날려 인형사를 감싸고, 투구 속 붉은 안광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오성화가 식은땀을 흘렸다.
“다 도망쳐.”
“잠깐만요, 대체 무슨….”
“말대꾸하지 말고! 당장 도망치라고!”
지수가 움찔 놀랐다. 오성화가 저렇게 흥분해서 언성을 높인 것은 처음이었다. 폭포처럼 땀을 흘리는 오성화는 모든 집중을 눈앞의 상대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김혜성이 지수의 손목을 잡고 도망치려고 들었다.
그 때 인형사가 천천히 손을 들어, 지수를 삿대질로 가리켰다. 직후. 남자의 몸이 움찔 떨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 이미 남자는 지수의 눈앞에서 장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죽는다.’
반응할 수도 없었다. 순간 그것을 확신했고, 예상을 깨부순 것은 폭발과 함께 지수의 앞에 날아들어온 오성화였다. 급박하게 올려쳐지는 대검이 지수를 양단하려는 장검을 튕겨냈다. 남자는 가볍게 내리친 것 뿐일 텐데,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오성화의 폭검으로도 가까스로 흘려넘긴 게 고작이었다.
“도망 따위 칠까보냐?”
“적은 하나예요! 협공해서…! 응?”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이 검은 갑주의 등에 주문을 폭격하려 들었지만, 주문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발동되지 않았다. 김혜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텔레포트를 시도하고 있었으니까. 오성화 하나를 빼면 전원이 마법사로 이루어진 구성에서, 저 남자는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대였다.
하기야, 마법을 펑펑 쓸 수 있다한들 이기겠냐마는.
“…육영웅 중의 하나. 흑기사 우진.”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런 반칙이 튀어나온 것이 기가 찬다는 듯, 김혜성이 절망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용했다는 기술은 ‘적막’. 주변의 마력을 뒤틀어서, 발동되는 모든 주문을 불발시켜버린다는 마법사 죽이기….”
방금 인형이 없는 인형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놀렸지만, 똑같이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 또한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검은 갑주의 흑기사가 천천히, 붉은 안광을 빛내며 이쪽부터 저쪽까지의 면면들을 훑어보았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