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용이 왜 거기서 나와 (6) >
“…페이지 넘기기, 체셔 고양이.”
지수가 속삭이자 어딘가에서 촤르르륵 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림자에서 폴짝 한 마리의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고양이는 지수가 파사의 마력으로 빚어낸 룬을 꿀꺽 집어삼켰다. 주문을 소화한 고양이는 흰색으로 변해가며, 스파크와 함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고양이의 눈동자가 상대방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웃기는 일이군, 계약자여. 함께 싸우는 첫 상대가 저런 터무니없는 살인마라니.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 같지 않은가. 아무래도 내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나 보군.>
재버워키가 흥미로워 죽겠다는 듯이 낄낄낄 웃었다.
이야기의 정령인 재버워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누군가가 걸어온 이야기의 행적을 대강이나마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끔찍하게 흉흉한 기척은, 의심할 여지 없는 잔혹동화였다. 페이지 전체를 피로 쓴 글자로 채워넣은 것처럼. 지금까지 대체 몇 명을 죽여왔는지 상상도 안 됐다.
“검사에 마법사에 이제는 정령까지…? 무슨 종합 선물세트도 아니고. 대체 정체가 뭔가요, 당신은!”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기가 찬다는 듯 그녀가 소리쳤다. 인형사가 한쪽 손을 휙 하고 휘두르자, 보이지 않는 마력의 와이어가 바람을 찢어내며 이쪽으로 쇄도해왔다. 하지만 체셔 고양이는 다 보인다는 듯 발톱으로 간단히 실을 찢어냈고, 지수는 그냥 그것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파사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지수의 영역에 닿은 실들은, 그 즉시 물에 닿은 설탕처럼 흐물흐물 녹아사라져버렸다. 인형사가 초조한 얼굴로 쯧 혀를 찼다.
‘역시 안 통하나요.’
아무리 지수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들, 지수와 인형사 사이에는 결코 메꿀 수 없는 실력의 격차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뒤집어버릴 정도로 극명한 상성이었다. 파사의 마력은 마력사(絲)를 이용한 공격에 대해 완전히 면역이었다.
‘뭔진 몰라도, 닿는 순간 증발해버려요….'
적어도 ‘실’을 사용한 싸움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인형사의 높은 전투지능은 그 사실을 순식간에 이해했다. 하지만 실을 이용한 절삭은 어디까지나 어중이떠중이들과 대충 놀아주며 싸울 때 쓰는 보조무기일 뿐이었다. 인형사의 주무기는 당연히 ‘인형’이다.
“그 모자 이리 내."
지수가 한쪽 손을 내밀며 말했다. 미친 살인마가 저걸 머리에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인형사는 지수의 말을 무시하고서 재빨리 벽을 향해 실을 걸쳤다.
저쪽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동용으로 사용하는 실이라면 아직 유효하다. 지금은 우선 이 자리에서 이탈해야 하는 게 급선무 였다. 인형들만 꺼낸다면 저런 자식쯤이야 손가락 하나만 까닥여도 도륙내버릴 수 있다. 그리고 실을 당기려 인형사가 팔을 뻗었을 때.
"크학!”
인형사의 몸에 폭발이 작렬했다. 만년필로 그어낸 뇌전의 룬이었다. 인형사는 점점 어이가 없었다. 위력은 평범한 수준이지만 주문이 완성되는 속도가 이상하다. 주문을 발동하기 시작하는 것과, 발동이 끝나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주문을 영창하려는 것을 보고 빈틈을 노린다는 당연한 전략이 통하지를 않았다.
‘일 대 일이라면 마법사 만큼 쉬운 상대도 없을 텐데…!’
저런 게 어디 있냐고 억울해서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하고 약하고를 따지기 이전에, 지금까지 인형사가 상대해온 각성자들과는 근본적인 부분이 달랐다. 마치 외계인이라도 만난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쪽이 알고 있는 정석이나 지식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 또다시 룬 주문의 탄환 하나가 쏘아져왔다. 지수가 계속해서 노리고 있는 건 급소가 아닌 인형사의 손이었다.
“자꾸자꾸 손만 노리고서!”
인형사가 짜증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확실히 정확한 판단이었다. 인형사에게 있어선 손이야말로 다른 곳보다 훨씬 중요한 급소였다. 팔다리가 다 멀쩡하다한들 손가락 열 개만 부러뜨려놓으면 인형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인형사는 전장에서 이탈하기는커녕 바로 앞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만 급급해하고 있었다. 남자의 주문만이라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겠지만, 날아다니는 고양이의 공격까지 막아내는 건 힘들었다. 아무리 인형이 곁에 없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려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인형만… 인형만 있었으면!’
이것이 인형사의 약점이었다. 조종하는 인형사 자신의 신체능력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 그 약점을 수많은 전투경험으로 커버해가며 어떤 각성자라도 사냥해온 것이 바로 인형사였으나, 눈앞의 상대에게는 이론 자체가 통하지 않았다.
아마 상대가 각성한지 1년도 안 된 D급 헌터라는 걸 알면 기절초풍해서 뒤로 넘어가버릴 것이다.
하지만 힘든 건 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기엔 여유롭게 가만히 서서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수는 지금 극한의 집중 상태에 놓여있었다. 파사의 마력으로 만들어낸 영역을 유지함과 동시에, 마도 명상으로 마나를 회복하며 인형사의 움직임을 보고 룬 마술로 요격까지 해야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인형사가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건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았어요. 엄청 아프니까!”
이내 마력으로 짜내어진 실이 인형사 자신의 몸에 파고 들었다. 지수가 흠칫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된다는 건 분명했다. 상태를 살펴보는 것보단 망설임 없이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 순간 그녀의 팔다리의 움직임이 인형처럼 딱딱해졌다.
동시. 총알이 튀어나가듯 땅을 박찬 인형사의 몸이 복도 쪽으로 날아갔다. 명백히 근육의 가동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이었다. 지수는 멈추게 하기 위해 뇌격을 쏘아냈으나, 인형사는 주문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어떤 경직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눈을 깜빡이지조차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뭐야 저게…!”
지수는 재빨리 날아간 인형사를 쫓아갔다. 착지를 생각하지 않은 탓에 인형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그것이 아프지도 않은지 인형사는 기쁘게 웃어제꼈다. 지수가 복도에 들어섰을 때, 인형사는 일어나서 짝짝짝 박수를 보냈다.
“일어나세요, 우리 친구들.”
식사 시간이니 식탁으로 모이라는 것처럼. 그 박수소리에 무언가가 반응했다. 주변 곳곳에서 드르륵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들이 들렸다. 마치 잘 만들어진 연극의 무대장치 같았다. 늘어서있는 객실의 문이 차례대로 열리고, 방 하나마다 한 명씩 안에 있던 인형들이 복도로 걸어나왔다.
검을 들고 있는 검사가 있었다. 활을 들고 있는 궁수가 있었다. 단검으로 저글링을 하는 광대도 있었다. 기계같은 움직임으로 복도에 나온 그것들은, 인형사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끼리릭 돌아간 그들의 눈알이 서있는 지수를 쳐다보았다.
<이건……위험하군.>
고양이 모습으로 옆에 떠있는 재버워키가 말했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그냥 보면 알았다. 지수가 쯧 혀를 찼다. 정말로, 이럴 때 옆에 서민하가 있었으면 든든했을 텐데. 입장이 역전된 것에 썩 만족했는지, 인형사가 웃으며 선언했다.
“스테이지 1 이에요. 심심풀이 정돈 되겠죠. 당신도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겪을 수 있도록, 천천히 소모시켜가며 죽여드릴게요. 그 다음에 친구가 되어요.”
심심풀이는 개뿔이. 지수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몰라도, 눈앞의 인형들만으로도 지수를 상대하기엔 충분하고도 넘쳤다. 저것들 전부와 정면승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한 화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인형사를 여기까지 도망치게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걸 해볼 수밖에 없었다.
“재버워키. 잠깐만 시간을 벌어줘.”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 일 없이, 고양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은 지수가 복도의 바닥을 늪으로 만들었다.
인형들의 발이 질척이는 늪 안에 빠졌다.조금쯤이지만 도움이 될 것이다. 지수가 집중을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반격이나 회피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재버워키가 지켜줄 것이라 믿고서 집중할 뿐이다.
•••이미 준비물들은 전부 갖춰졌다.
마력과의 감응.
주문 구조의 해명.
파사의 마력.
명경지수.
영역.
•••지금까지 배워온 기술들은 하나의 준비 과정일 뿐이었다. 해주의 비술은, 그 모든 걸 동시에 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인형들은 현란한 움직임으로 지수가 만든 늪에서 빠져나왔다. 그들 하나하나가 단순히 멍청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숙련된 전사들이었다. 체셔 고양이가 지수에게 달려가는 인형들을 영격하며 막아섰으나, 눈 깜짝할 새에 수많은 창칼에 꿰뚫렸다. 이미 고양이는 형태를 잃고 반쯤 활자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은, 영역을 펼친다. 마도 명상을 활용해 복도 전체를 지수의 마력으로 감쌌다. 영역에 펼쳐져있는 마력과 감응한다.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손에 잡히듯이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고서 명경지수에 진입한다. 바깥만이 아니라 안쪽에 숨겨져있는 마력까지도 더욱 깊숙하게 감지하고.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달려나간 인형들이 지수와의 거리를 좁혔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눈을 감은 지수는 계속해서 집중할 뿐 피할 생각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수를 둘러싼 인형들이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한 순간 뒤 수많은 칼날에 꿰뚫려 피투성이가 될 미래가 누가 봐도 명백했다.
<누구도 이야기 속 존재를 해치지는 못하니.>
<부재 증명.〉
사라져가던 고양이가 마지막으로 능력을 발동했다. 모든 창과 칼은 한 순간 지수를 그대로 통과해,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완전히 활자로 무너져내린 고양이가 지수의 그림자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그림자에서 다시 튀어나온 보팔의 검이 멀찍이서 날아온 화살을 튕겨냈다.
•••계속해서 집중한다. 인형들의 핵과도 비슷한 곳. 그들을 묶고 있는 주문의 마력 구조를 한 순간에 간파했다. 해명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하면, 반대로 분해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손에 든 만년필에 파사의 마력을 흘려넣는다.
- 이 만년필엔 하나 더 끝내주는 기능이 있다니까.
지수가 눈을 번득 떴다. 이것이 서민하 앞에서 자랑하던 바로 그 능력이었다. 파사의 마력을 흘려넣는 것으로, 조준이 끝난 주문 구조에 대해 자동필기가 시작된다. 허공에 유도되어 적혀나가는 식은, 분석한 주문과 완전한 대칭을 이루었다.
“해주의 비술.”
새하얀 빛이 터져나갔다.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인형들의 주문식에 파사의 마력이 부딪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모든 인형들이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일제히 땅바닥에 와르르 무너졌다.
멍하니 입을 벌린 인형사가 주변에 널브러진 인형들을 쳐다보았다. 몇 번이고 다시 조종을 시도해보았지만 인형들에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단순히 연결이 끊긴 것이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부분. 시간을 들여 인형으로 만들어낸 모든 처치들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싹 없어져있었다.
“…위험해요. 너무 위험해.”
인형사가 정색하며 읊조렸다. 자신을 지켜주던 모든 인형들이 전부 무력화되었음에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건 궁지에 몰렸다는 초조함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경악이었다. 세상에 이런 능력이 존재한다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다는 것처럼. 연신 손가락을 입으로 깨무는 인형사가 지수를 괴물 보듯이 쳐다보았다.
“신기해서 컬렉션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이건 안 돼. 이런 게 가능한 인간은, 지금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해…!”
한손을 올린 인형사가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천장이 무너지면서 2층에서 두 구의 거대한 인형이 떨어져 내려왔다. 호텔 복도에 잔해와 먼지가 내려앉았다. 척 봐도 방금 지수를 덮친 인형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스테이지 2 난입이에요…! 제가 정한 룰을 깨는 건 탐탁지 않지만, 반칙을 쓴 건 당신이 먼저니까. 전부 당신 탓이라고요.”
인형사가 지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마도 '침입자가 2층까지 올라오기 전에는 2층의 인형을 사용하지 않는다'. 뭐 그런 제한을 두고 게임 비슷한 것을 하고 있던 듯 싶었다. 인형들을 다 뚫고 최상층까지 올라가보세요, 하고 도발하는 것처럼.
‘꼴값을 떨고 앉아계시네.’
지수는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웃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지금 다시 해주의 비술을 발동할 여유는 없었다. 이제는 재버워키가 시간을 끌어줄 수도 없다. 그런데도 지수는 오히려 피식 웃음을 지었다. 썩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지수가 천천히 주변에서 영역을 거두었다.
“너무 늦었다고요… 죽는 줄 알았네.”
“늦다고요? 대체 무슨 말을….”
아니. 인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남자는 말 그대로 인형사의 천적이었다. 일 초라도 더 살려 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나도 안 궁금하니 그냥 기회가 있을 때 죽여버리는 게 맞았다. 거대한 두 인형 중 하나가 대검을 치켜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복도 반대편에서 무언가가 내쏘아졌다.
"응?"
한 순간 눈에 비친 것은 황금색의 동전. 오락실의 코인이었다.
총알처럼 쏘아진 코인에, 거대한 인형이 복도 맨 끝의 벽까지 날아가 쳐박혔다. 그리고 쾅!! 커다란 폭음을 내며 인형이 폭발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거대한 인형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까지 손상되었다. 인형사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인형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연락을 보낸지가 언젠데 나타나는 게 너무 늦다.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까지 영역을 펼치고 있던 지수가 복도 끝에서 느낀 것. 그것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두 사람의 기척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울려퍼졌다. 타오르는 듯한 주황색 머리. 빨간 넥타이와 검은 색 선글라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건 오성화와 김혜성이었다. 둘 다 자다 깨서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옷은 구겨지고 머리는 떡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HERE COMES A NEW CHALLENGER."
팅, 코인을 손톱으로 튕긴 오성화가 말했다.
"오랜만이다,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