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용이 왜 거기서 나와 (5) >
커다란 눈동자가 누워있는 서민하를 내려다보았다. 눈동자가 간파한 그녀의 상태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서민하로부터 느껴지고 있는 자신의 힘의 편린. 그건 의심할 바 없이 눈앞의 여자가 자신의 피를 섭취한 결과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피에 심어둔 저주도 계약도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영문을 모르겠군.’
대체 어떠한 경위를 거쳐야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의 여자는 단순히 자신의 혈액을 마시기만 한 게 아니라 완전히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삼고 있었다. 아마 뱀파이어로서 가지고 있는 흡혈 능력 덕분일 것이다.
그 덕에 여자의 몸은 ‘그릇’으로서 거의 완벽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앞으로도 이만큼이나 상성이 잘 맞는 육체를 만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눈동자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이글거렸다. 인형장이 계집에게는 단순히 동료로 만들어주겠다고만 말해두었지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직접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 불편한 일이지.’
아무리 무수한 수족이 있어도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뱀파이어 프린세스인가. 봉인이 풀릴 때까지 행동할 임시 숙주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훌륭한 그릇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면, 동화를 시작하지.>
호텔의 최상층. 일그러진 용의 마력이 흉흉하게 불탔다.
***
지수가 걷고 있는 건 지하 주차장이었다. 고급 호텔의 부지 아래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 하지만 주차장이라고는 해도 자동차는 한 대도 없고, 조명 또한 꺼져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되어있었다. 지수는 룬의 빛을 등불 삼아 걸어갔다.
‘진짜 여기가 맞다고…?’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민하가 있을 것 같은 곳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데다 주변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탓에 출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지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시도하려는 것은 이번에 새로 익힌 기술이었다.
[해주의 비술 : 마지막 시련]
해주의 비술에 필요한 마지막 능력은, 자신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 마력의 안개를 퍼뜨리는 기술입니다.
‘영역’이라고도 불리는 이 능력은, 마나의 피드백을 통해 주변 상황을 손에 잡힐 듯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몸 바깥의 마나를 흩어지지 않게 잡아두어야 하기에 유지하기 위해선 높은 수준의 마나 제어 능력이 필요합니다.
<조건 : '영역’을 일정 범위, 일정 시간 이상 유지>
<보상: 스킬 ‘해주의 비술’ 해금〉
몸 주변에 마력을 안개처럼 퍼뜨리라고 말해도 단순히 마력을 방출하는 것과는 달랐다. 별다른 이론적인 설명이 쓰여있지 않아 지수는 난감해하고 있었지만,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었다. 베테랑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 아, 그거? 자물쇠 딸 때 쓰는 기술이잖아.
어젯밤 지수의 집에서 묵고 간 김혜성이 견본을 모여주었다.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넘실거리는 마력의 영역을 만들어낸 김혜성은, 열쇠구멍 안쪽에서 흘려넣은 마력의 반응으로 내부 구조를 파악해 문을 부수지 않고도 간단히 잠긴 문을 딸깍 열어제꼈다. 그 모습은 마법사라기보단 도둑 같았다.
김혜성에게 재연을 몇 번이나 부탁해보는 것으로 원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몸 바깥의 마력을 붙잡아놓는다기보다는 자신의 몸을 축으로 삼아 천천히 순환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한 번 감을 잡고 나니 사용하는 것은 간단했다.
“영역.”
읊조린 순간 지수의 주변에 마력이 전개되었다. 아지랑이처럼 넘실대던 김혜성의 영역과 달리, 깨끗하고 흔들림 없는 형태였다. 완전한 구형을 그리고 있는 깔끔한 외곽선은 지수의 마력 제어 능력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영역의 범위였다. 지수의 마력은 순도가 높은 덕분에 주문을 발동할 땐 아주 효율적으로 운용 할 수 있었지만, 영역을 펼치는 건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단순한 마력의 절대량만이 영역의 범위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 문제점은 지수의 응용으로 해결되었다.
‘예바우드 식 마도 명상.’
지수가 숨을 흘렸다. 주변의 마력과 교감해 싸우는 와중에도 몸에 마력을 순환시키며 회복할 수 있는 대마도사의 극의. 그것을 살짝 활용하는 것으로, 지수는 엄밀히 말해 자신의 것이 아닌 마나까지 영역의 전개에 활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퍼뜨린 마력에서 오는 피드백은 곧바로 지수에게 전달되었다. 직접 만지거나 보지 않아도 주변 상황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주변을 경계하며 방어를 다질 때는 이만한 기술이 없었다. 그리고 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저긴.”
주차장의 저편. 육안으로는 모이지 않도톡 마력으로 얽힌 실들이 쳐져있었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적외선 센서 같았다. 지수는 다가가서 실에 손가락을 살짝 대어모았다. 바로 베여 피가 배어나왔다. 날카로운 수준이 장난이 아니었다. 섣불리 걸음을 옮겼다간 갈기갈기 찢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침입자를 다 죽여버리려고 설치한 것 같은 톱날의 결계였다. 주차장의 조명을 꺼놓은 것도 이걸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어둠 때문에 전개한 영역 덕분에 오히려 이것을 눈치했으니까. 지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장난이 아니다. 단순한 호텔 주차장에 이런 함정이 쳐져있는 것은 당연히 정상이 아니었다.
“큭··· 이쪽으로, 다가오지 마십시오···!”
턱을 매만지고 있던 지수가 휙 고개를 들었다. 주차장의 저편에서 들려온 건 남자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영역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에 있었다. 지수는 실의 결계 앞에 서서 한쪽 손을 치켜들었다. 이렇게 날카로운 마력사(絲)라면 검 같은 것으로 끊으려 내리친다 해도 역으로 잘려나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는 상관이 없었다. 휘몰아치는 지수의 그림자에서 세 자루의 새까만 검이 나타났다. 재버워키의 형태 중 하나인 모팔의 검이었다. 그리고 지수가 그 칼날에 코팅한 것은 새하얀 스파크를 일으키는 파사의 마력이었다.
파사의 마력은 마력을 상쇄하고 끊어낸다. 밧줄처럼 단단히 묶여있는 주문이라면 튕겨내는 정도에 그치지만, 얇디 얇은 마력의 실이라면 닿는 것만으로도 단숨에 끊어버린다. 세 자루 보팔의 검이 영역 안의 모든 실들을 잘라버렸다.
흐느적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실의 결계가 무력화되었다. 뚜벅뚜벅 걸어간 지수가 오지 말라고 경고하던 남자를 발견했다. 뚝뚝 떨어지고 있던 물방울 소리의 정체는 바로 남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지수가 황급히 회복의 룬을 발동했다. 조금씩이지만 남자의 상처가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그 실들을….”
남자가 입은 건 새까만 신부복이었다.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로 봐서는 아무래도 성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인 듯 했다. 지수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교회라고 하면 흡혈귀와는 앙숙인 관계 아닌가. 이곳에 서민하가 있는 게 확실하다면, 설마 이 상처는…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흡혈귀한테 당한 겁니까?”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인형사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 남자가 말했다. 지수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민하가 남자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라면 일이 꼬여도 엄청나게 꼬일 뻔했다.
하지만 인형사라니. 그건 또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었다. 요즈음 상당히 자주 귀에 들어오는 이름이기도 했다. 심지어 재버워키가 만들어낸 환상속에서도 언급이 되었었다. 어젯밤의 술자리에서도 오성화가 경고했다. 절대 얽히지 말고 무조건 자신한테 보고하라고. 쓰러진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인형사가 제 동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건 저 혼자,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이곳에 내려와 절 발견한 인형사는 웃으면서 오도 가도 못하게….”
확실히 부상을 입은 상태로 저런 실의 결계 안에 가두어지면, 가만히 쓰러져 죽어가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앉아서 남자를 치료하던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응급처치는 끝내놓았다. 실의 결계도 다 잘라냈고, 그도 이제 제 몸을 가늘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지수에게 말했다.
"귀하께선 교회의 은인입니다. 부디 이름을….”
“척척박사요.”
지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을 대기 뭐할 땐 그냥 무조건 척척박사였다. 솔직히 남자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목덜미의 각인은 아직도 욱씬거리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로 위험한 곳이라면, 서민하가 정신을 잃고 있다는 건 치명적인 사태였다.
'아무래도 진짜 위험한것 같은데.’
무엇보다, 이 위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명경지수 같은 걸 쓰지 않아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게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절대 내버려둬서는 안 될 무언가라고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딱히 지수가 아니라도 마법사라면 누구나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호텔의 최상층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질적인 마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핸드폰을 든 지수는 두 곳에 이곳의 주소를 첨부했다. 지원을 기다릴 여유는 없지만, 연락을 넣어놓으면 알아서 뒤따라올 것이다. 우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봐야겠어. 지수가 지하 주차장을 성큼성큼 걸으며 올라가는 계단을 향했다.
“설마 혼자서 싸울 생각입니까!”
뒤에서 남자가 만류했다. 지수는 말없이 주차장을 떠났다. 굳이 대답하자면 지수의 답은 ‘아니오’였다. 딱 봐도 엄청나게 위험한 분위기가 풀풀 풍기는데 이런 곳에서 싸움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제1목표는 서민하를 찾아 데리고 나오는 것.
그 뒤는 인형사인지 뭔지 하는 이름만 꺼내도 오성화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호텔 1층의 카운터.
"와- 1등으로 오셨네요.”
데스크에는 안내원 대신 한 명의 여자가 상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발을 앞뒤로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게 기다리기 심심했다는 태도였다. 손가락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열 개의 반지, 등에는 커다란 관처럼 보이는 케이스를 매고 있었다.
오성화에게 들은 ‘인형사’의 외관과 일치했다. 무슨 교회의 보물인지 시체인지를 훔쳤다고 했나. 그렇다면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 쓰러져있던 남자는 인형사를 추적하고 있던 교회의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지수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대체 왜 이 건물 안에 서민하가 있다는 말인가.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매어둔 거였는데…모든 실을 단숨에 잘라버리시다니. 꽤 대단한 검사신가봐요?”
여자가 칭찬해주겠다는 듯 짝짝짝 작게 박수를 쳤다. 웬만해선 벨 수 없는 마력의 실을 칼로 싹둑 잘라버렸으니 괜찮은 실력의 검사라는 오해를 가질 만도 했다. 그리고 여자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던 지수의 시선이 굳어서 멈추었다.
“그래도 검사는 하도 많아서, 수집 욕구는 별로 안 드네요.”
"......."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 거죠.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면, 여자랑은 싸우기 싫다는 건가요?”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인형사가 한쪽 손을 들었다. 마력의 실이 드레스의 치맛자락처럼 흐느적거리며 퍼져나갔다. 이쪽은 전투 경험만 수백 번이다. 검사를 요리하는 방법이라면 간단했다. 먼저 섣불리 요격하지 말고, 천천히 실로 포위해 움직임의 범위를 좁혀나가기만 하면 된다.
‘재미없어.’
이유라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먼저 이변을 감지하고 달려온 인간이기에 조금쯤 기대하고 있었지만, 결국 눈앞의 남자도 시시한 각성자였다.
자신의 주변에 둘려있는 실에 아무런 경계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과 만나자마자 칼을 빼들고 달려들어야 했다. 대화하면서 시간을 끄는 동안, 이미 이 쪽의 포위망은 완성되었다. 게임 오버. 유라가 콱 손가락을 주먹쥐었다.
그리고 지수의 몸에서 마력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방금까지 지하 주차장에서 전개하고 있던 ‘영역’과 똑같았지만, 그저 한 가지만이 달랐다. 단순한 마력이 아니라 파사의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마력을 상쇄하는, 파사의 마력으로.
“ 무슨......?"
인형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력사(絲)의 절삭력과 날카로움은 그 얇기에 비례한다. 눈에 비치지도 않을 만큼 얇은 굵기를 유지하면서 마력의 실을 짜내는 인형사의 능력은 분명 대단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얇디 얇은 마력의 실은 파사의 마력의 영역에 닿는 순간 쇄도하던 힘을 잃고 녹아버렸다. 마치 물에 뿌린 설탕가루처럼. 극히 섬세하면서도 미세한 실들은 지수의 몸을 잘라내기는커녕 아예 닿지조차 못했다. 차라리 단순한 돌맹이를 던졌다면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갈피도 잡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인형사를 지수가 삿대질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인형사의 얼굴. 정확히는 그녀의 얼굴 위, 머리에 씌워져있는 익숙한 디자인의 모자였다.
“왜 그걸 네가 쓰고 있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친 살인마가 서민하의 모자를 쓰고 있다. 그것만으로 상황 파악은 충분히 되었다. 지수가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내 실이, 닿기만 해도 흐물흐물….’
말도 안 돼요. 저게 호신강기인지 뭔지 하는 건가요? 인형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적은 원거리에선 싸울 수 없는 검사. 발의 움직임에만 주의하면 거리를 좁히는 건 막을 수 있다. 인형사는 온 신경을 집중해 지수의 발을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인형사의 배에 작렬한 건 뇌전의 마법이었다.
“큭! 말도 안 돼…!”
“어디다 한눈 팔고 있어?”
만년필이 허공에서 춤추었다. 영창을 읊고 마법진이 발현하는, 보통 주문의 모든 과정을 건너뛴 채 발동된 뇌전의 룬이었다. 지수가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만약 서민하가 죽었다면 지수와의 계약과 각인도 지워져버렸을 것이다. 서민하는 정신을 잃고 있지만, 아직 무사하다는 건 확실했다.
“검산데……? 어떻게…!”
“무슨 헛소리야.”
정색한 지수가 만년필을 휘갈기며 룬 마술을 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