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50화 (50/176)

50화.  < 용이 왜 거기서 나와 (4) >

창문 바깥에서는 아침해가 뜨고 있었다.

“헤어지기 싫어요. 친구가 돼주신다 했잖아요.”

방에서 나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서민하를 이유라가 붙잡았다. 서민하가 하품을 내쉬었다. 아침까지 이야기해서인지 상당히 졸렸다. 사실 서민하에게 있어서도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동성 친구와 함께 같은 방에서 밤을 새운다는 건.

“계속 곁에 있어주세요. 바깥에 나가봤자 힘든 일만 있을 뿐이에요. 여기서 또 노래를 불러주세요. 그래요. 민하가 노래하고, 제가 인형들을 춤추게 하는 거예요. 분명 즐거울…”

“미안하지만 이제 가야 돼.”

쓴웃음을 지은 서민하가 말했다.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의 서민하였다면, 그녀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자신의 친구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말에 이유라가 충격 받은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연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형으로 만들면. 계속 함께….”

"응?"

이쪽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상당히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이, 서민하와 헤어지는 게 그만큼 슬픈 듯 했다. 민하가 천천히 모자를 벗어 이유라에게 씌워주었다.

“또 올 테니까. 그건 담보.”

서민하가 모자를 덮어씌운 이유라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양손으로 소중한 듯 서민하의 모자를 감쌌다. 그래도 헤어지기 싫다는 듯 얼굴엔 울상을 짓고 있는 채였다. 그리고 등을 돌려 나가려던 서민하가 갑자기 카펫에 털썩 쓰러졌다.

“어!?”

이유라가 황급히 뛰어가 서민하의 상태를 살폈다.

이유라의 몸에서 스멀스멀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며 이윽고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그것은 현실의 존재가 아닌 듯 반투명한 형상을 하고 있는 붉은 색의 눈동자였다. 세로로 갈라진 동공에선 커다란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휙 고개를 돌린 이유라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민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이 미친 도마뱀!”

<호들갑 떨지 마라. 잠들게 한 것 뿐이다.>

허공에 나타난 그 눈동자야말로 이유라가 말했던 ‘스폰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스폰서라기보다는 노예계약의 갑이나 마찬가지였고, 금화와 보석들은 노예가 원활히 활동할 수 있도록 필요 경비를 지급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자신의 사념 조각을 매개체로 쓰러진 서민하를 훑어본 눈동자가 말했다.

<이 계집에게서는 미약하지만 내 힘이 느껴지는구나. 이상하게도 나의 사념은 깃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힘 그 자체다만…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아주 흥미로워. 내가 직접 증폭시킨다면 쓸만한 말이 만들어질지도 모르겠어.>

“민하한테 무슨 짓을 했다간 죽여버릴 거예요.”

<수족이여. 내 앞에서 죽음을 논하는 것인가?>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시는 게? 봉인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꼴 추하다고요, 당신.”

<네 영혼은 나에게 묶여있다는 걸 잊었나보군.>

눈동자의 붉은 기운이 흔들렸다. 그 한 마디에 끔찍한 격통이 찾아왔다.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온갖 아픔에 익숙해진 이유라였지만 이것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끝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은 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눈동자의 목소리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 정도로 해두지.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이 계집이랑 동료가 되고 싶다고 죽도록 바란 건 너잖나?>

그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이유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정말로 서민하와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동료까지 될 수 있다면, 그것은…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민하가 저 빌어먹을 도마뱀 아래에서 일한다는 건 조금….

생각에 잠겨있는 이유라에게 눈동자가 말했다.

<의식을 시작하면 분명히 누군가 눈치챈다. 벌레들이 몰려들겠지. 수족이여. 네 하찮은 인형이든 뭐든 다 사용해서 막도록 해라. 그 누구도 이 최상증의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이 동네에 찾아온 것은 어디까지나 이유라가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각성자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런 귀찮은 일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눈동자의 말에 웃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이렇게 직접적인 명령을 들으면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식의 계약에 묶여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이유라의 눈빛은 지극히 차가웠다. 그것은 사생활이 아니라 일하고 있을 때의 얼굴, 각성자 사냥꾼 ‘인형사’의 표정이었다.

짜증이 나서 지금 당장 사람들을 찢어발기고 분해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 미친 도마뱀도, 언젠가 반드시 죽여버릴 거예요.’

이를 빠득 간 이유라가 생각했다. 지금 찾고 있는 각성자. 마법을 쓰고, 곱슬머리에 땡글이 코주부 안경을 쓰고 있다고 했던가? 왜 그런 웃기는 행색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추측이 맞다면 그 또한 이유라와 같은 이레귤러였다.

정확한 능력은 모르겠지만 수많은 체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힘. 일설에 따르면 황마녀의 포탑에까지 간섭한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만에 하나도 안 되는 가능성이지만, 용언조차 간파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상위언어인 용언은 특성상 그 의미를 간파한 자에게는 효과가 격감한다.

그 각성자를 찾아내서 사냥한 다음 자신의 인형으로 만든다면, 저 미친 도마뱀의 명령 따위도 들을 필요가 없어진다. 봉인돼서 힘도 못 쓰는 도마뱀 따위가 이 영혼을 쥐고 흔들든 말든, 그 정도 울렁거림이야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오자 의외의 손님들을 발견했다. 호텔의 카운터에서 뭐라뭐라 작전을 말하고 있던 건 검은 색 신부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교회 소속의 각성자. 그것만으로도 이유라는 돌아가는 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성녀 가희의 유해를 빼돌린 게 들킨 것이다. 그 결과 사냥개들이 추적해왔고. 이유라가 뚜벅뚜벅 라운지로 걸어갔다.

“정말 바보같은 사람들이네요…. 화풀이로는 딱 좋아요.”

웅성거리며 내려온 이유라의 모습을 보고 경계했다. 하지만 곧바로 칼을 꺼내들고 공격해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광신도 집단이라고 해도 그만큼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저 여자가 인형사인가? 아니, 그렇다고 치기엔……"

가장 앞에 서있던 한 남자가 신중하게 모습을 살폈다. 주변에 인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로 ‘인형사’라면 분명 몇 구인가의 인형을 대동하고 있을 텐데, 여자는 지금 완전한 단신이었다. 설마 저 여자 자체가 정찰을 위해 나온 인형인가?

섣불리 공격하기는 꺼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말해, 만약 인형사라고 한다면 처단할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지? 침을 꿀꺽 삼킨 남자가 꽉 주먹을 쥐었다. 그런 남자의 심정을 잘 알겠다는 듯이, 살며시 웃은 이유라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평안하신지. 이 건물은 통째로 제가 빌리고 있으니, 다른 투숙객 분을 찾아온 건 아닐 테고. 혹시 제게 용무라도?”

그리고 여자의 손가락을 본 남자가 흠칫 놀라며 눈썹을 찌푸렸다. 손가락에 꽃혀있는 열 개의 반지. 형태 또한 전달받은 내용과 같았다. 남자가 뒤쪽을 향해 지휘를 내렸다.

“일대 정렬. 지금부터 인형사의 포획에 들어간다. 저항이 심할 시 사살해도 좋다.”

검은 신부복의 남자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잡아들고 인사하던 이유라가 차갑게 웃었다.

“남자들이 여자 하날 둘러싸고 폭력을 휘두르시려고요?”

“ㅡ하느님께선 이유 있는 무력은 선행에 속한다 말씀하셨다. 우리에게는 일말의 악의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신께서 우릴 보살피고 계시다는 믿음 뿐.”

호텔의 사용인들은 이 소란에도 놀라지 않고 가만히 서서 대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인형화가 아닌 단순한 암시를 걸어놨을 뿐이지만, 그들 모두 이미 이유라의 꼭두각시로 전락해있는 채였다. 이런저런 간섭이 들어오면 귀찮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방값은 꼬박꼬박 제대로 지불한 것을 보면 기묘한 부분에서 성실했다. 달려드는 남자들이 소리쳤다.

“외도를 심판하라!”

“자랑하는 인형, 꺼내보도록 해라!”

달려드는 남자들은 한 명 한 명이 꽤 괜찮은 수준의 각성자였다. 날고 기는 교회의 정예들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라는 정말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 년쯤 공백기를 가져서 그런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것이, ‘꽤 괜찮은 수준의 각성자’ 따위가 몇백 명 몰려온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마 안 보이시는 건가요.”

이유라가 한숨을 쉬었다. 펴고 있던 손가락을 꽉 쥐었다. 아까 인사할 때,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는 동작에서 뿌려두었던 실들이 휙 회수되었다. 날카로운 와이어가 날아드는 남자들의 팔다리를 찢었다. 비명과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섣불리 감지되거나 보이지 않도록 여러 가지 처리를 해두었다고는 해도, 정말 경계조차 하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말로, 인형 하나를 꺼낼 필요도 없다. 지금도 각 방에서 귀여운 아이들이 등장할 차례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유라의 손가락에 감겨있는 실들이 남자들을 단숨에 서걱서걱 찢어나갔다. 몰살까지의 과정은 하품이 나올 만큼 간단했다. 애초에 장소가 이유라에게 유리해도 너무 유리했다. 이렇게 실내의 폐쇄된 공간에서라면, 이 실들만으로도 웬만한 A급 헌터를 두부 썰듯 잘라 낼 수 있었다.

“화풀이도 제대로 못했네요. 악의 없이 싸운다느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게 약한 거예요.”

애초에 이유라에게는 악의 외의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가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햄처럼 썰린 고깃덩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옷에 피가 튀진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짝짝 박수를 치니 호텔의 관리인들이 다가와 정리를 시작했다. 이만한 참상이라면 청소하는 것도 참 고생일 것 같았다.

“그래도 비싼 돈 받고 일하시는 건데, 이 정도는 해주셔야죠.”

이유라가 웃는 얼굴로 시체 정리를 시작하는 관리인들을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두근! 이질적인 무언가의 기척이 호텔 위쪽에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각성인지 뭔지를 시작하는 듯 했다. 냄새가 풀풀 흘러나가겠네요. 한숨을 쉰 이유라는 호텔 문 쪽으로 나가 실로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

온갖 편의점의 안주와 술들, 김혜성과 마법에 대해 토론하면서 찍찍 메모한 종이들로 지수의 방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바로 전에 서민하가 청소를 해준 참인데, 이 꼴을 보면 비명을 지르면서 지수의 멱살을 잡을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정리를 해놓자….’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난 지수가 빈 용기나 술병들을 쓰레기통에 가져갔다. 술잔과 그릇도 싱크대 물에 담가두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소파에서 자고 있는 오성화와 그 아래 바닥에서 요를 깔고 자는 김혜성이 보였다. 남자가 두 명이나 누워있으니 가뜩이나 좁은 집이 훨씬 더 좁게 더 느껴졌다.

“오성화 씨, 아침에 무슨 일 있다면서요.”

지수는 휙휙 어깨를 흔들었지만 오성화는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덮고 있는 담요는 제 쪽으로 더 움켜쥘 뿐이었다. 김혜성의 경우엔 아예 방해가 들어오지 않게 결계까지 쳐두고 자고 있었다. 해석해서 그냥 확 해제해버릴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러면 또 너 진짜 회귀자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귀찮게 굴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본 지수가 대충 라면을 끓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콩나물을 넣어서 숙취가 딱 풀리게…냄새를 맡으면 둘 다 일어날 것이다.

물을 끓이기 시작한 지수가 세수와 양치질을 했다.

잠깐 바람을 쐬려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옆방은 아직 돌아온 기색이 없었다. 얘는 뭐 아직도 안 들어왔어. 쭉 기지개를 편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도 찬바람을 맞으니 머리 아픈 게 좀 풀리는 듯 싶었다. 만년필을 꺼내든 지수가 회복의 룬을 그려 자신에게 발동했다.

“어우, 살겠다.”

오성화에 이어 김혜성까지 상대해주자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술을 못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밤새 달리는 건 역시 힘들었다. 하긴 김혜성과의 토론은 그만큼 유익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순간 따가운 격통이 찾아왔다.

"······윽!"

지수가 인상을 쓰며 한 손으로 뒷목을 짚었다. 목덜미에 발현된 각인이 욱씬대며 끊임없이 공명했다. 연결된 대상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신을 잃었다는 경고였다. 그리고 지수 목덜미의 각인으로 연결된 대상이라면 한 명 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아침까지 안 들어온 서민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뭐 애 혼자 술 마시다 기절해버린 걸 각인이 비정상적이라 판단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지수는 재빨리 방에 다시 들어가 끓던 물을 다시 껐다. 그리고 천천히 명경지수를 발동했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또 집중한다. 마치 붉은 실과 같이, 계약으로 이어져있는 마력의 패스가 느껴졌다. 이걸 쫓아서 도착하는 곳에 서민하가 있을 것이다.

“얘는 또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두 발로 걸어서 마력을 쫓아갈 생각은 없었다. 새로 얻은 능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였으니까. 페이지가 휘리릭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지수의 그림자에서 뛰쳐나온 건 새까만 실크햇과 망토를 쓰고 있는 ‘미친 모자장수’였다.

모자장수가 되어 지수의 몸을 감싼 재버워키가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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