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그런 것쯤은 상관 없다고 (3) >
만난다면 반드시 연락하라 경고하긴 했지만, 오성화는 그리 커다란 걱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모습을 드러낼 테니.’
오성화가 바보 같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인형사 그 녀석은 건드려도 너무 커다란 걸 건드려버렸다. 성녀의 유해를 마음대로 훔쳐간 것도 모자라, 가짜로 바꿔치기해 기만하다니. 분노한 집단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특히 자존심이 박살난 교회 측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처단하려 할 것이다.
이미 인형사 문제로 유력자들이 들썩이고 있다. 그들은 프로다. 녀석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인형사가 지수를 표적으로 삼고 있을 리도 없고, 그때까지만 무난히 지나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뭐, 술이 맛없어지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오성화가 쩝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고 해도 지수 앞에서 꺼내고 싶은 화제는 아니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해야 할 만큼 미련한 애도 아니고, 한 번 말해줬으니 대강 알아들었을 것이다. 오성화가 소주잔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수 너, 요즘 잘 나가더라.”
“……네?”
“시치미 떼기는. 너잖아? 던전 정보확인 서비스.”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다 눈치챘다는 듯 눈웃음을 쳤다.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온 세상 사람이 정체를 모른다 해도 이 사람 만은 ‘불식의 협력자’가 지수라는 걸 알 것이다. 지수가 처음 던전 정보를 해석해서 알려준 게 오성화니까.
“그 덕에 작업실도 장만했죠. 돈이 되더라고요.”
“그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너 보고 육영웅 중 한 사람 아니냐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어. 솔직히 말해봐. 너 불식이랑 하는 일 말고도 따로 하고 있는 게 있지?”
“집행부 일이요?”
“그런 게 아니라. 저번에 마법사 하나가 찾아와서 추궁한적도 있었거든? 대체 그만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어디 숨어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거냐고. 그런데 네 가명을 듣자마자, 아 그러면 인정이지 이러면서 납득하더란 말이야.”
지수가 흠 턱을 매만졌다. 불식과의 비즈니스에 쓰고 있는 가명이라고 하면 분명히 ‘척척박사’였다. 그렇다고 하면 그 마법사가 납득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깔 카페 안에서 척척박사는 무슨 은거기인에 대현자 같은 이미지로 오해를 받고 있었으니까. 오성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은인이니까 제발 좀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더라. 아예 절까지 할 기세던데? 이런 행동은 그 사람도 불쾌해할 거라고 타이르니 돌아갔지만. 지수 너 그냥 얌전히 있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피식 웃은 오성화가 양손을 털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책략가라며 씨익 웃고 있는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지수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피했다. 지수는 정말 딴 게 아니라 인터넷에 글 몇 개 썼을 뿐이었다.
오성화는 젓가락질이 조금 서투른지 콩 하나를 집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지수는 반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나머지 반은 순수한 의문으로 오성화에게 물었다.
“저기. 루드비히라는 이름에 짐작가시는 게 있나요.”
그 말에 젓가락질을 하던 오성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누구지 그게? 알고 있으면 기억할 텐데.”
“아뇨, 그냥 좋아하는 작가라서요.”
지수가 자연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오성화는 실력이든 정보력이든 일반적인 헌터들 사이에선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 그가 알지 못한다면 웬만한 방법으로는 단서를 잡을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아무튼 여기서는 백묵의 대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수가 소주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어진 것은 실없는 잡담들이었다.
“나연 씨 네 담당 된 덕에 초고속 승진을 했는데, 술 한 번 사야지. 하긴 나연 씨 없었으면 우리가 만나지도 못했겠다. 너도 그 때 얘기 들었지? 나연 씨가 진짜 네가 거래 사이트에 올린 포션 보고 바로 아주 그냥 셜록 홈즈처럼…”
길드 얘기부터 시작해 이번에 자기가 용병으로 불려간 미궁 원정 이야기까지 별에 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수다 떠는 걸 상당히 좋아 하는 듯 싶었다. 지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울릴 뿐이었지만 오성화의 말재간이 뛰어난 탓에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었다.
“으하하! 저번에는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이 텅텅 비어있던 적도 있었는데, 신기한 현상이 다 있다니까? 던전 안에서 누가 빼돌린 것도 아닐 텐데 신기하다 이 말이야~”
“…참으로 인상 깊은 이야기네요.”
지수가 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몇 시간이 지나자 오성화는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있었다. 딱히 지수가 술이 센 것이 아니었다. 오성화 혼자서 브레이크 없이 연신 소주를 마셔댄 탓이었다. 오성화가 다시 잔을 건넸다.
“자, 여기. 지수! 아직 마실 수 있지?”
“저기, 오성화씨. 내일 아침에 일 있다고….”
“마실 수 있지?”
이쪽을 보는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지수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이제 보니 주정 수준이 장난이 아닌데. 거의 인사불성이 된 게 아무래도 혼자 가라고 돌려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설마 집까지 데려가서 재워야 하나? 쩝 입맛을 다시고 있던 지수가 한 가지 생각에 다다랐다.
누른 번호는 김혜성의 번호였다. 그가 이쪽에 번호를 가르쳐준 적은 없었지만, 과거의 오성화가 가르쳐주었다. 번호를 바꾼 게 아니라면 분명 연결될 것이다. 솔직히 이 늦은 시간에 받겠냐 싶었지만 전화는 몇 초 안 되어 바로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저 이지수인데요. 김혜성 씨 번호 맞나요.”
“응, 이지수? 아아….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아니다, 안 가르쳐줘도 대충 견적이 나오네. 어차피 우리 팀장이 마음대로 알려준 거 겠지. 뭐 마법에 대한 상담이라도?”
김혜성의 말에 지수는 적잖이 안도했다. 솔직히 말해 번호의 출처를 추궁하면 뭐라고 대답할지 난감한 부분이었다. 꿈 속에서 들었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수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떨군 채 이마를 짚고 있는 오성화를 바라보았다. 딱 봐도 완전히 가버렸다.
“그쪽 팀장님 여기 와서 뻗어있는데 상태 좀 봐주실래요.”
“……지수야. 나 안 취했는데? 진짜 안 취했어.”
웃기고 있네. 지수가 무시하고 김혜성과의 통화를 계속했다. 김혜성은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대충 알 만 하다는 듯 쯧 혀를 찼다. 그 인간 또 애 앞에서 센 척 하려다가 골로 갔나 보네. 그리고 김혜성이 지수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곳인가? 모르는 곳이면 찾아가기 힘든데.>
“아. 여기 라드예요.”
가게 이름만 알려줘도 충분했다. 애초에 김혜성 또한 이 가게에서 꽤 많이 만난 적이 있었다. 가게에서 얼굴을 본 횟수를 따지자면 오성화보다 김혜성이 단연 위였다. 불식 1팀의 부팀장으로서가 아니라 고깔의 마법사로서 만난 거였지만.
<오케이. 지금 가지. 이십 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
주소를 알려줄 필요도 없이 김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계속 자기 취한 거 아니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오성화를 내버려두고 혼자 남은 안주들을 먹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검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줄 수 있냐고 말하는 걸 까먹었다. 지금도 지수의 그림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재버워키의 검을 강화시키려면, 최소한이라도 검술에 대한 소양이 필요했다.
폭검 오성화라고 하면 대한민국 최고의 검사나 마찬가지였다. 이보다 더한 스승은 분명 구할 수 없을 터였다.
“완전히 떡이 됐구만 이 인간. 어린애 앞에서 한심하게.”
어느 새 라이브 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김혜성이 말했다. 이십 분 정도 걸릴 거라고 했지만 그보다도 빨랐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고 생각될 수준의 속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냐는 듯이 지수가 쳐다보자 김혜성이 대답했다.
“아, 텔레포트 처음 보나?”
김혜성은 간단히 말했지만 공간이동은 고위 중에서도 초고위의 주문이었다. 역시 불식 길드의 에이스 중 하나라고 해야 할까, 국내 최고 수준의 마법사라고 칭해질 만 했다. 지수는 새삼 자신이 대단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고 깨달았다.
오성화를 들처업은 김혜성은 마음대로 그의 지갑에서 카드를 빼내어 계산했다. 여주인한테 진지한 목소리로 더 긁어도 돼요 하고 귓속말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오성화를 골탕먹이고 싶은 듯 했다. 가게에서 나오자 찬바람이 쏟아졌다.
“택시 안 부르세요?”
오늘 오성화는 올 때 자신의 애마인 새빨간 코브라가 아니라 윤나연의 길드 차를 타고 왔으니 대신 운전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지수가 묻자 김혜성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서로 간에 인식이 상당히 어긋나있었다.
“택시는 무슨 택시야? 나 이 양반 집주소 몰라. 텔레포트도 나 혼자만 쓸 수 있고. 너희 집 가야지. 이 동네잖아.”
“그래, 그래. 지수 집 가자~”
“댁은 좀 가만히나 있으십쇼. 토하면 버리고 갈 거니까.”
김혜성이 부축하고 있는 오성화를 불안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면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오성화 좀 데려가 달라고 불렀더니, 그냥 우리 집에서 재우라니. 그럴 거면 애초에 김혜성이 여기까지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그러자 김혜성이 피식 웃으며 지수에게 말했다.
“뭐 마법사끼리 나누고 싶은 얘기도 있고 해서.”
즉 오성화를 격파했으면 이번에는 자신과 2차를 땡기자는 말이었다. 지수가 미간을 꼬집었다. 정말로 이러려던 생각이 아니었는데. 어쨌든 오성화를 길바닥에 나앉힐 수는 없었다. 지수는 두 사람에게 집 쪽을 안내해주며 빌라의 계단을 올라갔다. 옆집 창문에는 불이 완전히 꺼져있었다. 아무래도 서민하는 아직도 바깥에서 들어오지 않은 듯 했다.
‘얘는 또 어디서 뭐 하고 있대.'
솔직히 이 새벽에 혼자서 놀이터에서 궁상맞게 그네라도 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슬쩍 문자를 넣어보자 친구랑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친구도 있었구나. 나는 없는데. 지수는 안도하는 한편 조금쯤 부럽다고 생각했다.
“야. 이거 전부 네가 그린 거야?”
김혜성이나 오성화는 엄청난 부자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들이니 당연했다. 그래서 지수는 두 사람을 방 안에 들여보냈을 때 ‘와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어?' 정도의 반응을 예상했으나, 지수의 방을 살펴본 김혜성은 그답지 않게 엄청나게 들떠있었다. 보물창고라도 온 듯한 표정이었다.
김혜성이 손에 들고 있는 건 지수가 한 주문을 룬 마술 체계에 이식하며 겪은 시행착오의 낙서들이었다.
“아, 그거……."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웬만한 마법사들이라면 무슨 의미인지도 해석하지 못하겠지만 김혜성은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라 엄청나게 훌륭한 수준의 마법사였다. 척척박사의 핵심적인 조언들 몇 마디를 듣고서, 자신이 쓰는 주문의 구성 정도는 자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다시 말해 지수와 마법에 대해 제대로 된 토론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 중에 하나였다.
“이거 다 주문 구조 검토한 거잖아. 와. 고깔에 날고 기는 놈들보다 이론은 네가 훨씬 낫네. 너 진짜 회귀자 맞지?”
지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술과 함께 편의점에서 사온 쥐포와 오징어, 과자들을 꺼내왔다. 김혜성은 지수가 한 낙서의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연신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자신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는 마력을 컨트롤할 수 없을 텐데. 감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섬세한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런 쪽으로 개선하려면 이렇게 접근해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직관과 요령들, 그리고 조심스레 추측하는 주문의 성질들에 지수는 확실히 그렇다고 무릎을 치며 실감했다.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오성화와 술을 마실 때보다 한 이백 배는 생산적인 술자리였다. 오성화는 혼자 이불을 덮고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밤은 아직 길었다.
이야기에 따라와주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수는 처음으로 나누는 지적 교류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지수가 문득 김혜성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척척박사 글에는 의견을 안 남기셨던 거예요? 이런 의견이 달려있었으면 진작에 기억했을 텐데.”
“야. 그거는. 인마. 하, 그런 걸 물어보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인 김혜성이 대답했다.
“내가 그 분 팬이라서… 직접 덧글 달기가 좀 부끄럽다 이 말이야. 덧글창에 애들 헛소리 보고 얼마나 답답했는데.”
지수가 푸웁 맥주를 뿜으며 연신 콜록였다. 비공개 카페라도 다른 사람 시선이 있는 곳에서 의견을 개진하기는 조심스럽다… 뭐 그런 식의 신중함의 발로인 줄 알았는데. 이것 참 생각 외로 섬세하신 분이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지수는 다시 술을 마시며 주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마법사의 토론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