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48화 (48/176)

48화.  < 그런 것쯤은 상관 없다고 (2) >

‘나, 뭘 하고 있는 거지….’

서민하가 한숨을 쉬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여러 가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오락실이었다. 앞에서 관짝을 매고 있는 여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에 이끌려 손목을 붙잡혀 따라와버렸다.

생각해 보면 이런 곳에 다른 사람이랑 같이 오는 건 처음일지도 몰랐다. 서민하가 풍선껌을 불었다. 오락실에 와서 여자가 하고 있는 건 리듬게임 같은 것이 아니라 인형뽑기였다. 무언가 뽑고 싶은 게 있는지 끊임없이 돈을 넣고 있 었다.

여자의 이름은 이유라였다. 어떻게 해서든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거처를 준비하고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뒤져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서민하는 그게 누구인지 물어보았지만, 이유라는 그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아, 그런데 쓰고 있는 안경은 알아요.”

쓴웃음을 지은 서민하가 한숨을 쉬었다. 웬만큼 특이하게 생긴 안경이 아닌 이상, 쓰고 있는 안경 같은 걸로 사람을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막무가내인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그녀가 끊임없이 조잘조잘대며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이유라는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 거처까지 옮겼다고 했다. 찾아야 할 사람을 발견할 때까지 요 근처 어디 호텔 방을 빌렸대나.

‘돈이 많나보네.’

끊임없이 인형뽑기 기계에 지폐를 넣고 있는 것만 봐도, 돈이 엄청나게 많아보이긴 했다. 요 십수 분 동안 증발한 돈만 이미 몇 만원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만한 돈을 넣고서도 인형 하나를 못 뽑는 그녀의 실력이었다.

“되게 못하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순수한 감상이었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던 서민하가 속삭이듯 읊조렸다. 그 말에 무언가 울컥한 게 있었는지, 고개를 획 돌린 이유라가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서민하에게 기계의 스틱을 잡게 했다.

“그러면 민하가 해보세요, 해보시라구요.”

“저거 맞지?”

서민하가 유리창 안에 들어있는 사자 인형을 삿대질해서 가리켰다. 그 말에 이유라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민하가 실없이 콧숨을 내뱉었다. 그리 뽑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서민하의 눈이 퍼질러져있는 다른 인형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출구 앞에 다른 인형들로 벽을 세워 두 번, 마지막으로 사자 인형을 뽑아 총 세 번이면 대충 견적이 나왔다.

판단을 끝낸 서민하가 크레인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계는 그냥 정정당당히 한 번에 뽑으려 해봐야 답이 없다. 어차피 조작되어있기에 그렇게 백 번을 시도해봐야 돈 먹는 하마처럼 지폐를 빨아들일 뿐이다. 출구 직전에서 크레인의 힘이 풀리는 걸 염두에 두고 다른 인형을 쌓아놓아야 했다.

서민하의 판단은 대체로 맞아들어갔다. 사자 인형을 뽑기 전에 미리 다른 인형들로 벽을 쌓아놓는 건 옳은 판단이었다.

크레인이 놓친 사자인형은 그대로 다른 인형들 위에 떨어져 출구 쪽으로 굴러갔다. 하지만 출구의 틈에 아슬아슬하게 끼어버렸다.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이유라가 울상을 지었다.

“아, 거의 다 됐는데. 출구에 걸려버렸어요.”

“이런 건 그냥 후려치면 돼.”

간단하다는 듯 코웃음 친 서민하가 스틱을 휘휘 돌리며 크레인을 움직였다. 상하좌우로 붕붕 돌아가는 크레인이 속도를 얻었다. 그리고 기계손에 툭 부딪친 사자 인형이 밀려나 데구르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서민하가 인형을 집어 들었다.

“자.”

그렇게 인형을 내민 순간, 서민하의 심장이 철렁였다.

이유라는 이것 하나를 뽑으려고 몇만 원을 쓰고 있었는데, 자신은 코웃음을 치더니 고작해야 네 번 만에 간단히 뽑아버린 것이다. 마치 그녀의 시도들을 비웃는 것처럼. 충분히 기분나쁠 수 있는 일이었다. 분명 짜증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사자 인형을 들고 있는 서민하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또 분위기 파악을 못한 건가.’

서민하가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굳은살이 박혀있는 새하얀 손이 서민하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라의 눈동자는 별 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너무 격한 반응에 당황해하는 서민하에게, 이유라가 얼굴을 가까이 내밀고 말했다.

“민하는 인형뽑기 프로게이머 같은 건가요?”

“응? 이봐….”

인형뽑기 프로게이머라는 건 뭐야 대체? 그리고 사자 인형을 하늘 높이 치켜든 이유라가 빙그르르 돌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연신 대단하다는 듯 사자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민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쁘지 않아…?”

“네? 왜요? 민하가 절 위해 뽑아준 거잖아요. 이 아이도 제 친구로 삼을게요! 언제나 결에 두고 다닐 거예요. 이름은 뭐가 좋을까요? 심플하게 라이온? 그게 아니면 음….”

그 말에 서민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동물도 아니고 인형을 친구 취급하다니, 이쪽도 상당한 외톨이인 듯 싶었다. 하지만 그런 면모를 보며 적잖이 안심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서로 마음을 터놓는 데에 별다른 시간은 필요 없었다. 똑같이 어둡고 칙칙한 인생을 살아온 사이에 깊은 공감이 존재했다.

감상에 젖어있는 서민하에게 이유라가 귓속말을 해왔다.

“뽑아준 답례로, 민하한테만 특별히 보여드릴게요.”

뭘 보여준다는 거지? 서민하가 고개를 돌리자, 이유라가 손목에 스냅을 주며 획 손을 털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에 걸려있는 반지에서 획 보이지 않는 극히 미세한 실이 쏘아져 나가 사자 인형에 달라붙었다. 뱀파이어인 서민하의 눈이 아니었다면 아마 눈치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같아.’

그녀가 등에 매고 있는 관에 가야금처럼 팽팽히 걸려있는 온갖 실들은 악기의 현이 아니라, 인형들에 걸기 위한 조종간인 듯 했다. 꼭두각시 용으로 미리 실을 묶어둔 인형도 아닌데, 저런 식으로 실을 꽃아넣는 건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유라가 피아노를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이자, 사자 인형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는 웬만한 일에는 졸린 눈으로 일관하는 서민하조차 크게 놀랐다. 그건 재주나 개인기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소름이 끼치는 수준의 기예였다.

춤추기를 끝낸 사자 인형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더없이 정중한 몸짓이었다. 서민하는 순수한 감탄으로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이유라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무릎꿇고 앉아 바닥의 인형을 꼭 안아들었다.

“민하, 오늘 저희 집에 올래요? 다른 친구들도 많은데.”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라가 말했다. 표정이 상기되어있었다.

다른 친구들이라는 건 아마 사람이 아니라 인형을 말하는 듯 했다. 아마 동네의 호텔을 거처로 삼고 있다고 했나. 어차피 오늘은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지수도 술을 먹느라 늦게서야 들어올 것이다. 또 이유라의 인형극을 더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서민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설마 여기 통째로 다 빌린 거야…?”

서민하가 입을 벌리며 말했다. 동네 중에서도 도심에 위치한 썩 괜찮은 고급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층에는 다른 투숙객이 한 명도 없었다. 모든 방이 이유라 이름으로 예약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그냥 돈이 많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재벌 수준이었다. 서민하의 경제 관념으로는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오고 가는 건 불편하고…. 엄청 돈 많은 스폰서가 있거든요. 둥지에 보석이 썩어나는.”

이유라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 스폰서라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짜증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많은 돈을 대주고 있다면 그만큼 여러 가지 짜증나는 요구들에 맞춰줘야 할 테니까. 서민하에게도 남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음반 계약을 하게 된다면 이리저리 휘둘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유라가 한쪽 방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와......."

서민하가 감탄했다. 그 방 안에 늘어서있는 건 각양각색의 인형들이었다. 그곳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다. 정말로 놀라운 건 그 완성도였다. 관절부나 구동부가 인형과 같이 드러나있긴 해도, 옷이나 다른 것으로 가려놓으면 마치 진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될 정도였다.

“전부 네가 만든 거야?”

“네. 모두들 다 제 친구들이에요.”

이유라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기예를 보고 꼭두각시를 움직이는 공연자 같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녀의 본업은 인형을 만드는 장인인 듯 했다. 서민하는 그쪽 업계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이만한 완성도라면 대단한 스폰서가 붙어서 후원해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 문화재나 뭐 그런 거 아닌가.’

방 안의 인형들은 피규어처럼 누군가를 본따 만든 듯 싶었지만 서민하가 알고 있는 얼굴은 없었다. 하기는 서민하가 아는 사람이 인형으로 만들어져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늘어져있는 인형들을 살펴보던 서민하가 눈을 반짝였다.

“어. 이 사람 알아. 그… 그 사람이잖아.”

그 인형은 서민하도 아는 얼굴이었다. 역사 지식이나 상식에 별 관심이 없는 서민하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전쟁터에서 노래를 불러주며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던 할머니였다. 서민하가 알기로는 위인전도 나와 있었다.

“그, 노래부르는 할머니 맞지?”

이유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민하가 신기하다는 듯 입을 헤 벌리며 쳐다보았다. 위인을 기리기 위해 기념으로 제작된 인형이나 그런 것일까. 그 할머니는 성녀로 지정이 되어있으니 아마 교회 같은 곳에서 의뢰한 인형일 것이다.

“팔려고 만든 거야?”

“민하도 참, 소중한 친구를 어떻게 팔아요.”

농담이 지나치다는 듯 이유라가 웃었다. 그리고 수녀복을 입고 있는 할머니 인형의 볼을 쓰다듬었다. 인형은 정말로 인형 같지도 않게, 주름까지 섬세하게 재현되어있었다.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성녀로 있기를 강요당해서 어리광 한 번 부리지 못하고, 저주의 말도 한 마디 내뱉지 못하고 인격을 살해당한 채 죽어간 사람이죠. 사실은 성녀같이 시시한 인간이 아닌데. 이 사람이 부를 수 있었지만 부르지 못한 노래를 들으면, 민하도 분명 깜짝 놀랄 걸요.”

달콤하디 달콤한 목소리였다. 이유라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자신이 만든 물건에 대한 애착을 넘어서있었다. 마치 정말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소중한 손짓이었다.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서민하는 어떤 종류의 광기까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서민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어느 분야에나 일류의 장인들은 반쯤 미쳐있는 법이지 하고 납득했다.

그리고 등에 매고 있던 관을 내려둔 이유라가 책상에 다가갔다. 그곳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건 문서화된 자료 였다. 아마도 찾고 있다는 사람에 대한 단서인 듯 했다. 종이를 잠깐 들여다보던 이유라가 서민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민하는 이쪽 동네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건가요? 사실 저는 아직 지리 같은 걸 잘 모르겠어서.”

“…나라도 괜찮다면 안내해줄게.”

서민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민하 쪽에서 끌고 다니고 싶을 정도 였다. 자신에게 의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순수하게 기뻤다. 그러자 이유라가 고맙다며 달려와서 서민하의 품에 안겼다. 갑작스런 포옹에 서민하가 볼을 붉혔다.

책상 위에 놓여진 종이에 쓰여있는 정보들은 간단했다. 모종의 경로로 입수한, 이유라가 몇 년에 걸쳐 찾고 있던 능력자의 정보. 정말일지 아닐지는 찾아봐야 알겠지만.

- ...땡글이 안경을 쓰고 있는 곱슬머리의 남자.

만일 찾아낸다면, 강제로라도 ‘친구’로 만들 생각이었다.

***

오성하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했다. 지수가 걱정되어 직접 경고하러 온 것이었다. 몇 가지 신경쓰이는 점이 있었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사안은 바로 그것이었다.

"각성자 사체의 도굴이라는 건 역사가 오래된 일이야. 각성자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가진 각성자의 몸을 먹으면 불로장생하니 어떻니 웃기지도 않는 소문들이 돌았었으니까.

부자들은 환장해서 뒤쪽 경로로 사체를 사들였지. 그치들 미친 건 알아줘야 하니까.”

지수는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들이 건강에 좋다고 뭐든지 먹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육을 먹다니. 그것도 도굴된 시체의 인육을….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어서 있었다. 그리고 오성화가 말을 이었다.

“요즘은 그런 쪽 단속이 잘 되어있으니까 예전처럼 막 파이지는 않지만, 실력 있는 각성자가 마음 먹고 도굴을 하면 매장된 시체를 빼돌리는 건 일도 아니지. 수요가 존재하면 공급이 나타나는 법이니까. 뒤쪽에서 그런 걸 사들이는 미친놈들이 있다는 건 암암리에 모두들 알고 있었어.”

잠시 말을 멈춘 오성하가 소주잔을 쭉 들이켰다.

“그런데 이번에 대형 사건이 하나 터져버렸지.”

짜증난다는 듯 오성화가 소주잔을 쾅! 세게 내리쳤다.

“교회에서 성녀의 유해를 누군가에게 도둑맞았다. 그것도 한참 전에. 바꿔치기당한 걸 이제야 눈치챘지. 용의자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 그런 미친 짓을 해야 할 동기가 있고,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해봐야 셋 정도 뿐. 그리고 바꿔치기할 대역 인형을 만들 수 있는 건.”

일 년쯤 잠잠하길래 죽었나 싶었더니, 뒤쪽에서 그 지랄을 하고 있었던 거구만. 살아있다면 직접 복수를 할 수가 있다. 그것 하나 만큼은 다행이었다. 오성화의 눈이 한 순간 난폭해졌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재버워키의 환상에서 보았던 집행부 시절의 오성화의 얼굴이 언뜻 비쳐보였다.

“그 녀석은 각성자를 사냥한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하던 오성화와는 어딘가 달랐다. 이를 빠득 간 오성하가 응어리진 분노를 곱씹으며 말했다. 지수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녀석은 절대 못 이겨. 그러니까 열 손가락 전부에 기괴한 반지를 끼우고 있는 녀석을 보면.

“뭘 어쩔 생각 하지 말고. 바로 나한테 연락해.”

무조건. 절대로. 무슨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 어떤 예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눈동자를 하고. 오성화가 지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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